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노인과 바다-독보적 서사와 간결한 문체가 빛나는 불멸의 고전 첫 문단은 서사시처럼 전개된다. 본문

카테고리 없음

노인과 바다-독보적 서사와 간결한 문체가 빛나는 불멸의 고전 첫 문단은 서사시처럼 전개된다.

지성인간 2024. 11. 11. 06:36
728x90
반응형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 걸프스트림(The Gulf Stream,멕시코 만류)을 표류하는 배-미국 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1836-1910)가 1899년 그린 '걸프 스트림'이다.거친 상어가 들끓는 바다를 표류하는 어부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 화가 호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https://terms.naver.com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팔십사일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았다. 처음 사십 일 동안은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나갔다. 하지만 사십 일이 지나도록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이젠 정말이지 돌이킬 수없게 '살라오', 즉 운수가 완전히 바닥난 지경이 되었다고 소년에게 말했다. 소년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다른 배를 타고 나갔고, 그배는 일주일동아 큼직한 고기를 세마리나 잡았다. 매일같이 빈배로 돌아오는 노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소년의 마음이 아팠다. 소년은 언제나 물가로 내려가서 노인을 도와 사려놓은 낚시줄 뭉치나 갈고리와 작살, 또는 돛대에 둘둘 만 돛 따위를 날랐다.밀가루 부대를 여기저기 기워 붙인 돛은 둘둘 감겨있는 꼴이 마치 영원한 패배의 깃발처럼 보였다."(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저, 이인규 역, 문학동네, 2012)

러시아 우랄 예카테린부르크 출신의 한국 국적 화가이자 디자이너 알렉산더 빌겔모비치 남(Alexander Vilgelmovich Nam)이 그린 '노인과 바다'. http://www.arthit.ru

1.문장 하나하나를 따로 떼놓고 보면 마치 잘 읽히는 서사시(敍事詩)같다. 운문체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첫 문단이다. 저자 특유의 절제되고 강한 기사형 문체, 짧고 쉬운 문장들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묻어난다. 3인칭,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늙었지만 강건한 노인의 행위를 멀치감치 떨어져서 서술하고 있다. 도입부부터 거대 상징과 은유가 묻어난다. 84일의 흉어기간,  소년, 살라오, 기워붙인 돛 등이 그것이다. 탐사 보도나 스토리텔링 보고서 등에 아주 좋은 문장 구성과 문체라 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멕시코 만류(灣流)는 북아메리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세계 최대의 난류, 걸프 스트림(Gulf Stream)을 말한다. *살라오(salao)는 스페인 속어로 '불운하다'는 뜻으로 중남미에서 흔히 쓴다. 한편 저자는 도입부의 첫 문장을 200번 이상이나 고쳐 썼다는 일화가 전한다.

1952년 미국 뉴욕 출판사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 Charles Scribner's Sons)에서 나온 '노인과 바다' 초판본 표지. www.google.com

2.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는 세계 문학사에서 길이 빛나는 손꼽히는 명작이다. 독보적인 서사와 간결한 문체가 빛나는 영문학사 불멸의 고전이다. 영어권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의 소설 분야 필독서다. 저자는 완성한 초고를 1952년 9월 미국 주간 잡지 '라이프( Life,1883년 창간)'지에 발표했다. 소설은 연재와 함께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고, 작품이 실린 '라이프' 9월호는 불과 이틀 만에 53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래서 일주일만인 9월8일 출판사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Charles Scribner's Sons)에서 간행, 첫 달에만 7만5000부가 팔렸다. 출판과 함께 '이달의 도서'에 선정됐다. 1952년 말까지 9개 언어로 번역됐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6개월동안 있었다. 
1997년 영국 문학 비평가 피터 박스올(Peter Boxall,옥스포드대학 영문학 교수)이 선정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1001권의 책', 2002년 노벨 연구소가 선정한 '세계문학 100선'에 들어갔다. 또 영국 미디어 가디언의 '세계의 작가들이 선정한 최고의 책 100권', 미국 잡지 뉴스위크의 '세상을 움직인 100권의 책'에도 포함됐다.

미국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타미 쿼(Tami Kuo) 가 그린 '노인과 바다' 의 주인공 산티아고(Santiago)와 마놀린Manolin). www.behance.net

3.소설 '노인과 바다'의 중심은 인간, 그리고 삶이다. 저자는 소설에서 인간의 삶 자체인 우직함, 용맹, 단순함, 진실, 확고부동함 등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드러나는 모든 미덕이 주인공 산티아고(Santiago)에 투영돼 있다. 이를 통해 인간 삶의 버거움, 자연계의 먹이사슬,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또 늙은 어부 산티아고와 풋내기 조수 마놀린(Manolin)이라는 소년을 통해 공동체의 관계, 절망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거대 서사의 핵인 청새치는 젊음과 미래, 상어(떼)는 인생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시련이다.

소설 '노인과 바다'는 주인공 이름 산티아고(Santiago)부터 기독교 상징주의와 맞닿아 있다.플랑드르 화가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가 1612~13년 그린 '성 야고보(St. Jacob)'.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https://ko.wikipedia.org

소설은 가톨릭(기독교)적 상징주의에 맥을 잇는다. 주인공 노인 이름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다.히브리어로 야고보, '성 야고보(St. Jacob, ?~44,)'에서 따왔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 AD 6~100)의 형으로 예수 제자 중 가장 먼저 예루살렘에서 참수당했다.신약성서에 따르면 기독교 입문 전 동생  요한(사도 요한)과 함께 어부였다. 영어 발음은 샌 디에고(San Diego)다.  영어식 이름은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 James the Great, 대 야고보)다. 세계적 순례길로 유명한 '산티아고 가는 길(The Road to Santiago)'은 그의 이름을 딴 길이다. 그의 유해는 순례길의 끝인 스페인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성당에 있다.한편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 노인 산티아고의 신조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는 어부 출신 성 야고보의 기독교 입문 후 행로와  딱 들어맞는 신조라 한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활동하는 현대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오웬 겐트(Owen Gent)가 그린 '노인과 바다'. 노인의 앞을 막은 바닷물로 상어를 묘사했다.www.owengent.com

4.줄거리는 쿠바 하바나의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산티아고 노인은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했다.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끼로 쓸 정어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배는 낡았고 돛은 너덜너덜하다. 하지만 노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85일째, 노인은 고기를 잡기 위해 아주 먼 바다로 나간다. 그곳에서 그동안 본 적 없는 거대한 물고기와 맞닥뜨린다. 사흘간의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거대한 청새치을 잡는 데 성공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탐욕스러운 상어들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상어떼의 공격으로 청새치는 뼈만 남는다.살이 튼실한 고기 대신 앙상하게 뼈만 남은 고기의 모습을 보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노인.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이야기를 듣고 운다. 그 밖에 사람들은 노인이 잡아온 고기의 뼈만 보고 감탄한다. 어부들은 청새치의 길이를 18피트로 측정했고, 관광객 두 명이 청새치의 뼈대를 상어의 뼈대로 착각했다. 잠든 산티아고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를 꿈꾼다.

에스토니아 출신 미국 만화가 에드먼드 지크프리트 발트만(Edmund Siegfried Valtman, 1914~2005)이 1972년 미국 헤럴드타임스에 그린 일러스트. 1972년 대선에서 베트남 전쟁 이슈를 부각하려 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1922~2012) 연방 상원의원을 소설 '노인과 바다'를 통해 대선 패배를 예언한 풍자 삽화다. 맥거번은 그해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1913~1994) 공화당 후보에 큰 표차로 패배했다.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http://hdl.loc.gov

5.소설을 연재했던 미국 주간지 '라이프'는 "헤밍웨이를 노인으로, 상어들을 비평가로 비유한다면, 이 작품 이후 그의 바다에 상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선데이 타임스(The Sunday Times)는 "이보다 더 좋을 수도,이것과 다르게 쓸 수도 없는 아름다운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저자는 영면하기 전 '노인과 바다'에 대해 “평생을 바쳐 쓴 글이자 내가 가진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1954년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노인과 바다이 서사 기술의 완벽함과, 현대적인 스타일은 공적"이라고 사유를 밝혔다.

6.미국 유명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는 노인과 바다를 읽고 "헤밍웨이야말로 진짜 작가이다."라고 말했다.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장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1897~1962)는 '노인과 바다'에 대해 "우리 시대 작가가 쓴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고 확신했다. 영국의 문학 평론가 시릴 버논 코놀리(Cyril Connolly,1903~1974)는 "헤밍웨이가 쓴 최고의 이야기"라고 칭찬했다.미국 르네상스 전문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은 '노인과 바다'에 대해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의 모비딕(Moby Dick, 1851) 보다 뛰어나고 여러 면에서 호머(Homer,기원전 8세기경)의 서사시와 동등하다" 과찬했다.헤밍웨이가 제일 좋아한 평론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는 발렌티 알빈이 그린 '노인과 바다'. 소설 '노인과 바다'를 구상화 했다. www.saatchiart.com

7.영화는 당대 유명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Bonaventure Tracy, 1900~1967) 주연, 존 엘리엇 스터지스( John Eliot Sturges, 1910~1992) 감독으로 1958년 제작됐다. 헤밍웨이는 영화 각색에 직접 참여했지만 최종적으로 나온 영화를 매우 싫어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최우수 오리지널 음악상을 받았다. 1990년에는 앤소니 퀸(Anthony Quinn,1915~2001)주연,저드슨 테일러(Judson Taylor , 1932~2008) 감독의 텔레비전 영화로 나왔다. 1999년에는 러시아의 애니메이터 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알렉산터 페트로프(Aleksandr Petrov,1957~현재)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8.한국에서 헤밍웨이 작품이 번역된 것은 1931년이다.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이 일제 강점기인 1931년  단편 '살인자들(The Killers,1927년 작)'를 번역,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헤밍웨이 소설은 해방 이후 많이 번역됐고, 2010년대 초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다양한 출판사에서 번역됐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정부가 번역을 적극 권장하고 지원까지 했다. 소설 '노인과 바다'는 2003년 국립 중앙 도서관이 선정한 '고전 100선'에 포함했고, 2004년 조사에서 한국 문인이 선호하는 세계 명작 소설 100선에 들었다.

미국 우정청이 1989년 7월17일 발간한 아프리카 사파리를 배경으로 한 우표에 쓰인 헤밍웨이 초상.미국 일레스트레이터 그렉 러드(Greg Rudd, 1952~현재) 작품.미국 스미소니언국립우편박물관 소장. https://postalmuseum.si.edu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미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자 대표 작가. 영문학을 넘어 세계문학사에 우뚝 선 작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표작가. 1954년 노벨 문학상, 195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현 시카고 주변)에서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클래런스 에드먼즈 헤밍웨이(Clarence Edmonds Hemingway)는 의사, 어머니 그레이스 홀 헤밍웨이(Grace Hall Hemingway)는 성악가였다. 둘 사이에는 헤밍웨이 외에 마르셀린(Marcelline, 1898~?), 어설라(Ursula, 1902~?), 매들린(Madelaine, 1904~?), 캐롤(Carol, 1911~?), 레스터(Leicester, 1915~?)가 있었다. 
미시간주 피토스키 인근 왈론호 옆에 '윈드미어'라는 여름 별장이 있을 정도로 상류층이었다.오크파크에서 잘 알려진 음악인이었던 어머니 그레이스는 극성 '교육 맘'으로 헤밍웨이에게 첼로를 억지로 배우게하기도 했다.

헤밍웨이 일가의 1905년 사진. 왼쪽부터 누나 마르셀린, 여동생 매들린, 아버지 클래런스, 어머니 그레이스, 여동생 어설라, 헤밍웨이다.https://en.wikipedia.org

2.헤밍웨이가 저널리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13년 입학한 오크파크 앤드 리버포레스트 고교 때이다. 2학년때부터 저널리즘 수업을 들었고, 1917년 졸업후 '캔자스 시티 스타' 수습 기자(6개월)로 일했다.  이 때 '스타일 가이드(글쓰기 가이드)'는 평생의 문체 토대가 됐다. 스타일 가이드에 나와 있는 기자 글쓰기의 기본인 '짧은 문장을 써라. 첫 단락은 짧게 써라. 힘 있는 영어(언어)를 써라. 부정적이면 안 된다.' 등이다.
캔자스 시티 스타서 수습을 마친 헤밍웨이는 그해 12월 미국 육군에 지원했다. 하지만 낮은 시력으로 탈락하자 1918년 초 미국 적십자 모집을 보고, 이탈리아 야전병원의 수송차 운전병을 지원한다. 그해 5월 뉴욕을 떠난 헤밍웨이는 파리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서 6월 전선 병원에 배치된다. 하지만 심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있다가 1919년 초 귀향한다.

191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헤밍웨이. 밀라노 미국 적십자병원에서 약 2달 간 수송차 운전병으로 활동했다.https://en.wikipedia.org

3.헤밍웨이는 1919년 말 토론토 스타 위클리(Toronto Star Weekly)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이듬해 시카고에서 나오는 월간 저널 '코퍼레이티브 커먼웰스(Cooperative Commonwealth)에서 일한다. 이후 1921년 '토론토 스타' 파리 특파원으로 갔다.  이 때 예술계의 대모인 유명 미국 여성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 아일랜드 소설가로 '율리시즈'를 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942),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1882~1972)같은 대가들을 만나 교류한다. 이중 거트루드 스타인은 헤밍웨이의 멘토이자 아들 잭의 대모가 됐다.
1922년에는 나중에 '헤밍웨이를 키운 서점주인'으로 불리기도 한 실비아 비치(Sylvia Beach, 1887~1962,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만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실비아의 서점을 방문, 읽고 싶은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헤밍웨이는 1926년 첫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 미국 뉴욕)'를 발표, 영문학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1936~1939,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자 특파원 자격으로 전쟁에 뛰어들었고, 이 경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로 1940년 출판된다. 파리에서 돌아온 헤밍웨이는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쿠바, 1959년에는 미국 아이다호 케첨에 거주한다.

1939년 후반 미국 아이다호주 선 밸리 롯지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초판을 위해 포즈를 취한 헤밍웨이. 사진작가 로이드 아놀드 작품. https://en.wikipedia.org

4.헤밍웨이는 적십자병원 운전병으로 간 이탈리아에서 첫사랑을 만난다. 부상당해 입원한 병원에서 만난 상대는 7살 연상인 적십사 간호사 애그니스 폰 커로우스키(Agnes Hannah von Kurowsky Stanfield , 1892~1984)였다. 건강을 되찾은 헤밍웨이는 1919년 1월 미국으로 돌아왔고, 아그네스와 곧 결혼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해 이탈리아 장교와 사귄다는 편지로 절교를 선언했다. 이는 나중에 헤밍웨이가 이혼과 결혼을 반복한 원인이 됐다고 전기작가들은 말한다.

헤밍웨의 첫 사랑 아그네스 폰 쿠로프스키(Agnes von Kurowsky)-미국인 간호사로 이탈리아 밀라노 적십자 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났으나 1년만에 헤어졌다.www.google.com

 헤밍웨이는 공식적으로 4명의 아내를 뒀다. 첫 번째 아내인 피아니스트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Elizabeth Hadley Richardson, 1891~1979)은 8년 연상으로 1921년 9월 미시간주 베이 타운십에서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아들 존 해들리 니카노어 헤밍웨이(John Hadley Nicanor Hemingway, 1923~2000, 캐나다와 미국의 플라이 낚시꾼, 보전운동가, 작가)가 있다. 하지만 1927년 이혼했다. 헤밍웨이가 아내의 친한 친구인 폴린 파이퍼((Pauline Marie Pfeiffer, 1895~1951, 미국 저널리스트)와 불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이혼에도 불구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헌정했고, 그 소설의 로얄티도 해들리 리처드슨에게 줬다. 해들리 리처드슨은 나중에 1927년 파리에서 만난 미국 시카고 데일리 뉴스  외신 기자 폴 스콧 모러(Paul Scott Mowrer,1887~1971)과 1933년 영국 런던에서 재혼했다. 폴 스콧 모러는 1929년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정치작가였다. 둘의 이야기는 1992년 저널리스트  조이아 딜리베르토(Gioia Diliberto, 1950~현재)가 쓴 전기 '해들리(Hadley)'로 나왔다. 이 전기는 2011년 '끝없는 파리-헤밍웨이의 첫 부인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Paris Without End-The True Story of Hemingway's First Wife)'로 재발행됐다.

헤밍웨이 아내 메리 웰시(왼쪽 첫 번째)와 6명의 군복입은 여기자들-1943년 유럽 한 전선에 종군하기 직전 딕시 타이(Dixie Tighe, 1905~1946, 최초의 폭격기 탑승 여기자), 캐슬린 해리먼 모티머(Kathleen Harriman Mortimer , 1917~ 2011, 얄타 회담 보조-당시 소련주재 미국대사 W. 에이버럴 해리먼 딸), 헬렌 커크패트릭(Helen Kirkpatrick , 1909~1997,시카고 데일리 뉴스 기자, 영국 윈저공 첫 인터뷰, 파리해방 보도기자), 엘리자베스 리 밀러(Lee Miller, 잡지 Vogue 전쟁 특파원, 1920년대 뉴욕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델, 사진기자), 타니아 롱 (Tania Long, 1913~1998, 아일랜드 출신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1942년 뉴욕타임스 기자) 등이 함께 했다. 2차 세계대전때 종군기자에게는 적군에 붙잡혔을 때 전쟁 특파원들에게는 포로 신분을 보장하는 군복이 지급됐다. 미국 육군 군사 역사 센터 소장. https://en.wikipedia.org

헤밍웨이는 또 미국 작가 폴라 매클레인 (Paula McLain, 1965~현재)의 소설 '파리의 아내(The Paris Wife)'로 나왔다. 이 소설은 출판 초부터 뉴욕타임스 장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헤밍웨이는 이혼 직후 불륜의 주인공인 미국 아이오와주 출신 저널리스트(잡지 보그 파리 특파원) 폴린 파이퍼(Pauline Marie Pfeiffer, 1895년 7월 22일~1951)와 재혼했다. 둘 사이에는 패트릭 헤밍웨이과 그레고리 핸콕 헤밍웨이(Gregory Hancock Hemingway, 1931~2001)가 있다. 

헤밍웨이와 첫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1891~1979,왼쪽)-이혼 한 해 전인 1926년 오스트리아 슈룬스에서 아들 잭과 촬영했다.https://en.wikipedia.org

1937년 스페인 여행에서 헤밍웨이는 소설가이자 여행 작가 마사 엘리스 겔혼(Martha Ellis Gellhorn, 1908~1998)과 불륜을 시작했고, 폴린 파이퍼와 1940 년 11월 4일 이혼했다. 헤밍웨이는 폴린과 이별 3주 후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마사 엘리스 겔혼(Martha Ellis Gellhorn1908~1998)과 결혼한다. 헤밍웨이 세 번째 아내인 마사 겔혼은1944년 6월 6일 D데이(연합군에 위장 잠입)에 노르망디에 상륙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마사 겔혼은  20세기 최고의 종군 기자로 꼽히는 인물로 89세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미국에서 마사 겔혼언론상이 만들어졌다.  겔혼은 2차세계대전 중 헤밍웨이가 런던에서 만난 미국 언론인이자 작가 메리 웰시(Mary Welsh Hemingway, 1908~1986)와 바람을 피자 1945년 이혼했다. 메리 웰시는 1946년 3월 쿠바에서 헤밍웨이와 결혼했다. 둘은 1959년 쿠바에서 미국으로 나와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거주했는데 1961년 7월 2일 아침 메리는 헤밍웨이의 죽음을 목격한다. 메리는 당시 사고라고 했지만 5년 뒤 '산탄총 자살'이라고 인정했다. 한편 헤밍웨이는 1950~1951년 크로아티아계 이탈리아 귀족여성이자 시인 아드리아나 이반치치(Adriana Ivancich, 1930~1983)와 사랑에 빠졌으나 951년 2월 헤어졌다.둘은 1954년 5월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1927년 프랑스 파리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헤밍웨이와 아내 폴린의 모습. 미국 보스톤 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소장. https://en.wikipedia.org

5.1939년 봄 쿠바 하바나의 암보스문도스 호텔를 거점으로 정하고 살았고,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으로 건너가 1944년 5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연합군과 함께 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취재하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여름에는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 겨울에는 쿠바에서 보냈다.
1954년 10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수상 소감을 밝혔으나 시상식은 가지 않았다. 1959년 카스트로가 이끄는 사회주의 세력이 쿠바 혁명에 성공하고, 이듬해 카스트로 정권이 모든 자산을 국유화한다고 선언하자 헤밍웨이는 1960년 7월 하바나의 은행 금고에 예술품과 원고를 남긴 채 쿠바를 떠난다.

1941년 중국 충칭에서 헤밍웨이와 저널리스트 아내 마사 엘리스 겔혼(Martha Ellis Gellhorn ,  1908~1998)- 20세기 최고의 종군 기자로 평가받는 겔혼은 중국 충칭을 방문, 국민당 장군인 위한머우(余漢謀,1896~1982, 가운데)와 인터뷰를 했다. 미국 보스톤 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소장. http://www.jfklibrary.org

6.헤밍웨이는 전쟁 취재중 당한 부상과 비행기 사고 등으로 쌓인 병들로 몸 상태가 심각했다. 이에 아내 메리는 1961년 미네소타 메이오 클리닉에 입원시켜 건강을 돌본다. 하지만 나이가 있는데다 병은 호전되지 않는다. 사고는 그해 7월 일어난다.
1961년 7월 2일 아침 헤밍웨이는 자신이 아끼는 총으로 자살한다. 더블배럴 산탄총이었다. 장례는 케첨에서 가톨릭 의식으로 치뤄졌다.케첨의 묘지에 안장됐다. 장례식에 방문한 친지와 가족들은 모두 헤밍웨이의 죽음을 사고 인식했다. 그런데 헤밍웨이 가문은 아버지와 여동생 어설라, 남동생 레스터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작품은 '우리들의 시대에,1925)',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 '무기여 잘 있거라(1929)', '가진 자와 못 가진 자(1935)',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노인과 바다, 1952)' 등이 있다.

1959년 미국 아이다호주 피커부 인근 실버 크리크(Silver Creek)에서 새 사냥 중 찍은 사진. 왼쪽부터 헤밍웨이, 바비 피터슨(Bobbie Peterson), 영화 배우 게리 쿠퍼( Gary Cooper, 1901~1961). 미국 보스톤 John F. Kennedy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7.헤밍웨이 사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케네디는 아내 메리가 쿠바 카스트로를 만날 수 있게 주선했다. 이 때 하바나에 보관된 그림 및 작품을 환수했다. 헤밍웨이는 FBI 감시 인물이었다. 1940년대 초 쿠바 거주때부터였다. 이후  J. 에드거 후버는 1950년대 하바나의 헤밍웨이를 전담 감시하는 요원을 배치했다. 히틀러의 나치는 1933년 헤밍웨이의 책을 ‘현대 타락의 상징’이라며 불태웠다. 하지마 문인들은 대개 호평했다.
후배 작가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1919~2010
)는 "헤밍웨이와 나눈 대화가 전쟁통에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을 주는 시간이었으며, 스스로를 ‘헤밍웨이 팬 클럽의 전국 회장’으로 지명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영국 유명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그는 솔직하다. 기량도 대단하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정확한 단어를 배치한다."고 격찬했다.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 있는 헤밍웨이 기념비.https://en.wikipedia.org

8.헤밍웨이는 세계적 명사인만큼 다양한 곳에 이름이 붙었다. 러시아 천문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크가 1978년 발견한 소행성체에는 '3656 헤밍웨이'가 붙었고,  수성의 분화구 중 하나가 2009년에 '헤밍웨이'로 명명됐다. 유명한 만년필을 생산한 몽블랑은 '헤밍웨이 만년필 시리즈'를 공개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세계 헤밍웨이 모방 대회’(International Imitation Hemingway Competition)가 개최되기도 했다. 우스꽝스런 대회에도 불구, 헤밍웨이 특유의 문체를 최대한 모방한 작품을 제출하게 하는 등 의외로 진지한 행새였다. 우승 포상은 이탈리아의 해리스 바 방문 티켓이었다.
헤밍웨이가 살았던 3곳의 집은 미국 국립사적지로 지정됐다. 1968년 미시간 월룬호 별장, 키웨스트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집(현 박물관), 2015년 어니스트와 메리 헤밍웨이 가옥 등이다. 일리노이주 오크파크 헤밍웨이 생가도 박물관이 됐다.(콘텐츠 프로듀서)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