관동별곡-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운문체 가사는 경쾌한 첫 문단에 여행기의 묘미를 살린 서두로 시작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자연을 사랑하는 병이 깊어 대나무숲에 누웠더니)/ 關관東동八팔百ᄇᆡᆨ 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팔백 리나 되는 강원도를 맡기시니)/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ᄒᆞ다(아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망극하다)/延연秋츄門문 드리ᄃᆞ라 慶경會회南남門문 ᄇᆞ라보며(영추문으로 달려들어 경회루의 남문을 바라보며)/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ᄑᆡ 셧다(하직하고 물러나니 옥대나무가 앞에 섰다(平평丘구驛역 ᄆᆞᆯ을 ᄀᆞ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평구역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로 돌아 드니)/蟾셤江강은 어듸메오, 雉티岳악이 여긔로다(섬강이 어디인가 치악산이 여기로다)/昭쇼陽양江강 ᄂᆞ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소양강에 내리는 물이 어디로 든다는 말인가?)/孤고臣신 去거國국에 白ᄇᆡᆨ髮발도 하도 할샤(한양을 떠난 외로운 신하는 흰 머리만 늘어가는구나)/東동州ᄌᆔ 밤 계오 새와 北븍寬관亭뎡의 올나ᄒᆞ니(철원에서 밤을 겨우 새워 북관정에 올라가니/三삼角각山산 第뎨一일峯봉이 ᄒᆞ마면 뵈리로다(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보일 것만 같구나)/弓궁王왕 大대闕궐 터희 烏오鵲쟉이 지지괴니(궁예왕의 대궐터에서 까막까치가 지저귀니)/千쳔古고 興흥亡망을 아ᄂᆞᆫ다, 몰ᄋᆞᄂᆞᆫ다(나라의 흥망을 아는가, 모르는가?)"(관동별곡, 정철 저, EBSi 장동준의 관동별곡 강의 )

1.조선 중기 저작 중 보기드물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운문이다. 군더더기없이 주제를 전면에 드러내면서 기행문의 장점을 속도감있게 드러내고 있다. 화자(話者)의 충신연군지정(忠臣戀君之情)을 가감없이 쓰는가 하면 내레이터 스스로가 읽는 이에게 말하기도 한다. 감탄사와 생략 등이 남발한 듯이 보이지만 기행 가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문체의 리듬과 흥을 돋구고 있다. 화자의 우리말 문장력이 새삼 돋보인다고 하겠다.
수려한 필력과 대구법(對句法)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첫 문단이다.본문에 나오는 *연추문(延秋門)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 영추문(迎秋門,경복궁의 서문)의 임진왜란 전 이름이다. 경회남문은 경회루의 남문, 즉 광화문이다. *평구역(平丘驛)은 현재의 남양주시 삼패동 인근, *흑수(黑水)는 양평 용문역 일대와 주변 강, *섬강(蟾江)은 남한강 지류로 황성 원주일대를 흐르는 강, *치악(雉岳)은 원주 치악산(雉岳山), *소양강(昭陽江)은 춘천에서 내려와 북한강에 합류하는 강이다. *동주(東州)는 강원 철원군, *북관정(北寬亭)은 철원 북쪽에 있던 정자이다.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 *궁왕(弓王)은 후삼국 태봉의 왕 궁예(弓裔, 857~918), *오작(烏鵲)은 까마귀와 까치를 말한다,

2.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1580)은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가사문학 최고의 명작으로 꼽힌다.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 연군지정,戀君之情)을 읊은 노래 같지만 국토 예찬 기행 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관찰사(觀察使)로서 관동(關東)을 초도순시하면서 연군(戀君), 애민(愛民)정신을 우리말로 쓴 가사문학의 최고봉이다. 저자 나이 45세 정월에 강원도 원주(原州)에 부임하면서 내금강과 외금강,해금강(통칭 내외해금강, 內外海金剛),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두루 유람하고 노래한 것으로 1580년(선조 13)에 완성했다. 극히 일부가 필사본으로 전하나 그나마 온전치 못하고, 대부분이 목판본으로 전한다.
관동별곡은 조선 중기이후 나온 '송강가사(松江歌辭)와 '협률대성(協律大成)'에 수록돼 있다. 송강가사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 '의성본(義星本)', '관북본(關北本)', '성주본(星州本, 1747)', '관서본(關西本,1768,국립도서관 소장)' 등 다섯 종이 있었으나, 조선 19대 왕 숙종(肅宗,1661~1720)연간에 간행한 '의성본'과 '관북본'을 사라지고 없다.
성주본(星州本)은 71구 145행, 이선본(李選本)과 관북본(關北本)은 '어와 뎌 디위 어이면 알 거이고'가 있어 73구 146행이다. 율격은 가사의 전형적인 4음 4보격을 주축으로 시조처럼 3.5.3.4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문 번역은 17세기 최고의 문장가인 서포 김만중(金萬重,1637~1692), 병자호란 시기 척화파의 거두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년 6월 3일~1652,조선 중기 문신), 선조 때 문신 청호 이양렬(李亮烈,1581~?,1609년 증광시 합격), 19세기 초중기 문신인 춘담(春潭) 신승구(申升求·1810∼1864)의 '관동별곡번사(關東別曲飜辭)' 등의 판본이 있다.

3.자연(전라도 창평) 속에 은거 중이던 저자는 1580년 1월 강원도 관찰사(종2품)로 원주감사(監司-觀察使)에 부임했다. 감사가 있는 곳은 감영이라고 하는데 감사가 있는 영문(營門)이라는 뜻이다. 이후 3월에 관동팔경 즉, 간성의 청간정(혹은 통천 흡곡 시중대,侍中臺), 강릉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 평해 월송정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유람하고 이 작품을 지었다.

관동(關東)은 강원도 대관령 동쪽 지역(고성-속초-양양-강릉 쪽)을 말한다. 관동별곡(關東別曲)은 문자 그대로 '관동 지방에서 부르는 특별한 노래'라는 뜻으로 관동8경을 중심으로 쓴 가사다. 8경은 중국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유래했다. 소상(瀟湘)은 중국 후난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만나는 부근을 말한다. 소상팔경은 소상야우(瀟湘夜雨,소상강에 내라는 밤비)·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수의 가을 달)·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서 포구로 들어오는 돛단배)·평사낙안(平沙落雁,모래펄에 내려앉은 기러기)·어촌낙조(漁村落照,어촌의 해넘이)·강천모설(江天暮雪,저물녘 강가에 내리는 눈 )·산시청람(山市晴嵐,산 마을의 맑은 기운)·한사만종(寒寺晩鐘,연기 낀 절의 저녘 종소리)을 이른다.

4.관동팔경 중 총석정(叢石亭)는 북한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총석리에 있다. 총석(叢石)은 돌기둥으로, 총석정은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기둥들과 절벽에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관동팔경 중 으뜸으로 친다. 간성(고성 군청 소재지 杆城邑)의 청간정(淸澗亭)은 강원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누각 형식의 정자다.
강릉 경포대(鏡浦臺)는 강릉시 경포로에 있는 언덕 위의 누대(樓臺)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고성 삼일포(三日浦)는 북한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리에 있는 호수다. 삼일포는 신라 효소왕 때 국선(國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 등 4명이 절경에 반해 3일 동안 머무른데서 유래했다.

삼척 죽서루(竹西樓,2023년 국보 승격)는 삼척시 죽서루길 37에 있는 누대다. 누대 동쪽에 대나무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양양 낙산사(洛山寺)는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다.낙산사는 보타낙가산(寳陁洛伽山)의 줄임말이다.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승려 의상(義湘, 625~702)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 안에 있다는 말을 듣고 예불하던 중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울진 망양정(望洋亭)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해안가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정자다.고려때는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해변에 있었다. 평해 월송정(越松亭)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로 517(월송리 362-8)에 위치한 정자다.울진은 강원도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도 경북으로 바뀌었다. 한편 통천 흡곡(翕谷) 시중대는강동리와 송전리사이에 있는 시중호(侍中湖)에 있던 누대(樓臺)다.

5.관동별곡은 크게 4개 문단으로 나눈다. 제1단은 저자가 자연속에 은거(隱居)하다가 강원 관찰사를 맡아 원주행(原州行)를 하는 모습을 활기차게 보여준다. 제2단은 금강산 내금강(內金剛)의 절경, 만폭동(萬瀑洞) · 금강대(金剛臺) · 진헐대(眞歇臺) · 개심대(開心臺) · 화룡연(火龍淵) · 십이폭포(十二瀑布)를 노래한다.
제3단은 외금강과 해금강(外海金剛) 등 동해안 유람을 다룬다.총석정(叢石亭),· 삼일포(三日浦), 의상대(義湘臺) 일출(日出), 경포대(鏡浦臺), 죽서루(竹西樓), 망양정(望洋亭)의 경치를 읊었다. 제4단은 저자의 풍류(風流)를 꿈속에서 신선(神仙)이 되어 노니는 것에 견줘 노래한다. 첫 구절에 나오는 '강호에 병이 깊어'는 '당서(唐書) '은일전(隱逸傳)'에 나오는 ‘천석고황(泉石膏肓, 샘과 돌처럼 고치기 어려운 병,자연을 사랑하는 불치병)’이란 성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당 고종이 중국의 명산 숭산 행차길에 은사 전유암(田游巖)에게 질문을 하자 '천석고황'이라고 답변한데서 유래했다. ‘죽림(竹林)’은 위진(魏晉)시대 은사 ‘죽림칠현(竹林七賢)’에서 따온 것이다.

6.관동별곡은 한문을 섞은 우리말 가사의 으뜸이어서 조선 문인들에게 감탄과 경외(敬畏,Awe)를 주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 중 한명인 서포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저자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서포는 '松江先生 鄭文淸公 關東別曲 前後思美人歌 乃我東之離騷……自古左海眞文章 只此三編)'이라 했다.
이는 '송강의 사미인곡 관동별곡 등은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BC 343~BC 278년 추정)이 지은 ‘이소(離騷, 조우(遭憂), 즉 근심,불행을 만난다는 뜻)’에 비길 만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이 셋뿐이다”라는 뜻이다. 최고의 찬사를 보낸 셈이다.
조선 중기 문신 홍만종(洪萬宗,1643~1725)도 저서 '순오지(旬五志)'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등을 "가히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비길 만하다(可與孔明出師表爲佰仲着也)”고 격찬했다.

7.관동지방을 가 본적도 없는 조선 숙종(1674~1720)은 관동팔경을 시로 읊으면서 1군 1경이라는 기준을 마련하기도 했다. 숙종은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만경대,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등을 들었다. 숙종은 망양정에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도 하사했다.
관동팔경은 조선 문인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됐다. 청간정이 빠지고 만경대가 들어가는 가 하면 시중대가 들어가기도 했다. 조선 인문지리학의 선구자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만경대 대신, 청간정,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를 넣었다. 한편 선조 때 함경도 경성 판관을 역임한 조우인(曺友仁,1561~1625)은 관동별곡의 후속 편이라는 뜻의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 속관동별곡, 續關東別曲)'를 냈다. 한편 관동별곡은 1330년 고려 충숙왕(忠肅王,1294~1339) 17년에 안축(安軸, 1282~1348, 고려말 학자)이 지은 경기체가도 있다.

8.관동별곡의 시상(詩想)은 주로 중국 유명 시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당나라 음유시인 이백(李白,701~762)의 '유태산(遊太山,태산에서 노닐다)', '송왕옥산인위만환왕옥(送王屋山人魏萬還王屋,왕옥산으로 돌아가는 왕옥산인을 보내는 노래, 왕옥산은 중국 산시성에 있는 산)', '여산요기위시어허주(廬山謠寄韋侍御虛舟,시어사 노허주를 위해 여산를 노래하다)', 당나라 시성이자 민중시인 두보(杜甫,712~770)의 '북정(北征,북쪽을 치다)',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소식(蘇軾,1037~1101)의 '적벽부(赤壁賦,적벽의 노래,적벽대전에 참패한 조조를 떠올리며 인생무상을 노래)' 등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9.관동팔경은 겸재 정선(敾,1676~1759)이 65세 때 그린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과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조싄 후기 문신이자 화가 연객(烟客) 허필(許佖,1709~1761), 강세황(姜世璜,1713~1791)의 금강산도권 등의 그림으로 조선시대 풍경이 전한다.
겸재의 관동명승첩은 1738년 가을에 관동과 금강산 일대를 둘러보고 그린 11편이다.
단원의 금강사군첩(해산첩,海山帖, 60폭금강산화첩)은 44세의 김홍도가 1788년 국왕 정조의 어명을 받아 관동 일대를 둘러보고 그렸다.

10.관동별곡은 2000년 이전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국가가 저작에 관여한 교과서) 시대에는 중고교 국어 교과서 필수 수록 작품이었다. 특히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우선 순위에 손꼽히는 작품 중 단연 으뜸이었다. 1999학년도, 2015학년도 수능에 2번이나 출제됐다. 그 이전까지 하면 4번이나 출제됐다. 평가원 모의고사 등에 단골 출제되는 고전 문학이다. 2007년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지역균형선발전형 면접에서 암송하라는 질문도 나왔다.
시험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조선 당대 고위 인사(관찰사)가 한글(당시 언문)을 사용해 쓴 가사문학이어서 우리말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편 국립중앙도서관-강원관광재단은 2024년 3월과 4월 ‘관동별곡 인문학 여행’ 강연을 진행했다.

#.정철(鄭澈,1537~1594)=조선 선조때의 정승이자 문장가.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영수(선조 때 좌의정). 문학사적 업적은 높지만 권신(정치가)으로서 평가가 다양하다.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문청공(文淸公)으로 부른다. '인성(寅城)'은 정철의 본관인 연일(延日, 현 포항시)의 별칭이다. 해가 뜨는 곳이라 하여 '동쪽(寅)의 성(城)'이란 뜻이다.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1.한성부 종로방 장의동(藏義洞, 현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정유침(鄭惟沉,1493~1570)과 어머니 죽산 안씨(1495~1573,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정3품 당상관)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성종23년 출사)의 딸)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누나는 조선 12대 국왕 인종((仁宗, 1515~1545) 후궁인 귀인 정씨(貴人 鄭氏, 1520~1566)다. 작은 누나는 계림군 이류(李瑠, ?~1545,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의 부인이다. 이에 어린 시절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11대 국왕 중종(中宗, 1488~1544)과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 사이의 아들인 경원대군(나중에 13대 조선 국왕 명종,1534~1567)과 궁궐에서 함께 지낼 정도로 친했다.

2.송강의 집안은 10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최대 위기를 맞는다.을사사화는 중종 외척인 대윤(大尹-윤임,1487~1545, 중종의 비인 장경왕후의 오빠)과 소윤(小尹-윤원형,1503~1565, 문정왕후의 남동생)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이다. 이 때 대윤 쪽 사림이 대거 숙청당한다. 정철의 작은 누나 남편인 계림군 이류(李瑠, ?~1545,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가 대윤과 연관되면서 정철의 친형 정자(鄭滋, 1515 ~ 1547)가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유배당했다.
송강은 아버지의 유배지인 관북(關北,마천령 이북의 한반도 북동부) · 정평(定平,함경도 정평군) · 연일(현 포항시)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했다.
경원대군과 친했던 송강은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에서 1등, 이듬해 치른 별시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하지만 곧바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대윤파인 계림군 이류의 처남이라는 연좌제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에 소윤 윤원형(尹元衡,1503~1565)이 실각해 사망(1565)한 후인 1566년에 사간원(司諫院)에서 벼슬살이를 시작, 헌납(獻納, 정5품) 등의 요직을 거쳤다.

3.송강은 율곡 이이(李珥,1536~1584, 조선 중기 유학자)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국가 인재 양성과 문운 진작을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한 제도다. 하지만 사헌부 정언(正言,정6품) 재직 때인 명종 21년(1566) 국왕 명종의 종형인 경양군(景陽君) 이수환(李壽環,1508~1560)이 처가 사람을 죽인 사건과 관련, 왕명을 거부하자 파직당했다.
이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으로 낙향, 약 10여 년을 지냈다. 이 때 호남의 이름난 유학자인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 호남 사림의 대표중 한 명인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을 만나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또 이 때 율곡 이이(李珥,1536~1584), 성혼(成渾, 1535~1598,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 등과 교류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송강은 선조(宣祖, 1552~1608) 즉위(1567) 직후인 1568년 이조좌랑(정6품), 1570년 이조정랑(정5품)에 오르면서 권력실세로 성장했다. 하지만 1575년 선조 8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이후 삭탈관직(削奪官職)으로 4년여 동안 벼슬을 못하는 등 수모를 겪는다.
동서분당은 조정 요직인 이조전랑(吏曹詮郞,이조의 정랑과 좌랑,관리 추천권을 쥔 요직) 자리를 두고 당시 실세인 김효원(金孝元, 1542~1590)과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반목으로 발생했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창덕궁 기준)인 낙산(洛山) 밑의 건천동(乾川洞)이어서 그를 지지하는 이들을 동인(東人),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동(貞洞)에 있어서 그를 지지하는 이들을 서인(西人)으로 불렀다.

4.서인을 지지했던 송강은 삭탈관직(削奪官職)으로 쓰라린 생활을 한 영향인지 1578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서인 강경파로 등장한다.이후 1580년 초 45세때 강원도 관찰사가 됐다. 이때 원주로 부임한 이후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大家)로 인정받았다.
1583년 이조판서(吏曹判書,관리를 관할하는 직으로 문선(文選)·훈봉(勳封)·고과 등에 관한 일을 하는 곳의 수장,정2품)에 있던 친구 이이(李珥,1536~1584)의 추천으로 예조참판(종2품)에 이어 48세 때 예조(禮曹)판서(예의 ·제향 ·조회 ·교빙 ·학교 ·과거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곳의 수장, 정2품)가 된다. 이후 대사헌(종2품)에 우찬성(종1품)까지 올랐으나 율곡 사후 동인의 탄핵을 받자 1585년(선조 18년) 사직하고 낙향한다.
5.송강은 전라도 금구군 출신 문신 정여립(鄭汝立, 1546~1589, 관직은 수찬(修撰,서책을 펴내는 정6품)을 끝으로 퇴관)의 난(1589)에서 선조의 부탁으로 우의정(右議政, 의정부의 정1품)으로서 위관((委官, 사건 조사를 위해 임명된 재판관, 수사 책임자)이 되면서 피의 숙청을 주도한다. 송강은 선조의 의중대로 정언신(鄭彦信, 1527~1591,선조때 우의정), 김우옹(金宇顒, 1540~1603,선조때 이조참판), 동암(東菴) 이발(李潑, 1544~1589,동인 강경파의 영수), 백유양(白惟讓, 1530~1589,유배후 장살)과 아들 백수민(白壽民, 아내가 정여립의 형 정여흥(鄭汝興)의 딸),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전라도 나주출신 유학자),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선조 때 저명한 성리학자) 등 많은 권신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선조22년 기축년에 정여립의 난을 계기로 일어난 동인 숙청 사건)다.
기축옥사는 선조때인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에서 시작,약 3년간(1591년 5월 종료) 정여립과 연루된 1,000명의 동인과 호남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처자와 형제는 주살당했고, 조상도 파묘됐다. 금구군(金溝郡)의 집은 헐려 연못이 됐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反逆鄕)으로 낙인, 인재 등용에 차별을 당했다. 실제 조선의 전국 각 지역 과거(생원과 진사) 합격률(출처=네이버 지식백과)을 보면 그대로 들어난다. 태조에서 선조 때까지는 한양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 남원이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선조에서 숙종 때까지를 살펴보면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에 그친다.

6. 송강이 위관으로 활동한 기축옥사는 조선 최고 명문가(9대 연속 과거 급제자 배출 가문)인 전라도 함평의 광산 이씨 이발(李潑, 1544~1589)과 이길(李洁)·이급(李汲) 형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발은 송강이 사직해 낙향한 이후 승승장구했는데 이런 것도 옥사에 영향을 미쳤다.정철이 선조 14년(1581년)에 관리를 그만두고 호남으로 물러났는데 이듬해 이발은 부제학, 선조 16년에는 대사간, 선조 20년에는 대사성이 됐다.
하지만 이발은 정여립 사건이 터지자 대사간 직에서 사직했고, 결국 고문 끝에 죽었다.동생 이길,이급(李汲)도 연좌로 고문받다가 사망했다.82세의 노모 윤씨와 10세의 아들 모두 승복하지 않고 심문 중에 곤장을 맞다 숨졌다. 그런데 이발 부인의 여종 귀덕이 이발의 둘째 아들과 자기 아들을 바꿔치기해 이발 가문의 뒤를 계승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7.기축옥사 후 정철은 동인들로부터 '동인백정'이라는 원한스런 별명도 얻었다. 광산이씨는 철천지 원수 정씨 가문과 인연을 끊었고,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다지면서 '정철, 정철!' 이라 외칠 정도였다고 한다. 또 다만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사라졌다.
호남의 명문가 이발이 사면된 것은 30여년이 지난 인조 2년(1624년)이었다.관작이 복원되었고, 몰수한 재산도 되돌려졌다.숙종 20년(1694년)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고향 마을에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들을 표창하기 위해 세워준 붉은 문)을 세웠다.
8.정철은 건저의(建儲議) 사건으로 몰락했다.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뜻한다. 당시 권력 실세였던 송강은 임금 선조(宣祖, 1552~1608)의 의중을 모르고 세자 책봉 문제를 서둘러 공빈 김씨(恭嬪 金氏,1553~1577) 소생 광해군(光海君, 조선 제15대 왕, 1575~1641)의 세자 책봉을 밀어부쳤다. 그런데 당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仁嬪 金氏,1555~1613, 인조의 할머니)의 아들인 신성군(信城君 李珝, 1579~1592, 의주에서 병사)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런 임금의 뜻도 모르고 서인의 영수 정철은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선조때 영의정) 등과 만나 광해군 세자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동인측 이산해와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등이 도중에 슬그머니 빠진 것이다. 동인이 서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등을 돌린 것이다. 이에 정철 홀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한다.
9.선조는 건저의 사건을 '서인 손보기'에 활용한다. 동인이 동의하지 않은 것을 틈타 즉시 세자 책봉 논의를 막고 . 정철, 성혼(成渾, 1535~1598,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 윤두수(尹斗壽, 1533년~1601),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이해수, 홍성민(洪聖民, 1536~1594), 이산보(李山甫, 1539~1594), 박점, 황정욱(黃廷彧, 1532~1607), 백유함, 유공진, 장운익(張雲翼) 등 서인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한다.
선조는 정철에 대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 옳고 그름을 따진후 물리침)을 하고 파직시킨 후 함경도 명천군(明川郡)으로 유배 보낸다. 이후 경상도 진주와 평안도 강계(江界)로 다시 이배(移配, 귀양살이 하던 곳을 옮기는 것)시켰다. 이때가 임진왜란(1592~1598) 와중이었다. 선조는 이때 강계에 유배중이던 정철을 불러 사면하고 다시 등용했다.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 마리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정철이 죽은 후 "한 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쳤다"고 평가했다. 정철을 가리켜 "간철(奸澈,간사한 정철), 흉철(兇澈,흉악한 정철), 독철(毒澈,독한 정철)"이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또 선조는 최영경의 죽음과 관련,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고 변명했다.

10.임진왜란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정철은 57세 때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했다. 또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체찰사로서 왜란에 대처했다. 1553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도 갔다. 하지만 명나라를 다녀온후 동인 등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送亭村)에 살다가 58세로 영면했다.
유해는 1594년 2월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 장사지냈다가 1665년(효종 6년)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지장산(地藏山)으로 이장됐다.신도비(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는 1684년(숙종 9년)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수흥이 썼으며, 문백면 봉죽리 어은마을에 세워졌다. 1883년 고종은 정철의 사판(祠版)에 지방관을 보내 치제했다. 이후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 '사미인곡' · '속미인곡' ·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아내 문화 류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남아있다. 시문집인 '송강집(1894)'과 작품집인 '송강가사(목판본)'가 있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清公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11.사망 뒤인 1594년(선조 27년) 6월 권유(權愉), 김우옹 등의 탄핵으로 삭탈관작(削奪官爵,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됐다. 하지만 1609년(광해군 1년) 광해군 즉위 후 신원(伸寃)됐고,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복구됐다. 숙종(1685)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런데 1691년(숙종 17년)에 다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3년 후인 1694년(숙종 20년)에 복원됐다.
12.송강은 문화류씨 류강항(柳強項)의 딸과 17세에 결혼,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녀 정함장(鄭含章, 1555~?)이다. 장남 정기명(鄭起溟, 1558~1589)은 광산 김씨 김계휘(金繼輝, 1526~1582,추증 이조판서)의 딸과 혼인했다. 김계휘는 예학의 대가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아버지다. 이들 사이에 손자 정운(鄭沄)이 있다.
송강 차녀는 정함진(鄭含眞, 1560~?), 3녀는 정함영(鄭含英, 1563 ~ ?)이 있다.
또 차남은 정종명(鄭宗溟, 1565~1626, 인조 때 강릉부사)이며, 며느리는 남양 홍씨 홍인걸(洪仁傑)의 딸이다. 3남은 정진명(鄭振溟, 1567~1614)으로,며느리는 언양 김씨 김천일(金千鎰,1537~1593, 임진왜란 의병장, 진주성 전투서 자살)의 딸이다. 4남은 정홍명(鄭弘溟, 1582~ 1650,인조 때 대사헌 역임)으로 며느리는 기계 유씨 유대이(兪大頤)의 딸이다. 측실은 노비출신 논개(論介)가 있으며, 또다른 노비 출신 애복(愛福)도 있었다. 기녀출신 측실 진옥(眞玉), 측실 강아(江娥)부인도 있었다.
11.송강은 당대 최고의 애주가다. 선조가 정철의 애주에 감탄해 하사한 술잔이 남아 있을정도다. '장진주사(將進酒辭)'라는 권주가도 유명하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로 시작한다. 정철의 반대편이었던 동인 서애 류성룡은 '운암잡록(雲巖雜錄)'에서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작가 김훈이 소설 '칼의 노래'에서 강도높게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우의정 정철이 그 피의 국면(기축옥사)을 주도했다. 그는 민첩하고도 부지런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살육의 틈틈이 그는 도가풍의 은일과 고독을 수다스럽게 고백하는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의 글은 허무했고 요염했다."고 썼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