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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갈리아 전쟁기-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의 압도적인 글쓰기로 전쟁문학의 원전되다 본문
"갈리아 전체는 세 지역으로 나뉜다.한 지역에는 벨가이인, 다른 한 지역에는 아퀴타니인, 나머지 한 지역에는 그들 스스로는 켈타이인이라고 부르고 라틴어로는 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살고 있다.세 지역 모두 언어, 제도, 법률이 서로 다르다.갈리아인은 남쪽으론 가론강을 사이에 두고 아퀴타이인과 분리되고, 북쪽으론 마른(Mame)강과 센강(Seine)을 사이에 두고 벨가이인과 분리된다. 세 민족 중 가장 용감한 민족은 벨가이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프로빈키아의 문화와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상인들이 성품을 유약하게 만드는 일용품을 가지고 출입하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 (김한영 역, 사이,2005)

1.글에 꾸밈이 없고, 제3자 관점의 객관적 서술로 시작된다. 영웅 카이사르의 전장 이야기 치고는 첫 문단이 싱겁기 짝이 없다. 화려한 수식없이 질박한 문체로 글쓴이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글을 쓸 때 좋은 서술 기법이다. 자기주장을 최대한 내세우지 않고 설득하는 글을 쓸 때 적극 차용(借用)할 만한 문체다.
2.카이사르(영어명 Julius Caesar,줄리어스 시저)의 ‘갈리아 전쟁기(BC52~BC 51년 초)’는 당대 영웅 카이사르의 갈리아(Gallia,현재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벨기에, 피레네 산맥 주변)) 정복(침략)기록이다.
로마군단의 갈리아에서의 전쟁 이야기는 물론 지역 거주민의 성격,다양한 문화 등이 펼펴진다. 특히 지피지기(知彼知己), 심리전, 지형 활용,공성(攻城) 기술 등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3.로마가 야만족으로 지칭하는 갈리아를 정복한 장군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 자신의 군단 그대로를 이끌고 로마 제국의 북부 루비콘 강을 건넌다.
당시 로마 '원로원과 지도층'은 물론 카이사르 반대파들은 '단신 입국'을 외쳤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원로원 권고와 관행을 무시하고,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했다.사실상의 쿠데타 예비단계였다. 로마는 무엇인가 터질것 같은 불온한 기운이 가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런 것에 아랑곳 않고 갈리아 정복기를 쓰고 있었다. 원로원 등 기득권층은 카이사르를 불안에 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4.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도 글을 쓰는 문사(文士)였다. 그는 진중에서도 다양한 기록을 했다.
로마에 입성, 은인자중하며 쓴 갈리아 전쟁기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카이사르는 막강 군단과 민중파의 지지를 얻는다. 특히 로마 정계를 장악, 독재관까지 오른다. 원로원 보수파가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튼 갈리아 전쟁기는 당대의 명사이자 카이사르 반대파였던 유명 철학자 마르쿠스 툴르스 키케로(BC 106~BC 43)마저 감동케했다. 키케로는 한 저서(BC 46년)에서 "카이사르의 글은 알몸과 같아서 인간이 몸에 걸치는 장신구를 벗어던졌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돼 있다"고 호평했다. 독재로 치닫는 것을 우려해 카이사르의 행위를 결사 반대한 키케로의 격찬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정복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도 "갈리아 전쟁기는 전쟁 기술에 관한 최고의 교과서"라고 극찬했다.
5. 갈리아 전쟁기 첫 문단은 특히 많은 저서(특히 르포문학,여행기 등)들의 교본(敎本) 역할을 했다. 많은 이들이 첫 문단을 어떻게 쓸까 고민할때 참고하는 책이다.
갈리아 전쟁기는 또 근현대 들어 유럽 각국에서 라틴어 교본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책이 됐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로마 최고 집정관(독재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기원 전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
1.기원전 100년 7월 출생했다. 명칭은 가이우스(개인 이름) 율리우스(씨족 명) 카이사르(가문 명)이다. 아름다움의 여신 베누스(비너스)의 자손을 자칭하는 가문이었지만 몰락한 상태였다.
가문에서 출세한 이가 없어서 평민 출신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7~86, 민중파의 거두로 집정관을 지냄)가 카이사르의 정치적 멘토였다. 태생적으로 민중파였던 셈이다.
27세 때 제사장에 임명되고, 30세에 회계감사관, 37세에 최고 제사장, 38세에 법무관, 41세에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이 된다. 42세에 서유럽(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서부, 룩셈부르크,, 스위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총독을 지냈다.
2.카이사르가 급부상한 것은 고도의 책략의 결과였다. 이른바 약자들의 결합,삼두정치다. 현대 정치에서 말하는 연합, 혹은 연립정부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BC 53),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Pompey the Great, BC 106~BC 48)와 개인적으로 손잡고 콘술(집정관)이 됐다.
이후 켈트족 중심의 갈리아를 7년 동안 정복한 후 단신 귀국 관행을 무시하고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입성한다. 군대해산 명령인 원로원 최종 권고(로마의 적 규정)가 나오자 사실상의 쿠데타를 결행한 것이다. 이후 지지군단과 민중파를 바탕으로 종신 집정관을 거쳐 로마 최고 관직인 독재관 임페라토르(imperator, 영어 엠퍼러(emperor) 어원)에 오른다.
3.카이사르는 대머리 카이사르라 부를 정도로 젊었을 때부터 탈모에 시달렸다. 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이사르는 코르넬리아 킨나, 술라의 외손녀 폼페이아, 칼푸르니아 등과 결혼했으나 적자(嫡子)를 얻지 못했다. 카이사르 적출 소생은 율리아(Julia, 나중에 폼페이우스 아내) 뿐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의 아들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둥이였다. 유부녀들과 염문은 당대 로마의 화제였다. 로마 최고 갑부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115~BC53) 아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Strabo,BC135?~BC87)의 아내는 물론 정적 작은(小) 카토(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BC95~BC46)의 여동생도 있었다.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BC 69~BC 30)와의 연애도 잘 알려져 있다.
카이사르가 여성들에게 보낸 수많은 연애 편지는 사후 카이사르 신격화에 나선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모두 없앴다고 한다.
4.비극적인 죽음으로 더 유명하다. 기원전 44년 3월15일 로마 원로원에서 반대파의 칼에 수십군데 찔리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인 카이사르는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살해당했다.
이후 18~20일 사이에 카이사르 부하장군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83~BC30) 주도로 국가적인 장례 절차를 거쳐 화장된다.
5.카이사르는 '로마제국 하면 카이사르' 라고 할 정도로 세계 역사의 '원톱'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은 지냈지만 생전에 황제가 되지 못했다. 후계자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BC63~AD14, Augustus 황제)가 명실상부한 황제가 됐다.
카이사르 라는 이름은 이후 독일의 '카이져', 러시아의 '차르' 등 황제의 뜻이 됐다. 직함인 임페라토르(imperator)도 Emperor(황제), Empire(제국)로 발전했다
6.카이사르의 출생 월인 7월은 율리우스의 영어식 표기 'July'로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수많은 저술 기록이 있지만 실제 전해지는 것은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뿐이다. 카이사르 이야기로 가장 유명한 책은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줄리어스 시저'가 있다.

7.유럽에서는 ‘카이사르의 행운(Fortuna Caesaris· Felicitas Caesaris)’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 AD70?~122)는“카이사르는 운명을 권력 쟁취의 동력으로 삼았던 슈퍼 휴먼”,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AD46?~122?)는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에 강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했다.
현대에 와서 카이사르 연구 권위자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Adrian Goldsworth, 1969~현재,영국)박사는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카이사르에게 미소 지었다”고 말했다.
8.카이사르는 언어마다, 나라마다 발음이 다르다. 고전 라틴어는 카이사르(Caesar), 교회 라틴어는 체사르(Cæsar), 고대 그리스어는 카이사르(Καῖσαρ), 그리스어는 케사로스(Καίσαρος), 이탈리아어는 체사레(Cesare), 독일어는 체자어(Cäsar), 러시아어는 체자리(Цезарь), 폴란드어는 체자르(Cezar), 스페인어는 세사르(César), 포르투갈어·프랑스어는 세자르(César)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