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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세계 最古를 다투는 소설은 처음부터 궁중의 내밀한 암투 이야기로 시작한다. 본문
“어느 천황의 시절이었던가. 여어(女御) 또는 갱의(更衣)라 불리는 많은 후궁 가운데, 비록 귀족 신분은 아니지만 천황의 애틋한 총애를 받는 갱의가 있었다. 궁중 생활을 할 때부터 내노라하는 부모형제의 권세를 등에 업은 여어들은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낮춰 보았다. 하물며 그 여인과 신분이 같거나 그보다 지체 낮은 갱의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침전에서 발그레한 얼굴로 물러 나오는 아침이나, 잇달아 그 혼자만 부르심을 받은 밤은 주위를 맴돌며 보고들어 잔뜩 시기하는 다른 후궁들의 원망이 쌓인 탓인지 그녀는 조금씩 몸이 쇠약해지고 마음까지 약해져서 핼쑥한 얼굴로 친정집을 찾곤 했다. 그럼에도 천황께서는 더더욱 이 여인에게만 마음이 끌리시는지, 남들의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더니 마침내 대대손손 성덕을 전할 역사 위에 오점을 남기기에 이르렀다.”(겐지 이야기 1권, 추영현 역, 동서문화사, 2020)

1.대하소설의 도입부답지않게 곧바로 궁중 암투 속 주인공을 찾아가는 전개 방식을 택했다. 구중궁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궁중의 까탈스런 생활이나 여인들의 암투, 궁궐주 천황의 동정 등은 소설의 키워드이자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장치다. 편안한 문체로 문장 하나하나가 생생해 이야기를 듣는 듯이 쓰여졌다. 뛰어난 말솜씨를 지닌 변사(辯士)가 내레이션하는 듯한 이야기 전개다. 1000년 전의 소설같지 않은 문장과 문체라고 할수있다. 거대한 메타포나 깊은 은유도 없어 읽고 이해하기에도 편안한 도입부다. *.여어 또는 갱의는 천황의 침소 시중을 드는 여관(女官)이다. 중궁(中宮) 다음 등급의 후궁중의 하나, 혹은 황태자의 여인을 여어라고 한다. 갱의는 여어 아래 등급이다.
2.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1008)’는 세계문학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작품이자 일본 문학의 자부심이다.
중세시대인 1000년 전후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대하 소설로 궁궐살롱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있다. 논란은 있지만 세계 최고(最古), 최장(最長, 200자 원고지 기준 4800매 이상) 고전 소설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 천황 4대에 걸친 70여 년간을 배경으로 궁궐의 사랑과 이별, 권력투쟁과 가문의 몰락, 정치적 영광과 탐욕을 제대로 묘사한 걸작(傑作)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1008년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판본은 무수히 많다.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 초의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 1162-1241, 가마쿠라 시대 궁정 귀족이자 가인, 歌人) 판본이다. 이 판본은 795수의 와카(和歌,일본 정형시)와 에마키(繪卷, 그림 두루마리)도 함께 한다.
겐지 이야기는 일본 ‘가나(仮名) 문자’의 탄생이 가져온 혁명이었다. 기존에는 한자를 사용하는 남성 귀족 중심의 예술 세계였으나 가나가 나오면서 여성이 예술의 전면에 부각된 것이다. 가나의 등장으로 궁궐이라는 권력층의 살롱에서 여성이 쓴 여성 중심의 ‘뇨보(女房) 문학’이 탄생한 것이다.

3.겐지 이야기가 당대의 수많은 모노가타리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뚜렷한 주제 의식, 내용 중에 들어있는 와카, 다양한 인물 군상에 대한 심리 묘사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1008년 11월 중순에 이야기를 집대성해 마무리 하면서 서사(敍事)와 함께 주제와 인물의 심리묘사 등을 곳곳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 따르면 이때 여러 종이를 골라 모노가타리의 원본이 되는 책과 함께 서사(敍事)를 의뢰하는 편지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서사한 것을 책으로 엮어 정리했다고 나와 있다. 일기에는 당대 실력자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가 지필묵을 지원했다는 내용도 있다.
4.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처음으로 저자 논란에 불을 붙인 이는 근대 여성 문인으로 ‘겐지 이야기’를 구어(입말)판으로 출간한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1878~1942)다. 아키코는 겐지이야기의 후편 등을 무라사키 시키부 딸 다이 니노 산미 (Daini no Sanmi)가 썼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저자를 추적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무라사키 시키부를 뒤엎는 연구는 나오지 않고 있다.
5.현재 대부분의 전해진 판본에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라는 제목이 없다. 겐지 이야기(겐지 모노가타리)로 부르고 있지만 이는 후대에 통칭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는 원래는 제목이 없었다는 뜻이다.
전체 제목 보다 각 첩(장)별로 제목이 적혀 있다. 이는 저자가 궁궐에서 중궁(황후) 등에게 이야기 한편 한편을 써서 들려주다 보니 전체 제목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옛 사본과 주석서 등의 문헌에 나와 있는 명칭은 ‘겐지의 이야기(源氏の物語)’, ‘히카루겐지 이야기(光源氏の物語)’, ‘빛나는 겐지 이야기(光る源氏の物語)’, ‘히카루겐지(光源氏)’, ‘겐씨(源氏)’, ‘겐지의 왕자(源氏の君)’ 등이다.
또 ‘무라사키 이야기(紫の物語)’, ‘무라사키의 유카(紫のゆか)’, ‘무라사키의 인연 이야기(紫のゆかりの物語)’ 등으로도 쓰여 있다. 이밖에 ‘겐코(源語)’, ‘시뿐(紫文)’, ‘시시(紫史)’ 등 한자 조합 제목도 있다.

6.겐지 이야기 내용이 제일 많은(분량 기준) 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나고야(名古屋)의 ‘도쿠가와(德川)원-미술관과 정원’이다. 이곳에 있는 겐지 이야기의 에마키는 국보로 관광객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특별실에 있는 것은 복제 인쇄품이다.
겐지 이야기는 거의 모든 일본 문화의 바탕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생산된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겐가쿠(源學)’가 발달했을 정도다.
7.세계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영어로는 1882년 언론인이자 번역가인 스에마츠 겐초(末松謙澄,1855~1920,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사위)가 처음으로 영역했다. 영문명은 ‘The Tale of Genji’로 번역 출판됐다.
하지만 유럽에 폭넓게 알려진 것은 영국의 동양학자 아서 데이비드 웰리(Arthur David Waley,1889~1966, 본명 Arthur David Schlos) 덕분이다.
아서 웰리는 1925~1933년에 ‘The Tale of Genji, by Lady Murasaki’라는 제목의 완역본을 내놓았다. 이 책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서평이 보그 영국판인 ‘British Vogue’에 실려 있다.(BBC Culture 재인용)
겐지이야기는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에 들어가 있다.
8.소설이 쓰여진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는 서기 794년 50대 일본 천황 ‘간무(桓武, 737~806)’의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 천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1147~1199)가 1185년 세운 가마쿠라(鎌倉) 바쿠후(幕府)까지 약 390년 간을 말한다.
헤이안 시대는 초기에는 천황의 친정(親政)이 이뤄다가 세력 가문인 후지와라씨(藤原氏)가 장악했다. 이후 정권 부패로 하급 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이 설치는 시대가 되면서 무사 계급이 급성장, 1185년 무신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바쿠후가 등장했다. 이른바 막부정치가 본격 전개된 것이다.
일본에서 막부 정치는 가마쿠라(1185~1333)에 이어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1368)가 세운 무로마치(室町,1336~157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세운 에도(江戸, 현 도쿄) 막부(1603~1868)까지 700년 동안 이어진다.

9.겐지 이야기는 현대 소설을 능가하는 이야기 전개와 묘사로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힌다. 등장인물만 400여 명에 달하고, 대부분 관직명이나 거처(처소) 이름으로 나온다.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光源氏) 제2황태자, 아버지 기리쓰보(桐壷) 천황과 후궁 기리쓰보 여의(갱의), 선황(先皇)의 황녀 후지쓰보(나중에 중궁)가 나온다.
또 태정관의 딸로 겐지의 첫 번째 정실부인 아오이노 우에, 태정관의 아들로 겐지의 친구 도노추조(내대신), 기리쓰보 천황 형의 후궁이자 겐지의 애인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 후지쓰보 중궁의 조카딸 무라사키 노우에, 겐지의 애인이며 아카시 중궁을 낳는 아카시노 기미, 히타치노미야의 딸로 겐지의 추녀 애인 스에쓰무하나(末摘花) 등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본명으로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겐지의 시종인 후지와라노 코레미츠(藤原惟光)와 미나모토노 요시키요(源良清) 등 2~3명에 불과하다.
겐지 이야기는 히카루 겐지의 생애를 담은 전편과 아들 카오루의 생애를 담은 후편으로 나뉜다. 전편 줄거리는 겐지 왕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인생 무상을 이야기 한다. 겐지를 통해, 연애, 영광과 몰락, 정치적 욕망과 권력투쟁 등 헤이안 시대의 귀족사가 드러난다.
후편은 히카루겐지가 죽은 뒤 아들인 주인공 카오루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과 자신의 출생에 관련된 어두운 운명으로 속세를 등지고 종교에 구원을 청하는 이야기 등이다.
10.겐지 이야기는 일본의 ‘모에속성(萌え屬性)’이 그대로 드러나는 소설이어서 일본문화의 보고이자 거의 모든 예술작품의 원류이다. 모에속성이란 어떠한 대상의 특징(속성)에 대해서 모에라는 감정(열광)을 품는 것을 말한다.
1968년 일본 첫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는 “겐지모노가타리는 일본 문학의 최고봉”이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책과 비교할 만한 소설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학의 권위자인 도널드 킨(Donald Keene,1922~2019) 전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겐지 이야기는 최고의 일본 문학이며 세계의 고전”이라고 격찬했다.

11.영화는 1951년에 요시무라 코자부로(吉村 公三郎, 1911~2000)감독이 처음으로 영상화 했다. 흑백영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로 내놓았는데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 貞之助, 1896~1982)도 1957년 영화 ‘겐지 이야기 우키후네(源氏物語 浮舟)’ 만들었다. 데이노스케는 1953년 만든 ‘지옥문(地獄門)’으로 1954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1954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명감독이다.
12. 1961년에는 모리 카즈오(森一生, 1911~1989) 감독이 가부키 배우출신 이치카와 라이조(市川雷蔵, 1931~1969)를 내세워 ‘신 겐지 이야기(新源氏物語)’로 제작했다. 라이조는 1956년부터 일본 주간 신조(週刊新潮)에 연재돼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시바타 렌자부로(柴田鍊三郞, 1917~1978)의 사무라이 소설 ‘네무리 쿄시로(眠狂四郞)’가 영화로 만들어질 때 2대 주인공으로 발탁, 유명한 배우로 성장했지만 37세로 요절했다.
겐지 이야기는 이후에도 1957년,1981년, 1989년, 2001년에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 2015년 신 겐지 이야기(新源氏物語), 그리고 1999년, 2007년에 위에 언급한 야마토 와키의 코믹스를 바탕으로 한 아사키유메미시(あさきゆめみし)가 있다.

2001년에 호리카와 톤코(堀川とんこう, 1937~현재) 감독 영화 ‘천년의 사랑 히카루 겐지 이야기(千年の戀-ひかる源氏物語)’가 나왔다.
2009년 1월부터 3월까지 후지테레비 노이타미나에서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방영됗고, 2011년에는 츠루하시 야스오(鶴橋康夫)감독의 영화 ‘겐지 이야기-천년의 수수께끼(源氏物語 千年の謎)도 나왔다.
13.일본 유명 극단으로 여성만으로 구성된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에서 여러 번 무대 공연용으로 만들었다. 이 극단은 일본 긴키(近畿) 지방 중심의 민간철도 회사인 한큐 전철(阪急電鉄)의 창업자인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1873~1957)가 1913년에 만든 다카라즈카 창가대(宝塚唱歌隊)가 시초다.
1999년에에는 오페라도 나왔다. 작곡가 미키 미노루(三木 禾念, 1930~현재)가 현대 오페라로 미국에서 제작했다. 초연은 2000년의 6월 세인트 루이스 오페라극장(Opera Theater of Saint Louis)에서 이뤄졌다. 일본 초연은 2001년 9월 도쿄 치요다구 유라쿠쪼(有樂町)에 있는 니쎄이(日生)극장에서 있었다.

14.한국에서는 2007년 일본 승려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瀬戸内寂聴,1922~2021, 반전반핵 활동가)가 현대 일본어 문체로 낸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전 10권)’을 한길사에서 완간했다.
전문 번역가 김난주(1958~현재) 번역으로 10권짜리 양장본 '겐지 이야기'로 출간했다. 사실상의 중역(重譯)이어서 읽기에는 편하다는 뒷이야기다.
남편과 딸을 두고 이혼한 뒤 1973년 출가한 세토우치 자쿠초는 1998년 ‘겐지 이야기’를 현대 일본어 문체로 냈는데, 일본에서 ‘겐지 열풍’을 일으키며 200만 부 이상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14년에는 이미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박사가 원전을 직접 번역한 ‘겐지 모노가타리’1권(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낸 데 이어 2권을 냈다. 완간까지는 갈 길이 먼 셈이다.

#.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생몰 미상, 추정은 978~1016)=필명이라는 게 정설이다. 본명은 정확하지 않다. 겐지 이야기의 여주인공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후지와라노 카오루코(藤原香子)라는 설도 있다. 헤이안시대 실권자인 간파쿠(関白)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의 ‘간파쿠기(御堂関白記)’에 등장한다.
1.지방관 출신의 중류 귀족 후지와라노 타메토키(藤原為時)가 무라시키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관직은 시키부쇼(式部丞)이며, 후쿠이 현 동부 지방 에치젠의 지방관을 지냈다.무라시키는 집안 남자들이 글을 배울때 어깨너머로 한자와 가나늘 익혔는데 어릴때부터 문학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부친을 따라 에치젠에서 지내던 무라사키는 20대 후반이던 998년 교토로 올라와 40대 중반의 자식을 둔 홀애비 후지와라 노부타카(종5위 우위문권좌 겸 야마시로 지방관)와 결혼했다. 슬하에 자녀는 딸 하나를 뒀고, 남편과는 결혼 3년 만에 사별(1001년 4월)했다.

2.남편과 사별 후 나인(內人,궁중의 일을 맡아보던 여자)으로 입궁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정치가로 최대 실권자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 966~1028)의 딸인 황후(중궁) 후지와라노 쇼시(藤原彰子, 988~1074, 별호 아키코)의 나인(이야기꾼?)으로 들어간 것이다.
쇼시는 66대 천황 이치조(一条) 천황(980~1011, 986~1011)의 제2황후로 두 아들도 천황으로 등극했다. 68대 천황 고이치조(後一条, 1008~1036, 재위 1016~1036)와 69대 천황 고스자쿠(後朱雀, 1009~1045, 재위 1036~1045)다.

3.무라사키는 궁(중궁전)에 종사하면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지원 아래 이야기를 계속 써서 54첩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를 완성했다.
1011년 6월 이치조 천황이 붕어한 뒤에도 1013년 가을까지 황태후가 된 쇼시(藤原彰子)의 측근에서 나인 생활을 했다. 이후 기록은 없어 1045년 전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1965년 유네스코의 세계 기념 인물 명단에 등재됐다.다른 작품으로는 ‘무라사키 시키부집’,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가 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