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외투-제정 러시아의 민낯을 드러낸 근대문학의 모태같은 단편소설의 첫 문단은 난삽한 문장이 넋두리처럼 이어진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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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제정 러시아의 민낯을 드러낸 근대문학의 모태같은 단편소설의 첫 문단은 난삽한 문장이 넋두리처럼 이어진다

지성인간 2025. 7. 16.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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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제정 러시아 군인 외투.이 외투가 변형돼 1800년대 일반인들도 즐겨입는 겉옷으로 발전했다. photo by google

"국(局)에---어느 국인지는 말하지 않는게 좋겠다. 모든 종류의 국, 연대, 사무실, 한마디로 모든 종류의 관리 계층보다 화를 더 잘내는 부류도 없다. 요새는 개인도 누구나 자신이 당한 일을 사회 전체가 당한 모욕으로 생각한다. 어느 도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주 최근에 어느 군(郡) 경찰서장이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청원서에서 그는 국가의 법령이 무너지고 자신의 성스러운 이름이 쓸데없이 언급되고 있다고 분명하게 진술했다. 그 증거로 그는 방대한 분량의 어떤 낭만적인 작품 한권을 청원서에 첨부했다. 그 작품에는 십쪽마다 한번씩 군 경찰서장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몇군데에선 만취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니 온갖 불쾌한 일을 피하기위해 문제가 되는 국을 그냥 어느 국이라고 부르는게 좋겠다. 그리하여 어느 국에 어떤 관리가 근무하고 있었다. 아주 뛰어난 관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이 약간 얽은 관리는 머리칼이 약간 불그스레 하고, 겉보기에는 시력이 별로 좋지 않고, 이마는 약간 벗어진데다 양볼에는 주름이 지고, 안색은 치질 환자 같았다----어쩌겠는가? 페테르부르크의 기후 탓인 것을. 그는 이른바 만년 문관---."(니콜라이 고골 저, 이항재 역, 문학동네, 2011)

프랑스 여류 화가 크리스틴 미안(Christian Mian)이 고골의 소설 '외투'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더 오버코트'. 소설 주인공 아카키가 죽어서 유령이 된 모습을 형상화했다. photo by wikipedia

1.혼잣말 같은 장황한 문장이 이어지는 첫 문단이다. 말장난 같기도 하고, 그저 횡설수설하는 넋두리 같기도 하고, 애처로운 독백의 연속 같기도 하다. 문장 전개에 질서가 없어 읽는 이를 낯설게하는 도입부로 작가의 의도적 오류가 개입됐다. 그래서 가난한 하급관리인 주인공을 설명하기 위한 문장 전개로는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문체, 어조 등 불안하고 낯선 문학 기법은  습작이나 다른 글쓰기 연습을 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본문에 나오는 *.페테르부르크는 제정러시아의 수도로 ‘유럽으로 열린 창(窓)’으로 불린 현재의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다.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됐다가,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1870~1924)를 기념, 레닌그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2.니콜라이 고골의 '외투(Шине́ль, 1842)'는 러시아 근대 문학의 근원같은 단편소설로 긴 울림이 있는 명작이다. 운문(시)이 대세인 19세기 중반, 산문 시대를 연 저자가 쓴 러시아 소설의 모태(母胎)같은 걸작이다. 당대에 보기드물게 제정러시아 관료제와 무너지는 공동체 등의  민낯을 드러낸 작품으로 제국의 종말을 예고한 소설이다.
 1842년 말 페테르부르크에서 나온 고골 전집 3권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에 수록, 인쇄됐으며, 실제 판매는 1843년 1월 말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비평도 없는 등 평단과 독자의 외면을 받았고, 저자 생전에 재출판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자 사후 재평가되면서 거의 모든 러시아 문학지망생들의 습작의 모본이 될 정도였다.
한편 러시아 문학평론가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Pavel Vasilyevich Annenkov, 1813~1887)의 회고록에 따르면 완성본은 아니지만 얼개가 같은 원본은 따로 있었다. 당초 러시아 언론인이자 출판인 미하일 페트로비치 포고딘(Mikhail Petrovich Pogodin , 1800~1875, 약칭 M. P. 포고딘)이 저자의 미완성 원고를 베껴 쓴 것이다.저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린바트(Marienbad,현 체코 보헤미아 지역 온천도시 마리안스케 라즈네)에  머물때 쓴 것으로 최종본보다 훨씬 희극적이라고 한다. M. P. 포고딘의 필사본은 현재 모스크바 러시아국립도서관에 있다. 영어로는 'The Overcoat'로 번역됐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1890년대 나온 소설 '외투' 표지. 러시아 후기인상파 화가이자 출판인, 복원가, 미술사가로 활동한 이고르 에마누일로비치 그라바르(И́горь Эммануи́лович Граба́рь, 1871~1960)가 디자인했다. https://en.wikipedia.org

3.소설이 탄생한 계기는 '가난'이다. 저자는 1830년 4월 우크라이나에 있는 어머니에게 쓴 금전 지원 요청 편지에서 '겨울용 외투가 없어서 여름용 외투로 겨울을 보냈다'고 할 때부터 영감을 받아 끄적거렸다. 다만 실제 작품 구상과 집필은 1839년 어떤 하급 관리가 돈을 한푼두푼 모아 겨우 산 고급 사냥총을 잃어버리고 절망했다는 친지의 이야기를 듣고서다. 
실제 당시 제정 러시아의 하급 공무원들은 매우 가난했다. 겨울에 필요한 외투나 장화를 장만하려면 몇 달 동안 아껴서 저축해야 할 정도였다. 제국의 관리임에도 노동자와 농노 못지 않게 궁핍한 생활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하급관리의 사냥총 분실 이야기를 듣고 이를 접목한 소설을 머릿 속에 그렸다가 쓴 것이다.
이 때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마린바트(Marienbad ,현 체코 보헤미아 지역 온천도시 마리안스케 라즈네)에 머무른 시기다. 이후 언론인이자 출판인 미하일 페트로비치 포고딘(Mikhail Petrovich Pogodin , 1800~1875, 약칭 M. P. 포고딘)의 독촉을 받은 184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집필을 끝냈다.

독일 출신 화가로 독일과 스페인 등에서 활동한 발터 그라마테(Walter Gramatté,1897~1929)가 니콜라이 고골의 이야기를 담은 12개의 석판화 중 소설 '외투'의 주인공을 스케치한 작품. 출처=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https://collections.lacma.org

4.소설 '외투'는 당시까지만 해도 건들지 않았던 제정러시아 관리제도를 정면 비판했다. 무능하고 무력한 관료주의, 관리의 비인간성, 사회적 약자의 고통 등 제정 러시아의 관료주의와 권위주의, 추악한 사회 현실의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또 짧은 소설에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신화, 종교적인 요소도 두루 섞여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기이한 모습으로 무섭거나 재미있게 이상한 것)기법이 쓰였고, 읽는 이를 당황하게 하는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 읽기에 불편한 문장 전개)' 문체가 처음 사용됐다.
또 19세기 초중반 시기 일반의 상상력을 뛰어넘은 소재(제국의 관료시스템)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들여다보고, 깊은 성찰을 하게 한 소설이다. 거대 서사가 없는 단조로운 소설이이지만 울퉁불퉁한 이야기 전개, 희극에서 비극으로 급격한 전환 구조, 소설 문장 읽기의 거북함 등 기존 소설 기법을 무시하면서도 탄탄한 스토리텔링이  주목받았다.이런 이유로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 받으며, 현재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되고 있다.

20세기 소련시대 미술 작가그룹 쿠크리니크시(Kukryniksy)가 그린 고골의 단편 소설 '외투' 삽화. 쿠크리니크시는 1920년대 초 모스크바의 캐치커처 작가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쿠프리야노프(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Куприянов, 1903~1991), 포르피리 니키티치 크릴로프(Порфирий Никитич Крылов, 1902~1990),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소콜로프(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колов, 1903~2000)가 결성한 공동작업 그룹이다.모스크바 러시아국립도서관 소장. photo by alamy

5.줄거리는 가난한 하급 관리가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도둑맞고 그 충격으로 죽는데, 다시 유령으로 나타나 잃어버린 자기 외투를 되찾기 위해 도시 밤거리를 배회하는 이야기다.
3월 23일 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달력에서 적당한 이름을 찾으려 하나 실패하고,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라 하고, 아이의 세례를 받는다. 이후 성장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서류를 베껴 쓰는 일(필경사) 등을 담당하는 관료제도의 하위  등급인 9등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연봉은 400루블로 노동자,농노 수준이었다. 동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받지만 굿굿하게 살면서 수개월동안 모은 돈으로 외투를 산다.하지만 새 외투를 입고 나간 어느날 강도에게 빼앗긴다. 아카키는 외투를 찾기 위해 상관,경찰서장, 부서장 등을 찾아가지만 모두 냉담한 반응으로  보인다. 공적 제도인 관리제도를 이용해 외투를 찾지만 헛수고만 한 것이다. 아카키는 그렇게 외투를 찾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그가 근무한 관청은 나흘 뒤에서야 그의 죽음을 알정도로 공동체는 무너져 있었다. 그런 후 어느날 아카키는 유령이 돼 페테르부르크 밤거리에  출몰, 외투를 찾는다. 유령 아카키는 다른 사람의 외투를 훔치는 것은 물론 현직에 있을때 자신을 무시하고 호통을 쳤던 중요한 인물의 외투를 빼앗는다. 이후 아카키의 유령은 자취를 감춘다.

러시아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Boris Kustodiev,1878~1927)가 1905년 고골의 소설 '외투'에 그린 삽화.죽어서 유령이 된 아카키가 강도로 변해 외투 도둑질을 위해 길모퉁이에 숨어있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www.wikiart.org

6. 등장인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관청에서 서류를 베껴 쓰는 일(필경사)을 하는 하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바시마치킨(Акакий Акакиевич Башмачкин), 농노 출신의 재봉사 그리고리 페트로비치(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와 아내(하류 여성이자 독일인), 아카키의 새로운 망토를 훔친 남자들인 수염난 습격자, 아카키 가문의 노부인, 지역 경찰서장,아카키의 동료, 본명이 나오지 않는 고위관료(중요인물-значительное лицо, znachitelnoye litso) 등이다. 
한편 주인공 이름 아카키 아카이예비치(Акакия Акакиевича)는 '악의없는 이의 아들 착한애'라는 뜻이다. 아카키는 고대 그리스어로 착한 이라는 뜻이다. 바시마치킨은 가문 성으로 신발에서 유래한 말로 '남의 손아귀에 놓인다'는 뜻이다.

러시아 애니메이터 유리 놀슈테인 (Yuri Norstein, 1941~현재)이 고골의 소설 '외투'에서 영감을 받아 2015년 그린 '외투-군중속에서'. photo by wikipedia

7.줄거리는 만년9급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이야기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야기다. 이름짓기 곤란해 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던 주인공이 이름 없이 생을 마치고 관리 유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의 굴곡사를 그렸다.
3월 23일 밤, 한 아기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달력에서 적당한 이름을 찾으려 하나 실패하고,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 아기에게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후 세례를 받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울음을 터트린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류를 베껴 쓰는 정서 일을 담당하는 9등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400루블이라는 적은 연봉을 받는다. 동료들로부터 바보취급을 받는 가난한 하급관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는 갖은 우여곡절로 맞춘 새로운 외투를 강도에게 빼앗겨 되찾으려고 종횡무진한다. 타인의 조언을 듣고 급기야 경찰서장과 부서 장관을 찾아간다. 모두 냉담한 반응으로 헛수고가 된 채 실의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그가 근무한 관청은 나흘 뒤에서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 후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외투를 찾기 위해 유령으로 출몰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호통을 쳤던 중요한 인물의 외투를 빼앗아갔다. 이후 아카키의 유령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중요한 인물은 자신의 권위적인 성격을 누그러뜨리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포르투갈에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판화, 드로잉, 어린이 미술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아나 벨란데(ana bellande)가 고골의 소설 '외투'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더 오버코트'. https://anabellande.com

8.프랑스 외교관이자 동양학자(고고학), 문학평론가인 외젠-멜키오르 드 보지에(Marie-Eugène-Melchior, vicomte de Vogüé, 1848~1910)는 1885년 '레뷔 데 두 몽드(Revue des Deux Mondes,1829년 파리 창간 월간지)에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 관련 글을 기고하면서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제정 러시아 시인이자 문학평로가 아폴론 알렉산드로비치 그리고리예프(Apollon Aleksandrovich Grigoryev, 1822~1864)는 1847년 한 평론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조차도 사람에게 무한한 기쁨과 파괴적인 슬픔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세상에 알린 소설"이라고 말했다.
소련시대 문학 비평가이자 문헌학자 이반 바실리예비치 세르기예프스키(Ivan Vasilyevich Sergievsky, 1905~1954)는 "무관심과 잔혹함, 관료주의와 인간에 대한 무관심의 승리에 기반한 관료적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와 소련 시대 학자, 문학가, 문헌 비평가로 활동한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아이헨바움 ( Boris Mikhailovich Eikhenbaum, 1886~1959, 약칭 B. M. 아이헨바움)은 1918년 쓴 자신의 논문 '고골의 '외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서 "형식주의 학파와 서사학 전체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며 "내레이터가 마치 개별적인 문체 기법을 짜기 위해 줄거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어떻게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말했다.
소설 '롤리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боков, 1899~1977)는 1941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러시아 단편 소설"이라고 격찬했다. 나보코프는 "억압받는 관리의 하찮은 껍질에서 거대하고 강력한 유령이 터져 나오는 대단한 이야기"라며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883~1924)의 '변신'과 비교했다. 

1952년 이탈리아에서 나온 영화 '오버코트(Il Cappotto)' 포스터. 이탈리아 작가겸 영화감독 알베르토 라투아다(Alberto Lattuada,1914~2005)가 연출한 장편 영화다. photo by google

9. 소설 '외투'는 세계 각국에서 영화와 연극 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로 활용됐다. 첫 영화는 소련시대 무성영화 '외투(1926)'로 나왔다. 소련 연극 및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리 코진체프(Grigori Kozintsev,1905~1973), 소련 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레오니드 트라우버그(Leonid Trauberg, 1902~1990)가 공동감독했다. 
이후 연극, 영화, 발레, 애니메이션 등이 세계 각국에서 30여편이나 제작됐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발레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 작곡가 게르만 그리고리예비치 오쿠네프(German Grigorievich Okunev, 1931~1973)는 1973년 사망 당시 '외투'의 발레 버전을 작업 중이었다. 이를 이어 받아 V. 사포즈니코프(V. Sapozhnikov)가 이를 완성해 오케스트라에 맟게 편곡했다.
덴마크 안무가 플레밍 플린트(Flemming Flindt,1939~2009)가 미국 무용수, 안무가, 예술 감독 데니스 나핫(Dennis Nahat)과 클리블랜드-산 호세(Clevelend-San Jose) 발레단을 위해 이 버전을 제작했다. 1990년 여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됐으며, 세계적 발레니노 루돌프 누레예프(Rudolph Nureyev, 1938~1993)가 주인공을 맡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발틱-독일계 러시아 학술 화가 표도르 안토노비치 몰러(독일 이름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폰 묄러, 1812~1874)가 1840년대에 그린 '니콜라이 고골의 초상'.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photo by wikipedia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Яновский, 1809~1852)=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소설가이자 극작가. 근대 러시아 문학의 시작을 알린 문호이자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 러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중 한 명. 러시아 문학사에서 중단편 소설의 시대를 연 작가다. 
본명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야놉스키(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Яновский). 우크라이나어로는 뮈콜라 바실료비치 호홀야노우스키(Микола Васильович Гоголь-Яновський, 영어로는 Nikolai Vasilievich Gogol-Yanovsky 이다.

소설 '외투'의 저자 고골의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코샤로우스카(1791~1868)의 30대 모습을 그린 반신 초상화. photo by wikipedia

1.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미르호로드구 벨리키소로친치(옛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 미르고로드군 소로친치)지역에서 400명의 농노를 소유한 폴란드계와 우크라이나계 혼혈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실 파나소비치 호홀(고골)야노프스키(Vasily Opanasovich Yanovsky,1777~1825), 어머니는 마리야 이바노브나 코샤로우스카(Maria Ivanovna Kosyarovskaya,1791~1868)다.어머니는 1710년 루브니 연대 장교였던 레온티 코시로우스카의 후손이다. 고골의 할아버지인 아파나시 데먀노비치 고골-야노프스키(1738~1805)는 "고골이라는 성을 가진 조상은 폴란드 민족 출신"이라고 기록했다.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14세 때 바실리 아파나시예비치 고골-야노프스키와 결혼, 고골 외에 이반(1810~1819), 딸 마리아(1811~1844), 안나(1821~1893), 엘리자베타(1823~1864), 올가(1825~1907) 등을 낳았다. 고골의 아버지는 극장을 운영한 아마추어 극작가였고,고골 나이 16세 때 사망했다.
1820년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히우 주 니진(Nezhin)으로 가서 제정러시아 총리를 지낸 베즈보로드코 왕자(Prince Alexander Andreyevich Bezborodko,1747~1799)의 이름을 딴 베즈보로드코리세움(고등예술학교, 현 니진 고골 주립 대학교)’을 다녔고, 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28년 니진 리세움을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2.고골은 1829년 말 공직에 들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기로 근무했고 곧 서기장의 보좌관이 되었다. 그해 V.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니진에서 쓴 낭만적인 전원시 '간츠 퀴헬가르텐(Gants Küchelgarten)'을 출간했다.
1830년에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문학 평론가, 언론인 오레스트 소모프( Orest Mikhailovich Somov , 1793~1833),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 출판인 안톤 안토노비치 델비그델비그(1798~1831),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 시인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플레트네프(Pyotr Aleksandrovich Pletnev, 1792~1866) 등 문필가들을 처음 만난데 이어 이듬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바실리 안드레예비치 주콥스키(1783~1852, 약칭 V. A. 주콥스키)와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푸시킨(1799~1837)의 동아리에 가입했다.
1834년에는 무자격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중세 역사학(키사크) 등을 강의했다. 한편 1836년 4월19일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린스키 극장(The Alexandrinsky Theatre,러시아 첫 극장)에서 희곡 ‘검찰관’이 초연됐다. 이후 프랑스 파리 여행 중이던 1842년 대표작 ‘죽은 혼(Мёртвые души, 제목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치치코프의 모험)’ 1부를 발표했다.

고골 등 러시아 작가들의 뮤즈- 러시아 제국 궁정 시녀이자 회고록 작가 알렉산드라 오시포브나 스미르노바-로제티(1809~1882) 초상화. 러시아 수채화 초상화의 창시자이자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불린 표트르 표도로 비치 소콜로프(1787~1848) 작품이다. 모스크바 푸쉬킨 박물관 소장. photo by wikipedia

3.고골에게 큰 영향을 미친 여인은 어머니 외에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 알렉산드라 오시포브나 스미르노바 로제티(Alexandra Osipovna Smirnova, 1809~1882)이다. 둘이 연인관계까지 가진 않았는지 몰라도 정신적, 정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고골은 1842~1844년 사이 로마에서 유부녀 스미르노바와 함께 보내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 궁정 시녀이자 회고록 작가인 스미르노바는 당대 유명 작가들의 뮤즈이기도 했다. 스미르노바는 외무부 관리이자 모스크바 근처 스파 스코예 영지 소유주인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스미르노프(1807~1870)와 정략 결혼해 가난에서 벗어났고, 주로 자녀들과 함께 해외에서 거주했다. 한편 대표작 '죽은 혼(Мертвые души)'은 제정 러시아 당국 검열로 인해 1842년 5월 주인공 이름을 따서 '치치코프의 모험' 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고골의 친구였던 러시아 역사화가이자 풍경화가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1806~1858)가 로마에서 1841년 그린 고골 초상화.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http://az.lib.ru

4.고골은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사춘기에 동생 이반이 죽고 16세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정신 상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선과 악’, ‘종교와 윤리’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근본 원인이 됐다. 특히 심리적 불안정이 이어지면서 끝내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1847년 말 고골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살았고, 1848년 초에는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예루살렘을 둘러본 뒤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플과 오데사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모스크바에 살면서 집필에 전념,  1850년 ‘죽은 혼(Мертвые души, Dead Souls)’ 2부를 완성했다고 친구들에게 통보해 놓고, 수정 보완만 한 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2년 후에 대부분을 태워버렸다. 우울증이 정신질환으로 악화한 것이다. 이 때 고골은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끝내 수도사 생활은 하지 못했다.
병 치료를 위해 1850년 여름에 다시 어머니 등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진전이 없자 이듬해 가을부터 모스크바에 정착, 친구인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톨스토이 백작의 집(모스크바 니키츠키 대로 7번지)에서 살았다. 이 건물은 1972년 작가 기념 박물관이 됐다.

로마에서 만난 러시아 예술가 그룹-1845년 고골이 있던 로마에서 건축가 프리드리히 에핑거(Friedrich Eppinger), 칼 바인(Karl Beine), 파벨 노트벡(Pavel Notbek), 이폴리토 모니게티(Ippolito Monighetti ), 조각가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스타바 세르(Pyotr Andreyevich Stavaser) , 니콜라이 라마자노프(Nikolai Ramazanow), 미하일 슈루포프(Mikhail Shurupow), 화가 피멘 오를로프(Pimen Orlov), 아폴론 니콜라예비치 모크리츠키(Apollon Nikolayevich Mokritsky) , 미하일 미하일로프(Mikhail Mikhailov), 바실리 이바노비치 스턴베르크(Vasily Ivanovich Sternberg ) 등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중앙 여인은 이탈리아 모델 마리우치아이다. 러시아 사진작가 세르게이 르보비치 레비츠키 작품. photo by wikipedia

5.고골은 보수주의자로 제정러시아 로마로프 왕조(Семьи Романовы,1613~1917)와 러시아 정교회를 적극 지지했다. 두 둘에는 '신의 계시가 내려졌다'고 할 정도였다. 제정러시아 11대 황제 니콜라이 1세( Nikolay Pavlovich, 1796~1855)가 후원해 연극으로 공연한 '검찰관(초연 1836)'이 차르 체제 비판이라는 해석이 평단에서 나오자 충격을 받기도 했다.
1847년 출판된 저서 '친구들과 서신에서 발췌한 구절들'에서도 차르 독재와 농노제, 정교회를 적극 옹호했다.이에 고골을 후원했던 문학평론가 비사리온 벨린스키(Vissarion Grigoryevich Belinsky, 1811~1848)는 후원을 끊고, 고골을 공격했다. 벨린스키는 "나쁜 책(미학적으로 나쁜 책)은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해로운 책(이념적, 도덕적으로 나쁜 책)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며  '친구들과 서신에서 발췌한 구절들'의 출판을 맹비난했다. 
고골은 또 반유대주의자로 지목됐다. 고골이 여러 글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화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적 편견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유대인 출신 작가이자 군인 이제에프 자보틴스키(Vladimir Yevgenyevich Zhabotinsky, 1880~1940)와 러시아 출신 프랑스 역사가 레옹 폴리아코프(Лев Поляков , 1910~1997) 등은 고골의 반유대주의를 적극 비판했다.

19세기~20세기 초 가장 유명한 러시아 화가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1844~1930)이 그린 고골-소설 죽은 영혼 2부 원고를 불태우는 고골 모습을 그렸다. http://www.art-catalog.ru

6.고골의 정신질환이 악화 한 것은 1852년 1월 친한 친구로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인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야지코프(N. M. Yazykov, 1803~1847)의 동생으로 시인이자 신학자인 알렉세이 스테파노비치 호먀코프(Алексе́й Степа́нович Хомяко́в , 1804~1860)의  아내 에카테리나 미하일노프나(Ekaterina Mikhailovna)의 죽음을 듣고서다.
고골은 친구 누이의 죽음을 듣고 두려움에 휩싸였고, 문학 활동을 포기했다. 그리고 단식 기도를 하면서 밤을 샐 때 '곧 죽을 것'이라는 목소리를 듣는 환청상태가 됐다. 단식이 이어지면서 2월 중순 고골은 서서히 죽어갔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한 9일째에 영면했다. 향년 43세. 
장례는 모스크바 대학의 세인트 타티아나 교회에서 진행됐고, 인근 다닐로프(Danilov) 수도원 묘지에 묻혔고, 묘위에는 십자가상을 장식했다. 하지만 소련 시대인 1931년 다닐로프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노보데비치(Novodevichy) 수녀원에 있는 노보데비치 묘지(Cemetery)로 이장됐다. 이장을 위해 묘를 판 결과 고골은 얼굴이 아래로 향해 있어서 '산채로 묻혔다'는 음모론도 나왔다. 묘지 장식은 십자가 대신 고골 흉상으로 대체됐다.
주요작품은 ‘초상화(1835)’, ‘코(1836)’, ‘마차(1836)’, ‘검찰관(1836)’, ‘죽은 영혼(1부 1842, 2부 일부 1855)’가 있다. 또 ‘외투’, ‘결혼’, ‘도박사’  등은 작품집에 묶어 출간(1842)됐다.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원에 있는 고골 무덤과 기념비. 당초 다닐로프 수도원에 있던 묘는 이곳으로 이장됐다. 묘실과 묘비, 흉상을 모두 갖춘 것은 1952년이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관광지다.

7.고골은 러시아에서 '최초의 러시아어 사실주의 작가이자 자연주의 학파의 수장(러시아 문학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고골의 리얼리즘(사실주의) 정신은 훗날 러시아 예술은 물론 유럽 작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문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러시아 후배 작가로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문학 비평, 정치 풍자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1884~1837, 영어이름 Eugene Zamyatin), 소설가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Afanasyevich Bulgakov, 1891~1940)를 비롯, 당대의 주요 소설가들이 고골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2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세라피온 형제회(Серапионовы Братья)에 소속된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직접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부 니키츠키 대로(Nikitsky Boulevard)에 위치한 고골의 기념비. 러시아 조각가 니콜라이 안드레예프(1873~1932)가 말년의 우울한 모습을 조가한 작품이다. 당초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현재 고골 입상 자리에 있었으나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지시로 옮겨졌다. photo by google

8.러시아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떠받들어지는 고골의 기념물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각국에 많다. 첫 기념물은 조각가 니콜라이 안드레예프(Nikolay Andreyev's, 1873~1932)가 앉은 형태 동상으로 만든 작품으로 모스크바 중심가 니키츠키 대로(Nikitsky Boulevard)에 있다. 이 동상은 당초 현재 고골 입상이 있는 모스크바 고골로프스키 대로 아르바트 광장에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1878~1953)이 동상 대체를 지시,
1952년 조각가 니콜라이 톰스키(Nikolai Vasilyevich Tomsky, 1900~1984)가 새로 만든 입상으로 교체됐다.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빌라 보르게세 정원), 스위스 브베 등에도 기념 조각상이 있다. 박물관은 두개 있다. 출생지인 우크라이나 벨리키 소로친치의 고골 박물관, 모스크바에 있는 니콜라이 고골 하우스 박물관이다. 소련과 러시아에서는 여러 개의 기념 주화도 발행됐다. 2009년에는 출신국인 우크라이나 국립 은행이 고골 기념 동전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에 있는 빌라 보르게세(Villa Borghese) 정원에 있는 고골 동상.photo by wikipedia

9.고골의 작품을 토대로 영화만 135편 이상이 제작됐다. 가장 최근 작품은 캐나다에서 나온 드라마영화로 ‘흰 코트를 입은 소녀(The Girl in the White Coat, 2011)이다. 캐나다 영화감독 대럴 와식(Darrell Wasyk, 1958~현재)이 각본,감독했다.
일본 요절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가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1849)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콘텐츠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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