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제왕운기-단군과 발해를 한민족사에 처음 편입한 서사시의 첫문단은 표문과 중국 신화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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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단군과 발해를 한민족사에 처음 편입한 서사시의 첫문단은 표문과 중국 신화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4. 1. 8.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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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上卷) 병서(幷序)-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신(臣) 이승휴(李承休)가 지어서 바칩니다.“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서로 계승하여 주고받으며 흥하고 망한 일은 세상을 경영하는 군자가 밝게 알지 않아서는 안 되는 바이다. 그러나 고금의 전적은 한없이 많아 끝이 없고, 앞뒤 ‘일들은’ 서로 뒤섞여 어지럽다. 만약 능히 요체를 취하여 시로 읊을 수 있다면 또한 보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삼가 옛 책을 근거하여 짓고 제자(諸子)의 서적과 사서(史書)를 채택하여 확충하였다. 지금까지 아직 책(方策,방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우선 분명하게 익히 듣고 본 것을 근거로 삼아 읊조림에 맞게 하였고, 그 선하여 본받을만 한 것과 악하여 경계로 삼을만 한 것은 모두 일마다 ‘춘추(春秋)’의 필법에 따랐다. 이름을 붙여 제왕운기라 하였으니, 모두 2370자이다. 대체로 충신과 효자가 군주와 아비를 호위한 뜻이다."
상권 첫 문단. 혼돈한 형상이 계란과 같으니. "반고(盤古)가 혼돈 속에서 태어났다네.‘삼오역기(三五曆紀)’에서 이르기를, ‘아직 하늘과 땅이 있지 않았을 때, 혼돈하여 형상이 계란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통감외기(通鑑外紀)’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혼돈하여 계란과 같은데, 반고가 그 안에서 태어나 1만8000세를 살았으니, 양(陽)은 맑아서 하늘이 되고, 음(陰)은 탁하여 땅이 되었다.’라고 했다."(제왕운기 상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 문장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처음 편입된 단군. 1978년 홍숙호(1941~현재, 전 홍익대 교수) 화백이 그린 국가 공인 어진이다. photo by namu.wiki

1.전형적으로 임금에게 바치는 표문(表文)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병서(竝書,아울러 붙이는 서문)인 만큼 영사시(詠史詩,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읊은 시)를 쓴 이유를 담담하지만 힘있게 밝히고 있다. 상권 첫 문단은 중국 천지 창조의 혼란을 깨기 전 달걀에 비유하고 있다. 번역문임에도 병서(竝書)에 밝힌 것처럼 춘추필법의 한문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첫 문단이다. 본문에 나오는 *제왕(帝王)은 황제와 임금, *제자(諸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BC 770~221년 춘추전국시대 여러 학파), *춘추(春秋)는 공자(孔子,BC 551~479)가 노나라 (BC 1100~BC 256)역사를 쓴 편년체 사서를 말한다.*반고(盤古)는 중국 문화에서 천지창조 신화의 하나다. *삼오역기(三五歷記)는 유방(劉邦,BC 247?~BC 195)이 한(漢)나라를 세운(BC 202) 뒤 후한(25~220)이 망하면서 나온 삼국시대(위촉오) 오(吳)나라(229~280)출신 도교 작가 서정(徐整,220~265)의 저서다. 이 속에 반고(盤古)가 등장한다.

1965년 보물로 지정된 '제왕운기' 상권 펼침본. 서울 거주 곽영대(郭英大) 소장본.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2.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는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 중 하나다. 단군을 한민족사에 처음으로 편입시킨 영사시(詠史詩,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읊은 시)의 으뜸이다.
율시(律詩) 형태인 7언시(七言詩)와 5언시로 지은 서사시(書史詩)이자 서사시(敍事詩)이기도 하다. 역사 서술이 아닌 시(詩) 형태 저작이라는 이유로 한국의 역사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한테도 외면받은 ‘불운의 작품’으로 꼽힌다.
원나라 간섭기인 지원(至元, 원 세조 쿠빌라이 칸 연호)24년인 1287년(충렬왕 13)에 찬술(撰述, 간행이 아니라 책이나 글을 쓰는 것)됐다. 책의 구성은 표문인 ‘제왕운기진정인표(帝王韻紀進呈引表) 등 상하 2권 1책으로 돼 있다. 상권은 중국 역사를, 하권은 한민족사를 다루고 있다. 하권은 특히 ‘동국군왕개국연대’와 ‘본조군왕세계연대’로 나눠서 다뤘다.
저자가 환갑을 지난 64세 무렵 강원 삼척 두타산(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의 천은사(天恩寺)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에는 간행되지 않았다가 5~6년 후인 1294년 무렵 보문서(寶文署, 고려 때 공문서 보관 및 경서 강론 담당기구) 직학사(直學士,정3품) 지제고(知制誥,왕명 및 외교문석 기록관)인 윤보(尹珤,?~1329, 윤관 후손으로 당대 권신,權臣)가 고려 25대 왕 충렬왕(忠烈王,1236~1308,재위 1274~1308)에게 요청, 간행에 들어갔다.
첫 간행은 원정 연간(원 성종,成宗, 올제이투 테무르 칸 연호. 1295~1296)에 진주목(晉州牧, 현 경남 진주시)의 진주부사 이원(李原, 1368~1429, 세종 때 좌의정)과 서기 정초(생몰 미상)에 의해 처음으로 발간됐다. 당시 저자도 초간본이 나온 지 모르고 있다가 큰 아들 권지교서랑(權知校書郞,비서성 정9품) 이임종(李林宗)이 가져와서 알았다고 한다.
학계는 1294년에 초간본이 나온 것으로 비정(比定,비교해 정립)하고 있다. 다만 초간본은 현전하지 않는다. 영어로는 ‘Jewang ungi’ 또는 ‘Songs of Emperors and Kings’로 번역된다.

제왕운기 한솔제지 소장본.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3.제왕운기는 고려 말 1360년(공민왕 9) 중간(重刊)됐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에 삼간본(三刊本)이 나왔다. 현존 판본은 360년(공민왕 9) 중간(重刊)본과 1413년 목판본, 1417년 5월 경주 판본이 있다.
경주판본은 경주유학교수관(慶州 儒學 敎授官) 이지(李輊)가 영감사(令監司) 이지강(李之剛,1363~1427, 조선 세종 때 대사헌), 부윤(府尹) 이승간(李承幹, 세종 때 정승 하륜의 사위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냄), 판관(判官) 심영(瀋泳)과 간행한 것이다.

4.국내 소장 판본은 여러 곳에 있다. *곽영대(郭英大) 소장본은 공민왕 9년(1360) 중간본이다. 목판본. 상·하 2권 1책으로 1965년에 보물 제418호 지정됐다. 저자가 왕에게 올리는 ‘진제왕운기(進帝王韻紀)’가 있다. 책 끝에 정소(鄭玿,생몰 미상)의 발문이 있다. 정소는 고려 말 문신으로 당시 녹사참군사 겸 장서기 승사랑 양온령(司錄參軍事 兼 掌書記 升仕郞 良醞令) 직위에 있었다. 곽영대 소장본은 후기가 있었는데 떨어져 없어졌다.현존한 것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대 소장본은 1360년(공민왕9) 간행한 것으로 보물 제895(1986년 지정)로 지정됐다. 목판본 2권 1책이다. 저자의 인표(引表)가 있고, 책 끝에 정소(鄭玿)의 발문, 이원(李源)·안극인(安克仁) 등의 후제(後題), 간기(刊記,간행기)가 있다. 상권 제18장과 하권 제6·7·8·16장이 떨어져 나가 필사돼 있다. 그래도 발문·후제·간기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은 1991년에 보물 제1091호로 지정. 목판본 2권 1책. 고려 말·조선 초 간행 추정. 권수 1장, 하권 여섯 째 장이 떨어져나갔다. 또 여덟 째 장은 다른 판의 각자(刻字)가 보입(補入)된 것이다.
*한솔제지 소장본은 상하 2권이다. 2011년 11월 1일 보물로 지정됐다. 공민왕 9년(1360)경에 판각(板刻)된 책판(冊版)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인쇄한(추정) 목판본이다. 하권 제8장의 보판(補板)을 제외하면, 결락(缺落,흠이나 떨어져 나가는 것)이 없고 인쇄 상태도 양호하다.

이승휴에 의해 한민족사에 처음 포함된 단군 영정.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5.주요 내용은 인표(引表,바치는 문서)와 병서(竝書, 나란히 붙여쓰는 글, 서문 격)에 이어 상권에는 천지개벽(天地開闢) 시기의 반고(盤古), 삼황오제(三皇五帝), 하은주(夏·殷·周) 삼대와 진한(秦·漢)을 거쳐 송금원(宋·金·元)의 흥기를 7언시로 노래하고 있다.
하권은 동국군왕개국년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둘로 구성되었다. 앞은 ‘지리기(地理紀)’에 이어 단군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시로 엮었다. 뒤는 고려를 개국한 왕건(王建, 877~943, 고려 태조)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 추증 의조,懿祖, 생몰년 미상) 설화에서 찬술 당시 임금인 충렬왕(忠烈王, 1236~ 1308, 고려 25대 왕,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사위)까지 역사를 읊고 있다.

고려 이승휴의 시대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 고려 충렬왕의 장인이자 징기즈칸의 손자, 13세기 중국 원나라 건국자이다. www.history.com

6.제왕운기는 우리 민족은 하늘(天,천)과 연결되는 단군(檀君)을 시조로 하는 민족임을 강조한다. 민간신앙이나 고기(古記,옛 기록) 등을 통해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민족사 속에 포함,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민족을 나타낸다. 오늘날로 따지면 민족 정통론을 정립한 셈이다.
특히 발해(渤海, 678 혹은698~927)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확인하고, 발해인이 고려에 귀순해온 사실도 서술했다. 현전 고서 중 발해 역사를 최초로 한민족사에 포함한 것이다. 이는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의 자주 독립성을 은연중 강조한 것이다.
단군 기원의 역사 의식은 조선 건국이후 개혁파 신진 사림으로 이어졌고, 동국통감(東國通鑑, 1485,조선 성종때 관찬 사서) 등 정사에 국조(나라의 시조)로 기록되는 계기가 됐다. 통감 뜻은 통사를 서술한 역사서를 말한다. 특히 오늘날 쓰고 있는 ‘단군(檀君)’의 한자 명칭도 제왕운기(帝王韻紀) 표기이다. 참고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壇君’으로 썼다.

이탈리아 출신 마우리찌오 리오또 (Maurizio Riotto) 안양대 교수가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제왕운기(오른쪽)' 표지.

7.제왕운기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말 조선 초기) 문신 이원(李原, 1368~1429, 세종 때 좌의정)은 제왕운기가 서사시임에도 ‘통감의 정수’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16세기 이후 실학파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중기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동국지리지’,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 북학파(北學派)로 규장각(奎章閣) 4검서(檢書)의 한 사람인 류득공(柳得恭,1748~1807)의 ‘발해고’, 안정복(安鼎福, 1721~1792)의 ‘동사강목’.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 이종휘(李鍾徽, 1731~1797)의 ‘동사(東史)’ 등 후대 학자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만 이들 실학파의 역사 관련 저서들은 대부분이 중국 중심 사대주의 역사 인식에서 저술된 것이어서 논란이 많다.
차장섭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이승휴는 단군 이래 동북아 모든 나라를 그의 후손으로 계보화하는 정통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고려 중기의 민족 서사시 동명왕편과 제왕운기 연구(1994)’에서 “(제왕운기 이전에는) 지방 신으로 취급되던 선인 왕검이 민족 시조인 단군으로 승격돼 뚜렷이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진성규 중앙대 사학과(고려사) 교수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민중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그런 시련 앞에서 한 지식인으로서 뚜렷한 역사 인식이 ‘제왕운기’ 저술의 심리적 원천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왕운기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이탈리아 출신 마우리찌오 리오또 안양대 교수.출처=현대불교 박재완교수.

8.현대에 들어서는 1977년 아세아문화사에서, 1991년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본이 출간됐다. 한글로 읽기가 편한 것은 1999년 역락에서 출판한 번역본이라는 게 중론이다.
2022년에 이탈리아어로 번역·출간돼 주목을 끌었다. 마우리찌오 리오또(Maurizio Riotto) 안양대 교수가 ‘한국의 서사시(Poesia epica della Corea)’라는 제목의 도서를 이탈리아 카포스카리나(Cafoscarina) 출판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시칠리아 출신인 리오또 교수는 고교 시절부터 동양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로 한국에서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동양학 관련 논문 등 저서가 180여 종이나 된다. 리오또 교수는 한국 고전인 ‘구운몽(1687, 김만중)’과 ‘춘향전(작자 연대 미상)’, ‘홍길동전(허균)’, ‘삼국유사(일연)’ 등 30여 권을 이탈리아어로 번역·출간했다.
 

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가 주관한 제722주기 동안대제가 2022년 10월 3일 강원 삼척 천은사 내 동안사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삼척시청

#.이승휴(李承休, 1224~1300)=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 원나라 간섭기의 문장가.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 2005년 10월의 문화인물.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관료 생활 중 파직, 좌천 등을 많이 당해서 ‘동안(動安,옮겨 다니는 것이 편안)’이라고 했다고 한다.

1.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현 경북 고령군 성산면) 사람이다. 9세에 독서를 시작했고, 12세에 고승(高僧)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 고승 처소)에 들어가 유학자 신서(申諝,생몰 미상)에게서 공자의 ‘춘추’를 좌구명(左丘明,BC 502~BC 422, 노나라 학자)이 해석한 책 ‘좌전(左傳,左氏傳)’과 유교 3경전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역경, 易經)’ 등을 익혔다.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척에서 거주했다. 삼척은 어머니의 고향, 외가 고을이다. 다만 종조모인 북원군부인 원씨 집에서 기거했다는 설도 있다.

이승휴는 경산부 가리현(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외가인 삼척에서 활동했다. kbs에서 2011년 7월 3일 방송한 ' 제왕운기-학자의 고향' TV화면.

2.22세 때인 1245년(고종 32)에 과거 예비시험인 국자감시( 國子監試)에 합격했다. 이어 29세 때인 1252년(고종 39) 당시 최고의 문신이자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 관장자) 최자(崔滋, 1188~ 1260, ‘파한집’, ‘보한집’ 저자)가 주관한 문과 시험에 급제했다.
1253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삼척 외가로 갔다가 몽골군의 5차 침략(1253)으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삼척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골군에 저항했다.
몽골과 병란이 이어지면서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41세 때인 1264년(원종 5) 동문원 수제(修製, 격서(檄書) 따위 글을 짓는 일에 종사하던 임시 벼슬)에 임명됐다. 이어 경흥부판관겸장서기(慶興府判官兼掌書記)에 보임됐고, 1270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됐다.
삼별초의 항쟁 직후 관에서 횡렴(橫斂, 법적 근거없이 조세를 거두는 것)과 영선(營繕,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것)으로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자 그 폐해를 격하게 지적했다.

3.이승휴는 아들이 3명이다. 첫째 아들 이임종(李林宗)은 검지교서랑(정9품)을 지낸 뒤 사헌부에 있었으나, 아버지 사후 고향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셨다. 둘째 아들은 출가해 담욱(曇昱) 스님이 됐다. 담욱은 1322년 삼척 천은사 중수(重修)에 참여했다.
셋째아들 이연종(李衍宗)은 과거에 급제, 규정(糾正, 사헌부의 정6품)을 거쳐 밀직사 겸 감찰대부(監察大夫, 감찰사의 으뜸 정3품)에 이르렀다. 세 아들 모두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4.1273년(원종 14)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법제와 격식을 다루는 관직)로 있을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의 등급을 뛰어넘어서 임용되자 이는 불가한 일’이라고 상소문을 초안했다가 파직됐다.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 부음을 전하기 위한 서장관(書狀官,정4품~정6품 관원)으로 파견됐다.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쿠빌라이가 대칸으로 즉위해 옮긴 도시, 현 베이징,北京)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체류 중이던 세자(나중에 충렬왕)에게 왕의 유언을 전하고 고려의 의복과 전례를 따르도록 조언했다. 이 공로로 잡직서령 겸 도병마녹사(雜職署令兼都兵馬錄事)가 됐다.

고려는 1259년(고종 46년) 원에 항복,80여년간 간섭에 시달리며 많은 여자를 공녀로 보냈다. 공녀 중 황후 자리에 오른 기황후를 드라마 한 MBC월화드라마 '기황후' 스틸 컷. 2013년 10월 28일 부터 2014년 4월 29일 까지 방영했다.

5.충렬왕 때 합문지후(閤門祗候, 고려 시대 조회(朝會)•의례(儀禮) 등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관직)·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했다. 이때 왕이 정치 자문을 구하자 시정(時政) 15개 조로 설파했다.
이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지방 장관인 양광충청도 안렴사(楊廣忠淸道 按廉使)로 나아갔을 때 뇌물수수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가산을 몰수했다, 그런데 이 일이 화근이 돼 동주부사(東州副使, 현 철원)로 좌천됐다. 이때부터 자칭 ‘동안(動安)거사-옮겨 다니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라 하였다.
다시 전중시사(殿中侍史, 고려시대 감찰사(監察司)의 종5품 벼슬)에 임명됐으나 1280년(충렬왕 6)에 국왕과 측근 인물의 실정과 감찰사 관원들의 전횡을 10개 조로 간언하다가 또 파직됐다.이후 삼척 구동으로 돌아가 천은사 용안당(容安堂)에 은거(隱居)하면서 ‘제왕운기’와 불교적 내용의 ‘내전록(內典錄)’을 찬술했다.

이승휴의 관료 시절 충렬왕의 부인이자 충선왕의 어머니로 막강 권력을 휘두른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 공주 무덤. 북한 황해도 개풍군에 있다. 일제시대 촬영.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5.충렬왕이 폐위되자 발탁됐다.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해 선왕 때의 폐정을 개혁할 때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 사림원의 종3품 벼슬),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정4품 관직),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 정3품), 지제고(知制誥,고려시대 왕의 조서(詔書)·교서 등을 작성하는 관직)를 제수받았다.
충선왕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막강 권력이었다. 하지만 원을 탈피하려는 개혁정책을 펼친 데다 1296년 결혼한 부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1285~1315)와 불화가 이어지자 원나라에서 즉위 5개월만에 폐위시켰다.
충선왕은 이후 원나라로 들어가 10년 동안 대도(大都, 현 베이징)와 심양(瀋陽, 현 센양)에 머물다 아버지 충렬왕이 붕어(崩御, 왕의 죽음)하자 1308년에 복위했다. 충선왕은 1309년 다시 대도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고려를 ‘전지(傳旨, 임금의 말을 전하는 문서)통치’하다가 1325년 심양에서 사망했다.
이승휴는 폐위 전 충선왕 때 동첨자정원사(同簽資政院事),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 왕 비서실 장관으로 정3품), 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 밀직부사(密直副使)·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 사림원의 종2품)를 역임하면서 개혁 정치를 주도했다.
하지만 부원세력(附元勢力, 원나라에 기대 고려에 해를 끼치는 세력) 등 기득권에 밀려 충선왕이 폐위돼 원나라 수도인 대도로 가버리자 사직(辭職)했다.

강원 삼척시에 있는 두타산 천은사 모습. 출처=삼척시청

6.관직에서 나와 강원 삼척 두타산에 은거하면서 저술에 몰두했다. 복위한 충렬왕 26년인 1300년 77세로 두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서로는 ‘제왕운기’가 있고, 문집으로 셋째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찬한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이 있다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1390~1453) ·정인지(鄭麟趾:1396~1478) 등이 조선 4대 왕 세종(世宗,1397~1450, 1418년 8월 ~ 1450년 2월)의 교지(敎旨,왕의 명령 및 뜻)를 받아 지은 역사책 고려사(高麗史)에는 “(충렬왕) 26년(1300) 이승휴가 죽었다. 나이 77세였다. 그는 성질이 정직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동안거사 이승휴가 누각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삼척 죽서루(竹西樓).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1738년 무렵 그렸다.출처=http://www.woorisoop.org

7.강원 삼척시에서는 ‘이승휴제왕운기문화제’가 매년 열린다. ‘제왕운기’ 저자인 이승휴를 기리기 위하여 열리는 문화 행사다. 삼척시와 동안이승휴사상선양사업회가 천은사 내 동안사와 죽서루 일원에서 연다. 동안대제와 전국학생백일장, 사생대회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한편 천은사는 1948년 화재로 불탔다가 6·25 전쟁으로 완전 소실됐다. 그 자리에 1976년 절을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척 죽서루(竹西樓,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길 37, 관동팔경의 하나, 보물 제213호)가 이승휴  유허지로 알려져 있다. 1266년(고려 원종 7)에 이승휴가 올라가서 시(詩)를 지었다(출전 동안거사집)고 전해진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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