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국정 혼란이 몰고 온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난중일기 첫 문단은 소소한 일상으로 서두를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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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혼란이 몰고 온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난중일기 첫 문단은 소소한 일상으로 서두를 연다

지성인간 2025. 1.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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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임진왜란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한 그림 병풍)’. 2012년 영국 경매에 나온 6폭 병풍으로 순천왜성 전투에 이은 노량해전(오른쪽 위), 명나라 군대가 조선과 명 황제에게 보고하는 장면(왼쪽 위) 등을 묘사했다. 그림은 인물과 배의 모습이 중국풍인데다 금가루와 청색을 많이 사용한 일본 회화 기법이 엿보여19세기에 일본인이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년 정월 초1일(임술) 맑음. "새벽에 동생 여필(汝弼,우신-禹臣의 字) 및 조카 봉(菶)과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님 곁을 떠나 남도에서 두해를 보내니 지극히 한스러운 마음을 이길수 없었다. 병사(兵使)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사의 편지 및 새해선물과 긴 화살 등 여러가지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바쳤다.
초2일(계해)맑음. 나라의 제삿날-명종비 인순황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고 김인보(金仁甫)와 이야기했다. 초3일(갑자) 맑음. 동헌에 나가 별조방군(別助防軍)을 점고(點考)하고 각 관아와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이순신 저, 장윤철 역, 스타북스, 2022)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본문(오른쪽)과 서간첩 '임진장초'. 난중일기는 그해의 간지로 제목이 돼 있었으나 정조(1795) 때 활자본으로 간행하면서 전체를 '난중일기'로 처음 썼다.아산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소장.

1.제목 그대로 전형적인 국난(國亂)을 기록한 일기다. 국정 혼란이 몰고온 전쟁의 참화속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문장과 문체를 따질 수 없는 기록문학 그대로다. 해석의 여지가 없다고나 할까. 문체는 아주 사적인 ‘일기’ 그대로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기체 형식의 모든 글에서 원용해볼만한 일기문학의 결정체다. 본문에 나오는 *.여필은 저자의 동생 이우신(李禹臣)이다. 저자는 4형제중 셋째다. 4형제의 이름끝자는 돌림자인 신하 신(臣)이다.가운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황오제(三皇五帝)-즉 삼황(복희, 신농, 여와)과 오제(황제, 전욱, 제곡, 요, 순), 뒤를 이은 우 임금에서 따왔다. 복희(伏羲-최초 황제)에서 희(羲-큰 형), 오제 중에서 요(堯-둘째 형, 생원시 합격 후 요절, ?~1580), 순(舜-본인)를 택했고, 순을 이은 우(禹-동생)를 따왔다. *.봉은 저자의 조카 이봉(李菶,생몰 미상)으로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에 포함됐다. *.회는 저자의 아들 이회(李薈,1567~1625, 임실현감 역임)다. 

1555년 명종 때 개발,건조한 조선 최초 전투함 판옥선.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펼친 판옥선은 선체 위 전면에 걸쳐 상장(上粧)을 꾸린 2층 옥선(屋船)이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병사(兵使)는 병마절도사의 준말이다. *.이경신(李敬信, 생몰 미상)은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이순신 아래서 훈련판관(訓鍊判官,종5품)을 지낸 인물. *.인순황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5~1575)는  명종(明宗, 1534~1567)의 왕비다. 명종은 조선 11대 국왕 중종(中宗,1488~1544)과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99)의 늦둥이 외아들로 조선 제13대 임금이다. 인순왕후는  명종과 사이에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마지막 '직계 적통'인 순회세자(順懷世子,1551~1564)를 낳았다. 선조의 양모(養母)이기도 하다. *.김인보(金仁甫, 생몰 미상)는 저자의 문관 측근. *.별조방군(別助防軍)은 부대 편성의 단위로 별도로 편성한 방위군, 약칭 별방이다. *.점고(點考)는 점을 찍어 가며 사람 수를 세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치른 여수 진남관 (麗水 鎭南館).임진왜란 직후인1599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李時言, 1557~1624,이괄의 난 연루돼 참수)이 객사로 다시 지었는데, 1609년 불탔다.현 건물은 1718년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1652~1718)이 중창했다. 2001년 4월 1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04호로 지정됐다.전남 여수시 동문로 11 (군자동)에 있다. 출처=여수시.

2.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1592~1598)는 불후의 걸작이자 전쟁문학의 백미(白眉), 일기문학의 보고다. 싫든 좋든 한국인의 필독 '국민 교양서'로 '정전(正典)'의 반열에 오른 상태다. 한민족 최대의 전란인 임진(壬辰,1592~1597년 8월),정유(丁酉, 1597년8월~1598) 7년(1592~1598) 전쟁 기록이다. 국보 제76호(1962)로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전쟁 중 군중(軍中)에서  전통 한지에 붓으로 기록한 친필본 일기로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기록물이다.(지휘관이 직접 쓴 첫 전쟁 기록인 로마 공화국 집정관이자 독재관을 역임한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 BC 100~BC 44)의 '갈리아 전쟁기'도 로마 개선 후 썼다.)

일본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 중 한 명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1562~1611,일본 큐슈 구마모토(熊本)번 초대 번주)에게 보낸 출동 명령서인 슈인조(도장을 찍은 공문서). 출처=일본 아이치현의 가리야시 역사박물관

국보 지정 당시 공식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였다. 이후 2010년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됐다. 
'난중일기' 친필본은 1592년 5월 1일부터 시작하는 전문 7권 8책으로 초서(草書, 한자를 흘려쓴 서체)로 기록돼 있다. 
초서여서 해독이 쉽지 않았으나 정조 19년(1795) 어명(御命)으로 첫 활자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4권 8책)'로 간행됐다. 이 활자본은 경적(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인신(印信 : 도장) 등을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 校書監, 芸閣) 관리인 유득공(柳得恭,1748~1807, 저서 '발해고')이 주도했다. 초서를 정자(正字)로 바꾸고 전체 일기를 하나로 모아 간행했음에도 친필본 일부가 누락됐다. 그래도 이 활자본은 전서본(全書本)이라 하고, '난중일기'라는 말도 처음으로 썼다. 원래 저자가 쓸 때 제목은 일기를 쓴 해의 간지(干支, 십간십이지,十干 十二支)를 붙여 연도별로 1592년은 '임진일기(壬辰日記,1592)', 1593년은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이었다.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운데 아이)를 영웅시 해 그린 츠키오카 요시토(月岡芳年,1839~1892,나중에 츠키오카 요시토시) 작 도요토미 승진록(豊臣昇進録). 요시토는 에도(江戸)시대(1603~1868)를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다. 출처=일본 도검월드재단. www.touken-world-ukiyoe.jp

3.'난중일기'를 후대에 편집해 활자로 간행한 것 중 가장 뛰어난 판본은 400여년이 지나 나온 '난중일기 초(亂中日記草)'다. 1935년 12월 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친필본과 전서본을 대조해서 냈다. 난중일기초는 조사관 일본인 연구원 나카무라 히데다카(中村榮孝, 1902~1984, 나고야 대학 교수 역임)가 유물 유적 등을 조사 기록했고, 조선인 임경호(林敬鎬)가 친필본 '난중일기'를 해독했다. 최종 교열은 조사관 홍희(洪憙)와 히데다카가 했다. 그럼에도 오독과 오탈자는 여전했다.
앞서 또다른 편집본은 1916년 조선연구회 주간(主幹, 책임자) 아오야나기 난메이(靑柳南冥,1877~1932)가 '전서본'을 토대로 일본어 해석이 붙은 '원문 화역 대조 이순신전집(原文和譯對照 李舜臣全集)이다. 이는 일본어판 최초 번역서다. 필사본 중에는 덕수 이씨 집안에 전하는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 1716)'도 있다. 이순신 친필본을 옮겨 적은 유일한 필사본이다. 2008년 6월 현충사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포함, 영인본으로 간행했다. 

일본 에도(江戸,현 도쿄)시대(1603~1868)를 대표하는 우키요에 화가 츠키오카 요시노(月岡芳年.1839~1892,츠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린 일본 의 출정식 모습을 그린 '조선정벌대평정도(朝鮮征伐大評定図)'. 가운데가 조선 침략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다. 출처=일본 도검월드재단. www.touken-world-ukiyoe.jp

4.'난중일기'는 임진, 정유왜란 2539일간의 군중(軍中)의 생활과 전란(戰亂)의 정세를 다르고 있다. 내용은 일상생활, 동료와 친척 왕래, 본인의 집안 대소사, 조선 수군(水軍) 관련 훈련과 비책(秘策), 나라에 대한 충성, 왜군에 대한 분노 등이 실려 있다. 또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간의 갈등, 당시의 경제, 사회 문제 등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초의 장갑선(裝甲船,적탄을 막기 위해 선체 등을 강철로 덧싼 배)’으로 불리는 거북선 기록도 나온다.
'난중일기'는 48세의 나이에 기록을 시작한 전란 보고서이자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중요성을 알리는 교과서다. 개인이 쓴 최장의 전쟁기록이다. 한편 '난중일기'에서 가장 길게 서술한 곳은 1597년 명량해전(鳴梁 海戰)이다. 음력 9월16일부터 치른 전투는 울돌목(해남과 진도 사이 바다 물길)에서 12척의 배로  300여 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와 싸워 승리한 기록이다.
이에따라 난중일기에 대한 평가는 매우 후하다.국내외  수많은 학자, 문학인들이 격찬했다. 이순신을 소재로 소설 '칼의 노래(2001)'를 쓴 소설가 김훈(1948~현재)은 난중일기에 대해 "수사학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라며 "모든 것이 사실에 입각해 있다"며 아주 전압이 높은 문장이라고 말했다.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1555,1558?~1600) 초상.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로 가장 먼저 조선땅을 밟았다. 우키요에 화가 오치아이 요시키(落合芳幾,1833~1904) 작품. https://ja.wikipedia.org

5.'난중일기'는 전란 중의 기록임에도 주변 인물도 과감하게 비판했다. 특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선후사(公先後私)를 원칙으로 썼다. 당시 도원수(都元帥, 정2품) 권율(權慄,1537~1599, 1593년 도원수 부임)에 대해서는 '남의 공을 시기하고, 사사로이 일을 처리한다'고 비판했다. 
평민 출신으로 1583년 무과에 급제한 경상우병사(兵馬節度使, 종2품) 김응서(金景瑞, 1564~1624)가 '조정의 명도 없이 사사로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임진왜란 선봉장)와 교섭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개선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다"며 "쓸개가 있는 자라면 자결이라도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순신을 천거해 국난을 극복한 전시 재상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 저서 '징비록', 선조 때 제82,84대 영의정) 선생 상.

또 '어우야담(於于野譚)'의 저자로 당시 남도지역(전라도 남쪽와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파견 나왔던 흥양(현 전남 고흥군) 출신  류몽인(柳夢寅,1559~1623, 광해군 복위 모함받고 처형, 전남 고흥군 고흥읍 운곡사 배향)의 행실에 대해 "나라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도 않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는 변명만 믿고 있다"며 중국 송나라의 간신이었던 "진회(秦檜, 1090~1155, 송나라 문신)가 무목(武穆, 송나라 학자 악비,岳飛,1103~1141)한테 하던 짓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경상도 수사(水軍節度使, 종3품 외관직 무관)와 충청,전라,경상 3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종2품 외관직의 무관)를 지낸 원균(元均, 1540~1597, 칠천량 해전 전사)은 일기 속에 120회 가량 언급되고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하다'고 매우 비판적으로 다루고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직격했다.

조선을 침략해 7년동안 전쟁의 참화를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초상. 히데요시가 1958년 7월17일 죽자 혼란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와 가신들은 관복을 그대로 입혀놓고 사망을 숨겼다가 뒤늦게 장례를 치렀다. 출처=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6.'난중일기'에는 저자가 칭찬하는 인물도 많다. 이순신은 자신을 천거(薦擧)했던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 저서 '징비록', 선조 때 제82,84대 영의정)은 후하게 평가했다. 류성룡의 '증손전수방략(增損戦守方略)'에 대해 "수전과 육전, 화공법에 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한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이라고 극찬했다. 
당시 체찰사(體察使, 종1품,국가 변란 때 군무 총괄) 이원익(李元翼,1547~1634, 선조, 광해군, 인조 3대 걸쳐 영의정 역임)에 대해서는 "(제반 업무가)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을 둔 것 같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원익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심문받을 때 당시 우의정 찬성(贊成) 정탁(鄭琢, 1526~1605, 선조때 좌의정 역임)과 함께 이순신을 구명(求命)한 인물이다. 이밖에 임란 당시 선산(善山, 현 경북 구미)군수로 의병활동을 하다가 자신의 종사관(주장-主將을 보좌하던 직, 5,6품)을 지낸 정경달(丁景達,1542~1602, 통정대부, 通政大夫,정3품)도 높이 평가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1번지에 있는 순천 왜성 유적지. 정유재란(1597) 당시 육전에서 퇴진한 왜군 선봉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1572~1655,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656~1630, 원균 상대 칠천량 해전 승리)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이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왜병 1만 4000여 명이 1598년 11월 19일 퇴각할 때까지 주둔했던 곳이다. 출처=순천시청

7.난중일기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한글 번역본은 1953년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설의식(薛義植, 1900~1954, 1947년 새한민보 창립 사장)의 '이순신 수록(手錄) 난중일기(수도문화사)'다.  1955년에는북한에서 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洪命憙,1888~1968,이광수, 최남선과 조선의 3대 천재,1948년 월북 북한 부수상 역임)의 아들 홍기문(洪起文, 1903~199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부원장 역임)이 번역, '리순신 장군 전집'으로 평양에서 간행했다.
한국 공식 번역본은 1960년 4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서울대 교수 등 역임, 한국시조작가협회장) 역주로 문교부에서 간행한 '이충무공 난중일기'다. 이후 이은상은 1968년 4월2일 기존 번역을 보강한 '난중일기'를 출판사 현암사에서 냈다. 그런데 같은해 같은달 같은날에 이석호가 역주한 '난중일기'가 지문각에서 나와 주목을 받았다. 현암사는 이은상 역 '난중일기'를 1984, 1993년에 현암신서 제34권으로 다시 냈다. 이후 난중일기는 수많은 역본이 나왔다. 
한편 2005년 국가기록유산 디지털 정보화 사업 때 친필본 탈초와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고전전문번역가)이 국내 최초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출간했다. 그해 5월에는 박해일 교수 외 3인이 친필본을 번역한 '이순신의 일기초'를 간행했다.  

명의 임진왜란 종군화가가 그린 노량해전(露梁海戰,1598년12월16일)-미국 콜롬비아 대학 게리 레드야드(Gari Keith Ledyard,1932~2021) 교수가 공개한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屛,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 11장의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12년 구입해 소장중이나 1~6장(?)은 스웨덴 스톡홀름 극동아시아박물관에 있다.

8. 현대에 들어와서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발생, 충격을 줬다.1967년 12월 31일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보관한 난중일기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새해를 맞아 경남 진해에서 휴가중이던 박정희(朴正熙,1917~1979, 5~9대 대통령)대통령은 국보 도난에 충격을 받고, 수사력을 총동원해 범인을 잡으라고 지시하는 한편 1월8일에는 도난범에 대해 자수를 촉구하는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담화 다음날 부산시경(국장 정석모,1929~2009, 나중에 내무장관 역임)에 제보가 들어왔고, 주모자 류근필(당시 37세, 골동품상)을 검거했다. 
난중일기는 1968년 1월 9일 도난 10일만에 회수됐다. 그런데 이 사건은 충무공 이순신의 성웅화와 현충사 성역화에 일조했다. 도난됐다 회수한 '난중일기'는 군용 헬기로 청와대에 전달돼 대통령이 직접 문흥주 문교부 장관(재임 1966년9월26~1968년5월20일)에게 전달했다. 문교부는 이를 덕수궁에서 전시해 큰 홍보효과를 누렸고, 영인본을 500부를 제작, 전국 도서관은 물론 각급학교에도 배포했다.이후 현충사 소장본은 원본 열람 자체가 금지됐다.

불멸의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이순신(1545~1598)=한민족 최고의 명장.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의 해군 제독으로 시호는 충무공, 자(字)는 여해(汝諧).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창조한 불멸의 영웅.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받는다.

1. 한양 건천동(현 서울 중구 인현동 명보아트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변수림(卞守琳)의 딸(1515~1597)’이다. 형  희신(羲臣,1535~1587), 요신(堯臣,1542~1580), 동생  우신(禹臣, 생몰미상)이 있다. 아들 4형제는 모두 신하 신(臣)자를 붙였다. 중국 최고의 황제와 임금을 신하(?)로 만든 셈이다.
소년기를 한양 건천동에서 보내던 이순신은 가세(家勢)가 기울면서 10세 전후 가족과 함께 충청도 시골 아산으로 이주했다. 건천동 시절에는 3살 위인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 저서 '징비록', 제82,84대 영의정)과 친하게 지낸다. 또 당시 고위 관료였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1572, 명종 때 영의정)의 눈에 들어 나중에 은혜(중매)를 입는다.

충남 아산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의 은행나무 모습. 출처= 국가유산청 현충사 관리소

2.21세때 충청도 온양(아산)의 재력가로 1565년 보성군수를 지낸 무관 온양방씨 방진(方震,1514~?)의 딸과 결혼했다. 혼약은 방진과 동문수학한 당시 병조판서였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 명종때 영의정 역임)이 적극 중매해 사실상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이순신과 부인 사이에는 아들 이회(李薈,1567~1625, 임실현감 역임), 이예(李䓲,1571~1631,형조정랑 역임),  이면(李葂,1577~1597,정유재란 때 왜군과 교전 중 전사) 등 3형제와 딸(청난공신 홍가신, 洪可臣의 아들 홍비, 洪棐에게 출가)이 있다.
이순신의 처 방씨에게는 사후인 선조 24년 정경부인(貞敬夫人, 정1품 부인)이 내려졌다. 장인 방진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로 장모 남양 홍씨(참의공 홍윤필의 딸)는 숙인(淑人,정3품 부인)으로 증직됐다. 첩으로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 부안댁이 있다. 해주오씨와 사이에 2남2녀가 있다. 아들 이훈(李薰, 1574~1624)과 이신(李藎, 미상~1627) 이 있다. 이훈은 1624년 1월(인조 2년)일어난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괄(李适,1587~1624, 인조반정 공신 선정 문제로 반란)의 난' 진압때 전사했다. 또 이신은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2월23~4월18일)때 의주성(현 평북 의주)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여인’인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한국이름 기덕 奇德)가 그린 이순신 장군 추정 초상화(왼쪽). 키스가 1946년 간행한 ‘올드 코리아(Old Korea-the Land of Morning Calm)’ 에 그려진 그림을 2020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것이다. 키스 그림은 재미 학자 송영달 이스트캐롤라이나대 명예교수가 1990년대 발굴해 공개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키스는 일본에 있다가 1919년 3월 부산을 거쳐 경성에 왔고, 1921년 9월 경성 한 은행에서 외국인 첫 전시회를 연 인물이다. 출처=책과함께.

3.이순신은 무과 재수생이다. 선조5년(1572) 훈련원 주관 별시에 응시했으나 낙마(落馬)로 탈락했다. 32살 때인 선조 9년
(1576) 2월 식년시(3년마다 치르는 과거) 무과에 급제한다.당대 조선 명장 신립(申砬, 1546~1592)은 21살,  원균(元均, 1540~1597, 칠천량 해전 전사)은 27살에 합격했다. 무과(갑을병 3과) 합격생 총 29명 중 12등(병과 4등,갑과는 종7품, 을과 종8품, 병과는 종9품으로 임명)으로 합격했다. 이후 첫 관직으로 , 권지 훈련원 봉사(權知訓練院奉事, 종8,9품)를 맡는다.이해 말 여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두만강 근처 동구비보(童仇非堡, 함경도 삼수군)의 권관(權管, 종9품 경비대장), 즉 변경 수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함경도 관찰사가 청백리로 유명한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 선조때 호조판서 역임, 추증 영의정)이다. 이순신은 이후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선조12년(1579) 2월 한성 훈련원 봉사(종8,9품),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돼 해미병영(현 충남 서산 해미읍)에 근무한다. 36세인 선조13년(1580)에 처음으로 수군 임무인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현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부임한다.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있는 이순신 장군 오동나무 이야기가 깃든 발포만호성과 충무공 기념관. 발포성은 조선 성종 21년(1490)에 쌓은 성이다. 만호(萬戶)란 각 도의 여러 진(鎭)에 파견된 종4품의 무관직으로 1만호를 관리하는 직이다. 출처=고흥군청

나중에 유명해진 '오동나무 사건'이 이때 터진다. 발포 만호성 관아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전라좌수사(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정3품) 성박(成博)이 이를 베어오게 했으나 거절한 것이다. 이에 성박 등이 관계요로에 부정적인 말을 남긴다. 이를 안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이 이순신을 밉게 보고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겨 보고한다. 그런데 이를 본 전라도 도사(都事,감사 보좌역 종5품)로 재직 중이던 조헌(趙憲, 1544~1592, 추증 영의정,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 4충신)이 고과 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 수정했다. '발포만호 이순신 오동나무 청렴일화비'는 전남 고흥군 발포리 청렴광장에 설치돼 있다.
이순신은 선조15년(1582)년 1월 군기 경차관(軍器 敬差官, 병기고 임시 검열관)으로 온 서익(徐益, 1542~1587)이 과거의 일(서익의 훈련원 장무관 시절 이순신이 부당한 일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린다. 이에 이순신은 발포 수군만호에서 파직(罷職)된다. 다만 5월에 한양 훈련원 봉사(종8품)로 복직된다.

고려~조선시대 함경도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 8명의 행적을 담은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18세기 작가 미상) 중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조선의 맹장 신립(申砬, 1546~1592)장군이 1583년(선조 16) 함경도 최북단 온성부사로 있을 때 오랑캐가 경원도호부의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했으나 화살 한 발로 소탕한 고사를 그렸다.고려대 박물관 소장.

선조16년(1583) 7월 함경남병사(병마절도사) 이용의 추천으로 군관으로 갔다가 경원진 동쪽 건원보의 권관(종9품)이 됐고, 직후 벌어진 여진족과 싸움에서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종7품 )으로 승진한다. 하지만 부친 별세로 집에 돌아와 삼년상을 치르고, 선조20년(1587)에 다시 출사해 8월 조산만호(종4품)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를 맡는다. 
그해 10월 녹둔도(鹿屯島) 전투때 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음에도 승리를 거뒀으나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 약칭 북병사) 이일(李鎰, 1538~1601)의 모함으로 보직 해임을 당해 백의종군(白衣從軍)한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이 죄없는 무고를 당한 것을 알았으나 조선의 맹장으로 당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종2품)인 신립(申砬, 1546~1592, 1592년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군무 총괄특사)로 출전,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 전사)의 당파인 이일(李鎰, 1538~1601)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44세 때인 선조 21년 여진족 진압에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해제되자 사임하고 6월 아산으로 귀향한다.

충무공 이순신 초상으로 전해지는 전 이순신 초상(傳 李舜臣 肖像),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56호.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4.이순신이 다시 관직에 입문한 것은 45세 때인 1589년(선조23)이다. 1587년 전라도 흥양(고흥) 앞바다인 손죽도(巽竹島, 현 여수시 삼산면)에 침입한 왜구와 전투에서 수군이 패전한 정해왜변(丁亥倭變) 직후다.정해왜변은 지원병력을 거부당한 녹도권관(鹿島權管)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이 혈혈단신으로 왜구와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비변사(備邊司, 군국기무軍國機務 관장 문무합의기구, 수장은 정1품 도제조)가 1588~89년 불차채용(不次採用, 직책 직급관계없이 특별채용)할 때 복귀했다. 
당시 우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선조때 영의정)와 선조 때 병조판서와 우참찬,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鄭彦信, 1527~1591, 정여립 사건 연루돼 유배지 갑산에서 사망)이 추천해 2월 전라도 감사 조방장(助防將, 종9품)에 임명된다. 이해 12월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임진왜란 영의정으로 전시 재상)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 현감(종6품)이 된다. 이듬해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됐으나 부임 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 종3품)로 전임됐고, 역시 부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종3품)에 보임된다.1년만에 9품에서 3품까지 파격 승진, 제 역할을 찾은 것이다.

북관유적도첩 중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다). 이순신이 1587년(선조 20) 함경도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을 때 기습 침입한 여진족을 쫓아 포로로 붙잡힌 농민과 병사를 구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5.선조24년(1591)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남방 전선 정비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거북선을 개보수하고 화포 훈련도 수시로 시행한다. 또 이듬해 4월 초에는 손으로 불씨를 점화해 발사하는 화포(火砲)인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등을 판옥선과 거북선에서 훈련한다. 우리나라 총통은 크기에 따라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황자(黃字) 총통으로 분류하고, 통칭 화포라 한다. 이 당시 조정은 왜의 침입을 둘러싸고 국정 혼란이 이어진다.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데도 조정의 당파 싸움이 지속되던 1592년(선조 25) 4월13일(음력) 오후 5시 쯤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다. 왜군은 금정산(金井山) 줄기(금정산맥 그림자)가 끊긴데서 섬 이름이 유래한 절영도(絶影島, 현 부산 영도구)에 조총을 쏘며 상륙했다. 7년간 조선 전역을 참화로 뒤덮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년12월16일)이 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조정은 봉수(烽燧)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장계(狀啓, 지방 관아에서 왕에게 올리는 문서)를 받은 17일에야 전쟁 발발을 알았다. 
한편 임진왜란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통칭적으로 쓰고, 북한은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 한다. 중국은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 만력은 당시 황제 연호)과 항왜원조(抗倭援朝)를 쓴다. 일본은 분로쿠(文禄,문록) 게이초(·慶長,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 조선출병(朝鮮出兵)이라 한다. 이밖에 학자들에 따라 조일전쟁(朝日戰爭),임진전쟁(壬辰戰爭),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으로도 쓴다. 영미권에서는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으로 쓴다.

18세기 조선 화가 변박(卞璞, 1742~?)이 1760년 그린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 그림 윗부분은 왜군이 성으로 들어오자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 1592년 음력 5월 14일 참수)과 부하들이 도주하고 있다. 성 안의 붉은 관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단정하게 앉은 이들은 송상현(宋象賢, 1551~1592)부자의 순절 직전 모습이다. 변박은 1764년 조선 통신사 공식 화가로 왜국을 다녀온 인물이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6.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종3품 수군첨절제사 정발,鄭撥,1553~1592) 전투가 4월14일(양력 5월24일) 벌어져 그날 오후 함락됐지만 이순신의 첫 승리는 전라좌도 수군을 지휘해 음력 5월4~8일 싸운 옥포(玉浦) 해전이다. 이어 합포(合浦,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적진포(赤珍浦, 현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에 출전, 승리한다. 이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 승진한다.
이순신은 이어 5월29일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한 사천(泗川, 현 사천군 앞바다)해전, 6월2일 당포(唐浦,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해전, 5일 1차 당항포(唐項浦,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해전, 7일 율포(栗浦, 거제시 장목면 율포)해전에서 승리한다. 7월에는 8일 한산도(閑山島, 통영시 한산면 거제대교 앞, 한산도 혹은 견내량 대첩,見乃梁 大捷)해전과 10일 안골포(安骨浦,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해전에서 이긴다. 8월에는 부산으로 진출해 29일 장림포(다대포 서쪽), 9월1일 화준구미(花樽龜尾, 다대포 서남쪽), 다대포(多大浦), 서평포(西平浦, 다대포 동쪽  송도해수욕장), 절영도(絶影島, 다대포 동쪽 섬, 영도구 남항동) 초량목(다대포 동북부, 남포역), 부산포(釜山浦) 등에서 왜군을 무찌른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전라좌수영 최고의 돌격대장 흥양(전남 고흥군)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 추증 병조참판) 장군이 전사한다. 한편 정운 장군이 전사한 부산포 해전 승전일인 10월5일(음력 9월1일)이 부산시민의 날이다. 
이순신은 1593년 음력 2월10~3월6일 벌어진 웅포(熊浦)해전에서도 압승한다. 또 5월 벌어진 2차 웅포해전서도 승리한다. 이런 공로는 그해 음력 8월1일 초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종2품,수군 총사령관)가 된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군을 이끌고 한산도로 수군의 진(삼도수군통제영, 약칭 통영)을 옮긴다. 

정유재란 울산성 전투 주역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 1610~1612 명나라 요동총병관 역임) 초상.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울산성 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명나라가 망하자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조선으로 귀화, 상곡 마씨(上谷麻氏)의 시조가 됐다.작가 출처=미상.

7.전쟁  3년째인 1594년부터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명군이 참전하면서 강화 회담이 이어지는 등 대치하는 상황으로 간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적극전으로 전환을 독려하지만 이순신은 적의 유인작전에 말린다며 응하지 않는다. 결국 1597년(선조30) 음력 2월 25일(양력 4월 11일)에 거짓보고(부산 왜영 방화 사건), 어명 거역(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1562~1611 도해 저지 출전 명령) 등을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한다. 이순신은 어명거역 등을 이유로 서울로 압송, 3월 4일 투옥된다. 후임은 원균(元均, 1540~1597)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1597년 8월28일(음력7월16일) 칠천량(漆川梁,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해전에서 대패, 조선 수군의 궤멸을 부른다.
이순신은 한달간의 감옥생활 끝에 영의정 류성룡, 우의정 정탁(鄭琢,1526~1605, 선조때 좌의정 역임)의 상소 등의 노력으로 방면돼 도원수(都元帥, 조선군 총사령관) 권율(權慄, 1537~1599)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 대패는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줬고,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자 이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오성대감으로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1600년 영의정), 경림군 김명원(金命元, 1534~1602, 선조 때인 1601년 좌의정) 등이 이순신의 삼도 수군통제사(종2품) 복직을 건의해 받아들여진다. 이때가 칠천량 해전 참패 일주일 후인 음력 7월23일이다. 

성웅 이순신과 거북선-100원이 지폐이던 시절, 500원권 지폐의 인물 이순신 장군.

8.이순신은 음력 7월말~8월 초 경상 우수사(정3품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배설(裵楔, 1551~1599, 탈영후 고향 선산에 숨어있다가 종전 후 잡혀서 참수, 광해군때인 1610년 병조판서 추증)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는다. 직후 음력 8월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 폐지하라는 조정의 말을 전하자 '신에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며 반대하는 한편 진도(전남 진도)로 삼도수군통제 진을 옮긴다. 이 와중에 어란포(於蘭浦)해전(음력 8월27일)과 벽파진(碧波津)해전(음력 9월15일)을 치른다.
임진왜란 사에서 유명한 전투인 명량(鳴梁, 울돌목,파도소리가 울음소리로 들리는 좁은 수로)해전은 9월16일 벌어진다.이순신 전선 13척과 피난선 등이 명량 입구 좁은 목에서 일본군 133척과 대적해 대승했다. 정유재란의 판세를 뒤집은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는 전투였다. 명량 해전 일본측 지휘자인 토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656~1630, 원균 상대로 칠천량 해전 승리)의 '고산공 실록' 에도 일본군 대패로 묘사됐다.
이후 54세 때 1598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왜적 섬멸에 나서 7월19일 흥양 절이포(折爾島, 고흥군 금산면 신촌리), 9월20일~10월7일 흥양현 장도(獐島. 현 보성군 벌교읍), 순천 왜교성(倭橋城 ,해룡면 신성리 왜성,순천왜성 전투, 順天倭城 戰鬪) 등에서 잇따라 승리한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하는 이순신 장군을 그린 기록화. 1967~1979년 사이 그린 것으로 화가 조중일의 '이순신 장군의 해전도'로 알려져 있다. http://www.koryoart.com

9.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는 7년 전쟁을 끝낸 전투 '노량(露梁,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고현면 차면리)해전'이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조선 수군(지휘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지휘 진린,陳璘,1543~1607)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가 이끄는 일본군을 포위, 섬멸작전을 벌인다. 이 때 일본군은 전국 시대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음력 8월 18일 사망)의 사망으로 철군하려고 부산쪽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 함대에 접선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진린이 지휘하는 조명연합군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광양만의 동쪽 노량해협으로 유인해 관음포 앞바다서 기습했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오전 8~10시 쯤이다.조명연합군과 일본 수군 간의 일대 난전(백병전)이 벌어졌고 전라좌수영 장수들이 수명 전사했다.더구나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이 위협받는다. 결국  대장선이 조총 사거리에 들면서 최고 지휘관 이순신이 총탄을 맞는다. 대장선의 송희립(宋希立, 1553~1623)도 부상을 입었고, 이순신 최측근 참모 유형(柳珩,1566~1615, 종전 후인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 역임) 은 탄환을 6발 맞고도 전투를 독려했다.하지만이순신에 이어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1563~1598)도 끝내 전사했다. 
노량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승리였다. 왜적 배 1백 척을 포획하고, 2백 척을 불태웠으며, 500명을 참수했다. 포로도 180명이었다.  하지만 일본군도 명군 200명을 살해하고, 조선 배 4척, 명나라 배 2척을 포획했다고 정한록(征韓録) 등에 기록했다. 또 일본측은 노량해전의 결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와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1562~1611) 등 조선에 갇혀 있는 다이묘(大名, 일본 중세~근대 영주)들을 구출, 현해탄을 넘어 귀국했다. 이를 두고 일본군이 정유재란에서 전략적 승리를 했다는 평가도 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핀 매화.출처= 국가유산청 현충사 관리소.

10.이순신 일화는 많다. 이순신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율곡 이이(李珥,1537~1584, 이조판서 역임,추증 영의정,과거 장원 급제를 9번이나  한 조선의 천재)와 같은 덕수이씨다. 율곡은 이조판서 재직때 서애 류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려고 했으나 무산됐다.
임진왜란에 참전해 용인전투(1592년 음력 6월 5~6월 6일, 수원 광교신도시)와 칠천량 해전(1597년 음력 7월16일)에서 대승했지만 한산도와 명량에서 이순신에 패한 일본군 수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는 사망 전 회고록에서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며 "나는 그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고 말했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대한해협(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4)는 승전 후 "나를 호네이쇼 넬슨, 제1대 브론테공작(Horatio Nelson, 1758~1805, 트라팔가 해전 Battle of Trafalgar 승리한 영국 제독)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을 연결하는 이순신대교에도 명명됐다. 이 다리는 길이 2.26km의 현수교이며, 2개의 주탑 사이의 경간(徑間) 길이가 1545m인데, 이는 이순신이 태어난 해인 1545년을 기념한 것이다.한편 일본에서는 이순신 소재 책이 많이 나왔다. 그중 비교적 객관적인 평전은 1892년 일본 육군 대위 시바야마 나오노리(柴山尙則)가 지은 '조선 이순신전(朝鮮李舜臣傳)과  샤쿠오 슌조(釋尾春芿,1875~?,1805년 일어주간지 '朝鮮' 창간)가 1914년 펴낸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이 있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편 '노량-죽음의 바다' 스틸컷 . 배우 김윤석이 이순신 장군을 연기했다.사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롯데엔터테인먼트.

11. 이순신은 생전(전사 직전) 관작이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兼 三道水軍統制使)이다. 정헌대부는 정2품이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증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발발 200년이 되는 1792년(정조 16년)에 왕은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가증(加贈)했다. 
사후 추증 관작은 유 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시 충무공(有明 水軍 都督 朝鮮國 贈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諡 忠武公)이다. 이는 수군도독 영의정(정1품)이다. 현대에 이순신의 명칭은 '장군'보다 '제독(Admiral)'이 더 올바른 평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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