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하멜 표류기-봉건 조선을 서양에 본격 알린 재난 보고서의 첫 문단은 평범한 일기체로 서두를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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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봉건 조선을 서양에 본격 알린 재난 보고서의 첫 문단은 평범한 일기체로 서두를 연다

지성인간 2025. 7. 7.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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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8~1692)이 쓴 '하멜 표류기'에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담배가 매우 성행, 어린 아이들은 물론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썼다. 조선 후기 화가 송석(松石) 이교익(李敎翼, 1807∼?)이 담배피는 남자들을 그린 풍속화 '휴식'. photo by wikipedia

하멜 일지. 건명 스페르베르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섬에서 1653년 8월16일 난파당한 뒤, 1666년 9월14일, 그중의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 조선에서 겪었던 일 및 조선 국민의 습관과 국토의 상황에 대해서. -네덜란드 인도총독 요한 마자이케르 각하 및 평의원 제위 귀하  
1653
"저희들은 1653년 1월10일 저녁, 순풍을 타고 텍셀의 정박지를 출발하여 여러차례의 역풍과 폭우를 겪으면서도 6월1일 바타미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수일간 휴식을 취한 뒤, 우리들은 총독 각하 및 동인도 평의원들로부터 포르모사의 타이요완으로, 당지에 주재중인 니콜라스 펠브르흐 장관과 교대하실 신임 코르네릴스 카세르 씨와 그 가족을 모시고 가라는 명령을 받아, 1953년 6월 18일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바타비아를 떠났습니다. 저희들은 순조로운 항해끝에 7월16일 무사히 타이요완에 도착했습니다. 장관 각하는 당지에 내리시고 또 저희들은 짐을 풀었습니다. 또한 저희들은 장관 각하 및 평의원 여러사람들로부터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적하를 새로 하고, 각하에게 인사한 뒤 같은 달 30일 앞의 타이요한 항을 출발, 신의 이름으로 빨리 항해가 끝나기를 빌며 항해를 재축했습니다. 7월31일은 일기가 좋았지만 저녁부터 타이요한 쪽으로부터 심한 폭풍우가 불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바람을 심해갔습니다.---."(헨드릭 하멜 저,신동운 역, 스타북스 2020)

1668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나온 '하멜 표류기' 초판본. 난파선에서 나온 하멜 일행의 제주 상륙 모습을 표지 삽화로 넣었다. 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

1. 전형적인 평범한 일기체 문장으로 시작하는 첫 문단이다. 정박지에서 출항과 긴 항해 끝에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는 17세기 뱃사람의 로드맵 일기처럼 전개되고 있다. 지명 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으면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를 잘 모를 정도로 있는 사실을 무심하게 기술했다. 보상금을 받기 위한 재난 보고서인 만큼 은유나 상징이 필요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첫 문단 앞에 건명(件名,서류 이름-보고서 명칭)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것도 기행문이나 산문일기가 아니라 보고서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텍셀은 네덜란드 외곽 섬으로 외항선 기지 이름이다. *.바타미아(Batavia)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옛 이름으로 네덜란드 식민시 시기에 불린 명칭이다. *. 포르모사(혹은 포모사,Formosa)는 현재의 타이완(臺灣)이다. 16세기 일본과 무역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정박하던 곳으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타이요완은 현 타이완의 안핑(安平)부근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 포구다. *.니콜라스 펠브르흐(Nicolaas Verburg, 1626~1676)는 포르모사의 네덜란드 총독(1649~1653), 동인도회사(VOC) 바타미아 위원회 사무총장(1668~1675)를 지낸 인물이다. *. 코르네릴스 카에사르(C.Caesar)는 포르모사의 네덜란드 총독를 지낸 인물이다. *.적하(積荷)는 짐을 싣고 내리는 것을 말한다.
한편 본문 전에 나오는 '건명(件名,서류 이름-보고서 명칭)'에 나오는 *.스페르베르(Sperwer, 영어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뜻은 참매)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의 상선 이름이다. *.코레 왕국은 코리아(Korea)다. 프랑스식 발음으로 당시 서양에서는 조선에대해 영어권은 코레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스파냐어권은 코레로 불렀다. 스페르베르(Sperwer)호는 1653년(조선 효종4년) 일본 큐슈 나가사키(長崎)의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가다 심한 풍랑으로 난파,  선원 64명 중 36명(혹은 38명)이 살아남아 제주도 서귀포 가파도 부근에 상륙했다. *.켈파르트(혹은 켈파트, Quelpart)는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이 붙인 제주도의 다른 명칭이다. *.요한 마자이케르는 17세기 네달란드 인도네시아 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1668~1670년 사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나온 '하멜 표류기' 표지. 하멜이 탔던 종류의 범선을 삽화로 썼다. www.google.com

2.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1668)'는 17세기 네덜란드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조선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준 걸작이다. 사실상  조선을 서양에 본격 알린 최초 일기이자 재난 보고서다. 재난을 당한 이들의 조선 생활 13년 28일의 기록이지만 진실과 편견, 왜곡이 함께 공존하는 저서다. 재난당한 선원이 소속사에 제출, 퇴직금과 보상금 등을 타내기 위해 쓴 만큼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것을 집중 부각해 썼기 때문이다. 저자가 조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하기 전인 1668년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등에서 조선에서 끄적거린 '표류기(漂流記, 하멜일지)'와 일본으로 탈출이후에 쓴 '조선왕국에 관한 기록'을 묶어 냈다. 책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 조선에 대한 이국적 호기심, 탐험욕, 학술연구 등이 겹치며 출판 직후부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원제는 네덜란드어로 '범선 스페르베르의 좌초 이야기-1653년에서 1666년 사이에 켈파르트 섬에서 난파된 배들의 모험과 그 왕국에 대한 설명(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이다. 영어로는 '범선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이야기(The journal of the unfortunate voyage of the jaght the Sperwer)'이다. 
17세기말 서유럽에서 유명해진 '하멜 표류기'는 프랑스 번역가 미누톨리(Minutoli)가 1670년에 주석을 달고 프랑스에서 출판한 판본이다. 미누톨리의 프랑스 번역판은 영국 유명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 1632~1704)가 직접 이름을 서명한 복사본이 있을 정도로 서유럽에 잘 알려졌다. 특히 1885년까지 계속 판을 찍어냈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3.'하멜 표류기'는 제목과 달리 '표류(漂流,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 이야기'가 아니다. 난파된 뱃사람들의 낯선 나라에서 삶 풍물을 소속 회사에 보고하는 시장 조사(?) 기록이다. 저자가 동인도 회사에서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 청구의 증거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산업재해(재난) 보고서다. 저자는 1653년 8월 상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던 중 난파, 제주도에 닿은 후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됐다가 탈출했다. 물론 일본 나가사키(1666년 9월~1667년 10월)에 있을 때 대부분의 기록을 완료했다. 

1787년 프랑스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 라 페루즈(La perouse,1741~1788) 탐험대가 묘사한 제주도(켈파르트)남부. 제주도에 대한 최초 서양 지도 중 하나다. 헨드릭 하멜이 표류해 난파(1653년)할 당시 상륙한 제주도 모습과 비슷하다는 게 학계 의견이다. 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1653년 바타미아( 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상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포르모사(현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그해 8월 태풍을 만나 제주 남쪽에서 난파당했다가 제주도에 닿았다. 이후 조선 제주와 한양, 전라도 강진 병영, 여수 등에서 13년 동안 억류됐다가 일본으로 탈출, 1670년 무렵  조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한편 18세기 조선 문신인 실학파 성해응(成海應, 1760~1839, 저서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은 한 저서에서 "(하멜이 탄)난파선의 생존자들 중에서는 포에 대한 전문가도 몇명 있었다. 그들은 배에 30문 정도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바퀴가 달려있어서 쉽게 운반이 가능했다. 포가 한발 발사되면 대포는 배 뒤쪽까지 굴렀다. 그래서 뒤로 반동하는 힘이 가해져 몸체가 쪼개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들의 소총 역시 정교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철끝을 부싯돌이  내려치는 원리로 불꽃을 일으켜 화약이 발사된다. 이것은 걸쇠를 잠그고 끄는 용수철 작용으로 일어난다"고 적었다. 이 글로 봤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대포와 총을 확보하고, 이들을 활용해 새롭게 총포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도외시 한 것으로 보인다.

헨드릭 하멜이 타고 갔던 배 스페르베르호와 같은 범선을 그린 일러스트. photo by google

4.하멜 일행의 조선 상륙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1653) 8월 6일(무진) 2번째 기록에 나온다. 제 155대 제주 목사(牧使,정3품 외직) 이원진(李元鎭, 1594~1665, 강원도 관찰사,병조참의 역임)의 치계(馳啓, 말을 달려 알리는 것, 즉 임금에게 급히 종이에 써 상주하는 것)로 등장한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생몰미상)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생모 미상)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피(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피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1668년 네덜란드 발행 '하멜 표류기'에 들어가 있는 익명 작가의 삽화. 제주도에 난파당해 육지에서 조선인들에게 구조되는 모습이다. photo by wikipedia

왜어(倭語,일본말)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길리지단(吉利是段,크리스천)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제주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타타르)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끼)'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서양 오랑캐) 박연(朴燕, 얀 얀세 벨테브레이, Jan Janse Weltevree, 1595∼1656)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 여행이 금지된 곳, 한양)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한편 당시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강원도 관찰사(종이품(從二品), 병조참의(정3품),우승지(정3품)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승경(昇卿), 태호(太湖)다. 조선 실학파의  비조(鼻祖, 시조)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스승이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당숙(堂叔, 아버지의 사촌)으로 제주도의 풍습을 기록한 책 ‘탐라지(耽羅志)’를 썼다.

헨드릭 하멜 표류 당시의 조선(오른쪽)-조선 전기 문신으로 팔도도(八道圖)를 만든 이회(李薈,태조 때 병조정랑 역임)와 양촌 권근(權近, 1352~1409,태조 때 대제학 역임)이 1402년 제작한 '혼일강리역대 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1470년 모사본. 지도 제작에도 사대사상이 미쳐 중국 중심으로 그려졌다. www.hendrick-hamel.henny-savenije.pe.kr

5.회사에 제출하는 보고서인 만큼 '하멜 표류기'는 매우 건조한 문체로 최대한 군더더기를 배제했다. 그래서 조선 억류 생활과 귀국 과정이 상세하게 연대순으로 쓰여 있을 뿐 문학적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하멜 일행이 겪은 일, 이에 대한 감상,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이다.
저자의 배가 나가사키 항의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가다가 표류, 처음 닿은 곳은 '조선 제주도 대정현 지방 차귀진 아래 대야수 연변(大靜縣地方 遮歸鎭下 大也水沿邊)'이다. 현재의 제주도 서귀포시 서쪽 해변이다. 현재 기념관이 있는 서귀포 안덕면 사계리의 용머리해안 인근 하멜기념관은 정확한 위치가 아니다. 조선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직접 신문한 이는 네덜란드인으로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 얀 얀세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 1595∼1656)이다. 조선이름은 박연(朴淵, 朴延)이다. 박연은 사략선(私掠船, 약탈 목적의 무장선) 항해사였다. 박연은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난파당한 이듬해 제주도로 가서 이들을 직접 신문했다. 

제주도에 표류한 헨드릭 하멜 일행이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모습.1848년 영국에서 출판된 '보르네오와 인도 열도-의상과 풍경 그림 포함'에 나오는 제주도 지방 관리 모습이다. https://m.koreaherald.com 재인용

한편 이조참판(종2품), 홍문관제학(정2품), 전라도관찰사(종2품)를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2~1801, 천주교 신자로 몰려 신지도 유배 참형, 헌종 때 복권 영의정 추증)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 따르면 박연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뒤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박연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 르트홀란트주 드 레이프(De Rijp) 출신으로 1627년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상륙, 조선에 귀화해 훈련도감에서 활동했다. 조선 여인과 결혼, 1남 1녀를 두었으며,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됐다. 박연이 한국에 정착한 것은 일본이 기리시탄(크리스천, 기독교 신자)의 입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으로 갈 경우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컸고, 명나라도 후금(청)과 전쟁 중이어서 가지 못했다.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정권 몰락이후 난세를 평정한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사망하자 기리스탄 박해가 극심했다.  특히
도쿠카와 막부(통칭 에도막부,1603~1868)는 1629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1632)통치 중반에 그리스도가 그려진 그림을 밝는 행위인 후미에(踏み絵, 밟는 그림), 혹은  '에부미(絵踏み, 그림 밟기)를 시행, 기리시탄(크리스천) 색출 작업에 나섰다. 한편 후미에(踏み絵)는 현대 일본어에서 '권력자 등이 개인을 조사하는 행위, 또는 그 수단', '어떠한 결정에서 몰래 반대한 사람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 등으로 쓰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오스텐부르크에 있는 동인도회사(VOC) 본사 조선소. 1750년 범선 건조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 출처=네덜란드 암스테르담시 기록보관소

6.17세기 독일에서 나온 소설 중에는 '하멜 표류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하멜표류기와 같은 해에 출판된 한스 야콥 폰 그림멜스하우젠(Hans Jakob Christoffel von Grimmelshausen, 1622~1676)의 소설 '바보이야기-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Der Abentheuerliche Simplicissimus Teutsch, 영어 The Adventurous Simplicissimus Teutsch)'이다. 
소설 내용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12월 발발, Manchu invasion of Korea) 전후 주인공 짐플리치시무스가 러시아에서 동방으로 향하다 여진족에게 잡혀 조선으로 와서 겪은 이야기다. 조선에서 무기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힘자랑도 하다가 일본을 거쳐 포르투갈 선박을 타고 오스만제국과 베네치아를 거쳐 다시 유럽으로 간다. 
이 소설은 하멜의 일대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에 또다른 사람의 모험담을 소설로 옮겼는지, 하멜표류기를 보고 급하게(?) 소설화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학계에서는 그림멜스하우젠이 '하멜 표류기'를 읽고 쓴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멜이 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스페르베르가 이동한 경로. 조선을 탈출해 일본으로 가서 바타미아로 되돌아 온 경로는 나가사끼~타이완 경로를 이용했다.

7.하멜의 보고서(하멜 표류기)가 한국에 알려진 계기는 1917년 미국 교포사회에 의해서다. 당시 미국 교포들이 출간하던 '태평양'이라는 잡지에 하멜의 보고서가 한글로 번역, 소개된 것이다. 이를 발견한 이가 구한말 3대 천재(흔히 동경삼재-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 중 한 사람인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었다. 육당은 자신이 내는 '청춘'이라는 잡지에 이를 게재했다. 
1918년에는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1900년 세계 최초 설립)가 하멜 보고서 영문판을 학회지에 실었고, 이를 본 사학자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가 1934년 한국어로 번역, ‘하멜표류기’란 제목으로 '진단학보(1934년 11월 창간 국내 첫 학술지)'에 실었다. 이후 한국인에게 '하멜 표류기'로 고착화됐다.
한국에서 '하멜 표류기'는 다양한 문화 텍스트로 활용된다. 여러 출판사에서 책으로 나왔다. 1996년 KBS 일요스페셜은 2부작 다큐멘터리 '중세 조선의 비밀-하멜 표류기'를 방영했다. 당시 출연진으로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의 외교관들이 나와서 네덜란드 표류자들을 연기해 눈길을 끌었다. 제주와 전남 여수,강진에는 하멜 기념관도 운영되고 있다.
2015년 네덜란드 국영 항공사인 KLM은 한국으로 향하는 비즈니스석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기념품(미니어쳐 술병 등) '델프트 블루 하우스'에  하멜의 생가를 넣었다. 미니어쳐 술병에는 네덜란드 전통 증류주인 예네버(Jenever)가 들어 있다고 한다.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 동상. wiki commons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8~1692)=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소속 선박 선원(서기관).1653년(조선 효종 4년)부터 1666년(조선 현종 7년)까지 조선 거주자. 조선을 서유럽에 구체적으로 알린 인물.  네덜란드어 이름은 '하멀', 조선 이름은 남하면이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

네덜란드 화가 마크 붐(Marc Boom)이 그린 헨드릭 하멜 초상화.네덜란드 호린험 하멜박물관 소장.

1.네달란드 로테르담 동쪽 자위트홀란트주에 있는 도시이자 자치구 호린험(Gorinchem)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가, 어머니는 주부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대부(代父)는 시장이었다. 호린험에서 보낸 어린시절이나 학교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빠른 기록은 열세살 무렵인 1650년 암스테르담에 있는 네덜란드동인도 회사(和蘭東印度聯合會社,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에 입사했다는 것이다.
하멜은 입사후 3년 만인 1653년 아시아 최대의 동인도회사가 있는 인도네시아로 파견됐다. 업무는 회계보조원, 서무(Bookkeeper), 서기관 역할이었다. 그해 6월18일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상선 스페르버르호(Sperwer, 네덜란드어로 '새매')에 탑승,  포모사(타이완)를 거쳐 일본 에도 막부의 나가사키로 가는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8월들어 태풍을 만나 제주도 서귀포시 부근으로 떠밀려오다가 난파당했다. 하멜은 살아남은 36(혹은 38)명과 함께 서귀포 대정읍 근처에서 조선인들에게 구조됐다. 

하멜의 고향-네달란드 로테르담 동쪽 자위트홀란트주에 있는 도시이자 자치구 호린험(Gorinchem) 요트 정박장 모습.www.google.com

2.하멜은 제주도에 몇달을 머무르면서 제주 목사(牧使,정3품 외직) 이원진(李元鎭, 1594~1665, 155대 제주 목사)의 신문을 받았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하멜 일행에 대해 '면철'(面鐵), 즉 '녹슨 철빛 얼굴(붉은 빛을 띈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 이후 통역은 먼저 조선에 표류해 아예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 였다. 박연은 한양에서 급거 제주로 내려왔다. 다만 조선에 오래 머문 박연은 네덜란드어가 서툴러 겨우 대화가 됐고, 당연히 귀국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박연의 마지막 말은 '한번 여기 들어오게 되면 쉽게 나갈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라'였다. 제주 억류 장소는  조선의 4대 반정(쿠데타)의 하나인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쫓겨난 조선 15대 군왕 광해군(光海君,1575~1641)이 유배됐던 집이었다. 그나마 대우가 좋았던 것이다.  제주에 1년여를 보낸 하멜은 1655년 6월 일행들과 전라도(상륙지점은 기록이 없다)를 거쳐 수도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하멜 일행은 당시 왕인 효종(孝宗, 1619~1659)를 만났을 때 개량 화승총(火繩銃, matchlock)인 머스킷((Musket))을 진상하고, 일본 행을 간청했으나 무시됐다. 결국 훈련도감 소속으로 왕의 친위대(혹은 도성 경비대)의 일원이 됐다.이때부터 기나긴 억류가 시작됐다.

네덜란드 호린험의 하멜 박물관(Gorinchem Hamelhuis). photo by google

3. 하멜 일행이 위기에 처한 것은 한양생활 2년째인 1657년 왕의 친위대 복무중 탈출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당시 일행 중 두명이 순찰 도중 한양에 온 청나라 사신에게 구명을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사신들이 통역도 없는 상황에서 못 알아듣고 지나갔고, 곧 체포됐다. 이에 하멜은 위기를 감지하고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麟坪大君, 1623~1658, 효종의 친동생)에게 호소, 구명됐다, 조선 관료들은 인평대군의 선처 요총도 있고해서 이들을 다시 감옥에 가뒀다가 그해 한반도 남서쪽 전라도 강진의 군사 주둔지 '병영성'으로 추방했다. 병영성(전라 병영성)은 1417년(태종 17년)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 활용됐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탔고, 갑오경장 때 폐영됐다. 현재 병영성은 1997년 사적 지정이후 1998년부터 복원된 것이다.
하멜 일행은 전라도 병영에서 노역을 하다가 1659~1663년 발생한  우박, 서리, 가뭄에 홍수가 겹쳐 일어난 기근(飢饉, famine) 발생으로 분산 수용 됐다. 당시까지 살아남은 22명의 네덜란드인 중 5명은 순천으로, 5명은 남원으로, 하멜을 포함한 12명은 전라도 여수 전라좌도수군통제사령부로 갔다.
조국을 갈망하며 탈출 기회를 엿보던 하멜에게는 전라좌도 수군통제사령부에 배치되 것이 '신의 가호'라 할만했다. 하멜 일행에게 매우 호의적인 전라 좌수사 이도빈(李道彬, 1627~1670, 1644년 여수 진남관 개축, 1668년 삼도수군통제사 역임)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좌수사는 점호도 빼주고 노역도 면제하고, 네덜란드어도 배우는 등 친구처럼 대했다. 또 농반진반으로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고도 했다.  하멜이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하멜이 탔던 범선 스페르베르호 모형. 문화재청 제공

4.전라 좌수사 이도빈(李道彬, 1627~1670)에 고무받은 하멜은 탈출을 본격 준비했다. 이후 이도빈이 전보되고, 전라 좌수사로 정영(鄭韺, 1610 ~ 1679,경상 우병사 역임)이 부임했는데 매우 우호적이었다. 두번에 걸쳐 좋은 상관을 만난 것이다. 
하멜의 탈출 계획은 좌수사 이도빈 때부터 바닷길 장사를 하면서 준비, 친해진 이웃사람(동네 어민) 이름으로 배 가격도 2~3배를 주고 샀다.하멜 일행은 완벽한 준비끝에 1966년 9월 4일 8명이 여수 밤바다를 떠났다. 목적지는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 였다. 9월 8일 하멜이행이 탄 배는 나가사키 현 의 일부인 고토 열도 근처에서 일본배를 발견, 합류했다. 긴 억류의 나날을 보내고 조선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네덜란드 호린험은 2016년 제주도 서귀포시로부터 '돌하르방' 두 개를 기증받아 헤멜 박물관 인근에 조성했다.

최연소자는 12살에 제주도에 표류 상륙한 데니스 호버첸(사소한 잡일을 하는 인부)으로 일본에 도착, 탈출에 성공한 나이가 25세였다. 다음 연소자들은 탈주 당시 27세의 베네딕투스 클레르크, 클라스 아렌센었다. 최고령자는 데니스 호버첸의 아버지로 탈출 당시 47세인 조타수 호버트 데니슨이었다.
하멜은 나가사키에 머무는 동안(1666년 9월~1667년 10월) 조선 생활을 생상하게 기록했다. 1667년 말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로 갔다. 하멜은 자신의 원고를 동료(1668년 귀국) 편에 보내고 바타미아에 2년을 더 머물렀다. 2년동안  일기장을 내밀며 13년 치 봉급을 요구했으나 끝내 받지 못하고 1670년 조국으로 돌아갔다. 동인도 회사는 봉급은 끝내 주지 않았지만 퇴직금은 지급했다. 하멜 표류기는 동료들이 공개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그해(1668년) 네덜란드에서 3개 버전으로 출판됐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하멜 기념비. photo by google

5.하멜은 조선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제주에서 한양으로 와서 훈련도감에 베속, 어가 등을 수행하는 이무를 맡아 쌀 40키로그랜의 녹봉을 받았다.  실제 하멜 표류기에는 "기독교인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이교도(조선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었다"고 나온다.
하멜은 네덜란드 고향 호린험에서 살았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서류상으로는 평생 미혼이었다. 학계에서는 하멜이 조선에서 결혼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멜 표류기 곳곳에 처와 자식에 대한 감정으로 상상할 수 있는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강진 병영 유배 생활 중 기근으로 순천과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령받자 "우리가 어떻게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라며 한탄하는 기록도 있다. 
하멜과 함께 탈출한 다른 선원 및 지인들이 기록하거나 문답한 내용에도 비슷한 감정이 실린 내용도 있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이었다. '병영 남씨'라는 후손들이 있다는 전승이 있으나 현재는 없다. 다른 남씨에 편입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멜호로 명명된 여수~거문도 간 여객선. photo by wikipedia

6.네덜란드 당국은 1930년 7월 호린험의 린게 지구 한 거리 이름을 '헨드릭 하멜 거리(Hendrik Hamel straat)로 이름지었다. 거리에는 하멜 관련 동상도 있다. 당초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강진군에 기증했다. 2015년 6월에는 고향에 헨드릭 하멜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2009년 대한민국 외교부와 하멜 재단 협정에 의한 결실이다. 2016년에는 한국 화가이자 조각가 양순열(楊順烈, 1959~현재)이 하멜을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를 호린험에서 열기도 했다.
한국에는 하멜 박물관과 기념물이 많다. 강진에 박물관이 있고, 제주도 서귀포에 배 모양의 전시관, 여수에 하멜 기념관, 하멜 등대(종포해양공원)도 있다. 2012년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여수 하멜기념관에 하멜 일지 사본을 기증했다. 유럽한국학협회(AKSE) 는 한국학을 위한 헨드릭 하멜상을 제정, 수여했다. 하지만 2025년 6월 20일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유럽한국학회 총회에서 기존 헨드릭하멜상의 명칭을 AKSE상으로 바꾸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한국-네덜란드기업협회는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네덜란드 기업에 하멜 무역상을 주고 있다.

전남 여수에 있는 하멜박물관. 한 외국인이 하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by wikipedia

7.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69년에 건조한 새로운 1천 톤급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Corea)'호로 짓고 조선과 직교역을 시도했지만 일본의 반대로 실패했다. 코레아호는 1670년 1월 인도네시아 동인도회사 본부인 바타비아에 도착,  일본의 도움을 받으려했으나 무산됐다.
하멜은 각종 소설에도 등장한다. 잭 런던의 1915년 소설 '스타 로버(영국에서 '재킷'으로 출간)'에 나온다. 주인공과 함께 17세기 조선에서 배가 난파되는 에피소드다. 2007년 만화 '탐라, 그 섬'과 2009년 한국 드라마 하나에도 하멜을 모티브로 등장한다. 한편 2025년 6월 연합뉴스에 인터뷰한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이은정 교수는 "19세기까지 하멜의 책을 읽던 유럽 선원들이 한국 근처를 지날 때 두려움에 휩싸여 속도를 높였다고 전해진다"며, "하멜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탐구해야 할 인물이다"고 비판했다. (콘텐츠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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