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그리스인 조르바-노벨문학상 후보만 9번 오른 비운의 작가, 시(詩)적인 문체로 자전적 소설 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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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노벨문학상 후보만 9번 오른 비운의 작가, 시(詩)적인 문체로 자전적 소설 쓰다!

지성인간 2023. 4. 2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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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역대급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오랜 연인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의외로 무덤덤하게 시작한다.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에게해의 큰 섬)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기 직전인데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이윤기 옮김,열린책들, 2000)
번역의 고심이 엿보이지만 전형적인 소설 문체다. 작가가 현장에 있는 듯한 1인칭 화법으로 주변 상황을 가볍게 설명하면서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첫 문단에서 주인공과 장소, 날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소설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나중에 문체가 늘어지는 느낌이 들지만 도입부는 예상 외로 깔끔하다. 피레에프우스는 현재 아테네의 모항(母港)인 피레우스다.

열린책들이 2000년 내놓은'그리스인 조르바'의 앞표지 그림(화가 이혜승 작).

1.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요소가 물씬 나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Vios ke politia tou alexi zorba,1946)’는 그리스인의 자유와 순수 등을 리얼하게 표현한 불후의 소설이다. 원제는 '알렉시스 조르바스의 삶과 모험'이다.
한국어 번역본과 영어명은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이다.
소설 곳곳에는 호쾌한 데다 자유분방한 조르바(조르바 댄스도 유명하다)가 보여주는 지중해식 긍정과 자유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출판 당시 그리스 정교회는 카잔차키스를 맹비난(신성모독을 이유로)했다. 수도원에 대고 불을 지르는 수도자 자하리아, 조르바가 신을 악마라고 주장하며 난잡한 행동을 하는 것 등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를 파문 하지는 않았다.

2.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요 등장인물은 화자(話者)인 ‘에고(번역본 나)’, ‘알렉시스 조르바스(조르바)’, ‘마담 오르탄스(오르탕스 부인)’, 히라 수르멜리나(소멜리나 과부), 롤라(술집 여자 롤라), 마놀라카스(경관 마놀라카스), 미미소스(청년 미미코), 파테르 자하리아스(자하리아 신부) 등이다.
줄거리는 화자인 ‘나’가 피레우스 항에서 크레타로 가는 배를 타는 데 조르바가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함께 간 나와 조르바는 갈탄 광산을 개발하는데 조르바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한다.
조르바의 무용담, 떠도는 삶, 자유 의지가 파격적인 이야기로 펼쳐진다. 결국 갈탄 광산은 망하고 ‘나’가 상심해 있을 때 춤을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하고 둘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조르바와 헤어진 ‘나’는 자유의지로 각국을 떠도는 조르바의 전보를 받는다.그리고 조르바 연대기를 쓴다.

3.한국어 판본은 대개 중역(重譯)이다. 열린책의 이윤기 역본도 그리스어-프랑스어-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됐다.
그리스어 원전 번역본이 출판된 것은 2018년 문학과 지성사 판이다. 번역은 아테네대학교 대학원 언어학 박사인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했다.

4.1964년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1964)’라는 이름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했다. 영어 제목은 'Alexis Zorbas', 감독은 미카엘 카코야니스(Michael Cacoyannis,1922~2012)가 했다.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제작비 78만3000달러로 235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조르바 역의 안소니 퀸(1915~2001, 멕시코 출신 미국 영화배우)과 작가 역의 앨런 베이츠(1934~2003,영국 출신 배우), 그리스 여배우 이레네 파파스(1926~2022) 등이 호연(好演)했다.

2007년 카잔차키스 사망 50주년에 그리스에서 나온 기념주화(10유로 ).photo by wikipedia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 그리스 최고의 작가이자 철학자. 현대 그리스 문학의 거인. 장년에 정치에 참여해 장관을 지냈다. 그리스어 이름은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이다.

1.1883년 오스만투르크(현 튀르키예) 제국령 크레타 섬의 칸디예(이라클리오)에서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자키스,어머니 마리아 흐리스토둘라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낙소스 섬에서 프랑스 가톨릭 수도회 운영 학교를 다녔다. 아테네 대학에서 법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2.1906년 서사시 ‘뱀과 백합(Serpent and Lily)’로 데뷔했다. 1922년 그리스-터키 간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하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는다. 이후 소련과 중국 등을 방문하기도 한다. 1938년[장편 철학시 오딧세이아(Odysseia)로 호평받는다.

3.카잔차키스는 두번의 결혼을 한다. 1911년 갈라테아 알렉시우(Galatea Alexiou)와 결혼했으나 1926년 이혼한다. 이후 1924년 만난 엘레니 사미우(Eleni Samiou Helen)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1945년 결혼한다. 사미우는 카잔차키스가 사망(1957)할 때까지 작업 보조와 여행 동행, 사업 관리를 했다. 사미우는 2004년 사망한다.

4.어린시절 튀르키예에 저항하다 처형된 크레타 사람들을 본 이후 독립 투쟁을 결심, 나중에 독립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에는 유네스스코 번역국 국장도 맡았으나 1년만에 사퇴했다. 이상적 민족주의자로 좌파 정당의 대표를 맡았고, 내각에 들어가 정무장관도 지냈다.

5.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1957년(74세) 프라이부르크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고향인 크레타로 옮겨져 이라클리오 성 요새(Martinengo Bastion)에 묻혔다.
묘비명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이다.

고향 크레타 이라클리오 무덤에 써있는 묘비명.photo by wikipedia

고향 시골마을 미르티아에는 카잔차키스박물관이 있다. 사망 50주년에 기념주화(10유로)가 나왔다. 프랑스 파리 뒤 소메라르 거리 13에는 카잔자키스 판이 설치돼 있다.

6.소설과 희곡, 시, 번역 등 작품을 많이 남겼다. 소설 ‘(그리스도)최후의 유혹(1988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나 여러 국가에서 신성모독 시위가 벌어지고 상영금지도 됐다. 흥행도 실패했다.
다른 작품으로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The Greek Passion,1948), ‘성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co(1953)’,‘동족상잔(1957)’ 등이 있다.

7.카잔차키스는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린다. 또 동서양 많은 작가들의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난해한 문체 등이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대단한 문학적 성과에 비해 유명세가 덜하는 이유라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 등의 문학적 성과에 힘입어 노벨문학상 후보에 아홉차례나 올랐지만 끝내 받지 못했다. 알베르 까뮈(1913~1960, 알제리 출생 프랑스 소설가) 등 동시대와 후대의 내노라 하는 작가들이 카잔차키스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애석해 했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까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더 백번은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영국 작가 콜린 윌슨(1931~2013)은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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