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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 여행기-14세기 세계를 순례한 여행가의 첫 문단은 直筆보다 口述 흔적이 보이며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9. 2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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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카아바를 순례하고 사자(使者)-그에게 지고의 평화가 있기를-의 성묘(聖墓)를 참배하기 위해 고향 퇀자(Tanjah, 탕헤르)를 떠난 것은 725년(A.H, 양력 1325년) 7월 2일 목요일이었다. 나는 가슴 깊이 간직한 순례를 굳은 의지와 성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친한 길동무 하나없이 혈혈단신으로 장도에 올랐다. 여행길에는 대체로 무언가를 타고 다녔다. 나는 남녀노소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 마치 새가 둥지를 떠나듯 고국과 석별하였다. 그때 양친은 아직 생전이어서 나는 그분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그분들이 겪은 그 별한(別恨)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 나이는 갓 22살이었다.”(이븐 바투타 저, 정수일 역주, 창작과비평사, 2001)

200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이븐바투타 여행기' 표지 부분. 세계 두번째 완역본오로 나왔다.

1.도입부에 1인칭 시점에서 직접 쓴 것처럼 했지만 구술한 것을 옮겨 적은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시제와 장소, 떠날 때의 모습 등이 너무 가볍게 언급된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스스로 직접 썼다면 주변 상황이 상세히 묘사되고 부모, 친지들과 장중한 별리(別離)가 적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첫 문단은 여행기의 형식을 갖췄지만 2% 부족한 문장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각 문장이 비교적 자유롭게 구성됐다.이는 구술 문장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본문에 나오는 *카아바는 메카에 있는 금사(禁寺, 출입할 수 없는 신전), 즉 알라의 집이다. *사자는 알라가 보낸 사람, 즉 이슬람 시조 무함마드이다. *성묘는 성스런 묘, 즉 무함마드의 묘소다. *퇀자는 모로코 서북단 항구도시 탕헤르다. *A.H는 이슬람력(Hijri Calender)이다. 보통 라틴어로 A.H.(Anno Hijrae, in the year of the Hijra)라고 쓴다. 622년 7월16일이 히지라 원년 1월1일이다. *별한은 이별의 한스러움이다.

1836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수집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Rihla)' 필사본.photo by wikipedia

2.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리흘라, Rihla, 1360년대 중반)’는 여행문학의 영원한 고전(古典)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여행기 중 하나다. 구술(口述) 원전은 전하지 않고 필사본이 존재한다.
29년 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 10만 킬로미터를 여행한 것을 구술했는데 당시의 시인이자 명문장가인 아부 압둘라 이븐 주자이(Abu Abdullah Ibn Juzayy, ?~1355)가 기록했다.
구술 기록이 남게 된 것은 당시 탕헤르를 통치하던 마린 왕조(Marinid dynasty, 1248~1548)의 술탄 아부 아난 파리스(Abu Anan Faris, 재위 1348~1358년)의 공이 크다. 이븐 주자이에게 이븐 바투타의 여행담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븐 주자이는 알 안달루스(Al-Andalus, 현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여행가인 이븐 주바이르(1145~1217,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 아랍족 출신 여행가)의 여행기를 참고해 구술 내용을 재구성했다.
이슬람어 원제는 ‘تحفة النظار في غرائب الأمصار وعجائب الأسفار’이다. 이는 ‘도시들의 불가사의들과 여행의 경이로움을 생각하는 자를 위한 선물’로 풀이된다.
이 여행기가 ‘리흘라(الرحلة,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아랍권에서 전해왔다. 영어로는 ‘The Rihla’와 ‘he Rihla, or A Masterpiece to Those Who Contemplate the Wonders of Cities and the Marvels of Travelling’로 번역된다.

14~15세기에 그려진 이븐 바투타로 알려졌던 아라비아 순례자의 모습. 최근에는 이븐 바투타가 아닌 것으로 기울고 있다.photo by namu.wiki

3.여행기(더 리흘라)가 세상에 본격 알려지게 된 것은 독일의 아랍 여행자이자 탐험가인 울리히 야스퍼 시첸(Ulrich Jasper Seetzen, 1767~1811)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시첸은 중동 여행 중에 여행기 모음집을 입수, 공개했다.
이후 스위스 여행가이자 동양학자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Burckhardt,1784~1817)가 중동 여행 중에 ‘여행기’의 축약본을 구입, 소개했다. 또 1818년 독일 동양 학자 요한 코세가르텐(Johann Kosegarten, 1792~1860)가 다시 번역, 소개했다.
영미권에서 본격 알려진 것은 영국 동양학자인 캠브리지 대학 교수 사무엘 리(Samuel Lee,1783~1851)가 1829년 아랍어 축약판을 번역,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로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됐다.
리의 번역본이 출판된 지 100년이 지난 1929년에는 스코틀랜드 역사학자이자 동양학자인 해밀턴 깁(Hamilton Gibb, 1895~1971)가 프랑스 동양학자 샤를 데프레머리(Charles Defrémery,1822~1883)와 영국 식민지 관리자 프레드릭 산귀네티(Frederick Sanguinetti, 1847~1906) 소장 아랍어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 출판했다.
프랑스에서는 1830년 알제리를 점령했을 때 ‘여행기’를 입수,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이후 영국 학자 사무엘 리의 번역본을 참고해 1853~1858년 번역, 4권으로 출간했다. 외국어 완역본으로서는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2001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아랍어 원본을 정수일 교수가 번역, 출간했다. 이 완역은 프랑스어에 이어 한국어 번역이 세계에서 두 번째이다.

이븐 바투타 여행경로를 그린 두산백과 그래픽.자료=두산백과(www.doopedia.co.kr)

4.이븐 바투타의 장기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는 이슬람이 융성한 데다 메카로 가는 성지순례가 유행해 여행 인프라가 구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세력이 약해진 12~15세기 서구와 중동 문명 세계는 이슬람이 지배 세력의 중심이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카스피해 북부와 인도, 중국, 아프리카 내륙, 에스파냐(스페인)까지 미쳤다.
당시 주류였던 이슬람 교파의 하나인 수피즘은 성지순례와 지배 편의 등을 위해 각국 곳곳에 무슬림 숙소인 '자위야'를 설치, 운영했다.
자위야는 이슬람교 특유의 형제애로 운영되면서 일반인들도 편리하게 이용이 가능했다. 현재 리비아의 한 도시 이름 ‘자위야’로 뜻이 살아 있다.

13세기의 아라비아 상인들의 행렬인 대상(隊商) 중의 하나 모습.성지순례자들은 안전을 위해 이런 대상들의 행렬과 함께 이동했다.13세기 이라크 화가 야히야 이븐 마흐무드 알 와시티(Yahya ibn Mahmud al-Wasiti)가 1237년 쯤 압바스 왕조 시대 바스라의 화가 알 하리리(1054~1122)의 작품을 필사한 그림. photo by wikipedia

5.여행기에는 칭기즈칸 몽골의 자손 나라들인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The Golden Horde, 주치 울루스, 현 카스피해 주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동유럽 일부), 차가타이 칸국(차가타이 울루스,현 신장과 이란 일부, 아프카니스탄 등), 일 칸국(훌레구인 울루스, 현 이란 이라크 시라아 등)에 관한 이븐 바투타의 서술이 나온다. 이는 당시 체험하지 못했다면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여행기에는 이슬람화한 몽골 군주들 사이에서 여전히 칭기즈칸 신화의 중요성이 그대로 나온다. 페르시아 정주 문화와 몽골 유목 문화의 절충 문화와 관습 등이다. 거대한 몽골 제국의 황혼기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6.유명한 ‘파로스 등대’ 이야기도 나온다. 1325년 알렉산드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등대의 한 쪽 벽만 파괴돼 내부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귀향 시기인 1349년 알렉산드리아에 왔을 때는 등대가 완전히 파괴됐다고 온다.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280년 전후 완공(기원전 280~279년)된 알렉산드리아 파로스(방파제로 연결된 섬)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었다.
등대는 꼭대기에서 불을 지피고 반사렌즈를 이용했다고 한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 오르면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중해가 보이고, 등대 불빛은 40여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가 1334년 방문했던 파키스탄 펀잡 지방 팍파탄에 있는 수피신전 바바 파리드 신전. photo by wikipedia

7.여행기는 패러디와 표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븐 바투타의 구술을 이븐 주자이가 다시 정리했기 때문에 기존에 나와 있던 많은 여행기와 자료를 참고해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선 에스파냐(스페인) 발렌시아 출생 이슬람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Ibn Jubayr,1145~1217, 순례여행 중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의 ‘키난인(人)의 여행기’를 인용(표절?)했다.
또 13세기에 여행한 아미캄 엘라드(Amikam Elad)의 ‘여행기’, 1289년에 중동을 여행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아브다리(Muhammad ibn Muhammad al-Abdari)의 기록도 인용(표절?)했다.
독일 이슬람학자 랄프 엘거(Ralph Elger, 독일 할레대학교 교수)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보지만 그 내용 중의 많은 이야기는 의심한다”고 말했다.

8.당대에도 불신과 논쟁을 일으켰다.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의 법학자 아부 알바라카트 알발라피키(Abu al-Barakat al-Balafiqi, 1281년 전후~1370,혹은 72년 사망)는 “이븐 바투타는 완전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14세기 북아프리카(튀니지 출생)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도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에 술탄의 재상 파리스 이븐 와드라르(Faris ibn Wadrar)가 “쉽게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대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힐난했다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쥘 가브리엘 베르네(Jules Gabriel Verne,1828~1905)의 작품집에 실린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레옹 베네가 1800년대에 그린 이븐 바투타. photo by wikipedia

#.이븐 바투타(ابن بطوطة, Ibn Battuta, 1304~1369)=중세 모로코의 위대한 이슬람 여행가이자 탐험가. 지리학자, 법관.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라와티 앗탄지 빈 바투타(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عبد الله اللواتي الطنجي بن بطوطة)이다.

1.베르베르 무슬림 제국(Berber Muslim empire, 현재 모로코와 그 일대, 수도는 페즈) 탕헤르(옛 퇀자)의 울라마(علماء, 법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베르베르 부족의 하나인 로와타족(Lawata)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는 베르베르족인 마린 왕조(Marinid dynasty, 1248~1548) 시기였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교육기관 수니파 말리키 가운데 하나인 마드하브(madhhab, Islamic jurisprudence school, 이슬람 율법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말리키 사람들은 법학자 집안 출신의 이븐 바투타가 종교 재판관(religious judge)으로 봉사할 것을 청원했지만 순례에 들어간다.

15세기에 그려진 타브리즈의 이슬람 학교 모습.photo by wikipedia

2.스무살이 넘자 성지순례를 본격 준비 한다. 그리고 1325년 22살 때 혈혈단신으로 하지(Hajj, 연례 이슬람 순례) 대장정에 나선다.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육로로 여행했으며, 주로 안전을 위해 대상(隊商, 캐러밴)을 따라 이동했다. 이후 메카를 순례를 한 후 돌아오지 않고,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3대륙 여행에 나선다.

3.이후 30여년에 에 가까운 세월 동안 메카에서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인도 등을 거쳐 중국까지 다녀온다. 이븐 바투타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도착했을 때는 1348년이었다. 집을 떠난지 28년째였다.
당시 주변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반도 일대는 흑사병이 창궐(猖獗)했다. 아버지가 15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도 듣는다.
끝없는 죽음은 본 이븐 바투타는 고향인 모로코로 돌아가기로 결심, 뱃길을 이용해 사르데냐와 페즈를 거쳐 고향 탕헤르에 1349년 도착했다. 이때는 어머니마저 몇 개월 전에 사망한 뒤였다.

4.고향에 돌아온 이븐 바투타는 그해 말 다시 여행에 나선다. 이베리아 반도 알안달루스와 지브롤터 등을 돌았다.
1351년에 탕헤르로 돌아온 이븐 바투타는 다시 캐러밴을 꾸려 사하라 남쪽 여행에 도전한다. 이후 니제르, 말리 제국, 팀북부 등을 여행하고 1354년 초 모로코로 돌아왔다.

5.이븐 바투타는 여행 중 수많은 여자와 관계했다. 몇 명의 여성과는 공식 결혼하고, 이혼했다. 다마스쿠스, 말라바르, 델리, 부하라, 몰디브에서는 아이도 낳았다.
또 에페소스에서는 비잔티움, 코라산, 아프리카, 팔레스타인 등에서는 ‘하렘’에서 노예 소녀를 구조해 살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20년 만에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것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모로코 탕헤르에 있는 이븐 바투타의 영묘. photo by wikipedia

6.이븐 바투타는 1356년 여행기가 완료된 후 이슬람 판사로 임명된다.울법학자 율법 판사로 지내다가  마라케시에서 1368년 혹은 그 다음 해 영면했다.
1987년 미국의 역사학자 로스 E. 던(Ross E. Dunn, 샌디에고 주립대 명예교수)은 저서 ‘이븐 바투타의 모험(The Adventures of Ibn Battuta)’에서 여행기의 많은 서사에 대해 의구심을 표했다.
그런데 2010년 예멘 출신 영국 작가 팀 매킨토시 스미스(Tim Mackintosh-Smith,1961~현재)는 이집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교((Al-Azhar University) 기록보관소에서 시리아에 머문 이븐 바투타의 체류 일정을 확인했다.이후 많은 의심이 사라졌다.
인도의 정치가 자와할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1889~1964)는 딸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쓴 ‘세계사 편력’에서 이븐 바투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로 꼽았다.

모로코 탕헤르에 있는 보르장남 막사를 개조한 '이븐 바투타 기념 박물관'.photo by wikipedia

7.이븐 바투타 기념물은 다양하게 남아 있다. 모로코의 대도시 탕헤르에는 ‘탕헤르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Tangier Ibn Battouta Airport)’이 있다.
또 종합경기장 '스타드 이븐 바투타(수용인원 6만5000여 명)'가 존재한다.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이 65,000명에 달한다. 또 기념관도 만들어져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아랍에미레이트(UAE) 두바이에는 '이븐 바투타 몰( Ibn Battuta Mall) 이 있다. 구역마다 이븐바투타가 여행했던 국가들을 테마로 인테리어를 했다.(콘텐츠 프로듀서)

모로코 탕헤르에 있는 이븐 바투타 스타디움(Stade Ibn Batuta) 2018년 모습. 스페인 축구경기가 열리기도 한다.photo by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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