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심장-빅토리아 시대 제국주의 본성을 파헤친 걸작의 첫 문단은 촘촘하고 깔끔한 문체로 서두를 연다

제1장 "쌍돛대 유람선 넬리호는 돛을 전혀 펄럭이지 않은 채 닻 쪽으로 움직이다가 정지했다. 이미 밀물이 들어와 있었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는데 배는 하류쪽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므로 정박한 후 조수가 바뀌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로 통하는 템즈강의 직선 수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물길의 시작점처럼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앞바다에서 바다와 하늘은 이음매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 빛나는 공간속에서 조수를 따라 흘러온 바지선들의 그을린 돛은 니스칠을 한 스프리트를 반짝이며 뾰족하게 솟은 붉은 캔버스 천의 무리를 이룬 채 정지해 있는 듯 보였다. 안개가 깔린 낮은 강기슭은 바다로 평평히 뻗어가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레이브젠드 상공의 대기는 어두웠고, 훨씬 더 뒤쪽에서 애절한 어둠으로 응축되어 지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도시를 가만히 뒤덮고 있었다. 여러 회사의 중역인 남자가---." (조지프 콘래드 저/황유원 역 휴머니스트 2024)

1.숨막히도록 정밀한 묘사가 이어지는 도입부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깊이있고 촘촘한 문장들이다.번역임에도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묘사마저 깔끔해 원문의 스마트한 문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돛과 닻의 큰 차이를 가볍게 설명하면서 광명세상(돛)과 어둠의 심연(닻)을 은유하고 있다. 또 영국 런던 템즈강의 직선수로(물길) 묘사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1837~1901, 빅토리아 여왕-1819~1901,치세기간) 대영제국(British Empire,17~20세기 초)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바다와 하늘의 이음매, 애절한 어둠 등은 앞으로 나올 거대 서사를 암시한다. 알수 없는 내레이터의 정밀한 묘사 속 이야기가 막 시작하려는 도입부다. 깔끔한 문체 연습에 알맞는 첫 문단이다. 본문에 나오는 *.조수(潮水)는 밀물과 썰물 *.템즈강(River Thames)은 영국 런던 시내를 관통해 북해(영불해협)로 흐르는 강 *.바지(barge)선은 강과 운하,연해안 등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배 *.스프리트는 돛을 펴는데 쓰는 작고 둥근 나무 *.그레이브젠드(Gravesend)는 잉글랜드 켄트주 템즈강 하구의 끝 도시를 말한다.

2.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 1899)'은 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한 걸작으로 20세기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작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본성을 파헤친 걸작으로 영어권 국가 중고등 과정의 필독서 중 하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Francis Ford Coppola, 1938~현재)의 1979년 영화 '아포칼립스 나우(Apocalypse Now, 지옥의 묵시록(1981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원작이다.소설은 원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출판인 윌리엄 블랙우드(William Blackwood, 1776~1834)의 출판사 윌리암 블랙우드앤선스가 발행하던 잡지 블랙우드 매거진(Blackwood's Magazine, 1817년 창간, 1980년 폐간) 1899년 2월 호에 처음 선보였다. 이어 2부와 3부가 같은 잡지 3월과 4월호에 실렸다.이후 출판사 윌리엄 블랙우드 앤 선즈가 1902년 11월13일에 출판한 '청춘-서사, 그리고 두 가지 다른 이야기(Youth-a Narrative, and Two Other Stories)'에 묶여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소설은 대영제국의 황금기인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 말에 나오면서 평단과 독자 모두에 주목받지 못했다. 제국주의를 정면 비판한 사실상 반체제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Alexandrina Victoria, 1819~1901)의 치세 기간으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라는 말을 들었던 때다.
소설은 1998년 미국 기반 글로벌 출판사 랜덤하우스의 모회사인 현대도서관(Modern Library)이 선정한 '20세기 영어로 된 100대 소설'에서 67위에 올랐고, 미국 잡지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에 들어갔다. 이밖에 미국 대학위원회 선정 'SAT' 추천도서에도 들었다.

3.소설 '어둠의 심장'은 대영제국 황금기에 문명사회와 제국주의의 잔혹과 병폐를 꼬집은 대작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 도시(런던)와 원시의 세계인 아프리카 콩고(19세기중반~1908 벨기에 왕 레오폴 2세 사유지,1960년 독립)의 어둠의 장소를 대비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 인종차별 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가 소설을 쓴 동기는 1890년 32세의 나이에 벨기에 무역 회사에 취직, 증기선에 근무한 것이 작용했다.아프리카 서부 바다에서 콩고 강을 오르내리는 무역선이었는데 선장이 아파 누우면서 저자가 선장 대리로서 배를 지휘했다. 저자는 이런 경험을 하고 영국으로 귀국한 지 8년 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핵심 등장인물은 증기선을 지휘하는 찰스 말로( Charles Marlow), 아프리카의 상아 무역상이자 교역소장 커츠(Kurtz)이다.

5. 줄거리는 아프리카 탐험을 꿈꾸던 찰스 말로가 친지의 도움으로 무역 회사에 취직, 콩고 강을 운항하는 증기선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벌이진 이야기다. 말로는 상아(象牙, 코끼리 뿔) 무역상 커츠라는 인물을 만나기 위해 원시 세계 콩고 내륙 깊숙이 들어간다. 아프리카 상아교역소장으로 일하는 커츠는 원주민에게서 상아를 엄청나게 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말로는 커츠를 만나러 교역소로 향하던 중 원주민들에게 공격을 당한다. 이는 자신의 신분 노출에 따른 고국 소환을 염려한 커츠가 원주민을 시켜서 벌인 일이었다.
결국 커츠를 만난 말로는 유럽 출신 지식인이 정글에서 신처럼 군림하며 잔혹하게 변하는 모습에 놀란다. 이뿐만 아니라 커츠를 만나러 가는 여정 내내 제국주의의 가혹한 착취, 토착 아프리카인에 대한 잔혹, 인간의 잔인함과 광기의 심연,문명과 야만,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진실 등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6.소설은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2)의 "통찰의 순간들로 가득하다"는 호평 등 극히 일부 문인들의 찬사 외에는 출판이후 50여년 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 호평을 받으면서 1960년대 초부터 많은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영문학 수업 교재로 활용했다.
미국 유명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 1930~2019, 전 예일대 교수)은 "많은 대학에서 연구되는 다른 어떤 문학 작품보다 더 많이 분석되었다"며 "모호함에 대한 독특한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철학자 필립 라쿠에-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 1940~2007)는 "서양 문학의 가장 위대한 텍스트 중 하나" 라며 "(제국주의 광기에 물든)공포스런 서양문화에 대한 성찰"이라고 호평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 1930~2013)가 '식민지 이후 연구'에서 비판해 논란이 됐다. 치누아 아체베는 1975년 공개 강연 '아프리카의 이미지-콘래드의 어둠의 심장에 나타난 인종주의'를 통해 "인종에 대한 공격적이고 비참한 책"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유럽의 비평가들은 "아체베의 비판은 (주인공) 말로의 관점과 (저자)콘라드의 관점을 구별하지 못해서 나온 서투른 헤석"이라고 반박했다.
프랑스 태생의 영국 언론인, 작가 에드먼드 딘 모렐( Edmund Dene Morel, 1873~1924)는 "식민지의 잔혹함이라는 주제에 대해 쓰인 가장 강력한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또 미국의 전기 작가이자 문학, 예술, 영화 평론가 제프리 마이어스(Jeffrey Meyers, 1939~현재)는 "르네상스에서 1차 세계 대전까지 유럽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문명진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라며 " 식민주의의 위선적 정당화를 공격하고,. 아프리카에서 백인의 야만적 굴욕을 폭로했다"고 지적했다.

9. 소설은 이탈리아 출신 영화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1938~현재)의 1979년 영화 '아포칼립스 나우(Apocalypse Now, 현대의 묵시록-한국에서 일본어 地獄の黙示録를 그대로 번역해 '지옥의 묵시록', 1991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로 일약 유명세를 탔다. 미국 유명 시나리오 작가 존 밀리어스(John Frederick Milius, 1944~현재)가 각색하고, 명배우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1924~2004), 마틴 신(Martin Sheen, 1940~현재) 등이 열연했다.
미국 연극 프로듀서이자 영화감독 조지 오슨 웰스(George Orson Welles, 1915~1985)은 1938년 CBS 라디오 방송 용으로 각색한데 이어 1939년 영화사 RKO Pictures의 영화로 각색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영화로 만들지 못했다.
오페라는 2011년 영국 작곡가 타릭 오레건(Tarik Hamilton O'Regan, 1978~현재)이 대본가 톰 필립스와 합작,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린버리 극장에서 초연했다. 한편 미국 출신이지만 영국에 정착한 Tㆍ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988~1965)은 1925년 시 '휑한 사람들(The Hollow Men)' 첫 번째 서문에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에 나오는 '미스터 커츠, 히 데드(Mistah Kurtz – he dead)'를 인용한다. 엘리엇은 '황무지(The Waste Land)의 서문으로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미국 시인이자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가 반대해 쓰지 않았다.
소설은 한국에서 다양한 제목으로 번역됐다. 을유문화사판은 '어둠의 심연'으로, 민음사판은 '암흑의 핵심', 휴머니스트 판은 '어둠의 심장', 문예출판사 '어둠의 속', 큰글판출판사 '암흑의 오지' 등으로 번역했다.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폴란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로 20세기 영국 소설 개척자. 영국 제국 절정의 시대(빅토리아 여왕 치세기,1837~1901) 영어권 최고의 작가 중 한 명. 본명은 유제프 테오도르 콘라트 코제니오프스키(Józef Teodor Konrad Korzeniowski)이다.
1.폴란드의 러시아 제국 식민지 시절 베르디체프(현 우크라이나 베르디치우)에서 폴란드 독립투사이자 문필가(시인·극작가·번역가)인 아버지 아폴로 코제니오프스키(Apollo Korzeniowski, 1820~1869)와 에바 보브로프스카(Ewa Bobrowska, ?~1865)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유아기 폴란드어로 교육받았지만 프랑스어와 영어도 배웠다. 양친은 모두 폴란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정치범으로 체포됐다. 어머니는 8살때인 1865년 수감과 유배 생활 도중 얻은 병(결핵)으로 사망한다. 가족은 1869년 2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 크라쿠프(1596년까지 폴란드의 수도)로 이사했는데, 5월에 아버지도 사망한다.12살에 양친을 잃은 것이다.
고아 콘래드를 키운 이는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 타데우시 보브로프스키(Bobrowski, 1829~1894)였다. 외삼촌은 콘래드를 헌신적으로 키우고, 도왔다. 나중에 콘래드는 작가로 데뷔한 후 "외삼촌의 헌신, 배려, 영향력 덕분에 성장했다" 고 말했다.

2.고아 콘래드는 16살에 선원이 되기 위해 프랑스 마르세유로 갔고, 수습 선원으로 마르세유와 코르시카 등에서 4년을 보냈다. 그런데 선원으로 일하면서 영어공부와 함께 도박과 사교 생활에 돈을 탕진, 1878년 초 권총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콘래드는 자살 소동 후인 1878년 4월 영국 상선에 취직하고, 1880년과 1884년 이등항해사와 일등항해사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영어에 익숙해진 콘래드는 1886년 8월 영국으로 귀화하고, 11월에 일반선장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후 1890년 벨기에의 식민지(레오폴 왕 사유지)였던 콩고 자유국의 콩고 강 상류 지역 무역을 독점한 회사에 고용된다. 이 때의 경험이 소설 '어둠의 심장'을 쓰는 계기로 작용한다.

3.콘래드가 작가로 데뷔한 것은 1895년이다. 선원생활로 기초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돈을 확보한 콘래드는 1894년 1월 36세의 나이에 선원의 삶을 마감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글쓰기 공부에 매진한다. 이름도 조지프 콘래드로 개명한다. 그리고 1895년 4월 첫 소설 '올메이어의 어리석은 행동(Almayer's Folly)'을 런던출판사 T.피셔언윈(T. Fisher Unwin, 1882년 설립)에서 낸다. 조지프 콘라드라는 이름으로 낸 이 소설은 숨겨진 금광을 찾아 부자를 꿈꾸는 네덜란드 식민지 보르네오에 사는 가난한 상인에 대한 이야기다.
이 첫 소설에 대해 문학 평론가 에드워드 윌리엄 가넷(Edward William Garnett, 1868~1937)은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콘라드의)영어가 출판에 충분히 좋은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가넷의 아내로 러시아 문학 번역으로 유명한 콘스턴스 클라라 블랙(Constance black, 1861~1946) 은 "(오히려)외국인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장점"이라고 말했다.

4. 콘라드의 첫 뮤즈는 1888년 인도양의 모리셔스에 있을 때 해운 대리인의 딸 앨리스 쇼(당시 17세)였다. 하지만 짝사랑으로 끝났다. 이후 프랑스 상선의 옛 친구인 가브리엘 르노프(Gabriel Renouf) 선장의 처남 가족들과 지냈다. 이때 르노프의 26세의 여동생 유제니(Eugenie)에게 청혼했으나 실패했다.
1896년 3월 콘라드는 16살 연하의 노동자 계층의 딸 제시 조지(Jessie George, 1873~1936)와 결혼했다. 둘은 보리스와 존일(John ill)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아내 제시는 콘라드 지인들에게 하층민이라고 천대받았지만 콘라드는 '솔직하고 헌신적이며 매우 유능한 동반자'를 사랑했다. 제시는 1923년 요리책 작은 가정을 위한 요리 핸드북(A Handbook of Cookery for a Small Hous)도 냈다. 콘라드는 서문에서 "일상 생활에 필요한 간단한 음식을 양심적으로 준비하는 것, 쓸데없는 잔치나 희귀한 요리를 섞어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칭찬했다.

5.콘라드는 여러편의 소설과 다양한 글을 기고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 무렵에는 연간 100파운드의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이에 소설가이자 변호사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 1867~1933, 193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대표작 포사이트 사가, Forsyte Saga) 등에게서 대출을 받아 생활하기도 했다. 콘라드 가정에 재정적 숨통이 트인 것은 1913년에 '기회(Chance)'가 출판되면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후였다.
우울증이 있던 콘라드는 1910년과 1919년 사이 영국 시골 집과 폴란드 등을 여행하며 살았다.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우울증 해소에 노력했다. 1914년 요제프 레팅거의 권유로 고향 폴란드로 휴가를 갔는데 크라쿠프에 도착한 날 하필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산악 휴양 도시인 자코파네(Zakopane, 폴란드 남부 타트라 산맥 기슭 포드할레 남부도시) 에서 사촌 아니엘라 자고르스카(Aniela Zagórska, 1881~1943, 폴란드 번역가)가 운영하는 Konstantynówka 펜션 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콘라드는 수많은 폴란드 인들을 만났는데 그를 꾸짖는 이도 있었다. 노벨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 등 노벨상을 두 번 받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1867~1934,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자)의 주치의인 언니 브로니스와바 드우스카(Bronisława Dłuska, 1865~1939)로 콘라드에 대해 "식민지 고국의 미래를 개선하는 것 이외의 목적에 뛰어난 재능을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콘라드는 폴란드어로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지만 폴란드인의 정체성은 매우 강하게 유지했다. 평생 고향 폴란드의 가족, 지인들과 교류했고, 폴란드의 정세에 대해서도 많은 발언을 했다. 1924년 6월 사망 직전에는 아들 존이 폴란드 소녀와 결혼, 폴란드어를 배우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또 독립된 폴란드로 영구 귀국한다는 생각도 했으나 건강 악화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6.콘라드는 조실부모(早失父母)영향으로 평생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이 나빠 고생했다. 1891년부터는 통풍, 오른팔 신경통, 반복적인 발작 등으로 병원 입원이 잦았다. 그렇치만 다양한 건강관리와 요양으로 버텄다. 건강이 괜찮은 1923년에는 독자층이 많은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24년 4월 노동당 총리 제임스 램지 맥도날드 ( James Ramsay MacDonald,1866~1937)가 제안한 영국 기사 작위를 거부했다.

1924년 8월 3일 콘라드는 영국 켄트 주 비숍스본 집(오스월드)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일어나지 못했다.향년 67세. 유해는 '조셉 테아도르 콘라드 코르제니오프스키(이름 철자 잘못)'라는 이름으로 켄트주 캔터베리의 캔터베리 묘지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마지막 완성 소설 '인 로버'의 서문에 쓴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3~1599)의 '요정 여왕(The Faerie Queene,1590)'에 나오는 글이 새겨졌다."장난감을 즐긴 후의 잠,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떠난 후의 항구, 전쟁을 겪은 후의 편안함, 삶을 마친 후의 죽음은 참으로 큰 기쁨이다" 한편 콘라드의 아내 제시는 12년 후인 1936년 12월 6일에 사망했고, 콘라드의 묘원에 함께 묻혔다. 이 무덤은 1996년 2등급 건축물 로 지정됐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둠의 심연(1899)', '로드 짐(1900)', '노스트로모(1904)', '서구인의 눈으로(1911)' 등이 있다.

7.후대 많은 작가들이 콘라드의 글쓰기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콘라드는 특히 미국에서 많은 호감적인 독자층을 확보했습니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풍자작가 헨리 루이스 멘켄(Henry Louis Mencken, 1880~1956)은 '특정에서 일반을 끌어내는 방법'을 알아본 가장 초기 미국 작가였다. 미국 유명작가로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1925)' 의 저자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는 콘라드의 글쓰기를 많이 모방한 작가 중 한명이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헨리 루이스 멘켄에게 "콘라드를 모방한 사람들의 목록에서 빠졌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나중에 '소리와 분노(The Sound and the Fury, 1929)'의 저자 윌리엄 커스버트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1962, 1949 노벨문학상 수상자), 미국 소설가이자 화가 윌리엄 슈워드 버로스 2세(William Seward Burroughs II, 1914~1997), 소설가 솔 벨로(Saul Bellow, 1915~2005, 197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소설가 필립 밀턴 로스(Philip Milton Roth, 1933~2018),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조안 디디 언( Joan Didion, 1934~ 2021, 뉴저널리즘선구자), 은둔의 소설가 토머스 러글스 핀천 주니어(Thomas Ruggles Pynchon Jr. 1937~현재) 등도 '콘라드에게 빚을 졌다'고 인정했다 .

8.콘라드를 기념하는 곳은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해군 순양함 다나에(HMS Danae)허는 콘라드(ORP Conrad)로 명명, 폴란드 해군의 일부로 운용했다. 폴란드 발트해 연안 항구도시 그디니아에는 콘라드 부조와 닻 모양 기념물이 있다. 호주 시드니의 서큘러 키(Circular Quay)의 '작가의 산책로'에는 1879년과 1892년 콘라드의 호주 방문을 기념하는 패를 설치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콜럼버스 거리와 비치스트리트 사이의 작은 광장은 1979년 콘라드 광장(Joseph Conrad Square)으로 명명했다.싱가포르의 라플스호텔(Raffles Hotel)은 콘라드가 그곳에 묵지 않았음(실제는 근처 선원의 집,Sailors' Home)에도 그곳에 머물렀다는 기념표식을 세웠다.

역사가이자 시인인 헨리 존 뉴볼트(Henry John Newbolt, 1862~1938)는 1903년 콘라드를 만났을 때 초상화를 그렸다. 1912년 10월 콘라드를 만난 미국 음악 평론가 제임스 휴네커(James Huneker, 1857~1921)는 "선원도 소설가도 아닌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 진심으로 환영하는 순진한 신사"라고 나중에 회상했다. 1913년 9월 콘라드를 방문한 후 영국 수학자이자 철학자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제3대 러셀 백작(1872~1970)은 "손끝까지 귀족적인 폴란드 신사"라며 놀라운 만남이었다고 자서전(1968)에 회고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