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필 문학의 꽃 '용재총화'의 첫 문단은 한민족 문장가 품평과 비판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권1. 1-1경술과 문장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원래 두 가지가 아니니, 육경(六經)은 모두 성인의 문장으로, 모든 사업에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 문장을 짓는 사람은 경술에 근본할 줄을 모르고, 경술에 밝은 사람은 문장을 지을 줄 모른다. 이는 습성이 편벽되어서일 뿐만 아니라 이것을 하는 사람들이 노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의 문사(文士)는 모두 시를 업으로 삼았는데, 포은(圃隱) 정몽주는 성리학을 창시했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매헌(梅軒) 권우(權遇) 두 형제가 경학에도 밝고 문장에도 능했는데, 양촌은 사서와 오경의 구결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錄)',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의 책을 지었으니, 사문에 공로가 적지 않다. 그 후 스승의 직무를 맡은 황현(黃鉉)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알려진 바가 없고, 윤상은 경술에 가장 뛰어났는데 문장을 조금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문장과 경술 모두에 뛰어났는데, 김말은 고루하고 답답함을 면치 못했다. 두사람은 평소 서로의 견해를 겨루며 우열을 다투어 그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도 둘로 나뉘었다. 두 사람 모두 세조에게 인정받아 관직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이 되었다가 연로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서 굶어 죽었다. (성현 저, 김남이 전지원 등 역, 휴머니스트, 2015)

1.경학과 문장의 현재를 설명하고, 조선 유학의 위치를 논하면서 서두를 연다. 조선 초기의 문인들의 학문적 특성과 문장가로서 성격을 풀이하면서 장단점에 칼을 된다. 당대에는 보기드물게 유학자로서 다른 유학자의 글을 비판하는 것이다. 특히 문장을 다투다 서로 나뉘어 시기 질투하는 상황까지 묘사, 후학들의 과도한 논쟁을 경계하는 이례적인 첫 문단이다. 도입부 뒷부분의 '이숭인(李崇仁,1347~1392, 고려 말 충절 문인, 이성계 세력에 척살)은 온화하지만 장대하지 못했고, 정몽주(鄭夢周,1338~1392, 고려 문하시중,이성계 세력에 척살)는 순수하지만 긴요하지 못했으며,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조선 개국공신, 이방원 세력에 척살)은 장대하지만 단속하지 못했다.'라는 문장은 후대 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문장이다.
본문에 나오는 *.경술(經術)은 유교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일 *.문장(文章)은 한 나라의 문명을 형성한 예악과 제도를 쓴 산문이다. *.육경(六經)은 중국 춘추시대 여섯 가지 경서, 즉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기(樂記) 혹은 주례(周禮). *.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과 매헌(梅軒) 권우(權遇,1363~1419)는 형제지간으로 고려말 조선초 학자이자 문신이다. *.천견록(淺見錄)은 유교 경전 주석서이다.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이 5경에 대한 천견록을 썼다. 권근은 스승 이색(李穡,1328~2396)의 유지를 받들어 천견록을 집필했다. *.입학도설(入學圖說)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이 성리학의 기본원리를 그림과 함께 풀이한 책이다. *.황현(黃鉉, 1372~?)과 윤상(尹祥, 1373~1455)은, 고려말 조선초 학자이자 문신이다. *.김구(金鉤, 1383~1462, 문종때 집현전 부제학 역임)ㆍ김말(金末, 1383~1464,세조때 판중추원사 역임)ㆍ김반(金泮, (?~?, 세종때 성균관 대사성 역임)은 조선 전기 문신이다. 이들 3인은 경서에 매우 밝아 ‘경학 삼김(經學三金)’이라 불렸다. *.구결(口訣)은 한문을 읽고 뜻을 알기위해 적어놓은 글, 입겿,현결. 현토(懸吐)와 비슷한 말이다.

2.성현의 '용재총화(慵齊叢話,1525)'는 15세기 수필문학의 정수이자 필기(筆記) 문학을 대표하는 역작이다. 한국 수필문학의 근본, 뿌리로 평가받는 작품집이다. 민속학과 구비문학(口碑文學, oral literature,말로 전해지는 이야기)은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료다. 용재(慵齊)는 저자의 호, 총화(叢話)는 모든 이야기다. 용재총화는 ‘용재 성현이 엮은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뜻이다.
글이 쓰인 시기는 1499∼1504년 연간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쓴 글을 저자 사망 21년 후인 조선 11대 국왕 중종(中宗, 1488~1544)20년인 1525년 경상도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했다. 용재총화가 책으로 엮어 활자본으로 나온 데에는 사연이 있다. 간행 주관자는 경주 부윤(府尹,종2품) 황필(黃㻶,1464~1526)이다.
황필은 과거급제 때 시험관(좌장) 성현을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에 저자의 아들이자 당시 관찰사(觀察使,종2품)였던 성세창(成世昌, 1481~1548, 명종 ㅌ때 좌의정 역임,유배지 사망)이 아버지의 글 간행을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 발문까지 써서 간행한 것이다.
현재 전하는 용재총화는 필사본 3권 3책(336편의 이야기, 서울대 규장각 소장)과 대동야승(大東野乘)본이다. 널리 통용되는 인쇄본은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낸 '대동야승'에 수록된 10권 2책이다. 대동야승은 조선초~인조 시대의 야사와 수필, 일화를 엮는 책이나 편찬자와 시기는 미상(숙종~영조 대 추정)이다.
용재총화는 서양 에세이의 아버지라 불리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의 '수상록(Essais , 隨想錄, 1580년 출판)'이나 잉글랜드의 철학자이자 정치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2)의 '수상록(The Essays or Counsels, Civil and Moral)'보다 훨씬 앞서 있다.

3.용재총화는 일제시대인 1934년 계유출판사에서 낸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 권1에 국문으로 현토(懸吐, 한문을 읽기 쉽게 토를 다는 것)해 일부가 수록돼 있다. 북한에서도 나왔다. 1957년 평양시 국립출판사에서 '대동야승 선집-용재총화'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洪命憙,1888~1968, 김일성 정권 부수상 역임)의 아들 홍기문(洪起文, 1903~1992, 북한 국어학자이자 정치인)이 한글로 번역했다.
한국에서 전문이 번역된 것은 1964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의 '국역 파한집-용재총화' 합권으로 나왔다. 1969년에는 현암사 '한국의 명저' 시리즈 일부로 냈고, 1971년에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국역 대동야승' 간행때 포함됐다. 영인본은 2000년 경산대가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발간했다.
용재총화의 저술에는 저자의 두 형 성임(成任,1421~1484)과 성간(成侃, 1427~1456)의 영향이 컸다. 두형은 경전(經典)만 추종하는 도학자(道學者, 유학 원리에 치중하는 학자)에 맞서 학문의 다양성을 탐구했다.이를 저자가 본받은 것이다. 성임은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1462, 원저자는 송나라 이방(李芳,925~996)의 '태평광기')', '태평통재(太平通載)' 엮었다.
같은 시기에 조선 최초 양관(예문관과 홍문관) 대제학(兩館 大提學, 1464)을 지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1487)',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1477)', 조선 초 문신으로 좌찬성(종1품)을 지낸 강희맹(姜希孟,1424~1483, 문인화가 강희안(姜希顔,1419~1464)의 동생)의 '촌담해이(村談解弛)', 문인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이륙(李陸,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도 영향을 줬다. 이륙은 성현의 절친이자 사돈이다.

4.용재총화는 고려~조선 9대 국왕 성종(成宗,1457~1495) 시대까지 민속과 문학를 다룬 324편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기실(記實,196편)과 골계(滑稽,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 27편), 기이(紀異, 16편), 잡론(雜論, 85편) 등으로 나눠 구성했다.
주요 내용은 도입부에 조선의 지배 학문 유학과 유학자를 논한다. 신라말 학자 최치원(崔致遠,857~908), 고려 인종때의 문신이자 시인 정지상(鄭知常,?~1135), 고려말 학자이자 문신 정몽주(鄭夢周,1338~1392) 등 신라와 고려의 명현(名賢), 고려말 조선초 문인 권근(權近,1352~1409), 조선 초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윤상(尹祥,1373~1455) 등 경학(經學)의 대가들을 품평한다. 또 15세기 관학의 대가이자 문장가 서거정(徐居正,1420~1488), 성현의 형 성임(成任,1421~1484) 등의 학문적 특성과 문장가로서 성격을 풀이한다.
신라 때부터의 명필가와 필법(筆法)도 소개한다. 신라 말 명필로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린 전설적인 서예가 김생(金生, 711~807,예서와 행서 초서의 대가), 고려 공민왕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암(李嵒,1297~1364,예서와 초서,송설체의 대가),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송설체의 대가), 문인화가 강희안(姜希顔,1419~1464) 등이다. 이어 그림의 대가로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중국 곤륜산 崑崙山의 북쪽 자락인 음산 陰山에서 노니는 큰 맹수를 그린 것)로 유명한 고려 31대 왕 공민왕(1330~1374), 조선의 화가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 소장)로 유명한 안견(安堅,생몰미상), 조선 초 인물화의 대가 최경(崔涇,생몰 미상)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음악도 이야기한다. 신라의 현금(玄琴)이나 금관국(金官國, 금관가야)의 가야금은 물론 조선 세종~ 성종때 비파 명수 송태평(宋太平, 생몰 미상)·세종때 뛰어난 악사 도선길(都善吉,생몰 미상) 등 악공, 연산군~중종 시기 거문고 명수인 기생 상림춘(上林春, 생몰미상)의 악기를 다루는 기교도 싣고 있다.

5, 용재총화는 지리와 풍속, 문벌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각 도읍의 형세는 물론 구체적으로 백운동(白雲洞, 현 종로구 청운동)· 한양 청학동(靑鶴洞-현 위치 미상) 등 명승지도 소개한다. 풍속에서 음식-잔치 음식의 가짓수와 맛의 특징, 혼례·나례(儺禮,음력 섣달그믐날 밤 악귀를 쫓기 위해 히는 의식)· 처용무(處容舞)·관화(觀火, 궁중 불꽃놀이) 등의 절차를 설명한다.
사신(使臣, 외국 사절) 접대와 의식, 사신 인물평, 과거제도, 성균관의 제도, 제사 풍습, 불교와 승려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일반 백성, 기생, 과부, 복서(卜筮, 길흉을 점치는 다양한 점복), 여진족, 심지어 탕녀(蕩女)이야기도 나온다.
당대 문벌(門閥), 인물평도 있다. 저자는 문벌 번성 1위로 광주 이씨(廣州李氏)를 꼽았다(當今門閥之盛 廣州李氏爲最)'. 인물 중에는 고려 장군 강감찬(姜邯贊, 948∼1031)에 대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지만 귀인상이라 썼다.
저자는 책 속의 '촌중비어(村中鄙語, 시골뜨기의 말)'의 머리말에 "후대 사람들에게 권계(勸戒, 타이르고 훈계)가 될 만하고 바깥세상의 일사(逸事, 기록에 빠져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일)로서 늙그막에 즐길만하여 한가한 때에 소일거리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6.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뜻하지 않은 일화도 재밌다. 고려말 이조판서를 지낸 백암거사(白巖居士) 이행(李行, 1352~1432, 여말선초 문신, 조선 출사 거부)은 물맛을 잘 알았는데 으뜸으로 충주 달천수(達川水, 속리산~충주 시내 달천~남한강)를 꼽았다. 두번째는 우중수(右中水, 금강산에서 발원해 강원도로 흘러 북한강에 이르러 한가운데로 흐르는 물),세째는 속리산 삼타수(三派水, 속리산 발원해 한강 낙동강 금강의 갈림길에 흐르는 물)를 지목했다. 그런데 가장 비싼 물(한양 기준)은 우중수였다. 백암거사 이행은 저자의 증조부 성석연(成石연, ?~1414)의 절친 문인이다.
세종의 아들로 글과 그림으로 유명한 안평대군(安平大君 李瑢, 1418~1453) 사례도 나온다. 조선에 온 중국 사신이 안평의 유명세를 듣고 글씨를 받아 갔는데, 조선 사신이 명나라에 갔다가 사온 글씨가 안평 작품이었다는 일화다. 한편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왕을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어 공을 세운 사람)이었던 마천 홍일동(洪逸童,1412?~1464,남양 홍씨 족보를 최초로 정리한 사람)의 술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홍일동은 말술이었는데 선위사(宣慰使, 외국 사신 입국때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파견하던 임시관, 정2~정3품 중 지명)로 갔다가 홍주(洪州)에서 술을 몇 말이나 마시고 죽었다.

7.용재총화에는 특이한 일도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합격해 신고식을 하는 ‘신참례(新參禮)’ 이야기인데 선배가 신참 무릎때리기(무거운 나무를 들지 못하면 선배들이 때림), 물고기잡이 놀이(연못의 물고기 잡기), 거미잡기 놀이(부엌의 거미를 잡고,씻은 물 물먹기) 등을 소개한다. 한편 신참례는 고려때 실력이 아닌 권력을 등에 업어 관직에 오른 권문세족 자제의 기강잡기, 즉 낙하산 인사를 경계하기 위해 시작됐으나 조선에 와서 변질됐다.
맹인들의 집회소인 맹청(盲廳, 조선 효종때인 1649~1659사이 공식 설치)과 맹인들의 어가(御駕,임금이 타는 가마)전송 이야기도 나온다. 용재총화는 “지금 도성 안의 남쪽 영희전(永禧, 수양대군 집, 세조로 등극하면서 역대 왕을 모신 어진전으로 변경·현 영락교회)의 뒷골목 하마비(下馬碑) 건너편에 맹청(盲廳)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가가 궁궐 밖으로 나갈 때나 돌아올 때 여러 맹인들이 으레 도포를 입고 떼를 지어 어가를 전송하고 맞으며 조사(朝士·문반), 사마(司馬·무반)와 반열을 같이 하니 해괴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용재총화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성리학을 높이고 불교를 억제)의 시대를 살아 간 저자의 유학자 한계를 벗지 못하는 내용도 있다. 조선인은 간교하고 의심이 많지만, 중국인은 순수하고 인정스러우며 의심이 적다고 쓴 것이다.민족성에 대해 모화(慕華,중국 숭상)사대 사상에 흠뻑 젖은 평가다.

#.성현(成俔, 1439~1504)=조선 초 문장가로 고려말 조선의 명문가 출신 관료. 15세기 필기(筆記) 문학과 음악 이론의 대가이다. 국악 이론서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공동 편찬자(유자광, 신말평). 호(號)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용재(慵齋) 등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1.조선 최고의 명문가인 창녕성씨 집안에서 병참판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정2품)를 지낸 성염조(成念祖,1398∼1450)와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개국공신 성석린(成石璘,1338∼1423, 태종때 영의정 역임)의 동생으로 태종 때 대사헌·대제학과 호조·형조·예조의 판서 등을 역임 성석연(成石因, ?~1414)의 증손자이자 대사헌·판한성부사·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성엄(成揜, ?~1434)의 손자이다.
두형 성임(成任, 1421~1484, 경국대전 편찬 참여)과 성간(成侃, 1427~1456)이 있다. 12세때 아버지가 사망, 가문이 위기에 처했으나 두 형의 과거 급제로 다시 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다만 둘째형은 1453년(단종 1) 문과 급제 후 전농직장(典農直長)과 수찬(修撰)을 역임했으나 4년 후 30세에 요절했다. 사육신의 한명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8촌 동생,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1752~1800)의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의 11대 조부이다.

2.성현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형들의 친구인 강희맹(姜希孟,1424~1483, 문인 화가이자 농학자, 저술가)·이승소(李承召,1422~1484, 이조판서 역임)·김수온(金守溫, 1410~1481,호조판서 역임) 등에게서 배웠다. 김수온은 1446년 발영시(拔英試, 세조가 단오를 맞아 현직 중신과 문무 백관에게 임시로 진행한 과거)와 등준시(登俊試, 세조가 1446년 7월 종친과 문신 대상 치른 과거)의 장원에 잇따라 합격, 과거급제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유래를 만든 수재다.
성현은 스물세살때인 세조8년(1462) 식년문과(式年文科), 1466년 발영시에 급제, 박사(博士)로 등용됐다. 식년문과는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들어 있는 해에 치르는 과거로 3년마다 돌아온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정7품)을 지냈다.
3. 명나라를 4번이나 다녀온 보기드문 문신이다. 맏형 성임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을 했고, 1475년에는 조선 세조 때 최고 실세 한명회(韓明澮,1415~1487, 영의정 역임, 1504년 부관침시,剖棺斬屍)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1488년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돼 평양에 머무르던 중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 1430~1502)과 왕창(王敞)을 만나 시담(詩談)을 나눴는데 이들이 탄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燕山君,1476~1506)때 공조, 예조판서, 대제학에 올랐다.
성현은 한산이씨 이숙(李塾)의 딸과 혼인, 아들 성세창(成世昌, 1481~1548, 좌의정 역임)이 있다. 손자는 승의랑(承議郞, 정6품)을 지낸 성해(成諧,생몰미상,1525년 식년시 생원 합격), 증손자로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성자제(成子濟, 1515~1573)를 뒀다

4.성현은 문인으로서는 보기드물게 음률에 뛰어나 장악원(掌樂院, 궁중의 음악과 무용 등을 맡은 관청)의 제조(提調, 업무 주간)라는 직책도 맡았다. 이런 경험으로 1493년 조선 음악의 교과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장악원 제조(掌樂院 提調) 유자광(柳子光,1439~1512, 천민 첩 사이에 태어난 얼자(孼子) 출신으로 정계를 뒤흔든 풍운아, 정1품 대광보숭정대부 역임),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 신말평(申末平, 1452~1509, 개성부 경력(실무 책임자, 종4품) 역임) 과 편찬했다.
성현은 1504년 6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유언은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되 칭찬할만한 덕이 없다. 장례는 검소하게 하고 표석이나 세우고 비는 세우지 말라”였다. 경기 파주에 안장됐다. 현재 용재성현묘역 (慵齋成俔墓域)으로 관리되고 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 '풍아록', '부휴자 담론', '주의패설(奏議稗說)', '금낭행적(錦囊行跡)', '상유비람(桑楡備覽)', '풍소궤범',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이 있다.

5.성현은 영면 몇개월 후 치욕을 당했다.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 사건 연루자 처벌) 직후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부수고 시신을 참수하는 것)당한 것이다. 대사헌 재직 시 부마(임금의 사위) 간택과 관련된 발언을 문제삼은 것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곧바로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되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됐다. 시호는 ‘문대(文戴)’다.
성현은 평생을 10가지의 원칙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천(敬天, 하늘 공경), 신독(縝獨, 혼자 있을 때 몸가짐 조심), 정심(正心,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과욕(寡慾, 욕심을 부르지 않음), 개과(改過, 과오가 있으면 고침), 지치(知恥, 수치를 안다), 수약(守約, 검소한 삶), 행간(行簡, 간단명료하게 행동), 천형(踐形, 사람다운 삶), 복례(復禮, 예를 지키는 것) 등이다. 이런 삶을 후대가 반영해서인지 중종 때 신원(伸冤)된 후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