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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작가 사망 30년 후에 불멸의 고전이 된 거대 서사의 첫 문단은 바다 갈망으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8. 1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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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두자. 몇 년 전-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늘 쓰는 방법이었다. 입 언저리가 일그러질 때,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질 때, 관을 파는 가게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거나 장례행렬을 만나 그 행렬 끝에 붙어 따라갈 때 특히 심기증에 짓눌린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날려 보내지 않으려면 대단한 자제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면 나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나갈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카토는 철학적 미사여구를 뇌까리면서 칼 위에 몸을 던졌지만, 나는 조용히 배를 타러 간다. 이것은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바다를 알기만 하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모비 딕, 김석희 역, 작가정신, 2010 )

2010년 작가정신이 내놓은 '모비 딕' 표지 부분.

1.내레이터 이름을 첫 줄에 내세운 과감한 도입부다. 화자인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제대로 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첫 문단이어서인지 큰 상징이나 은유가  없어서 편안하게 읽힌다.  문체적으로도 운문체 느낌이어서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바다를 향한 갈망을 집요할 정도로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또 카토와 나를 비교함으로써 거대 서사가 뒤따를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도입부다.
문단 아래 부분에 나오는 ‘카토’는 고대 로마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BC.100~BC.44)에 저항해 싸우다 자살한 마르쿠스 포르치우스 카토(BC. 95~BC.46)이다.

2.허먼 멜빌의 ‘모비 딕(Moby Dick, 1851)’은 미국은 물론 세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고전(古典) 중의 고전이다.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이다.
영국 런던에서 1851년10월18일 ‘고래(The Whale)’삭제(줄임)판으로 처음 나왔다. 미국에서는 11월14일 뉴욕에서 '모비 딕'Moby-Dick; or, The Whale)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짜리 무삭제판으로 출간됐다.
작가 나이 31살에 쓴 모비 딕은 24만 단어와 전체 135장으로 매우 긴 구성을 취하고 있다. 원제는 ‘Moby-Dick; or, The Whale’이다. 거대한이라는 뜻의 모비(Moby)와 성기를 일컫는 딕(dick)의 합성어다.
모비 딕은 길이 26m, 몸무게 80톤이 넘는 늙은 수컷 알비노 향유고래와 페루의 사납기로 유명한 모카딕(Mocha Dick)이란 거대한 흰고래를 보고 작가가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이빨고래의 이름이다.

미국 뉴욕에서 1851년 나온 '모비 딕' 초판본 첫 페이지.photo by wikipedia

3.미국 소설의 대명사로 영문학 3대 비극 작품 중 하나다. 다른 작품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리어왕(King Lear)’,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ë, 1818~1848)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다.
하지만 출판 초기에는 평단의 주목을 못받고 독자의 외면을 받았다. 작가가 72세로 영면하기 전까지 미국에서 고작 3200부가 팔렸을 뿐이다.
당대에 모비 딕을 주목한 작가는 소설을 헌정 받은 ‘주홍글자(The Scarlet Letter, 1850)’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thorne, 1804~1864)과 아내 소피아 피바디(Sophia Amelia Peabody, 1809~1871) 뿐이었다.

4.모비 딕이 주목받은 것은 작가 사망 뒤 30년이 지난 1920년 전후 불기 시작한 ‘멜빌 부흥 운동’ 이다. 탄생 100 주년인 1919년이 출발점이었다.
미국 문명 비평가이자 역사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1895~1990), 작가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극찬으로 올바른 평가가 시작됐다.
특히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저명한 평론가였던 레이먼드 멜보른 위버(Raymond. M. Weaver 1888~1948)의 공로가 컸다.
미국 작가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1956~현재)은 “모비 딕은 진정한 서사시다. 창조신화, 복수 설화, 민간 전설, 창조하고 또 파괴하고자 하는 상충하는 충동을 엮어 이 모든 것을 지구의 광대한 대양을 배경으로 펼치며, 미국의 강력한 원형을 거의 전부 구현했다”고 격찬했다.

미국에서 나온 소설 '모비딕' 1902년판 일러스트.photo by wikipedia

5.소설의 모티브는 1820년11월20일 남태평양에서 거대한 수컷 향유고래 공격으로 침몰한 포경선(捕鯨船)과 선원 이야기다.
조난당한 21명의 선원이 태평양에서 배 파편에 의지하면서 먹거리가 부족하자 죽은 동료 선원들의 인육을 먹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들 선원들은 94일간 7200km를 표류하다가 8명만 생존했다.
이 이야기는 2000년에 미국 작가로 ‘사악한 책 모비딕(영어명 Why Read Moby Dick?)’을 쓴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1956~현재)의 논픽션 ‘In the Heart of the Sea: The Tragedy of the Whaleship Essex’로 출판됐다. 한국에는 ‘바다 한가운데서’로 번역됐다.
모비딕은 2020년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위대한 소설 100'에서 2위를 기록했다.

5. 소설 화자(話者, 내레이터)인 이슈메일(Ishmael,영어 이스마일)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방랑자,추방자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종(하녀) 하갈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첫 아들이지만 서자다. 사라에게서 적자 이삭(이사악, Isaac, 영어 아이작)이 태어나면서 어머니 하갈과 함께 쫓겨난다. 이삭은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다.
아랍인의 시조(조상)로 여겨지는 이슈메일이 내레이터로 나오는 것은 문명을 객관적으로 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물질중심의 기독 문명를 주류로 보지 않고, 이슬람과 식민지 야만인 문명도 동등하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자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허브, 외딴 섬의 식인종 부족 출신인 야만인 선원 퀴퀘그, 1등 항해사이자 유일한 정상인 스타벅, 작살잡이 아메리카 원주민 테슈테고, 조로아스터 신자 페들러 등도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소설은 거대한 고래를 잡으러 가는 과정과 고래의 모든 것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리고 선원들과 모비딕의  혈투가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주인공 이슈메일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잃어버린 자식들을 찾는 구조대원들이 자기 자식을 찾다가 남의 자식인 이슈메일을 구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6.모비딕은 작가들이 매우 좋아하는 소설이다. 현대는 물론 20세기 이후 수많은 작가들이 모두 손에 꼽는 책이다.
미국 은둔 소설가 토마스 핀천(Thomas Ruggles Pynchon, Jr. 1937~현재), 미국 4대 소설가인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2023) 등이 모비 딕을 좋아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
또 유명 소설가들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1899),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1962),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 E. M. 포스터(E. M. Forster, 1879~1970) 등도 좋은 소설로 꼽았다. 소설가 이문열도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라고 했다.
20세기 최고의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이후 성취하기 어려웠던 ‘진정한 독창성’이 19세기와 20세기 미국 문학에서 일부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그 시작은 멜빌이다”고 말했다.

7.포경선 출항 항구(뉴베드퍼드,New Bedford)가  있었던 매사추세츠 주 지정 ‘공식적인 위대한 소설’이다. 2008년 주 하원에서 모비 딕을 '공식적인 위대한 소설'로 명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피쿼드 호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물인 1등 항해사 스타벅은 유명한 ‘스타벅스’의 상호가 됐다.스타벅스는 로고도 뱃사람을 유혹하는 전설이 있는 ‘사이렌(Siren)’을 디자인해 만들었다. 사이렌은  이탈리아 소렌토(Sorrento, Surrentum)의 어원이자 앞바다이다.

1954년 노희엽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백경(모비 딕) 초판(7월31일), 재판(10월10일) 표지. photo by http://boogram.pe.kr

8.국내에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번역됐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해서인지 몰라도 일본  번역 제목 그대로 ‘백경(白鯨, 흰고래)’ 으로 소개됐다.
한국판의 번역 초판은 1954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노희엽(1924~사망) 전 교수의 번역이 가장 오래됐다. 미국 논픽션 작가 로버트 J. 딕슨의 1953년 판 다이제스트 본을 번역했다. 최초의 완역본은 양병탁(梁炳鐸) 경희대 영문과 교수가 1959년에 내놓았다.
김석희 번역가가 2010년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완역본 ‘모비 딕’을 내놓았다. 작가정신은 그해에 ‘모비 딕 백과사전 격’인 일러스트판도 출판했다. 일러스트판은 2019년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을 맞아 문학동네에서도 출간했다.

9. 모비딕은 2011년 한국에서 '액터-뮤지션(배우가 악기까지 연주)' 형식의 뮤지컬로 공연됐다. 최고의 창작 뮤지컬로 호평 받으며, 17회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개작해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재공연됐다.
2017년 미국 작가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1956~현재)의 '사악한 책, 모비 딕'도 나왔다. 이 책은 2020년 재출간됐다

1956년 나온 영화 '모비딕' 포스터.

10.1926년 마일라드 웹(1892~1935)감독이 무성영화시대의 스태배우 존 배리모어(John Barrymor, 1882~1942)를 주연으로 내세워 흑백판 무성영화로 내놨다.
1956년에는 존 휴스턴(John Huston, 1906~1987) 감독이 당대 스타배우 그레고리 펙(Eldred Gregory Peck, 1916~2003)을 에이허브 선장으로 등용, 제작했다.
한국에서는 1975년 12월 28일 KBS에서(현 KBS-1)에서 새해 특선 영화로 더빙해 방영했다. 제목은 ‘백경’이었다. 이 영화는 1980년대에 3~4차례 더 방영됐다. 1974년 호주에서 5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드라마로는 1998년 3부작 TV로 미국과 호주 합작으로 나왔고, 201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작으로 2부작 TV 미니시리즈로 제작 방영됐다. 가장 최근에는 2022년 스위스에서 드라마 ‘모비 딕; 오어 더 웨일(Moby Dick; or the Whale)로 나왔다.

미국 화가 조셉 오리엘 이튼(Joseph Oriel Eaton, 1829~1875)이 1870년에 그린 허먼 멜빌 초상화.photo by wikipedia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미국의 대문호.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작가.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사후 인정받은 대표적인 작가다.

1.미국 뉴욕의 명문가이자 부유한 무역상 집안에서 아버지 앨런 멜빌(Allan Melvil, 1782∼1832)과 어머니 마리아 간세보트( Maria Gansevoort, 1791∼1872) 사이에서 태어났다. 8형제 중 셋째다.
할아버지 토머스 멜빌(Thomas Melvill, 1751∼1832) 소령은 1773년2월16일 일어난 ‘보스턴 차(茶) 사건(Boston Tea Party)’에 참여했다.
외할아버지 피터 간세보트(Peter Gansevoort, 1749∼1812) 장군은 1777년 뉴욕의 스탠윅스 요새(Fort Stanwix) 방어를 지휘한 독립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1783)의 영웅이었다.

2.부자 엄마를 둔 멜빌은 하인이 3명이상 있는 집에서 여유로운 삶을 보냈다. 1828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정착했다.1928년 멜빌은 뉴욕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있는 컬럼비아 문법 및 예비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처가댁 돈을 끌어와 사업에 나섰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1930년 아버지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도록 했다. 멜빈 가족은 집세를 못냄에 따라 뉴욕의 알바니로 이사갔다.
아버지는 1832년 멜빌이 12살 때 사망했다. 50세였다. 이후 멜빌 가족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진다. 이에 따라 멜빌은 은행 점원, 시골 학교 교사 보조 등 닥치는대로 일했다.

3. 멜빌은 스무살이 되던 1839년 상선 세인트 로렌스호 선원이 된다. 영국 리버풀로 항해하며 선원으로 경험을 쌓는다. 이후 841년 포경업의 중심이던 뉴베드포트에서 태평양행 포경선인 애쉬쿠넷 호를 탄다.
멜빌은 이 배가 마퀴사스 군도 누쿠히바 섬에 정착했을 때 토비 그린이라는 선원과 함께 탈주해 하와이와 남태평양 일대를 방랑하다가 1844년 10월 보스턴으로 들어온다.

4.최초의 소설이자 출세작인 타이피(Typee, 1846)를 영굴 런던에서 출판,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멜빌은 타이피의 속편격인 두번째 소설 오무(Omoo, 1847)도 발표, 인기를 굳힌다.
멜빌은 31세 때인 1850년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작가 및 출판인들의 회합’에서 가장 중대한 영향을 준 인물과 만난다.
소설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저자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thorne, 1804~1864)이다. 15살 차이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료된다.
멜빌은 가족과 함께 호손의 집 근처로 이사를 했고, 이 곳에서 ‘모비 딕’을 집필했다. 모비딕 초고(草稿)를 본 호손은 “그대 심장은 내 가슴 안에서 뛰고, 내 심장은 그대의 가슴 안에서 뛴다. 우리 둘의 심장은 신의 가슴속에서 뛴다”고 호평했다. 멜빌은 완성한 ‘모비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허먼 멜빌 부인 엘리자베스 리지 쇼의 1885년(63세) 모습.photo by wikipedia

5.멜빌은 1947년 워싱턴에서 정부 일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지만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다. 보스턴의 법학자 레무엘 쇼의 딸인 엘리자베스 리지 쇼( Elizabeth Lizzie Knapp Shaw, 1822~1806)를 만난 것이다.
둘은 우려곡절 끝에 그해 8월 쇼의 집에서 결혼했다. 아내 리지는 후에 결혼에 대해 “매우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회상했다. 둘은 뉴욕시 포스 아베뉴(현 파크 아베뉴)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 결혼으로 멜빌은 아내의 보살핌은 물론 처가의 도움도 받아 재정적인 안정도 가져왔다.
둘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다. 하지만 1849년 테어난 첫 아이 맬컴(Malcolm)은 1867년 자해 총상으로 집에서 사망한다. 18세였다. 1886년에는 방랑벽이 있는 둘째 아들도 스탠윅스도 사망한다. 35세였다.

6.1866년 멜빌은 뉴욕시의 세관 검사관이 됐지만 가정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식구가 많은 데다 출판사가 파산, 인세도 못받았기 때문이다. 작가로서는 사실상 은퇴하고 세관에서는 20여년 근무했다.
작가로서 멜빌은 잊혀져 갔고, 1885년 12월 31일 이후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1891년 9월28일 새벽 심장 질환(cardiovascular diseas)으로 영면했다. 뉴욕 브롱크스의 우드론 공동묘지(Woodlawn Cemetery)에 묻혔다.

미국 뉴욕 브로크스 카운티 우드론(Woodlawn) 공동묘지에 있는 허먼 멜빌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지니 쇼의 묘.photo by wikipedia

7.불만과 불운의 죽음이었다. 문학계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드물 정도였다. 그래서 멜빌 사망 부고는 ‘문단 활동을 했던 한 시민’, 대표작은 철자까지 틀린 ‘Mobie Dick’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멜빌의 재평가를 본 가족은 둘째 딸인 프린세스 멜빌(1855~1938)이 유일했다. 부인도 1906년에 사망하고, 첫째딸인 엘리자베스(1853~1908)도 이미 고인이었다.

8.1919년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재평가가 시작돼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됐다. 컬럼비아대 교수이자 평론가 레이먼드 멜보른 위버(Raymond. M. Weaver 1888~1948)가 멜빌의 삶과 문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착수한 것이 계기였다.
위버는 멜빌에 관한 최초의 저작물 ‘Herman Melville: Mariner and Mystic(1921)’를 출간했다. 이 저서는 ‘멜빌의 부활(Melville revival)’을 쏘아올리는 불꽃이었다.
2023년에는 영국 작가 D.H. 로렌스가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라는 평론집에서 ‘모비딕’를 평가하면서 확산됐다. 칼 반 도렌(Carl Van Doren)의 ‘미국 소설(1921)’, 칼 반 베흐텐의 ‘더블 딜러(1922)’, 루이스 뭄포드의 전기 ‘허먼 멜빌(1929)’ 등도 부흥에 역할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말년에 자신의 책을 낸 출판인에게 “넘어서고 싶은 작가들이 이제 몇 안 남았는데 그중 한 명이 허먼 멜빌”이라는 말했다.

9.멜빌은 19세기의 선각자였다. 오세아니아 섬 문화를 파괴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악락한 인물로 묘사했다. 인종차별주의를 극혐했고, 백인우월주의에 얽매이지 않았다.
1945년 미국에서 멜빌 소사이어티가 설립됐다. 멜빌의 삶과 작품 연구에 전념하는 비영리 단체다.
뉴튼 어빙(Newton Arvin)은 1950년 비평 전기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을 출판했다. 이 책은 1951년 논픽션 ‘National Book Award’를 받았다.

10.미국 우편서비스는 1984년 8월1일 문학 예술 우표 시리즈의 하나로 20 센트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배경은 매사추세츠 주 뉴베드퍼드에 있는 포경 박물관이었다
1뉴욕시허먼멜빌협회는 1985년 멜빌이 1863~1891년 살았던 집 근처 파크 아베뉴 일대를 Herman Melville Square로 헌정했다.
고생물 학계는 2010년 발견된 새로운 종의 거대한 향유고래 화석에 멜빌의 이름을 붙여 ‘(학명)리비아탄 멜빌레이’라고 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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