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굶주림(Hunger)-나치를 찬양한 '북유럽 문학의 별'이 쓴 배고픈 이야기는 빵으로 시작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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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Hunger)-나치를 찬양한 '북유럽 문학의 별'이 쓴 배고픈 이야기는 빵으로 시작된다

지성인간 2023. 7. 12.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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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리스티아나(1624~1924년 노르웨이 수도, 현 오슬로)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크리스티아나는 그곳을 떠나가게 되기까지 누구에게든 반드시 흔적을 남겨 놓고야 마는 그런 기이한 도시였다. 나는 잠에서 캐어난 채 고미 다락방에 누어 있었다. 아래층 벽시계에서 6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날이 훤했다.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쪽 방문 옆 벽은 낡은 ‘모르겐블 라데트’신문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등대관리소장의 공고문과 약간 왼쪽으로 굵고 둥그란 글씨로 인쇄된 파비엔 올센 빵집의 신선한 빵 광고문이 보였다.”(우종길 역, 창, 2011)

출판사 창이 2011년에 낸 '굶주림' 표지 부분

1.1인칭 화자의 춥고 배고픈 상황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첫문단이다. 화자의 행위 하나하나와 심리, 주위 환경까지 ‘가난이 묻어날 만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배고파서 일어난 화자를 굶주린 배와 빵을 교묘하게 대비시키는 은유적인 서술도 압권이다. 등대지기는 이 소설의 결말을 예비해 둔 장치로 보인다. 도입부의 핵인 ‘누구에게든 흔적을 남겨놓고야 마는 기이한 도시’라는 표현은 지금 읽어도 명쾌하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2.크누트 함순의 ‘굶주림(Sult, 1890)은 20세기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소설이다. 춥고 배고픈 무명작가의 반자전적 이야기지만 쏙쏙 들어오는 문체가 강렬하다.현대 사소설의 원조라고 할 수있다.
1888년 11월 덴마크 잡지 ‘신천지(Ny Jord)’에 익명으로 발표됐다. 이후 1890년 나온 책이 인기를 끌면서 작가의 명성을 유럽 전역에 떨치게 된다. 1899년, 1907년, 1916년 등 3번에 걸쳐 개작했다.
영어 번역은 호주 출신 영국 여류작가인 메리 차벨리타 던 브라이트(조지 애저튼,George Egerton,1859~1945)에 의해 1899년 ‘헝거(Hunger)’로 처음 번역됐다.
영역본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노르웨이 문학가이자 번역가 스베레 링스타드 (Sverre Lyngstad, 1922~2011)가 1996년 번역한 책이다.

소설 '굶주림 (Sult, 1890)' 초판본. photo by wikipedia

3.등장 인물은 나를 제외하고 딱히 내세울만한 이가 없다. 줄거리는 변방에서 올라온 문학 청년이 도시에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방황하다가 고국을 등진 이야기다.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나(Jeg)는 스스로 만든 기사도 규범을 지키며, 더 궁핍한 어린이와 방랑자에게 돈과 옷을 제공한다. 너무 가난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활로 건강이 악화한다.
배고픈 어느날 식사를 위해 샅샅이 뒤지다가 손가락을 거의 먹을 뻔한 적도 있다. 나의 사회적, 육체적, 정신적 상태는 끊임없이 쇠퇴하고, 이를 신과 세계 질서 탓으로 돌린다.
공동묘지에 가서 쓴 자기 글을 신문에 보내고, 이런 춥고 배고픈 질서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더 초조해지고 글쓰기까지 점점 더 어려워짐을 느낀다.
나는 지독한 가난에 잠 잘곳이 없어 감옥에서도 하룻밤을 보낸다. 그래도 자존심은 잃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배고품에도 무료 아침 식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범을 지킨다. 굶주림에 시달린 어느날 도시를 떠나기 위해 뱃일을 하겠다는 사인(계약)을 한다.

4.이 소설은 자본이 지배하는 삭막한 도시 문명에서 길을 잃은 가난한 변방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묘사한 수작(秀作)이다.
당대에 보기 드물게 사적인 행위와 내면 독백이  의식의 흐름를 따라가는 작법으로 쓰여졌다. 서사와 등장인물들의 변화, 갈등, 도약 등이 생략된 채 개인 행위와 심리가 소설의 주요 제재로 작동한 것이다.
더블린 출신 영국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1882~1942)의 명작 ‘율리시스(Ulysses, 1922)’ 이전에 나온 탁월한 심리소설이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5.이 소설의 1인칭 화자는 기존에 나온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1821~2881)의 ‘죄와 벌(Преступленіе и наказаніе, 1866, Crime and Punishment)’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Raskolnikov)를 연상시킨다.
독일에서 출간할 때 이  책의 서문을 쓴 앙드레 지드(André Paul Guillaume Gide, 1869~1951)는 “이 이상야릇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음 가득히 피와 눈물이 솟구치는 걸 느끼게 될 것”이라며 “작가가 겪은 현실의 사실만으로 독자들을 압도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소설 '굶주림'은 1966년 영화 'Hunger'로 만들어졌다. 당시 영화 포스터. photo by wikipedia

6. 영화로도 많이 제작됐다. 1966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 합작으로 ‘Hunger’라는 이름으로 헤닝 칼센(Henning Carlsen, 1927~2014) 덴마크 감독이 제작했다.
2001년 미국에서도 마리아 기에세(Maria Giese,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가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었다. 2012년 그리스에서 이 소설을 바탕으로 ‘Boy Eating the Bird's Food(감독 겸 프로듀서 엑토라스 리지조스, Ektoras Lygizos)’라는 이름의 영화로 나왔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가 그린 1896년 무렵의 크누트 함순. 미국 워싱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photo by wikipedia

#. 크누트 함순(Knut Hamsun,1859~1952)=노르웨이 작가. 나치 추종자. 노벨문학상(1920) 수상자. 본명은 크누트 페데르손 함순(Knut Pedersen Hamsun)이다.

1.19세기 말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구드브란스달(Gudbrand Valley)의 인란뎃(Innlandet) 카운티 롬(Lom)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더 페데르손(Peder Pedersen)과 어마니 토라 올스데터(Tora Olsdatter)사이의 넷째였다.
아버지는 재봉사였으나 함순이 3살 때 노르웨이 북부 하마뢰이(Hamarøy)로 이주, 농사를 지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9살 때 외삼촌 한스 올센(Hans Olsen) 댁에 맡겨졌으나 학대받았다고 한다.

2.14세 때 고향인 롬으로 도망쳐 나와 도제식 구두 공장, 상점 점원, 행상인, 보안관의 조수 및 초등학교 교사 등의 일을 했다.
1877년 17살에 첫 소설 ‘수수께끼의 인물(Den Gaadefulde-En Kjærlighedshistorie fra Nordland)’을 자비(自費) 출간했다. 영어로는 ‘The Enigmatic Man-A Love Story from Northern Norway’이다.
가난에 시달리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함순은 돈을 벌기 위해 3년여간 온갖 일을 하다가 1885년 각혈을 하는 등 건강이 심각해지자 귀국했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하자 8개월 만에 다시 미국에 가서 전차 차장, 농장 일꾼, 문학 강연 등을 전전하다 2년 만에 다시 귀국했다.

3.함순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거주지를 정하고 1888년11월 ‘굶주림(Sult)’를 잡지에 발표했다. 게재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890년 책이 나오자 유럽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명성과 부를 얻은 함순은 1917년 ‘대지의 축복’을 발표,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끈다. 이어 1920년 노벨 문학상까지 받는다.

5.함순은 두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1898년에 베르크리요트 베흐(Bergljot Göpfert Bech)와 결혼, 딸 빅토리아를 낳았으나 1906년에 이혼했다.
3년 후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유명 여배우 마리 안데르센(Marie Andersen,1881~1969)과 재혼, 두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아내 마리는 남편 사후 ‘무지개(Regnbuen, The Rainbow, 1953)’와 ‘굴레그넨 아래서(Under Gullregnen,1959)’ 등 두 권의 전기를 냈다.

1917년 무렵의 크누트 함순과 아내 마리 안데르센, 그리고 자녀들.photo by wikipedia

6.영국이 자본(돈)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한다고 본 함순은 반영(反英)주의자이자 앵글로포비아(Anglophobia, 영국 공포증)였다. 미국에서도 살았지만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그러면서 나치를 찬양했다. 그건 함순의 생애 전체를 불명예와 파멸로 몰아넣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아직도 함순을 나치의 이데올로기 ‘피와 흙(Blut und Boden)’의 원류라는 비판이 있을정도 다.
함순이 ‘자원(自願) 나치’ 하자 나치 고위층은 열렬히 환영했다. 1931년 나치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베를린에 입성했고, 아들을 슈츠슈타펠(Schutzstaffel,SS, 히틀러 호위 당내 조직) 창립 멤버로 들여 보냈다. 딸인 세실리아도 독일로 유학 보냈다.
친 나치 행보는 1940년 조국 노르웨이가 독일에 점령될 때도 이어졌다. 그리고 1943년 5월 노벨상 메달을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에게 보내는가 하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와 나치를 ‘세계를 지키는 십자군’으로 표현했다.
그는 히틀러가 죽은 후에도 ‘인류를 위한 전사(warrior for mankind)’, ‘모든 국가를 위한 정의의 복음의 설교자(prophet of the gospel of justice for all nations)’라고 황당한 말까지 했다.  한편 함순이 괴벨스에게 준 노벨문학상 메달은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7.2차 세계대전 후 함순의 친나치 행각에 분노한 군중들은 노르웨이의 주요 도시에서 함순 저작물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함순은 정신병원에 몇 달 동안 감금됐다.
노르웨이 정부는 반역죄로 체포했으나 고령과 정신이상 등을 감안, 재산의 대부분인 32만5000크로네의 벌금형을 내렸다. 이로써 화려한 명성을 뒤로 한 채 패가망신했다.
부와 명예를 다 잃은 함순은 만년에 노르웨이 아그데르(Agder) 카운티 그림스타드(Grimstad ) 뇌르홀름(Nørholm)의 자택에 칩거했다. 건강 악화로 시력과 청력을 잃은 데다 치매까지 앓았다. 그러다가 1952년 2월 숨을 거두었다. 93세였다. 유해는 뇌르홀름에 있는 함순의 집 정원에 안장됐다.

8.함순은 나치 추종(追從)에도 문학 작품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지금도 ‘북유럽 문학의 별’로 불리운다.
미국 소설가로 노벨문학상(1954) 수상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는 “내 모든 글쓰기는 함순으로부터 배웠다”고 격찬했다.
폴란드 태생 미국 작가로 197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이작 싱어(Isaac Bashevis Singer, 1904~1991)는 “20세기 소설의 모든 유파는 함순에게서 유래했다”고 했다.
독일작가로 노벨문학상(1929) 수상자 토마스 만(Thomas Mann,1875~1955)은 “함순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와 프리드리히 니체(1884~1900)의 자손”이라고 묘사했다.

1996년 나온 함순(Hamsun)전기 영화 포스터.photo by wikipedia

9.스웨덴의 영화 감독 얀 트로엘(Jan Troell, 1931~현재)’이 만든 함순 전기 영화 ‘ Hamsun’은 1996년 제작, 개봉됐다.
앞서 함순의 전집 15권은 1954년 출판됐다. 또 2009년 탄생 150 주년에는 1954년판에 포함하지 않았던 함순의 모든 작품을 망라해 27권으로 출간했다.
함순의 개인적 불명예에도 불구, 유럽에서 그의 작품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노르웨이 한 전기작가는 2009년 “그는(함순은) 무덤에 머물지 않는 유령”이라고 말했다.
함순이 살았던 집 세 곳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그중 한 곳은 2009년 8월 기념관 함순센터(Knut Hamsun Centre)로 개관했다. 이 센터는 노르웨이 노르틀란드 군 샐턴(Salten)의 하마로이(Hamarøy)에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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