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금기의 사랑과 파멸로 논란많은 걸작의 첫 문단은 사랑 찬가의 끝판을 보여준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아침에 양말 한 짝만 신고 서 있을 때 키가 4피트 10인치인 그녀는 로, 그냥 로였다. 슬랙스 차림일 때는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에 안길 때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그녀 이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던가? 그래, 당연히 있었다. 사실 어느 여름날 내가 첫 번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 아 언제였던가? 그해 여름 내 나이는 그때로부터 롤리타가 태어나기까지의 햇수와 엇비슷했다. 살인자는 으레 문장을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쓰는 법이다. 남녀 배심원 여러분 증거물 1호는 치품천사들이, 위풍당당한 날개를 지녔으나 무지몽매한 치품천사들이 부러워하던 그것입니다. 여기 뒤엉킨 가시 굴레를 보십시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저, 김진준 역, 문학동네, 2013)
1.한밤중에 청소년이 쓴 흥분한 사랑찬가를 길게 늘어뜨린 것 같은 도입부다. 내레이터의 감정이 격해지다 못해 범람하고 있다. 독자의 호기심과 감동을 유도하는 첫 문단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특히 의도적인 언어 유희가 지나치고, 내레이터의 과도한 어휘 구사가 보인다. 자극적인 감탄의 연발과 문장 하나하나가 이를 말해준다. 첫 문단에 주인공이자 내레이터가 한사람이라는 독특한 구조도 엿보인다. 이런 도입부는 점잖은 자기소개서나 논술 등에 준용해 쓰기는 어렵다. 이제 막 시작하는 풋사랑에게나 쓸법한 연애편지에 활용하면 좋은 문장 구조와 문체라고 할수 있겠다.
영어 원문 첫문단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은 너무나 유명하다. 중간에 나오는 *4피트 10인치는 약 147센티이다. *치품천사(熾品天使, Seraphim,세라핌)는 등급이 가장 높은 천사를 뜻한다.)
2.나보코프의 ‘롤리타(Lolita, 1955)’는 금기를 깨뜨린 소재와 문제 의식 등으로 출간이후 지금까지 논란이 많은 걸작(傑作)이다.
러시아 출신 작가가 영어로 썼지만 출판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1954년 완성해 미국에서 출간을 시도했지만 ‘문제적 내용(포르노그라피 같은 불건전한 사랑)’으로 출판사 네 곳에서 거절당했다.
그래서 출판 환경이 좀 더 자유로운 프랑스에서 영어로 1955년 9월 청색 문고판으로 나왔고, 불어 번역판도 뒤를 이었다. 나오자마자 프랑스 평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수개월 후 일시적으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3년간 아예 반입이 금지됐다가 1958년 8월 뉴욕에서 출간됐다. 직후 미국 문학계에서 ‘포르노 소설이다, 아니다’로 수년간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12세 소녀와 중년 남자의 저급 사랑 놀음에 ‘포르노그라피’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책은 미국 출간 3주 만에 10만 부가 팔렸다. 이는 미국 소설가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949)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이후 가장 많이 팔린(6개월 100만 부) 것이다.
영국에서는 1959년에 나왔고, 러시아어판은 1967년에 저자 본인 번역으로 출판됐다. 이후 몇년이 지나면서 전 세계에서 ‘논란많은 명작’ 반열에 오르며 스테디셀러가 됐다. 출판계는 2020년 기준 세계적으로 2000만 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국 유명 도서출판사 모던라이브러리(Modern Library)가 1998년 선정한 ‘최고의 20 세기 소설 100편’ 중 4위에 올랐다.
3.소설은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이용하고 학대한 클레어 퀼티를 죽인 후 감옥에서 필요(?)에 의해 작성한 회고록 형식을 취했다. 한마디로 한 살인자가 배심원에게 보내는 형식의 감옥 수기, 참회록이다. 그래서 험버트가 주인공이자 내레이터 역할을 한다. 소설 제목은 작중 여주인공의 이름 돌로레스(Dolores)의 애칭인 롤리타(Lolita)에서 따 왔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행위의 주체이자 소설 속 픽션의 내레이션도 하는 메타픽션(Metafiction) 형식을 취했다. 메타픽션은 등장인물들이 작품에 그려지는 세계를 허구로 인지한 설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기법이다.
4.롤리타는 단순하게 읽으면 남자 주인공이 매우 불건전한 환상 속에서 은밀한 기쁨을 누리는 멜로 드라마 같다. 하지만 희극처럼 보이는 비극이자 치부(恥部)를 들춰내는 부조리극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현란하고 화려한 지적인 문체가 다가온다.
소설 구조도 독특하다. 호기심 가득한 소재로 독자의 읽기를 리드하는 듯한 형식을 취했다. 긍금증을 유발하는 캐릭터로 읽지 말라고 할수록 숨기면서 읽게하는 구조다.
5.현대에 쓰는 롤리타 콤플렉스(Lolita complex, lolicon), 롤리타 증후군(Lolita Syndrome), 님페트(님펫,nymphet)라는 용어의 원산지다.
이들 용어는 평론가 러셀 트레이너(Russel Trainer,1912~1992)의 1969년 저서 ‘롤리타 콤플렉스’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들 용어는 롤리타의 일본 번역 출판 후 유행하면서 굳어졌다고 한다.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비정상적인 욕망을 품는 것을 통칭한다.
6.롤리타는 노골적이고 추한 욕망과 절망적인 사랑에 이은 파멸을 묘사한 잡히지 않는, 잡을 수 없는 몽환(夢幻)의 사랑을 허구화 한 소설이다. 그래서 결론은 작중 인물 대부분이 파멸한다.
작가의 모국어가 아닌데도 현란한 어휘와 문체, 대담한 은유, 단어의 뜻을 이중 삼중 해석하게 하는 언어 유희, 늘어지는 산문 스타일 문체로 썼다. 이같은 문체와 불건전한 이야기가 서정적으로 읽히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평단에서는 ‘미국 문학의 표현력을 한 단계 올렸다’, ‘언어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등의 찬사가 꾸준히 나온다. 하지만 저자는 생전 이 소설에 대해 "영어와의 실패한 연애"라고 겸손해 했다는 일화가 있다.
7.소설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주인공인 롤리타(Lolita)로 불리는 돌로레스 헤이즈(Dolores Haze), 남주인공 험버트 험버트(Humbert Humbert), 롤리타 어머니 샬로트 헤이즈(Charlotte Haze), 극작가 클래어 퀼티(Clare Quilty) 등이다.
인물들의 이름도 이중적인 뜻이 있고, 다양한 상징을 갖고 있다. 여주인공 롤리타의 원래 이름 ‘돌로레스’는 라틴어 및 스페인어로는 ‘고통’이라는 뜻이 있다. 험버트는 독일식 이름으로 폭력(특히 나치 독일)을 상징한다. 헤이즈는 흐릿한, 혼탁한 의미다. 퀼티는 덮개의 뜻을 갖고 있지만 약하게 발음하면 길티(guilty), 죄의식이다.
8.줄거리는 비도덕적이고 성도착적인 사랑과 파멸을 미사여구로 실감나게 풀어낸 이야기다. 주인공 험버트험버트는 어렸을 적 사랑했던 소녀 애너벨에 집착해 소녀에 대한 욕망과 동경을 품는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험버트는 우연히 하숙집에서 과부인 집주인의 12세 딸 롤리타를 보고 사랑한다. 하숙집 주인 샬로트 헤이즈는 험버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험버트는 롤리타를 옆에 두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한다.
그런데 롤리타에 대해 쓴 험버트의 일기장을 본 샬로트는 곧바로 헤어지려고 하지만,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에 험버트는 고아가 된 롤리타를 데리고 떠돌다가 자제된 성욕이 롤리타의 유혹에 무너진다.
2년 여의 세월이 가자 롤리타에게서 뛰쳐나와 학교로 돌아간다.험버트는 애타게 찾지만 종무소식이다. 그런데 임신한 롤리타가 갑자기 돈을 보내라는 연락을 한다.
롤리타를 만난 험버트는 동거하자고 애원하지만 거절당한다. 험버트는 3년 전 롤리타를 납치해 학대했던 극작가를 찾아가 다툼 끝에 권총으로 살해한다.
그런 후 험버트는 옥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죽는다. 한 달쯤 뒤 롤리타도 딸을 사산하고, 숨을 거둔다.
9.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가 패러디해 16세 소년이 할머니를 사랑하는 이야기 ‘그라니타(Granita)’라는 단편을 썼다.
1962년에는 유명감독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1999)의 영화 ‘롤리타’로 나왔다. 이 영화는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선 원작자 나보코프가 소설 훼손을 우려해 반대했다. 설득 끝에 나보코프가 직접 시나리오를 만들었는데 큐브릭이 대폭 삭제하자 손을 뗐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 청교도 사회의 거센 반발로 영국의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1971년 영국 작곡가 존 배리 프렌더가스트(John Barry Prendergast, 1933~2011)와 미국 작사가 앨런 제이 러너(Alan Jay Lerner, 1918~1986)에 의해 뮤지컬 'Lolita, My love'로 나왔다. 그해 2월 필라델리피아에서 초연됐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결국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오르지 못했다.
1992년 러시아에서 오페라 '롤리타'로 나왔다.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콘스탄티노비치 슈체드린(Rodion Shchedrin, 러시아어 Родио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Щедрин, 1932~현재)가 러시아어 오페라로 제작했다. 1994년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됐다.
이후 2004년 러시아 동북구 페름시의 페름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발레 극장 (Perm Tchaikovsky Opera and Ballet Theatre)에서 공연됐다.
1997년에 유명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를 내세운 아드리안 린(Adrian Lyne,1941~현재) 감독의 ‘롤리타’는 검열 때문에 미국에서의 개봉이 계속 연기되다가 겨우 상영됐다.
이탈리아의 안무가 '다비드 봄바나'가 구성한 ‘발레 롤리타’도 만들어졌다. 2003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의 개막식 테마 '러시아의 알파벳'에서 러시아 출신 인물들이 대거 나왔는데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나보코프가 ‘롤리타’의 작가로서 소개됐다.
8.한국에서는 윤대균(전 합동통신 기자) 번역가에 의해 1959년 5월 신태양사에서 ‘로리타’로 출판됐다. 당시 표기법에 따라 ‘롤’이 아니라 ‘로’였다.
1999년에는 민음사에서 권택영(權澤英, 1947~현재) 전 경희대 영문과 교수 번역으로 나왔다. 현재는 절판. 2000년대 들어서는 2013년 문학동네가 김진준 역으로 출판했다.
명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1997년 영화 ‘롤리타’는 1998년 10월 서울에서 개봉됐다. 하지만 흥행에서는 사실상 실패했다.
9.롤리타 러시아어 번역본은 작가가 직접했고, 출판도 뉴욕에서 했다. 나보코프는 생전 번역 이유에 대해 “먼 미래에 누군가가 러시아어 버전을 제작할 것”이라며 “모든 단락의 끔찍한 오역이나 저속한 의역, 번역자 실수로 완전히 타락하고 엉망이 되지 않도록 직접 번역했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러시아 출신 미국 작가이자 곤충학자. 다중언어 소설가.시적인 표현과 언어 유희, 세련된 문장으로 ‘언어의 마술사’로 불렸다.
원래 러시아 이름은 블라디미르 블라디비치 나보코프(‘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боков)’이다.
1.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서깊은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보코프 가문은 제정 러시아의 귀족으로 할아버지는 제정러시아 차르 정권의 사법(司法) 장관을 지냈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나보코프(Vladimir Dmitrievich Nabokov, 1870∼1922)는 법관, 변호사였으나 나중에, 정치가이자 진보 저널리스트로 활동한다. 어머니는 백만장자 금광 소유자의 손녀이자 상속녀인 옐레나 이바노브나 루카비슈니코바(Yelena Ivanovna Rukavishnikov)이다.
동생은 세르게이(1900~1945), 누이 올가(1903~1978), 누이(1906~2000), 남동생 키릴(1912~1964) 등이 있다. 가족은 러시아어, 영어 및 프랑스어를 집에서 사용했다. 이중 첫째 동생 세르게이(1900~1945)는 독일 거주때 히틀러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후 끌려가 독일 북부 노이엥가메(Neuengamme) 집단 수용소에서 살해됐다.
2.나보코프는 가정교사와 어머니에게서 영어를 배워 모국어인 러시아어보다 먼저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1916년에 첫 시선집을 자비로 출간했다.
러시아 최고 명문가였던 나보코프 가문은 1917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해 2월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에 이어 일어난 10월 볼세비키 혁명으로 가족들은 크림지역으로 임시 이사했다가 결국 1918년 독일로 망명했다. 이후 1920년 베를린에 정착했다.
3.볼세비키 혁명 당시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 중이었던 나보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했고, 런던에 머물렀다. 그는 1922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에 정착해 진보 매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아버지는 그해 3월 베를린에서 피살됐다. 러시아 군국주의자이자 극우파인 표트르 샤벨 스키 보크(Pyotr Shabelsky-Bork)와 세르게이 타 보리츠키(Sergey Taboritsky) 등이 범인이었다. 글쓰기를 계속하던 나보코프는 1926년에 첫 장편 소설 ‘마셴카’를 출간했다.
4.나보코프는 큰 잡음없는 가정생활을 유지했다. 1922년 부모님 주선으로 스베틀라 시에베르트(Svetlana Siewert)라는 여성과 약혼했지만 파혼한다.
이후 결혼 상대자인 러시아계 유대인 여성을 만난 것은 1923년 베를린에서다. 런던에서 가족이 있는 베를린으로 와서 영어와 글쓰기, 테니스, 복싱 등을 가르치며 살다가 자선 무도회에서 만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망명한 변호사 가문의 딸 베라 예브세예브나 슬로임(Véra Yevseyevna Slonim, 러시아 이름 Ве́ра Евсе́евна Набо́кова, 1902~1991)이었다. 둘은 1925년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는 1934년 아들 드미트리 블라디미르비치 나보코프(Dmitri Vladimirovich Nabokov, 러시아어 Дми́т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бо́ков, 1934~2012)가 태어났다. 드미트리는 나중에 오페라 가수 겸 번역가로 활동했다. 드미트리는 나중에 부모가 모두 사망한 후 아버지의 유언을 거스르고 '로라의 원본’(The Original of Laura, 한국 번역명 오리지날 오브 로라)' 을 2009년에 출판한다.이 책은 나보코프의 친필과 원고가 쓰인 인덱스카드의 모습을 그대로 볼수 있게 출판했다.
아내 베라는 올라운드 내조자였다. 나보코프 사망 때까지 비서, 타이피스트, 편집자, 교정자, 번역가 및 서지 작가, 대리인, 비즈니스 매니저, 법률 고문 및 운전사, 연구 조교, 조교 및 교수 보조로 활동했다.
4.나보코프는 1937년 나치를 피해 파리로 이주했으나 독일군의 파리 점령으로 다시 194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45년에는 미국 시민권도 받았다.
곤충학자이기도 한 나보코프는 1945년 하버드 대학교 비교동물학 박물관의 학예연구사로 위촉되었으며 남아메리카 나비 무리의 분류 체계에 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나보코프는 스탠퍼드, 코넬,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나 1955년 ‘롤리타’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집필 활동과 인시류(鱗翅類, Lepidoptera, 나비 및 나방 등) 연구에 몰두했다.
5.1951년에는 회고록 ‘말하라, 기억하라(Speak, Memory)’를 냈다. 이 책은 20 세기 최고의 논픽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53년 6월 나보코프 가족은 오리건 주 애쉬랜드로 이사 갔다. 그곳에서 젊은 작가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1937~현재)을 가르치기도 했다.
나보코프는 다시 1961년 스위스 몽트뢰로 이주했다. 스위스에서는 장편소설 ‘창백한 불꽃 (Pale Fire)’을 낸다. 1977년 사망 때까지 그곳 몽트뢰 팰리스 호텔에 거주했다.그리고 이 호텔에서 영면한다.
나보코프는 사망 직전 유언으로 'The Original of Laura'를 불태우라고 했다. 하지만 이 유언은 아내 베라도 아들 드미트리도 지키지 않았다.
6.평생 불면증 환자였다. 나보코프는 수면을 ‘멍청한 형제애’, ‘정신적 고문’, '이성, 인류, 천재에 대한 야간 배신'이라고 불렀다.
나보코프는 작품에 어떤 주장이나 교훈을 주는 글을 쓰지 않았다. 작품에 도덕적, 사회적 메시지를 넣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 허구 그대로를 쓴 후 판단은 읽는이(수용자)에게 맡겼다.
나보코프는 생전에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빨리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라고 말했다.
7.러시아 문학 평론가 율리 아이 헨 발트(Yuly Aykhenvald)는 “나보 코브는 사소한 사물에 마음을 부여하는 세련된 감각을 가진 작가”라며 “채색과 뉘앙스, 냄새와 소리 등이 그의 말을 통해 예기치 않은 의미와 진리를 얻는다”고 말했다.
많은 후대 작가들이 나보코프의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 1937~현재)은 물론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John Banville,1947~현재),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Don DeLillo,1936~현재), 인도출신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 1937~현재), 미국소설가이자 프리수턴대 교수 에드먼드 화이트(Edmund White, 1940~현재) 등이다.
미국 소설가 존 호크스(John Hawkes, 1925~1998)는 “나보코프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며 “나보코프 추종자”라고 말했다.
풀리처상 수상자인 스토리텔링 작가 제프리 유제니데스(Jeffrey Eugenides,1960~현재)는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너 개의 공을 저글링할 수 있지만 나보코프는 10개의 공을 저글링할 수 있다”고 격찬했다.
8.나보코프는 종교적으로 불가지론자로 신을 믿지 않았다. 곤충학에 심혈을 쏟았다. 나보코프는 1967년 “러시아에 혁명이 없었더라면 나는 전적으로 나비학에 전념했을 것이고 전혀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곤충학에 대한 업적도 대단하다.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은 ‘나보코프의 (곤충)생식기 캐비닛’을 보유하고 있다. 또 죽기 직전까지 연구했던 ‘파란 나비 생식기 컬렉션(표본 4300개)’은 스위스의 로잔 동물 박물관에 있다.
2012년에 수성의 한 분화구는 나보코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