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고려도경-편협한 시각에서 쓴 견문록(첩보 보고서)의 첫 문단은 왜곡한 高麗 찬사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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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편협한 시각에서 쓴 견문록(첩보 보고서)의 첫 문단은 왜곡한 高麗 찬사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9. 2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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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듣기에, 오랑캐 군장들은 대부분 속임수와 폭력으로 자신을 높이며 이름을 별나고 괴상하게 하여 ‘선우(單于)’ 니 ‘可汗’이나 하나, 언급할 가치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가 봉해졌을 때부터 덕을 베풀어 제후가 되었는데 후대에 점점 쇠약해졌다. 또한 기자 조선이후의 여러 왕조 역시 한(漢)나라 관작을 써서 그에 갈음하여 자리를 두었으니, 위에는 일정한 높음이 있고, 아래로는 차등이 있다. 그러므로 나라를 이어받고 대를 전하여 감에 있어 자못 기록할만한 것이 있으니, 모든 사적을 고찰하고 역대의 왕을 차례로 나열하여 건축기를 지었다.”(서긍 저, 민족문화추진회 역, 조동영 감수, 서해문집, 2005)

12세기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나전칠기를 극찬했다. 서긍은 나전 솜씨가 세밀해 가히 귀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기록했다. 일본에서 환수해 2023년 9월 초 국외소재문화재단이 공개한 고려시대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 출처=국외소재문화재재단

1.첫 문단부터 견문록(여행기)의 상식인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중국 중심, 한족우월주의 시각에서 역사를 왜곡했다. 한민족을 오랑캐 중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히 편협된 시각에서 서술된 것이다. 또 서문이 있다고는 하나 첫 문단에는 견문 기록물의 원칙인 객관성, 사실성, 정확성 등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런 글은 견문록이 아니라 자국과 자신에게 유리한 첩보 보고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역사 왜곡을 저질를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흠정 사고전서 판 '선화봉사고려도경' 본문.문연각 본. photo by wikipedia

2.서긍의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4년 집필 보고, 원본 소실 후 1167년 간행)’은 12세기 송나라 중국인 서긍(徐兢,1091~1153)의 고려 견문록(여행기)이자 정보 보고서다.
송 8대 황제 휘종(徽宗,1082~1132)의 명령에 의해 고려를 찾은 중국 사신의 기록으로 모두 40권(한문 필사 기준). 28문(門), 300여 항으로 구성됐다.
그래서 휘종의 연호인 선화(宣和, 1119~1125)를 넣어 선화 연간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썼다는 뜻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이름했다. 약칭 ‘고려도경(高麗圖經)’으로 불린다.
현존 가장 오래된 판본(1167년 간행본)은 타이완(臺灣) 타이베이시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다. 1925년 베이징에서 발견된 판본으로 공산군에 패한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자유중국 총통) 국민군이 퇴각할 때 타이완으로 옮겨온 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영어로는 'A Chinese Traveler in Medieval Korea'이다. 중국어 발음대로 ‘Xuanhe Fengjing Goryeo Tujing’으로 쓰기도 한다.

3.서긍은 1123년(고려 인종 1년) 6월 고려에 왔다. 서긍 일행은 1123년 3월 14일 중국 변경을 떠나 정해현 명주(明州), 현 저장(浙江)성 닝보(寧波)를 출발, 흑산도(黑山島,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도착한 이래 군산도, 마도 안흥정(현 태안반도), 예성항(禮成港, 현 인천 근방)을 거쳐 6월 13일 개경(開京)에 도착했다. 개경의 순천관(順天館)에 머물렀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르빈에 있는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동상.금상경역사박물관(金上京歴史博物館)앞에 있다.photo by wikipedia

이들이 남쪽 우회로를 이용한 것은 북방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1115년 북방에 여진족 수장(首長)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1068~1123, 금 태조 온얀 아쿠타)가 금나라(1115~1234)를 건국,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존의 육로나 산둥(山東)반도에서 출항하는 배를 이용한 항로를 이용할 수 없었다.
서긍 일행은 당시 휘종이 보낸 사신으로 국신사(國信使) 겸 고려 16대 왕 예종(睿宗,1079~1122)의 조의 사신(弔儀使)으로 왔다. 사신단은 급사중(給事中, 종4품) 노윤적(路允迪, 정사)과 중서사(中書舍, 종4품) 부묵경(傅墨卿, 부사) 등 1000여 명으로 꾸려졌다.
이들은 신주(神舟)로 이름 지어진 거대한 관선(官船) 2척과 객주(客舟)로 불린 민간 선박 6척 등 8척의 배에 ‘전례에 없는 제문과 조위 물품’을 나누어 싣고 왔다. 서긍은 이 사절단에서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인원·선박·예물 등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사신단은 개경에 한 달 가량 머물렀고, 그해 7월13일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라 8월13일 중국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했다. 이후 서긍은 1124년 8월6일 고려도경 2권을 완성, 1권을 휘종에게 바쳤다.

고려에 국신사겸 조의사로 파견된 서긍 일행의 고려방문 및 귀국 항로도.photo by baijiahao.baidu.com

4.고려도경은 3년 뒤인 1126년 금나라 침략으로 송의 수도 유경(汴京, 현 허난성,河南省 카이펑, 開封)이 함락될 때 진상본과 서긍 집 보관본 모두 없어졌다.
황제 진상본은 이른바 ‘정강의 변(靖康之變)’으로 수도 유경이 유린되면서 사라졌다. 정강지변은 1126년 금나라 태종의 침략으로 휘종 등이 포로로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마친 사건이다. 정강은 휘종의 연호다.
집에다 보관한 1권은 1126~277년 쯤에 동네 사람 서주빈(徐周賓)이 빌려다 보았는데, 미처 반납하기도 전에 ‘정강의 변’이 났고, 난리 통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10년 후인 1137년 장쑤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 홍주(洪州)에서 발견됐지만 온전치 못했다. 멀쩡한 것은 40권 중 바닷길(해도, 海道) 등이 있는 2권뿐이었다
이후 효종 3년(孝宗, 1127~1194)인 1167년(고려 기준 의종 21년)에 서긍의 조카 서천(徐蕆)이 이 본에 의거 장쑤성(江蘇省) 강음군(江陰軍, 별칭 징강, 徵江)에서 간행했다.

서긍일행이 타고 온 배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송나라 무역선.배의 길이가 24m나 된다.1972년 여름 중국 취안저우에서 발견됐다. 출처=취안저우박물관. photo by www.incheonilbo.com 재인용

5.징강본(澂江本, 간행 해인 효종 3년 연호가 건도(乾道)여서 건도본이라고도 한다) 고려도경은 글만 있다. 고려도경은 당초 그림이 있어서 ‘도경(圖經)’이었으나 새로 간행할 때 그림을 결국 복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징강본은 청(淸)나라(1616~1912) 건륭(乾隆, 고종 순황제, 高宗 純皇帝, 1711~1799) 연간 만들어진 궁중 장서처인 베이징 천록림낭전(天祿琳瑯殿)에 보존돼 있었다. 이곳에는 송(宋)·원(元)·명(明)대의 각종 서책 선본(善本)이 소장돼 있었는데 징강본도 그 중의 하나였다.

6.징강본 고려도경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청나라 때 장서가(藏書家) 포정박(鮑廷博(1728~1814)이 건륭 58년(1793)에 편찬한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수록했기 때문이다.
포정박은 명나라 말기의 문신 정휴중(鄭休仲)의 중간본(重刊本)을 활용, 수록했다. 포정박은 발문에서 “고려본이 있는데, 언제 판각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런 고려도경이 빛을 본 것은 청나라 멸망(1912)한 후인 1920년 무렵이었다. 청 왕실의 서화골동품(書畫骨董品)과 고완진보(古玩珍寶, 보배로운 옛 것)를 인계, 관리한 베이징의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이 발견, ‘천록림낭총서(天祿琳瑯叢書)’의 하나로 1931년 영인 출간한 것이 계기였다.

북송 멸망 후 금나라에 대항해 군대를 이끌었던 남송 장군 악비(岳飛, 웨페이,1103~1142)의 1140년 카이펑 근처 주센전(朱仙鎮)전투를 그린 벽화. 중국 베이징 이화원에 있다.악비는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을 쓴 문신을 하고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photo by wikipedia

7.서긍이 고려에 온 때는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시기였다. 만리장성 너머에서 거란족의 요(遼, 대거란국,907~1125)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호시탐탐 송(宋)을 넘보고 있었다.
이에 고려는 당시 가장 강했던 거란족의 요에 사대를 취하는 등 등거리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요는 강성했다. 고려를 세차례 침입했고, 3차에서는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姜邯贊, 948~1031) 서북면 행영도통사 상원수(임시 사령관)에 참패했음에도 건재했다.
요는 대거란국이라고도 했는데 거란어로 ‘모스 키타이 구르(Mos Kitai gur)’라고 한다. 요가 강성할 때 서구에 중국이 키타이(Cathay. 캐세이)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현재는 홍콩의 항공사 이름에 남아 있다.
요가 강성할 때는 등거리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는 요의 연호를 썼고, 송의 책봉 요구도 사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는 여진족이 세운 금에 멸망한다.
이런 동북아 상황을 뻔히 아는 서긍임에도 고려도경에 고려를 제후국, 사대 조공 국가로 하급(下級)으로 묘사한다. 고려를 동남쪽 이적(夷狄)이라고 표현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이 매우 많다. 견문록으로서 객관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에 고려의 동태를 파악하는 첩보 보고서로 폄하(貶下) 하는 학자들도 있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불화 등 서화를 격찬했다. 고려시대 그려진 수월관음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8.책이 출판된 이후고려 문하시중(현 국무총리)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삼국사기 저자)은 송나라에서 졸지에 유명인사가 됐다고 한다. 사신으로 송에 갔을 때마다 칙사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인종의 외할버지 이자겸(李資謙, 1056~1126, 쿠데타 실패 후 전라도 영광 유배)에 대해서는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자”라고 평가했다.
 고려 인종 시대는 고려 사회 내부도 분열과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자겸의 난(1126)에 이어 묘청의 난(1135~1136)으로 나라가 크게 분열됐다. 두 난으로 많은 문신들이 희생됐다.
인종 23년(1145)에는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도 완성했다. 김부식의 문벌 권력이 최고조로 치달으면서 무신정변(武臣政變, 1170년 일어난 무신 쿠데타)의 씨가 잉태되는 시기였다. 

서긍 일행이 극찬한 고려청자. 충남 태안 마도 2호선에서 출토됐다. 개경의 중방 도장교(정 8품) 오문부 댁에 참기름(眞)과 꿀(蜜)을 보낸다는 물품꼬리표가 붙어있었다.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9.고려도경은 고려 미술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또 도자기 기록도 상세해 도자사(陶磁史) 연구에 적극 인용되고 있다.
고려 관복(冠服), 군사제도, 선박, 항해술, 궁궐, 민간 생활 등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다. 모두 그림을 없지만 글로만 유추해도 알수 있을 정도라 한다.
개성의 도시(都市) 역사와 복원 부분도 후세에 활용되고 있다. 개성의 시가 및 왕성, 관부 등의 복원에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10.고려도경이 고려에 알려진 것은 1150년대 전후로 보이지만 현존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다만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있는 ‘묘련사중흥비(妙蓮寺重興碑)’에서 고려도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1793년 중국 문신 포정박이 편찬한 지부족재본(知不足齋本)에 대한 필사 작업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필사본 고려도경’ 등이 그때 필사된 것이다.
이 책에는 아정장판(雅亭藏板)이라고 쓰여 있다. 아정(雅亭)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로 1779년(정조 3)부터 사망할 때까지 규장각 검서관으로 근무한 문인이다.
지부족재본은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이유원(李裕元, 1814~1888) 등도 필사해 활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조선 초에 간행한 ‘고려사(高麗史,김종서·정인지·이선제 등이 세종의 명으로 기술, 문종 원년에 편찬된 기전체의 관찬사서)’에는 ‘사국본(司局本) 고려도경’에 대한 글이 나오지만 책 자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일제치하에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은 한민족사를 축소 왜곡하기에 좋은 자료로 활용됐다.소장자의 낙관이 찍힌 고려도경 서문.photo by wikipedia

11.고려도경은 일제 치하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줄이고, 왜곡하고, 비하할 수 있는 좋은 자료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1900년대 초 일본인 샤쿠오 슌조(釋尾春芿, 1875~?)가 주도해 설립한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지부족재본을 대본으로 활자인쇄(活印)됐다.
1932년에는 한민족 역사 왜곡의 핵심인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1875~1932, 조선사편수회 핵심인물)가 ‘조선학총서(朝鮮學叢書)’의 하나로서 활인했다.
중국에서는 베이징(北京)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1931년 ‘천록임랑총서(天祿琳琅叢書)’ 제1집의 하나로 영인했다. 이 영인본이 미국 하버드대학의 합불연경도서관(哈佛燕京圖書館)에 소장돼 있으며, 1970년 이화사학연구소에서 영인했다.

경기도 박물관이 2018년 연 900 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 고려도경 전시회 모습. 출처=경기도 박물관

12.고려도경 한글 완역본은 1978년 민족문화추진위에서 처음 나왔다. 이후 1998년 출판사 움직이는책에서 ‘고려도경(高麗圖經)으로 완역, 출간됐다.
영역은 2016년 5월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나왔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겸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소장 셈 베르메르슈가 8년 작업 끝에 영어로 번역했다. 영문판 제목은 'A Chinese Traveler in Medieval Korea'이다.
2018년 7월26~10월21일 경기도 박물관에서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 고려도경’ 전시회를 열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23연9월22일 ‘선화봉사 고려도경 900년(宣和奉使高麗圖經 900年)’이라는 주제로 전남 목포 샹그리아비치호텔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송나라 사람이 남긴 고려 기록은 문인이자 시인 오식(吳栻)의 ‘계림기(鷄林記, 20권)’, 왕운(王雲, ?~1126)의 ‘계림지(鷄林志, 30권)’, 손목(孫穆,1103년 서장관으로 고려 방문)의 ‘계림유사(鷄林類事,3권)’ 등이 있으나 대부분 소실되고 극히 일부만 전한다.

12세기 고려의 모습을 기록한 '선화봉사 고려도경'의 저자 서긍를 삽화 형식으로 그린 모습.photo by baijiahao.baidu.com

#.서긍(徐兢, 쉬징, Xu Jin,1091~1153)=북송 왕조의 관리이자 외교관. 서화,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고려도경의 저자. 자는 명숙(明叔) 호는 자신거사(自信居士)이다.

1.중국 허저우(和州), 현 안후이(安徽)성 허셴(和縣)현) 리양(歷陽) 출신이다. 아버지 서굉중(徐閎中)은 황실에서 의료와 직속 비서를 관리하는 조정대부(朝請大夫. 종5품)였다.
서긍은 어린 시절부터 서예와 그림(서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사서삼경 등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18세에 고등교육기관 태학(太學, Taixue)에 들어가 과거를 준비했지만 번번히 낙방했다.

서긍과 서긍을 소개한 책자. 출처= baike.sogou.com

2.송 휘종 정화 4년(1114) 스물세살 때 아버지 서굉중의 관직에 힘입어 음보(蔭補, 가문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로 출사했다. 정화(政和) 4년(1114)에 스물 네살에 통주(通州, 현 장쑤(江蘇)성)의 말직인 형조사(刑曹事, 죄수들을 다루는 일)에 근무했다.
고려로 가는 국신사로 뽑힌 것은 급사중(給事中, 고려 종4품)으로 정사인 노윤적(路允迪, 송나라 문신으로 경학에 뛰어난 인물)이 서화(書畫)에서 보인 서긍의 재능을 귀하게 여겨 추천한 것이다.
서긍은 고려를 다녀 온 후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됐으며, 상서형부 원외랑(尙書刑部 員外郞)까지 승진했다.

12세기 동아시아 강역의 판도를 보여주는 지도.고려 국토를 축소해 왜곡 묘사했다.고려를 축소한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보인다.photo by www.naver.com

3.정강지변으로 아버지와 친했던 재상 채경(蔡京,1047~1126, 재상 16년 역임)이 파면되면서 서긍 아버지도 지주(池州, 현 안후이성)의 영풍감(永豐監)으로 좌천됐다.
채경은 송나라 재상으로 숙적 요(遼)를 멸망시켰으나, 금나라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 흠종 즉위 직후 휘종에게 사치를 권하고 재정을 궁핍에 몰아넣었다는 이유로 국난 초래 6적(賊)으로로 몰려 실각, 유배가던 중 80세에 사망했다. 하지만 장남 채유(蔡攸) 등 일가족은 휘종을 이은 황제 흠종(欽宗, 1100~1161)의 명령으로 주살됐다.
서긍은 아버지를 걱정해 남경(南京), 현 허남(河南)성 상추(商丘)로 내려와 홍칭궁(鴻慶宮)을 관리하는 일을 하다가 면직됐다.

4.말년에 타이저우(태주)의 사원 숭도관(崇道觀)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했다. 장쑤(江西) 신쩌우(信州) 리양(弋陽)의 유명한 세연지(洗硯池)에서 유유자적했다.
송 고종 소흥 23년(1153), 서긍은 역양(歷陽)으로 가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 오현(吳縣)에서 병사했다. 향년 63세였다.

중국사 3대 치욕중 하나인 '정강지변'의 주인공 휘종이 그린 그림 부분.photo by wikipedia

5.서긍은 고금의 전적(典籍,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묶어놓은 것)을 섭렵했다. 이에 불가(佛家), 노자(老子, 열국시대 초나라 사상가), 손무(孫武, 춘추시대 병법의 달인), 오기(吳起,춘추시대 병법가), 노편(盧扁, 명나라 의학자, 검법서 저자)의 책들과 산경(山經), 지지(地誌), 방언(方言),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다고 한다.
또 그림은 물론 해서(楷書, 일점 일점을 정자로 쓰는 서체)와 행서(行書,해서와 초서의 중간서체), 전서(篆書, 가늘고 긴 고문 서체)에 두루 능했다.
서긍의 행장을 작성한 장효백(張孝伯, 중국 남송시대 문인, 1137~?)은 “산수화와 인물화에서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극찬했다. 특히 논찬(論贊)의 끝부분에 “우연히 화권(畵卷)을 펼쳐보니 신선(神仙)이 산다는 면면창주(面面滄洲)를 대하는 것 같다”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 뛰어난 시인으로 서긍의 벗이었던 한구(韓駒, ?~1135)는 “서긍은 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림으로 시를 짓는 것인가’라고 격찬했다고 한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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