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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서구 모든 문화 텍스트의 원전은 뮤즈(여신) 호출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9. 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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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마음을 알았으며/바다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전우들을 귀향시키려다/마음속으로 숱한 고통을 당했습니다/그토록 애썼건만 그는 전우들을 구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못된 짓으로 말미암아/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보들이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 떼를 잡아먹은 탓에 헬리오스 신이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여신이여, 제우스의 따님이여, 우리에게도 들려주소서!”(호메로스 저, 천병희 역, 숲, 2015)

그리스 신화의 서사시 무사(뮤즈)인 칼리오페(Calliope) 조각상. 아름다운 목소리란 뜻의 칼리오페는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 딸)의 딸로 호메로스에게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영감을 준 대표적인 무사다. 2세기 제작품으로 이탈리아 티볼리 근처 카시우스 별장 소장.photo by wikipedia

1.영웅 서사 구전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영신(迎神, 신을 맞이하는 것)의 특징이 나타나는 도입부다. 호메로스의  또다른 서사시 일리아스처럼 뮤즈 호출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한 전쟁이 끝난 뒤의 후일담을 노래하면서 책임 소재를 묻고, 상징과 은유를 통해 주인공이 왜 귀향을 못하고 있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구전 서사시답게 뛰어난 운율을 자랑한다. 첫 문단의 내레이터가 또다른 내레이터를 불러내는 역할을 해 대형 서사가 있을 것을 암시한다. 본문에 나오는 *무사(Musae)여신(뮤즈,Muse)은 제우스의 딸로 시가(詩歌,시와 음악)의 여신이다. *신성한 도시는 트로이아(트로이)를 뜻한다. ‘신성한’을 쓴 것은 인간이 아닌 신,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트로이아 성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휘페리온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별명이다.

2.호메로스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오디세이아(Odysseia, BC 700년 전후)’는 고대 그리스 구전 서사시의 원형이자 서양 문화의 원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모험담이기도 하다.
오디세이아(고대 그리스어 Οδύσσεια)는 '오디세우스(Odysseus, 미움받은 자)의 노래'라는 뜻을 갖고 있다. 로마명으로는 '율리시즈(Ulysses)'다. 총 1만2110행에 달하는 서사시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시대부터 24권 본(그리스 알파벳(24) 순서)으로 통용되고 있다. 호메로스의 저작으로 알려진 다른 서사시 ‘일리아스(Ilias)’보다 약간 늦게 나온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 운율인 6각운(Hexmater 헥사메터)으로 쓰여졌다. 6각운은 한 줄이 6개의 운율 피트로 구성된 시의 한 형태다.
유럽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유명한 서사시이지만 첫 영어 번역본은 16세기에 나왔다. 공식 출판된 것은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 조지 채프먼(George Chapman,1559?~1634)의 1616년 번역본 ‘오디세이(Odyssey)이다.

영국 런던에서 18세기에 발간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오페라 대본. 첫 장 왼쪽에 호메로스 흉상을 배치했다.photo by wikipedia

3.신화와 인간의 시대가 겹친 시기의 서사시여서 수많은 인간과 신이 활약한다. 내용은 트로이아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해상 표류와 그에 얽힌 모험담이다. 그리스-트로이 간 전쟁이후 귀국담, 이른바 로드 스토리다. 그래서 ‘집으로 가느길(Home coming)’에 ‘표류(방황,Wandering)’하고, ‘우정(Guest-friendship)’을 나누고, ‘시험(Testing)’당하고, ‘징조(조짐, Omens)’가  나타나고.$ 등으로 전개된다.
이중 내레이터 형식도 보인다. 내레이터 속의 내레이터, 내레이터 속의 주인공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겹쳐서 전개되기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칼립소(Calypso, 은폐 뜻)의 섬에 있는 오디세우스, 그리고 오디세우스와 파이아키아인의 만남 등에서 나타난다.

4.학자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수메르(BC4500년경 ~1900년경)의 도시 우루크(메소포타미아의 도시)의 왕의 노래인 ‘길가메시(Gilgamesh)’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야기는 달라도 전개와 구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길가는 늙은이,조상을 뜻하고,메시는 젊은이, 영웅을 뜻한다.
그리스 서쪽지역 이타카(Ithaca)의 영주, 트로이 전쟁의 영웅, 트로이 목마의 고안자인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5권부터 나온다. 4권까지는 주인공이 없는 동안의 오디세우스의 저택 모습 등이 그려진다.

오디세우스(가운데)와 아들 텔레마코스(창을 찌르는 이)가 페넬로페를 괴롭힌 구혼자들을 죽이는 모습. 프랑스 화가 토마스 디조르지(Thomas Degeorge,1786~1854)가 1812년에 그린 작품. photo by wikipedia

5권에서 절해고도(絶海孤島,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의 님프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13∼24권은 오디세우스의 귀국과 아내에게 구혼한 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다.

5.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해 귀로(歸路)에 오른 영웅 오디세우스는 표류한다. 포세이돈 등 신들의 노여움(포세이돈 아들 폴리페모스를 장님으로 만든 죄, 신이 쌓은 성벽을 파괴한 죄 등)을 샀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10년간의 전쟁 후 12번의 모험과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 종결 10년 후에야 고향 이타카에 단신 도착한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궁을 떠난 지 20년이 된 만큼 이타카에서는 국왕 오디세우스의 소식을 모른다.

스위스 화가 찰스 글리에(Marc Gabriel Charles Gleyre, 1806~1874)가 그린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Nausicaa, 스케리아 섬의 왕 알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는 오디세우스를 구해준다.photo by wikipedia

이타카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아들과 정절을 지키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다. 귀족들(여러명의 구혼자)은 오디세우스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 페넬로페와 결혼해 재산을 가로채려고 한다.
페넬로페는 꾀를 부려서 시간을 벌지만 한계에 다다르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백방으로 다니지만 못찾고 이타카로 돌아온다.
천신만고 끝에 이타카에 상륙한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 돼지를 키우는 옛 부하 에우마이오스의 허물어져가는 집에 숨어서 텔레마코스와 만나고, 계략을 세운다.
이후 거지로 분장해 궁으로 들어간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가 제안한 화살 경기에서 승리한다. 궁을 난장판으로 만든 귀족 구혼자들의 허점을 찔러서 대부분을 죽인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 라에르테스와도 재회한다.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 에우메우스(오른쪽)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왼쪽)을 죽이는 것을 묘사한 기원전 330년 쯤의 벨 크라테르(bell-krater,종을 칠수 있는 병).photo by wikipedia

6.학자들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BC 322) 시대에 ‘오디세이아’에 대해 대해 논평과 저자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으로 주장한다. 또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편집과 논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중세 시대 비잔틴 제국에서 학교 교과서로 널리 사용됐다. 그리스 테살로니카의 비잔틴 그리스 학자이자 대주교인 유스타티오스(Eustathius of Thessalonica, 1115~1195)는 일리아드(중세 종이 4000장)와 오디세이아(2000장)에 대해 긴 논평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오디세이아의 첫 번째 인쇄본(현재까지 발견 기준)은 15세기 말 밀라노에서 나왔다. 아테네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 한 그리스 학자 데메트리오스 찰코콘딜레스(Demetrios Chalkokondyles, 1423~1511)에 의해 1488년에 제작됐다.
그리스 문화부는 2018년 7월 남부 펠로폰네소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 근처에서 오디세이아의 14번째 책에서 나온 13개의 구절이 있는 점토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아테나를 그린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보타니(Giuseppe Bottani, 1717~1784)의 그림.photo by wikipedia

7.16세기 조지 채프먼(George Chapman)이후 인기를 끈 오디세이아 영어 번역본은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판본이다.
포프는 1715년 ‘일리아스(Iliad)’의 1~4권을 포함하는 첫 권을 출간한후 1720년 6권으로 완결했다. ‘오디세이아(Odyssey)’는 1~3권을 1725년, 4~5권은 1726년 잉글랜드 학자이자 시인 윌리엄 브룸(William Broome,1689~1745), 아일랜드 출신 시인 엘리아 펜턴(Elijah Fenton, 1683~1730)과 공동 번역했다.
포프는 두 번역으로 당시로는 거금 1만 파운드를 벌었다. 포프가 “호메로스 덕분에 살아 있는 어떤 군주나 귀족에게 빚지지 않고 생활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8.오디세이아는 전쟁과 표류 모험담의 원형이다. 서구의 명작 대부분은 오디세이아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대 유명작품의 단골 소재로 활용됐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70~BC19)는 서사시 ‘아에네이스(Aeneid, BC 30년 전후)’에서 오디세이아를 원용했다. 아랍의 이야기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 千一夜話)’에는 오디세우스의 모험 이야기가 ‘신밧드 이야기’로 변용해 등장했다.
중세의 암흑을 깬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명작 ‘신곡(La Divina Comedia, 神曲, 원제 'La Comedia,희극, 1321년 완성)’의 지옥편 여덟 번째 원에서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만난다.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의 모더니스트 소설 ‘율리시스(Ulysses, 1922년 파리 출간)’는 오디세이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Eleanor Atwood, 1939~현재, 소설 ‘눈먼 암살자’ 저자)는 오디세이아의 일부를 소설 ‘페넬로피아드(2005)’로 내놓았다.

세리아 섬으로 표류해 그곳을 다스리는 알키니우스 궁정 연회에 참석한 오디세우스가 눈먼 음유시인 데모도쿠스가 하프 연주와 함께 트로이에서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활약에 대해 노래하자 울고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 화가 프란체스코 하이에즈(Francesco Hayez,1791~1881)의 1813~1815년 사이 작품. photo by wikipedia

이밖에 미국 시인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Ezra Loomis Pound, 1885~1972)의 ‘시편(The Cantos,1970)’,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마의 산(Der Zauberberg, 1924)’ 등도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9.영화와 오페라 등 수많은 예술작품의 텍스트 역할을 했다. 첫 영화는 주세페 데 리구오로 (Giuseppe De Liguoro,1869~1944) 감독의 이탈리아 무성 영화 ‘로디세아(L' Odissea, 1911)’로 나왔다.
이탈리아에서 마리오 카메리니 감독의 ‘율리시스(Ulysses, 1954)’로 나왔다. 커크 더글러스(Kirk Douglas, 1916~2020)가 율리시스로 나왔다. 이탈리아에서 1968년 로딧세이아(L'Odissea)로 TV 미니 시리즈로 나왔다. 그해 RAI(이탈리아 국영 TV)에서 방송됐다.
1956년에는 미국에서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 1914~2005) 감독의 ‘트로이의 헬렌(Helen Of Troy,)’이 나왔고, 1971년에는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 미할리스 카코지아니스(Mihalis Kakogiannis, 1922~2011)의 ‘트로이의 여인들(The Trojan Women)’도 제작됐다.

2004년 제작된 볼프강 페터슨 감독 영화 '트로이'의 스틸컷. 헥토르(왼쪽),파리스(가운데)와 헬렌의 모습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독일 출신 미국 영화감독 볼프강 페터슨(Wolfgang Petersen, 1941~2022)이 브래드 피트(Brad Pitt, 1963)를 주연으로 내세워 ‘트로이(Troy, 2004)’로 제작했다. 2017년에는 튀르키예 출신 영화감독 테킨 기르진(Tekin Girgin)이 ‘트로이 그레이트 워(Troy the Odyssey)’를 내놓았다.
오페라는 1640년에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처음 공연됐다. 클라우디오 몬테 베르디(Claudio Giovanni Antonio Monteverdi, 1567~1643)의 오페라 ‘파트리아의 오디세우스의 귀환(OdysseyIl ritorno d' Ulisse)’이다.
독일 작곡가 롤프 리엠(Rolf Riehm, 1937~현재)은 2014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에서 ‘Sirenen & Bilder des Begehrens und des Vernichtens (Sirens & Images of Desire and Destruction)’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2018년 영국 BBC문화의 전 세계 전문가 대상 ‘가장 오래가는 이야기’ 여론조사 결과 오디세이아가 1위를 차지했다.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는 호메로스 흉상. 기원전 2세기 제작된 것을 로마시대에 다시 복제한 것으로 추정. 이탈리아 나폴리 만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대 로마 도시 바이에(Baia) 출토. photo by wikipedia

#.호메로스(Homeros, BC 800년 전후)=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가. 트로이 전쟁에 관한 구전을 노래한 가객(歌客), 이른바 음유시인(吟遊詩人)이다. 영어로는 ‘Homer’로 쓴다. 다만 정확한 생몰 년대가 미상이고,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1.출생과 사망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의 저자로 논란이 있지만 그리스 시인이다. 가장 널리 퍼진 기록은 튀르키예의 중부 해안 아나톨리아(Anatolia, Türkiye Cumhuriyeti) 지역에 사는 이오니아(Ionia,에게해 동부) 출신의 장님 음유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또 에피카스테(Epikaste, 이오카스테, 네스토르의 딸)와 텔레마코스(Telemachos, 멀리 떨어져 있는 싸움꾼의 뜻, 오디세우스의 아들)가 호메로스의 부모였다는 설도 있다.

프랑스 화가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William-Adolphe Bouguereau,1825~1905)의 1874년작'호메로스와 안내 소년'. 호메로스가 시각장애인으로 표현됐다.photo by wikipedia

2.실존 인물 논쟁은 고대 그리스 시절인 BC 5세기와 BC전 4세기에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년경~BC 399)와 플라톤(Plato, BC 428년 전후~348,347) 등 당대의 그리스 학자들도 제기했다.
하지만 서양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은 저서 ‘공화국’에서 호메로스를 ‘최초의 스승’ , ‘그리스 문화의 지도자’ ,‘모든 그리스의 스승’이라고 격찬했다.
플라톤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 322)도 ‘시학(Poetica)’에서 ‘호메로스야말로 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가장 잘 안 시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한편 17세기 작가 프랑수아 헤델린(François Hédelin, 1604~1676)은 호메로스 시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가하며 “호메로스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관련 없는 구전 노래의 무능한 편집자들에 의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급하게 뒤엉켜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 천재화가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가 그린 파르나소스(1509~1510)에서 호메로스(위 왼쪽)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시각장애인으로 묘사됐다.photo by wikipedia

3.호메로스는 에게 해, 터키 서쪽 해안에 있는 섬 키오스(Khios, 그리스 키오스 주의 주도)에서 영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섬 이오스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증거가 없다.
후대에 세운 묘비명은 ‘여기 거룩한 호메로스의 머리를 흙이 덮고 있다. 그는 영웅들을 찬양한 사람이었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4.호메로스의 시들은 최초로 BC 6세기 후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BC 527년 사망)에 의해 아테네(Athens) 등에서 수집됐다고 전해진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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