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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걸리버 여행기-풍자와 조롱의 진수를 보여준 최고의 기행소설 첫 문단은 거대 서사도 상징도 없이 그저 그렇게 시작한다. 본문
제1부 소인국 여행기 제 1장 저자가 그 자신과 가족에 대해 간력하게 말하고 처음 여행에 나서게 된 이유들을 설명한다. 그는 바다에서 배가 난파하여 목숨을 건지려고 열심히 헤엄을 쳤고, 릴리펏 나라의 해안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는 그나라의 포로가 되어 수도로 끌려간다.
"나의 아버지는 노팅엄셔에서 자그마한 땅을 갖고 있었다. 나는 다섯 아들 중 세번째였다. 아버지는 내가 열네살이었을 때 케임브리지의 에마누엘 칼리지에 갔고, 나는 그 곳에서 3년동안 머물면서 학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나를 유학시키는 비용은(나의 생활비가 아주 소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작은 재산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런던의 유명한 이사인 제임스 베이츠 선생님의 도제로 들어가서 그분밑에서 4년을 일했다. 아버지는 가끔 내게 소액의 돈을 부쳐 주었다. 나는 그 돈을 잘 모아 두었다가 항해술과 그에 관련된 수학 지식을 배우는데 사용했다. 그런 지식은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었는데 나는 장래 언젠가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늘 생각했다. 나는 베이츠 선생님의 집을 나온 뒤에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아버지---."(조나단 스위프트 저,이종인 역, 현대지성, 2019)
1.18세기 근대소설 기법이 정착하는 시기여서 인지 여느 소설과 다른 도입부를 보이고 있다. 희곡의 첫 장 무대 설명처럼 머리말 형식의 소제목에 편집자가 친절하게 주인공의 상황을 설명하는 설정을 하고 있다. 전체 모험의 줄거리를 알려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편집자의 과도한 개입(각색,첨삭 등)의 흔적이다. 이는 정색하고 본문을 시작하는 것에서도 알수 있다. 본문은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자서전 일기를 쓰듯이 펼쳐진다.출신 성분과 이력, 모험의 준비 과정을 일기, 혹은 수필을 쓰듯이 회상조의 설명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부조리하다.가난하지만 대학을 수학 하고, 머슴살이(도제)를 하며서 항해술을 배우고, 당대 머슴은 꿈도 못꾸는 여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서술을 한다. 첫 문단에는 상징이나 비유, 풍자나 사회 조롱 등이 없다.단순한 문체에 무미건조한 이야기여서 독자의 흥미도 끌지 못한다. 도입부는 이른바 소설적 구조나 요소가 없는 산문형 문체다. 장황한 설명이 따르는 기행문 형식이다. 소제목에 나오는 *릴리펏(Lilliput)은 작은 이들이 사는 상상의 땅이다. 본문에 나오는 *노팅엄셔(Nottinghamshire)는 영국 잉글랜드 미들랜즈 주 동부에 있는 지역이다. *14살에 대학 가는 일은 당대에 흔히 있었던 일이다.
2.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1726)'는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풍자문학의 진수다. 상상도 어려운 환상의 모험속에 인간 문명과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 조롱을 담은 최고의 걸작이다. 국내에 어린이용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전 4부작으로, 18세기 문명과 영국 정치현실 등을 꼬집은 성인용 모험 대작이다.
런던 벤자민 모테(Benjamin Motte,1693~1783, 출파업자 겸 출판사 이름)에서 1726년 10월 익명(匿名, 이름을 숨기거나 다른 이름을 쓰는 것)인 '레뮤얼 걸리버'로 나오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모두 2권의 가격이 당시로서는 비싼 8실링 6펜스였는데, 1주일도 채 안돼 첫 인쇄본이 매진됐다. 당시 저자는 소설에 비판 내용이 많아 구속(기소)을 각오할 정도였는데 책을 낸 출판인 벤자민 모테가 소설의 일부를 삭제 변경하거나 소설 시대 배경인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 '여왕 앤'(Queen anne,1665~1714,후임은 독일 하노버 제후 조지 1세,George I) 을 옹호하는 이야기를 곁들여 냈다. 그런데 책이 날개돋힌 듯 팔리자 출판인 벤자민 모테는 익명의 다양한 버전으로 가공해 돈벌이를 했다.
당시 책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으면 시인이자 극작가 존 게이(John Gay,1685~1732)는 "내각 위원회에서 보육원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힌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출판 초부터 쉽고 평이한 서술기법으로 인해서 문자를 깨우친 남녀노소 모든 나이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원본은 성인용 풍자 동화로 1720년에 시작해 1부와 2부가 쓰여졌고, 4부가 1723년, 3부가 1724년에 완성됐다. 물론 저자 최종본은 1725년 8월 완성됐다. 원제는 '세계 여러 외딴 나라로 여행기, 네 개의 이야기, 처음엔 외과 의사, 그 다음에는 여러 척의 배의 선장이 된 레뮤엘 걸리버 지음(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 In Four Parts. By Lemuel Gulliver, First a Surgeon, and then a Captain of Several Ships)이다. 외국어로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피에르 프랑수아 기요 -데퐁텐 아베( Pierre Desfontaines Abbé,1685~1745)가 런던에서 나온지 1년도 채 안된 1727년 번역했다. 그해에 독일어, 네덜란드어로도 번역본이 나왔다.
3.1735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출판사 조지 포크너(George Faulkner,1703~1775, 출판인이자 출판사)가 스위프트의 작품 모음집을 인쇄했다. 그 중 세번째에 '걸리버 여행기'를 실었다. 그런데 이 판을 낸 이후 광고에서 저자는 "나는 (벤자민 모테가 출판한)낸 작품을 거의 모른다"고 말했다.이 때 나온 판을 진정한 정본으로 인정한 셈이다. 런던에서 초판부터 10여년동안 인쇄해 온 벤자민 모테가 책을 삭제하거나 변경해 상업적으로 너무 이용해 먹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벤자민 모테는 조지 포크너가 낸 아일랜드 판 '걸리버 여행기 '의 런던 판매를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했다.
4. 소설 '걸리버 여행기 '는 우선 재미있다. 내레이터가 거친 표현과 풍자, 과장과 허풍 등을 통해 영국 현실과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해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1인칭 서사로 무심한 문장을 끌고 가면서도 창의적인 서사가 이어지고, 판타지(작은 사람, 거인, 날아다니는 섬, 죽은 자의 영혼, 노망난 불사신, 말하는 말, 혐오스러운 휴머노이드) 등 블랙 유머가 넘쳐난다. 저자가 "세상의 주의를 돌리기보다는 괴롭히기 위해 썼다"고 할 정도로 부조리한 세상에 '풍자의 폭탄'을 던진다.
5.책에는 당시 처음 쓰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제1편의 릴리펏(Lilliput)은 '작고 섬세하다'는 의미다. 제2편 브로브딩내그(Brobdingnag)는 '매우 크거나 거대한' 이라는 말이다. 야후(Yahoos)는 '무례하고 시끄럽고 폭력적인 사람'을 뜻한다. 후이넘(Houyhnhnms)은 말 종족의 이름이다. 말 종족 언어로 ‘자연의 완성’이라는 뜻이다. 라퓨타는 공중에 떠 있는 섬 라퓨타(Laputa) 혹은 스페인어로 매춘부을 뜻하는 라뿌따(La puta)이다. 또 린달리노(Lindalino)는 Lin이 두개, 더불린을 뜻한다.
등장인물과 동물은 주인공이자 이야기꾼 레뮤얼 걸리버(Captain Lemuel Gulliver), 걸리버가 처음 방문한 섬의 주민들 릴리푸리탄스(Lilliputians), 거인처럼 큰 사람들 브로브딩내그 (Brobdingnagians),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말이자 주민 후이넘 (Houyhnhnms)과 후이넘의 지배를 받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간 야후(Yahoos) 등이다.
5.줄거리는 주인공으로 의사인 걸리버가 선의(船醫)로 취직해 세계를 돌아다니다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릴리펏,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 브로브딩내그, 날아다니는 섬의 나라 라퓨타, 말(馬) 모양을 한 지성체 후이넘이 지배하는 나라를 방문해 겪는 일이다.
소인국에서 거인 취급을 받다가 거인국에서 손가락만 한 입장이 돼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비교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또 하늘을 나는 섬 등을 방문해 사색에 잠긴 사람들과 불필요해보이는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들, 죽은 자와 과거의 장면을 현실에 불러올 수 있는 마법사들을 만난다. 말의 나라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추악하고 어리석은 동물 야후와 존경스러운 품격과 예의를 갖춘 말 모양 동물 후이넘도 만난다. 걸리버는 가는 곳마다 적응을 잘해 런던으로 돌아오면 후유증으로 고생한다. 걸리버는 자신이 방문한 땅이 영국의 식민지로서 권리상 영국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야만의 제국주의가 숨어 있는 셈이다.
6.걸리버 여행기에는 영국 휘그당과 여왕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은 물론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무자비하게 논리적인 후이넘, 야수 같은 야후 등이 인간를 거세하는 계획, 걸리버가 여왕의 집에 소변을 누어서 파괴적인 화재를 끄는 장면, 매우 음탕한 여성 야후를 물리쳐야 하는 장면 등이다.
현대 유명 소설 '동물농장', '1984'의 저자인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본명 Eric Arthur Blair, 1903~1950)은 '걸리버 여행기'에 대해 “아무리 읽어도 지겹지 않으며, 다른 모든 책들을 파괴하고 오로지 여섯 권만 골라야 한다면 그 중의 하나로 이 책을 고를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시인이자 철학자 제임스 비티(James Beattie, 1753~1803)는 "스위프트의 작품은 서사에 대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며 "정치가, 철학자, 비평가가 그의 풍자적 예리함, 묘사의 에너지, 언어의 생동감에 감탄할 것"이라고격찬했다. 영국 문학사가 조지 세인츠베리(George Edward Bateman Saintsbury, 1845~1933)는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재미의 원천”이라고 평했다.
다만 저자의 친구이자 이 책의 최초 비평가 중 한 명인 정치 철학자이자 행정가 헨리 세인트 존 제1대 볼링 브룩 자작(Henry St John , 1st Viscount Bolingbroke, 1678~1751)은 "노골적으로 인간혐오를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또 영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메이크피스 태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 1811~1863)도 "(종교 비판은)신성모독적"이라면서 "인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우스꽝스럽고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말했다
7.속편이 이어졌다. 가장 초기에는 익명의 저술 '릴리펏 궁정의 추억(Memoirs of the Court of Lilliput)'이 1727년에 출판됐다. 릴리펏 궁정에서 스캔들, 에피소드 등을 썼다. 프랑스어로 첫 번역한 피에르 데스폰테인(Abbé Pierre Desfontaines)은 '새로운 걸리버 또는 걸리버 선장의 아들인 존 걸리버의 여행기'를 1730년에 출판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현대 공상과학 작가의 여러 작품에서 패러디했다. 미국 작가이자 보스턴 대학교 생화학 교수를 지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 1920~1992)는 1880년 낸 한 책에서 날아다니는 섬(라퓨타)을 묘사했다. 아시모프는 1980년 주석을 붙여 출간한 '걸리버 야행기'에서 "스위프트가 소개한 단어와 구절을 이해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8.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은 쏟아졌다. 1902년 프랑스에서 바로 조르주 멜리에스(Marie-Georges-Jean Méliès, 1861~1938)에 의해 무성 단편영화로 나온 게 최초다. 현재는 사진과 시나리오만 남아 있다. 유성 영화는 1935년에 소련에서 만든 75분짜리가 최초다. 제목은 새 걸리버(Новый Гулливер , Novyy Gullivyer)로 알렉산드르 루키치 프투슈코(Александр Лукич Птушко , 1900~1973)가 감독했다. 미국에서는 1939년 애미메이션으로, 1960년 콜럼비아 픽처스에서 100분짜리 영화 '걸리버의 제3세계(The 3 Worlds of Gulliver)'로 나왔다. 1965년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 달 너머로 가는 걸리버 여행'가 나왔다.
영국에서는 1977년 리처드 해리스 주연 영화 '걸리버 여행기'가 벨기에와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영화가 나왔으며, 2003년에는 인도에서 판타지 액션 코미디 '자잔타람 마만타람(Jajantaram Mamantaram)'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가장 최근 영화는 2010년 크리스마스에 잭 블랙 주연으로 1억2000만 달러 이상 제작비를 쓴 '걸리버 여행기'로 나왔다. 쓰인 영화로 나왔다. 제국주의 미화 등 악평이 쏟아지면서 미국 흥행수익이 4천만 달러에 그쳤다.애니메이션은 2021년에 개봉한 우크라이나에서 만든 극장판 '걸리버 리턴즈'가 가장 최근이다.
9.걸리버 여행기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3부 일러스트 지도에 라퓨타와 럭넥, 일본 등이 나오는데 일본 서쪽 해협의 명칭이 'Sea of Corea'로 나온다. 300년 전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원전 삽화에 '한국해(동해)'가 표기된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 자체가 동해와 독도가 우리의 고유 영토임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출판은 1970년대 삼성판 걸리버 여행기로 나왔다.이후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계림문고, '보성 우리들문고' 등에서 다양하게 나왔다. 전체 내용중 '소인국' 과 '거인국' 편만 축약된 채 어린이용으로 편집 출판됐다. 1997년에는 '만화로 보는 세계 고전의 걸리버 여행기'도 나왔다. 무삭제 완역본이 나온 것은 1992년이다. 출판사 문학수첩에서 나왔는데 신현철이 완역했다.
한편 일본은 걸리버가 상륙한 곳(추정)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광사업화 하고 있다. 도쿄(東京) 남쪽 요코스카(横須賀) 칸논자키(観音崎,かんのんざき, 카논자키)는 걸리버가 일본에 처음 발을 디딘 샤모스치 항구로 보고 다양한 행사를 한다. 요코스카지역관광협회는 매년 11월 걸리버-칸논자키 축제도 연다. 칸논자키에는 1869년에 완성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등대가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1667~)=영국 아일랜드계 풍자 작가, 수필가, 정치 팸플릿 작가, 시인. 더블린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의 수석 사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산문 풍자 작가이다. 별명은 '대주교 스위프트'. 모든 작품을 가명(레뮤얼 걸리버 , 아이작 비커스태프 , MB 드레이피어 등)혹은 익명 출판했다.
1.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1640~1667)와 그의 아내 애비게일 에릭(Abigail Erick or Herrick)의 둘째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영국 레스터셔주 멜튼 모브레이 프리즈비( Frisby)의 워크(Wreake)마을에서 살았다.그런데 왕당파(Royalist, 왕정주의자) 아버지가 1642~1651년 사이 벌어진 왕당파 대 의회파 사이 내전에 휘말려 재산을 빼았겼다.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형과 함께 변호사 활동을 했는데 스위프트 탄생 약 7개월 전 더블린에서 사망했다. 아버지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자 유모가 자신의 고향, 북부 잉글랜드 컴벌랜드(Cumberland)주 화이트헤븐(Whitehaven)으로 데려가 3살때까지 키웠다. 스위프트는 이때 성경을 배웠다고 나중에 밝혔다. 이후 여섯살 무렵 어머니와 함께 영국의 삼촌 고드윈 스위프트(Godwin Swift,1628~1695) 집으로 이사갔다. 이 때 삼촌의 친구인 영국 아일랜드계 변호사, 궁정 신하, 정치인 존 템플(John Temple,1600~1677)을 만났다. 이런 인연으로 나중에 존 템플의 아들은 스위프트를 비서로 고용했다.
2.스위프트의 삼촌 토마스 스위프트(Thomas Swift)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데이버넌트 경(Sir William Davenant,1606~1668)의 딸과 결혼했는데, 데이버넌트는 대문호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대자(代子)였다.
스위프트는 15살이던 1682년 아일랜드 더블린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Trinity College Dublin)에 입학, 중세 사제직을 위한 커리큘럼을 소화하고1686년 학사 졸업했다. 석사 과정을 밟던 1688년 스위프트는 런던으로 갔고, 윌리엄 템플 경, 1대 준남작(1628~1699)의 비서로 활동했다.
3.스위프트에게는 두명의 여인이 있다. 한명은 윌리엄 템플 경의 비서로 갔을 때 처음 만난 평생 뮤즈 에스터 존슨(Esther Johnson,1681~1728, 애칭 스텔라)이다. 스위프트는 1696년 스텔라를 다시 만났는데 '런던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고 상냥한 젊은 여성'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두사람의 공식 혼인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그래서 1704년 두 사람의 공통 친구인 윌리엄 티스달(William Tisdall, 1669–1735) 목사가 스텔라에게 청혼 편지를 보냈을 때 스위프트는 반대했고, 절교까지 했다. 스위프트와 스텔라의 사랑은 1707년 깨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스위프트는 1707년 22살 연하의 여인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더블린 시장을 지낸 바솔로뮤 반 홈릭(Bartholomew Van Homrigh,?~1703, 시장 재위 1697~1698)의 딸 에스더 반홈릭(Esther Vanhomrigh, 1688~1723)이다.
스위프트는 반홈릭을 애칭 '바네사(Vanessa)'로 불렀다. 그런데 바네사는 스위프트에게 스텔라를 만나지 말것으로 종용했는데 이 때문에 두사람을 격렬하게 싸운다.결국 바네사는 1723년 결핵에 걸려 사망하면서 스위프트 앞으로 돼 있는 자신의 유언장을 파기해 낯선 남자들에게 재산을 준다.
바네사는 스위프트가 그녀의 성 Vanhomrigh에서 Van을 그녀의 이름 Esther의 애칭인 Esse 앞에 붙여 지은 이름이다. 바네사는 스위프트의 시(시집) '케데누스와 바네사(Cadenus and Vanessa,1713년 헌정, 바네사가 죽은 1723년 이후인 1726년 출판)'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바네사는 20세기 들어 여성 이름 '바네사(Vanessa)'로 폭넓게 쓰였다. 하편 스위프트는 강력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앤 롱(Anne Long,1681?~1711)과도 밀도있는 교류를 했다. 그는 앤 롱의 사망시 추모사에 '그녀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인물이었고, 큰 명예와 덕, 무한한 온유함과 관대한 기질과 진정한 상식을 지녔습니다.'고 말했다.
4.스위프트는 1702년 2월, 스위프트는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 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704년 '욕조 이야기(A Tale of a Tub )'와 'The Battle of the Books'를 출판,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여왕 앤(Anne, 1665~1714)의 통치 기간(1702-1714) 동안 더블린과 런던을 자주 오갔다. 정치적으로 처음 휘그당에 적극적이었지만 나중에 토리당에 충성한다. 특히 토리당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면서 외무장관(1710~1715)인 헨리 세인트 존, 볼링브룩 자작(Henry St John , 1st Viscount Bolingbroke , 1678~1751)과 재무장관이자 총리(1711~1714)인 로버트 할리, 옥스퍼드 백작(Robert Harley, Oxford and Mortimer)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조지 1세(George I, 1660~1727)가 즉위하면서 토리당이 야당이 되면서 스위프트도 밀려났고, 아일랜드에 대한 런던 정부에 대한 분노, 다양한 풍자 글을 썼다.
5.스위프트는 1728년 1월28일 에스더 존슨이 죽은 밤부터 '존슨 부인의 죽음'을 쓰기 시작하다가 몹시 아파서 세인트 패트릭성당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때부터 스위프트는 앓는 날이 많았다. 이에 1731년에는 자신의 부고 인 '스위프트 박사의 죽음에 관한 시(Verses on the Death of Dr. Swift)를 썼고, 한참 후인1739년 출판했다.
1732년에 절친이자 협력자였던 존 게이(John Gay)가 사망했고, 1735년에 런던 시절의 또 다른 친구인 존 아버스넛(John Arbuthnot)도 죽었다. 1738년 스위프트는 말기 치매(미친 증상)증상이 뚜렸해졌고, 1742년 뇌졸중까지 걸렸다. 결국 병치레를 하다가 죽기 1년전부터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1744년 절친 알렉산더 포프가 사망했고, 자신의 비문을 쓰고 난 직후인 1745년 10월 19일 스위프트도 영면했다. 향년 78세였다.
더블린 시민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가운데 유언에 따라 1728년 1월 28일 사망해 더블린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묻힌 에스더 존슨(스텔라) 옆에 안장됐다.
재산 대부분(1만2,000파운드)은 1757년 문을 연 정신 질환자를 위한 병원(정신장애인을위한세인트패트릭병원)에 쓰였다. 이 병원은 현재도 정신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목조통 이야기(1704)', '기독교 폐지에 대한 주장(1712)', '걸리버 여행기(1726)', '겸손한 제안(1729)', '드 레이피어의 편지(1724)' 등이 있다. 사후 스위프트가 스텔라에게 보낸 편지 65통을 모은 '저널 투 스텔라( Journal to Stella,1766)가 출판됐다.
6.빅토리아 시대 영국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 1819~1900)은 스위프트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조지 오웰(본명 Eric Arthur Blair , 1903~1950)은 "가장 존경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적시했다. 영국 모더니스트이자 여류시인 에디스 루이자 시트웰(1887~1964)은 스위프트의 허구적 전기인 ' 검은 태양 아래서 산다' 를 썼고 1937년에 출판했다. 소피 실레토 스미스(Sophie Shilleto Smith) 1910년 '딘 스위프트'를 출판했다. 스위프트의 전기를 쓴 최초의 여성이었다.
영국 유명 역사가이자 작가 AL 로우즈(AL Rowse, 1903~1997)는 스위프트의 전기와 그의 작품에 대한 에세이를 썼고, '걸리버 여행기의 팬북스 판을 편집했다. 영국의 소설가 엘리자베스 마이어스(Elizabeth Myer,1912-1947)는 1945년 '세인트 제임스의 바실리스크(The Basilisk of St. James,런던, 채프먼 앤 홀 출판)'를 썼다.이 책은 스위프트와 스텔라, 바네사의 삼각 갈등을 그렸다. 문학 학자 프랭크 스티어 굿윈(Frank Stier Goodwin,1902~1977)은 1940년 스위프트의 전기 '조나단 스위프트-거인의 사슬(Jonathan Swift – Giant in Chains)'를 써서 출판했다.
1982년 유대인 출신의 소련 과 러시아의 극작가 그리오리 고윈(Grigory Gorin, 1940~2000)는 스위프트의 생애 마지막 몇 년과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스위프트가 지은 집(The House That Swift Built)'를 썼고, 극본은 1984년 소련과 러시아의 무대 및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교육자로 활동한 마크 자카로프(Mark Zakharov, 1933~2019) 감독이 같은 이름의 2부작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었다. 영국 소설가 제이크 아노트(Jake Arnott, 1961~현재)는 2017년 소설 역사 허구 모험물 '치명적인 나무(The Fatal Tree)'에 스위프트를 등장시켰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