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눈 먼 자들의 도시-실명 전염병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부패, 이기주의를 그려낸 소설은 섬세하게 시작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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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실명 전염병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부패, 이기주의를 그려낸 소설은 섬세하게 시작된다

지성인간 2023. 5. 2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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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불이 들어왔다. 차 두 대가 빨간불에 걸리지 않으려고 가속으로 내달았다. 횡단 보도 신호등의 걸어가는 사람 형상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스팔트 검은 표면 위 칠해진 하얀 줄무늬를 밝으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 줄무늬를 얼룩말이라고 부르지만 세상에 그것처럼 얼룩말을 닮지 않은 것도 없을 것이다. 안달이 난 운전자들은….”(정영목 역,해냄. 2022)
 
1.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구전 이야기꾼이 말하듯이 쓴 도입부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물론 문단 구분이 없이 이어져 숨막히게 읽힌다. 횡단 보도 묘사에서 보듯이 있는 그대로의 묘사가 치밀하다. 대화체 문장이 나오긴 하지만 따옴표가 없이 이어져 대화와 지문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 어떤 것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글쓰기 연습에 적극 활용해 볼만 하다.

2.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1995)’는 인간이 얼마만치 야만적으로 될 것인가를 쓴 보고서같은 소설이다.
부패와 이기주의, 익명의 폭력성, 공동체의 붕괴 등을 환타지 소설처럼 그려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멸망) 시대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원제를 그대로 해석하면 ‘눈이 멀어진 것에 관한 수필’이다. 영어판 제목은 ‘Blindness’이다. 한국어 제목이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의역(意譯)인 셈이다.

3.눈먼 자들의 도시는 어딘지 모르는 도시(이름이 안붙었다)의 거주민 대부분이 눈이 멀어지는 집단 실명 병에 걸리면서 공동체가 붕괴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성폭력이 만연하고, 공권력 붕괴 속에 기승을 부리는 폭력배와 일상화 한 폭력, 썩어가는 시체 등이 세밀하고 끔찍하게 묘사돼 있다.
등장인물은 이름이 없다. 대신 ‘안과의사’, ‘안과의사의 아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썼던) 여자’ 등으로 지칭한다.

4.문학계에서는 이 소설을 ‘환상적 리얼리즘(Fantastic Realism)’를 구현한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한다.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우화(寓話)적 비유, 경계 없는 상상력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현실의 사실적 묘사를 꿈이나 신화, 동화와 결합해 숨겨진 신비를 작품화 하는 것이다.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로 ‘백년동안의고독(Cien anos de soledad,1967)’을 쓴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1927~2014),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1986) 등 남미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술 기법이다.

5.소설은 광란과 비극의 연속이다. 하지만 종말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명자들의 눈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끝 문장도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난 후의 해피엔딩인 셈이다.

6.한국에서는 1998년에 영어판(1997년 간행)을 번역, 해냄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2008년 영어 제목 그대로 영화 ‘블라인드니스(Blindness,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로 만들어졌다.

7.이 소설의 영감은 기존에 나온 재난 이야기에서 나왔을 것으로 분석된다. 영국 작가 존 윈덤(John Wyndham,1903~1969)의 SF소설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1951)’이다.
또 현대 공상과학 소설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영국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단편 소설 ‘맹인의 나라(The Country of the Blind,1904)도 있다. 이 소설은 1911년 나온 소설집(The Country of the Blind and Other Stories, 영국)으로 다시 출판됐다. 잘 알려진 SF소설  ‘타임머신’, ‘우주 전쟁’도 웰스의 작품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 초판본,1995, 포르투갈.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1922~2010)=포르투갈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노벨문학상 수상자(1998). 원래 이름은 주제 드 소자 사라마구(Jose de Sousa Saramago)다.

1.포르투갈 중부 히바테주(Ribatejo) 주 아지냐가의  가난한 집에서 주제 소자(José de Sousa)와 마리아 피에데드(Maria Piedade) 사이에서 출생.
개명하지 못한 땅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용접공으로 일했다. 1947년 소설 ‘죄악의 땅’으로 소설가로 등단했다.
늦은 나이인 40대 후반(1969)에 공산당에 들어가 반정부 공산주의 칼럼니스트가 됐다. 이에 포르투갈 우파 정부 집권 시기에 국외 추방(1975)당하기도 했다.

2. 사라마구는 3명의 여인과 사랑이 삶을 관통했다. 첫 결혼은 1944년 타이피스트이자 후에 아티스트로 성장한 일다 리스(Ilda Reis)와 했으나 1970년 이혼했다. 1947년 태어난 유일한 딸 비올란테(Violante)는 두사람 간의 소생이다.
1960년 후반 작가 이사벨 다 노브레가(Isabel da Nóbrega)를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으나 공식 결혼은 하지 않았다.
사라마구의 마지막을 지킨 여인은 27세 연하의 스페인 지식인이자 저널리스트인 필라 델 리오(María del Pilar del Río Sánchez,1950~현재)다. 1986년 만나 1988년 결혼했다. 델 리오는 사라마구의 책을 스페인어로 다시 정리(공식번역?)한 여성이며, 현재 주제 사라마구 재단 회장을 맡고 있다.

3.1982년 쓴 수도원의 비망록은 포르투갈에서만 40여만 부가 팔려 사라마구의 부(富)와 명성이 배가됐다. 1991년 나온 소설 예수 복음은 로마교황청이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사라마구는 생전에 ‘주제 사라마구 재단(José Saramago Foundation,2007)’을 리스본에 설립, 운영했다.

4.2010년 6월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란사로테섬 자택에서 영면, 화장됐다. 포르투갈은 이틀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리스본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리스본의 주제 사라마구 재단에 보관돼 오던 사라마구 유골은 2011년6월 사망 1주년 기념일에 재단 앞(카사 도스 비코스) 광장의 100년 된 올리브 나무 아래에 묻었다.

5.다른 작품으로는 ‘죄악의 땅(Terra de pecado,1947)’, ‘서도와 회화 안내서(Manual de pintura e caligrafia,1977)’, ‘바닥에서 일어서서(Levantado do Chao,1980)’, ‘수도원의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1982)’, ‘돌뗏목(A Jangada de pedra,1986)’, ‘예수복음(O Evangelho segundo Jesus Cristo,1991)’,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Todos os nomes,1997)’, ‘동굴(A Caverna,2001)’, ‘도플갱어(O Homem duplicado,2003)’, ‘눈뜬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lucidez,2004)’ 등이 있다.
사라마구 작품 영어 번역가인 마가렛 줄 코스타(Margaret Jull Costa)는 “가장 위대한 현대 포르투갈 작가”라고 격찬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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