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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구토-철학 에세이 같은 난삽한 소설의 첫 문단은 일기체 독백으로 시작한다 본문
“원서 발행인의 서언-이 기록들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속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고 발표한다. 첫 페이지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일기 자체보다 몇 주일 전의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늦어도 1932년 1월 초순에 씌어진 것이리라. 그 당시 그는 중앙 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을 여행하고 나서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 연구를 완성하고자 3년째 부빌에 체류하고 있었다.
*날짜없는 쪽지-최선의 방법은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적어두는 것이다. 뚜렷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일기를 적을 것.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도, 그 뉘앙스며 사소한 사실들을 놓치지 말 것. 특히 그것들을 분류할 것. 내가 이 테이블, 저 거리, 저 사람들, 나의 담뱃갑을 어떻게 보는 가를 써야만 한다. 왜냐 하면 변한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범위와 성질을 정확하게 결정지을 필요가 있다.”(장 폴 사르트르 저, 방곤 역, 문예출판사, 1999)

1.독특한 소설 구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을 ‘원서 발행인의 서언’으로 장식한 후 이야기를 본격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레이터에 대한 객관적신뢰을 주기위한 논문형 서술이다. 독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장치의 하나다. 내레이터(주인공)와 시제, 지역을 정확하게 밝히면서 현재를 상황을 최대한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일기체의 독백이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중언부언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첫 페이지, 첫 문단을 집중해서 읽을수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읽으면서 메스꺼움(구토)을 느낀다면 과장일까? 소설이라기 보다는 철학에세이 같은 글을 읽으며 뒤죽박죽 느낌을 받을 정도다.독자가 이렇게 느꼈다면 작가의 의도가 적중한것이다. 딱 잘라서 입사시험이나 논술 대비용 문장 구성이나 문체는 아니다.
2.사르트르의 ‘구토(嘔吐, La Nausée, 1938)’는 앙티로망(Anti-roman, 반(反)소설)의 선구자 격 소설로 실존주의를 세상에 선언한 작품이다. 문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를 허문(?) 모호한 작품으로 실존주의 철학을 담은 첫 장편 소설이기도 하다.
출판 전 원래 제목은 ‘우울증(Melancholia, 멜랑콜리아)’였다. 작가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그림 ‘Melancholia 1’에서 영감을 얻었다. 원제가 바뀐 것은 출판업자 가스통 갈리마르(Gaston Gallimard,1881~1975,프랑스 출판업의 아버지)의 제안에 의해서다.

1949년 미국 작가 일로드 알렉산더(Lloyd Alexande, 1924~2007) 번역본이 미국에서 나왔다. 영어로는 ‘Nausea’로 번역된다.
한편 ‘앙티로망’은 러시아 출신 프랑스 여류 소설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1900~1999)의 소설 ‘어느 미지인의 초상(1947)’의 서문에서 사르트르가 사용한 말이다. 전통 소설 개념을 부정하고 새 기법에 소설 양식을 뜻한다. 그래서‘누보로망(Nouveauroman,신소설)이라고도 한다.

3.구토는 논문형 틀을 적용한 일기체 형식 소설이다. 하지만 독자에게 각인될 정도의 어떤 플롯(서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읽는 이가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주인공 로캉탱이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겪는 감정의 변화를 메스꺼울 정도로 난삽하게 묘사한다.
소설 구조와 문체, 전개 등이 독창적이다. 기존 플롯 구조를 무시했다.소설에 반대하는 느낌이 배어있다. 난삽한 문장을 인식하며 존재를 되새기게 한다. 그렇다고 철학적 주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웬 지 찜찜하다.
4.소설 무대는 사르트르가 1930년대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노르망디 레지옹의 센마리팀 주에 위치한 항구 도시 르 아브르(Le Havre, 항구라는 뜻) 느낌이 강하다. 물론 소설에서는 허구의 마을 ‘부빌(Bouville, Boue-ville의 동음, 진흙 마을)’로 나온다.
구토는 존재를 찾아 나서는 에세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 소설쓰기에서 희망을 찾는 결말은 실존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 존재 자체가 본질에 앞선다는 해석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독자에게 매우 불친절한 소설이다. 형이상학, 부조리, 존재와 고독 등 뒤죽박죽이다.소설의 묘미가 남지 않은 반소설이다.작가의 의도가 성공한 것이다.

5.줄거리는 한 지식인이 존재의 가치를 찾으며, 자유란 ‘감옥 안의 자유’임을 깨닫고 구역질을 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프랑스 혁명기 역사 인물인 로르봉 후작(侯爵)을 연구하기 위해 바닷가의 소읍 부빌에 체류한다.
어느 날 해안에서 조약돌을 줍다가 구토증을 느낀다. 그는 구토증의 정체를 밝히려고 아무 이유도 없이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빌에 머무는 중 카페의 마담과 성관계를 갖지만 고독하다. 로캉탱은 원래 안니(Annie)라는 애인이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다. 마담과의 관계 외에는 다른 인간 접촉이 거의 없다. 존재의 이유에 대해 늘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구토증을 느끼는 존재 자체가 우연이고 부조리다.

옛 애인 안니와 6년 만의 재회를 앞두고, 공원의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응시하다가 직감적으로 무엇인가를 확신한다. 안니는 옛날의 매력도 없고 타성에 젖어서 살고 있다. 로캉탱은 어느 것에서도 존재의 희망을 찾지 못한다.로캉탱은 역사 연구도 포기하고 그 곳을 떠나면서 재즈 음악이 주는 감동 속에 장차 소설을 쓰는 것이 구원이 되지나 않을까 희망을 가진다.
6.한국에서는 1953년 6월 양병식 역으로 정음사의 세계문학총서로 출판됐다. 6.25전쟁이 끝나기 직전이다. 의외로 빨리 나온 셈이다. 사르트르 100주년인 2005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와 ‘현대문학’ 10월호에서 특집을 꾸미기도 했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 실존주의 대표적 사상가.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거부했다. 본명은 장 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이다.
1.파리에서 프랑스 해군 장교 출신 장 바티스트 사르트르(Jean-Baptiste Sartre,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와 어머니 안 마리(Anne-Marie)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15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파리의 부르죠아인 외할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 외할아버지는 샤를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로 파리 소르본대학(La Sorbonne) 독문학과 교수였다.
의료 선교사로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1875~1965, 독일 출신이나 1919년 프랑스 귀화)의 삼촌이다.
10때 인 1920년 전후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1859~1941)의 에세이 "시간과 자유 의지 : 의식의 즉각적인 데이터에 대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철학에 매료됐다.
2.파리의 명문학교 앙리 4세 리세 루이드 그랑에 들어갔으나, 1917년 어머니가 조제프 망시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를 따라 라로셸(La Rochelle) 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해 1920년 다시 앙리4세 리세로 돌아왔다.
파리 최고의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반 과정에서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Paul Nizan, 1905~1940)과 친해졌다. 1924년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수석 입학한다.
1928년에 아그레가시옹(Agrégation, 1급 교원 자격 시험)에 낙제, 지인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놀라워했지만 다음해 수석 합격한다. 차석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였다.
1929년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그 해 11월 프랑스 육군에 입대, 기상 관측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한다.

3.1931년 군에서 나온 후 파리 근교 르 아브르 고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1933년 프랑스문화원 장학생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하면서‘현상학(phenomenology,의식에 나타나는 자체를 탐구하는 철학)’을 공부한다.
파리에 돌아와 교직 생활을 하면서 1936년 단편 ‘벽’를 발표한 뒤 2년 후 ‘구토(La Nausée)’를 발표, 평단의 주목과 명성을 얻는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징집됐는데 1940년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다. 포로수용소에 있던 1941년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석방됐다.
귀향해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등과 대독 저항 단체(레지스탕스)를 조직, 활동한다. 사르트르는 1944년까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좌익으로 기울었고, 소련연방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러시아의 악명 높은 ‘굴라그(GULAG)’를 지지할 정도였다.
굴라그는 1930~1959년 운영됐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소속 노동교화소 본부의 약자다.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노동교화소로 불린다.1954년에는 소련을 방문했다.
하지만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 시위를 강경 진압하자 ‘스탈린의 환상(Le Fantôme de Staline)’이라는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맹비난했다

5.법조인이던 아마추어 배우와 베르됭 출신 은행가의 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와 평생을 함께 했다. 유명한 ‘계약 연애’이다.
첫 연애 계약을 맺은 장소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 벤치였는데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조건이 붙었다고 한다. 보부아르와 함께 1945년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월간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한다.
둘은 자유연애를 하면서도 51년 동안 같이 살았다. 양녀(알제리 출신 아를레트 엘카임, Arlette Elkaïm, 나중에 상속자)도 들여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과 연애 행각도 유명했다. 말년에 넘쳐나는 인세를 여대생들에게 주면서 관계를 맺어 ‘원조 교제를 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6.사르트르는 나이가 들수록 강경 좌파에서 합리적 좌파로 변했다. 또 반전주의자였고, 무종교인이 아니라 강경한 무신론자였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본격 참전하자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등과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1890~1970)대통령과는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사르트르는 ‘드골은 프랑스의 히틀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고, 드골은 ‘사르트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입만 산 놈’이라고 직격할 정도였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이른바 ‘68운동(1968년 5월3~6월23일, 드골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 투쟁)’이 거세진 가운데 사르트르가 학생들을 선동했다.
이에 당시 드골 대통령 참모들이 ‘사르트르 체포’를 건의했다. 드골은 “사르트르도 프랑스인이다. (현재의) 볼테르(Voltaire)를 바스티유(감옥)에 넣을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7.우리나라와는 악연(惡緣)과 가연(佳緣)이 교차한다.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e, 1904년 창간)’의 “6‧25는 남한의 북침”에 동조, 북침설을 주장했다.
이후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자 사르트르는 다시 미국의 ‘남침유도설’로 입장을 선회하는 등 사망 때까지 북한을 공개지지(북한 정통론)했다.
사르트르는 생전 북침설 주장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창간한 신문 ‘리베라시옹( Libération,1973년 5월 사르트르가 공식 창간, 약칭 리베)’이 2017년 7월 2일 자에 ‘슬프다! 레이몽 아롱(사회학자, 6.25 전쟁 종군기자 ‘북한 남침’ 보도 및 주장)이 옳았다‘라고 고해성사를 했다.
아름다운 인연도 있다. 시인 김지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선동죄’ 혐의로 체포,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을 했다.
사르트르는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의 번역본을 읽은 후 곧바로 석방 호소문에 서명했다고 한다. 김지하는 세계 문인들과 인권단체들의 노력으로 다음해 2월 석방된다.
8.문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 알제리 몽도비(Mondovi) 출생)와 친했으나 나중에 인연을 끊는다. 소련에 대해 카뮈는 반대를 명확히 했는데 사르트르는 옹호했다.
또 알제리 독립전쟁(Algerian War of Independence, 1954년 11월 1일 ~1962년 3월 19일)에 대해서도 카뮈는 문맹이며 청각장애인 어머니의 터전 상실을 우려해 반대했는데 사르트르는 지지했다. 사르트르는 심지어 프랑스 정부의 강한 저지에도 불구, 알제리 독립 진영 무장세력인 민족해방전선(FNL)에 무기를 지원했다.

9.1960년 피델 카스트로( 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2916)를 만나기 위해 쿠바를 방문했고, 쿠바 정부의 게이 박해에 반대했다. 그 곳에서 사르트르는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1928~1967)도 만났다. 그는 체게바라에 대해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추켜세웠다.
10.1964년 10월22일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보다 일주일 전 10월14일 사르트르는 노벨 연구소에 편지를 써서 후보자 명단에서 삭제하고, 선정되면 상을 수락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수상자로 발표되자 곧바로 거부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상을 거절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앞서 1945년에 그는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프랑스의 가장 명예로운 훈장)도 거부했다. 한편 1948년 로마 교황청은 사르트르 저서를 금지 도서 목록(List of Prohibited Books)에 올렸다.

11.고혈압에 골초였던 사르트르는 1973년 눈이 멀고 건강이 악화되어 저술 활동을 중단한다. 그리고 1980년 4월 폐기종 악화로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영면한다. 향년 75세였다.
사르트르 사망 소식은 프랑스 일간지들의 특보로 실렸고, 장례식에 5만여 명이 운집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모여든 인파들의 추모로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 장례식’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다만 위고는 ‘국장(國葬)’이었지만 사르트르는 ‘일반장’이었다. 국장에 비해 더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다.
사르트르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묘가 있는 공동묘지 페레 라셰즈(Père Lachaise)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 행렬은 사르트르 생전의 주요 장소를 모두 들렸다.이 때문에 밤이 너무 깊어서 묘지 입구 문 왼쪽의 임시 무덤에 묻혔다가 4일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나중에 시몬 드 보부아르도 옆에 안장됐다.

12.유명한 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서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1948)’, ‘변증법적 이성 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 등이 있다.
또 소설로는 ‘구토(La nausée,1938)’, ‘벽(Le mur,1939)’,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1949)’, ‘말(Les Mots, 1964)’ 등이 있다.
희곡 작품으로 ‘파리 떼(Les Mouches, 1943)’, ‘닫힌 방(Huis-clos, 1944)’,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1948)’, ‘악마와 선신(善神), Le Diable et le bon dieu, 1951)’, ‘네크라소프 Nekrassov, 1955)’, ‘알토나의 유폐자(Les Séquestrés d'Altona,1959)’등이 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