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미인곡-한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조선 가사 문학의 백미는 대화체로 시작된다.

“뎨 가ᄂᆞᆫ 뎌 각시 본 듯도 ᄒᆞᆫ뎌이고/天텬上샹 白ᄇᆡᆨ玉옥京경을 엇디ᄒᆞ야 離니別별ᄒᆞ고/ᄒᆡ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러 가시ᄂᆞᆫ고.(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해가 다 저문 날에 누굴 보러 가시는고?)
어와 네여이고 내 ᄉᆞ셜 드러보오/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ᄒᆞᆫ가마ᄂᆞᆫ/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ᄉᆡ/나도 님을 미더 군ᄠᅳ디 전혀 업서/이ᄅᆡ야 교ᄐᆡ야 어ᄌᆞ러이 ᄒᆞ돗ᄯᅥᆫ디/반기시ᄂᆞᆫ ᄂᆞᆺ비치 녜와 엇디 다ᄅᆞ신고./누어 ᄉᆡᆼ각ᄒᆞ고 니러 안자 혜여ᄒᆞ니/내 몸의 지은 죄 뫼ᄀᆞ티 ᄡᅡ혀시니/하ᄂᆞᆯ히라 원망ᄒᆞ며 사ᄅᆞᆷ이라 허믈ᄒᆞ랴/셜워 플텨 혜니 造조物믈의 타시로다(아아, 너로구나 내 이야기 들어 보오/내 몸과 이 거동이 임께서 사랑함직 한가마는/어쩐지 날 보시고 너로구나 여기시기에/나도 임을 믿어 다른 뜻이 전혀 없어/아양이며 교태며 어지럽게 굴었던지/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리니/내 몸이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하늘이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탓하랴/서러워서 풀어내 헤아리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
1.소박한 사랑을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써서 민요 형식으로 묘사했다. 두 여인 화자(話者)를 내세워 푸념하듯, 하소연하듯 한 대화 기법으로 쓴 것이다. 특히 은유적인 표현이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는 느낌이다. 한글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보기 드문 운율을 갖춘 산문이다. 본문의 ‘白ᄇᆡᆨ玉옥京경’은 옥황상제가 사는 곳으로 대궐을 뜻한다. ‘造조物믈’은 조물주다.
2.정철의 ‘속미인곡(續美人曲,1585~1589 추정)’은 2명의 여성이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화체 가사다.
소박한 순우리말 어휘가 운율을 이뤄 ‘가사(歌辭)문학(조선 초중기에 운율을 꼭 지키지 않고 산문처럼 지은 시)’의 보배로 여겨진다. 서-본-결 3단 구성 형식을 취해 민요로 부를 수도 있는 구조다.
대표적인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고신연주지사(孤臣戀主之詞)’다. 조선 후기 연군(戀君), 혹은 남녀간의 사랑, 정인(情人)에 대한 글쓰기의 본보기로 많이 활용됐다.
3.줄거리는 도입부에서 백옥경(대궐)을 떠난 중심화자가 임의 동정을 궁금해하며 사모의 정을 표현한다.
이어 임을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임을 향한 간절함, 스스로 판단한 이별의 원인이 펼쳐진다. 님에 대한 그리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학자들 사이에서는 먼저 나온 사미인곡(思美人曲,1588, 선조21년)의 속편, 동곡이교(同曲異巧, 곡은 같으나 문체는 다른)로 낮게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글을 앞세운 데다 오히려 사미인곡 보다 더 감정이 풍부하게 실리고 서술 형식도 달리한다. 이런 이유로 현대에 와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사미인곡과 달리 속미인곡은 여인을 내세운 대화체다. 화자(話者)의 감정이 훨씬 객관적으로 잘 전달되는 형식이다.
5.상징과 은유없이 곧이곧대로 읽으면 임을 이별한 여인의 애달픈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대는 물론 조선말까지 백성들이 즐겨 읽는 가사 노래였다고 고 한다.
한역(漢譯)도 됐다. 숙종~정조 사이 문신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중추원 정삼품) 지낸 김상숙(金相肅,1717~1792), 송강의 6세 손 정도(鄭棹) 등이 한문으로 번역했다.
6.소설 ‘구운몽’의 저자인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중 속미인곡이 최고”라며 “관동별곡, 전후 미인가(사미인곡,속미인곡)는 우리나라의 이소(離騷)” 평했다.
이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BC 223) 굴원(屈原, 추정 BC342~BC 278)의 장편 서사시다. 離騷에서 離는 어려움을 만나는 것, 騷는 근심을 뜻한다.
인조(仁祖) 때의 문인 홍만종(洪萬宗,1643~1725)은 자신의 저서 ‘순오지(旬五志,1678, 속담, 양생술 등을 쓴 책)’에서 “말이 더욱 묘하고 뜻이 더욱 절실해 제갈공명(중국 위촉오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 AD 181~234)의 ‘출사표’와 더불어 겨룰 만하다”고 극찬했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숙종 시기 풍운아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은 저서 ‘북헌집(北軒集,1760)’에서 한글 가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속미인곡 등은) 아마도 굴원의 이소(離騷)에 짝지을 만할 것”이라고 격찬했다.
송강 가사에 감동받은 김춘택은 제주로 귀양갔을 때 순 한글체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을 짓기도 했다.

#.정철(鄭澈, 1536~1593)=조선 선조 때의 서인 영수(領袖). 우의정과 좌의정, 전라도 체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 윤선도(1587~1671)와 함께 가사 문학의 대가로 꼽는다. 호는 송강(松江).
1.1536년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장의동(현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종5품)을 지낸 아버지 정유침(鄭惟沉)과 대사간 안팽수(安彭壽)의 딸 죽산 안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유년기(10살 이전)에는 인종(1544~1545)의 숙의(淑儀,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월산대군 조카)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를 보러 궁중에 자주 들어간다.
이 때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1545~1567)을 만나 친해 진다.
하지만 10살 때인 1545년(명종 1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대윤(大尹) 대 소윤(小尹) 간의 싸움)에 연루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난다.
을사사화는 1545년 을사(乙巳)년에 대윤(윤임-중종 둘째부인 장경황후 오빠이자 인종 외삼촌)과 소윤(윤원형-중종 셋째부인 문정황후 오빠) 간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화(士禍)로 대윤 일파 선비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2.을사사화에 연루된 정철 가문은 아버지는 유배되고, 형은 곤장을 맞고 장독(杖毒)으로 사망한다.
이에 따라 정철은 아버지 유배지에서 생활하다가 유배가 풀린 15살 때 선산이 있는 전라도 창평(현 담양군)으로 이사 간다.
정철은 창평 당지산(唐旨山) 별뫼(성산, 星山)의 송강(松江)가에 거주하면서 창평의 명망가 광산김씨 김윤제(金允悌)의 문인이 된다.
이를 계기로 김윤제의 외손녀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딸과 17살에 혼인(1552)해 4남 2녀의 자녀를 뒀다.
3.정철은 창평에 거주하면서 이름난 유학자인 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하서 김인후((金麟厚,1510~1560), 고봉 기대승(奇大升,1527~1572) 등에게서 수학한다.
1561년(명종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 장원급제했다. 선조 즉위 이후 1568년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좌랑(吏曹佐郞, 정6품)에 이어 1570년 이조정랑(吏曹正郞, 정5품)에 오른다.
선조 13년인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고, 1583년 이조판서에 있던 친구인 율곡 이이(李珥,1537~1584)의 추천으로 예조판서에 오른다. 1585년 낙향(落鄕)해 창평에 머문다.
4.송강의 악한(惡漢)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선조 22년(1589) 10월 우의정 때 위관((委官, 수사 책임자)을 맡아 처리한 정여립(1546∼1589) 사건이다.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다.
이 옥사로 1000여 명의 동인계 선비가 처형되거나 유배됐다.
기축옥사의 최종 책임자는 임금인 선조였다. 선조의 내락,혹은 지시에 의해 수사책임자 정철이 집행했다. 하지만 선조는 나중에 사림의 반발을 우려, 정철이 모든 것을 집행한 것으로 둘러씌웠다.
기축옥사 때 동인이었던 광산이씨 이발(李潑,1544~1589, 선조 때 대사간 역임, 고문 중 사망) 가문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이발 가문은 9대가 연속으로 과거급제를 해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기축옥사를 피해가지 못했다.
5.정철은 세자 책봉과 관련된 '건저의(建儲議, 세자를 세우는 논의)' 문제로 ‘폭삭 망하는 길’로 갔다.
건저의는 선조의 의중과 달리 정철이 후궁(공빈김씨,1553~1577)의 아들인 광해군(1575~1608)을 세자로 책봉해 줄 것을 건의한 일이다.
선조는 건저의에 반대, 정철을 삭탈관작 (削奪官爵,관직을 빼앗고 선비 명부서 삭제)하고 유배형에 처한다.
기축옥사 등에서 정철을 앞세웠던 선조는 “음흉한 성혼(成渾,1535~1598)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고 자신의 죄를 전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헌(趙憲,1544~1592,선조때 문신이자 의병장)은 “오로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강개한 곧은 말만 하기 때문에 백관들이 두려워 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조선 중기 예학의 대가 김장생(金長生,1548~1631,우암 송시열 등 제자 양성)도 “정철은 군자”라며 “그를 비난한 자는 소인”이라고 말했다.
6.지나친 음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던 정철의 말년은 비참했다.
임진,정유 왜란(1592~1598)을 맞아 관계에 복귀해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갔으나 소기의 성과(명의 지원 등)를 달성하지 못해 동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사직했다.
강화도 송정촌(松亭村, 현 인천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에 우거(寓居,어렵게 사는 것)하다가 58세로 별세, 고양군(현 경기 고양시) 원당면에 안장됐다.
이후 현종 6년(1665)에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 등이 나서서 충청도 진천 어은골에 이장할 묘지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했다. 현재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에 있는 정송강사(鄭松江祠)다.
주요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 이외에도 100여 수 이상의 시조가 있다. 담양 창평(昌平)의 송강서원, 연일(영일)군(현 포항시)의 오천(烏川)서원에 배향(配享)됐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