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달과 6펜스-고갱의 방탕과 열정을 다룬 소설은 쉬운 말 평범한 문체로 첫 문단을 시작한다. 본문

카테고리 없음

달과 6펜스-고갱의 방탕과 열정을 다룬 소설은 쉬운 말 평범한 문체로 첫 문단을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6. 30. 14:33
728x90
반응형

“처음 찰스 스트릭랜드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시 나는 그에게서 단 한 순간이라도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의 위대성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지금 내가 논하는 위대성이란 요행히 출세한 정치가나 성공한 군인의 그러한 위대성이 아니다. 그 같은 위대성이란 그들 인간 자체에 관련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이 차지한 지위에 관계된 것들이다. 그들의 위대성은 상황이 바뀌면 이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러한 예는 흔히 눈에 띈다. 관직에서 물러난 수상은 과장 많은 웅변가로 드러나며, 퇴역한 장군은 시골 장(場)이 서는 어느 길목에서 활동하는 무기력한 늙은이로 드러난다.”(안흥규 역 문예 출판사,1999)

문예출판사가 낸 '달과 6펜스' 는 고갱의 자화상(1883)을 표지로 썼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 소장. photo by wikipedia

1.첫 문장에 인물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회상형  이야기 전개를 예고하고 있다.일인칭 내레이터 관점에서 절제된 문체로 인물과 위대함에 대해 냉정하게 묘사한다.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화자가 직접 들어가는 서술 기법이다. 도입부임을 감안해 독자들이 편안하게 몰입하도록 상징이나 은유, 수식이 없는 간결한 문체를 내세웠다. 그래서 읽기에는 깔끔하다. 다만 위대함 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과장한 측면도 있어 도입부가  늘어진다는 느낌도 있다. 첫 문단만 읽으면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전개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다.

2.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는 ‘영문학 최고 걸작 50선’에 들어가는 명저(名著)다. 출판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다. 다만 남성중심사회  20세기에 쓴 소설이어서 21세기에 읽으면 여성에 대한 무책임오만비하 등이 뒤섞여 불편하게 읽히는 소설이다.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의 생애에서 소재를 얻어 썼다. 타이티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를 상징하는 인물 등이 나온다.
제목의 ‘달’은 이상이자 예술에 대한 주인공의 열정, 영혼이다. 물론 ‘6펜스’는 돈, 재화(財貨)이자 세속을 상징한다. 12진법이 적용됐던 당대 영국에서 6펜스는 화폐의 가장 낮은 단위다. 1실링은 12펜스였다. 

달과6펜스는 소설 출판당시 영국의 가장 낮은 화폐단위인 6펜스를 제목에 활용했다.1902년 영국에서 나온 6펜스 동전.photo by wikipedia

3.달과 6펜스는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그것을 그린 화가에 대한 전형적인 회고·회상(回顧·回想)형식의 소설이다. 작가 몸이 1914년 타히티를 방문한 개인적인 경험과 불만과 불운의 화가 고갱의 생애 등에서 강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
소설은 화려한 상징이나 비유, 장대한 서사도 없다. 그러나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들이  문장이 돼 부드럽게 이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평범한 말과 문체지만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읽는 이에게  재미를 더해 준다.

4.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런던의 중산층 주식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 화자의 친구이자 주인공 후원자 더크 스트로브, 스트로브 아내이자 스트릭랜드의 동거녀 블란치, 원주민 여인 아타, 닥터 쿠트라 등이 나온다.

소설 '달과 6펜스' 초판본, 1919, 런던. photo by wikipedia

5.줄거리는 1인칭 화자인 ‘나’가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Charles Strickland)’와 만나 겪었던 일의 기록이다. 안정된 삶을 버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예술가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엮었다.
나는 어느 날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화가의 기록을 알게 된다. 스트릭랜드는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 일을 하던 부유한 사십 대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아내와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파리로 가서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산다. 순전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예술 열정’때문이었다.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본 친구가 있다. 더크 스트로브다. 스트로브는 아낌없는 지원을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다. 더구나 병에 걸린 자신을 수발해준 스트로브의 아내와 밀통(密通)해 동거하다가 끝내 팽개친다. 그녀는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스트릭랜드는 방랑 끝에 타히티 섬에 정착해 원주민인 아타라는 여인과 두 아이를 낳고 살면서 그림을 그린다. 나병(한센병
Leprosy, 감염성 피부 질환)에 걸려 죽기 전까지 많은 그림을 남기지만 방안 벽에 그린 최후의 역작은 유언대로 불태워진다. 스트릭랜드는 나무 밑에 묻힌다. 나는 그가 마지막에 남긴 정물화를 보고 감회에 젖는다.

고갱의 '노란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e d'Orsay) 소장. photo by wikipedia

5.이 소설은 1925년 영국 런던 뉴씨어터(New Theatre)에서 연극으로 제작, 상연된다.
1942년에는 앨버트 루인(Albert Lewin, 1894~1968)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 또 1957년에는 오페라로도 제작됐고, 2년  후에는 미국 TV드라마(주연 로렌스 올리비에)로 나온다.

6.국내에는 15종 이상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최근에는 가수 심규선이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동명의 곡을 내놓았고, 웹툰 작가 김규삼과 혜원의 작품 ‘블랙홀과 3만 원’도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작가 칼 밴 베크턴(Carl Van Vechten,1880~1964)이 1930년대 찍은 60살 무렵의 서머셋 몸. photo by wikipedia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1930년대 세계에서 수입이 가장 많은 작가.

1.프랑스 파리에서 아버지 로버트 몸(Robert Ormond Maugham, 1823~1884)과 어머니 에디스 마리 스넬(Edith Mary Snell) 사이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인 아버지는 프랑스 주재 영국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8살 때, 아버지가 10살에 사망, 영국 켄트 북항지역 캔터베리 휘트스타블(Whitstable)에서 사제를 하던 삼촌 헨리 맥도날드 몸(Henry MacDonald Maugham)에 맡겨졌다.
10살 때까지 프랑스어를 하던 몸은 영국으로 가서 어줍잖은 영어, 작은 키, 약간의 말더듬이 등으로 심리적 육체적 장애가 나타났다. 특히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신(神)의 응답이 없자 일찌감치 무신론자가 됐다. 16세 때 독일인 숙모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1년 반 동안 유학했다.

2.캔터베리의 킹스스쿨, 런던 세인트 토머스 의학교(St Thomas's Hospital Medical School, 현 킹스 칼리지 런던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897년 산부인과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 경험을 바탕으로 첫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Liza of Lambeth,1897)’를 썼는데 큰 호평을 받았다. 초판이 3주만에 매진됐다. 의사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작가로 성공한 것이다. 당연히 의사를 그만뒀다.

몸의 희곡이 런던 연극계를 지배한 것에 대해 셰익스피어의 아니꼬움을 풍자한 화가 베르나르도 패트리지(Bernard Partridge,1861~1945)의 일러스트.런던에서 발행되던 펀치(Punch, 1908)에 실렸다. photo by wikipedia

3.1908년 초에는 런던에서 연극이 4편이나 동시 상연됐다. 그해 초에는 불멸의 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 보다 더 많은 희곡이 상연된 것이다.
몸의 희곡은 1902년에서 1933년 사이 런던에서 32편의 연극이 지속 상연됐다고 한다. 몸의 극본이 인기를 끈 것은 누구나 이해할수 있는 평범한 회화체로 구성됐기 때문이었다.
글의 애매 모호함을 싫어한 몸은 영어 사전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말을 작품에 구사했다. 어휘 능력과 비유, 서사보다는 생생한 대화체에 강점을 가진 몸의 희곡이 많이 상연된 이유이다.
 
4.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적십자사에 자원해 들어갔고, 나중에 비밀요원(정보장교,MI6 소속 스파이)으로 프랑스, 스위스, 러시아 등에서 활동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당시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6년 군에서 알게 된 동료 미국인 핵슨(Frederick Gerald Haxton)이 나중에 비서 겸 동반자가 된다. 몸은 1920년대 초부터 프랑스에서 생활했고, 1928년부터 프랑스 남부 니스 인근의 카프페라 별장에 정착했다.

5.동성애 성향이 강했던 몸의 여성 관계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1913년 극작가 헨리 아서 존스(Henry Arthur Jones, 1851~1929)의 딸인 여배우 수 존스(Sue Jones)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프랑스 화가 폴 세자르 엘뢰(Paul Cesar Helleu)가 스케치 한 몸의 아내 시리 웰컴(Gwendoline Maud Syrie Barnardo Wellcom)의 결혼 전 모습. photo by wikipedia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유부녀였던 시리 바르나르도(Gwendoline Maud Syrie Barnardo,1879~1955)와 불륜 관계였다. 시리의 남편은 당대 제약업계를 주름잡던 부자 헨리 웰컴(Henry Wellcome, 1853~1936)이었는데 26살 연상이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과 살던 시리가 몸과 불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파장으로 둘은 1916년 이혼했다.
1917년 5월 미국 뉴저지에서 시리와 공식 결혼했다. 시리의 딸 마리 엘리자베스(Mary Elizabeth Wellcome)도 입적했다. 하지만 몸의 동성애  영향  등으로 1929년 이혼했다. 나중에 딸의 상속권을 박탈하려고 했으나 법원이 이를 막았다고 한다.

6.몸은 양성애자로 동성애 관계가 많았다. 몸은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리에서 입대했는데 1916년 나중에 비서이자 동반자가 된 동성애자 미국인 핵슨(Frederick Gerald Haxton)을 만난다. 그는 1920년 말 핵슨과 1년 이상 여행했고, 프랑스 별장에서  함께했다.
핵슨 사망 이후에는 재단사의 아들로 알려진 알랜 셔를(Alan Searle)과도 함께했다. 몸은 그를 ‘나의 소년’이라고 불렀다.

7.몸은 1965년 12월15일 밤 니스의 앵글로 아메리칸호스피탈(Anglo-American Hospital)에서 영면했더. 91세였다. 5일 후 마르세유에서 화장됐으며, 유골은 1961년  영국 캔터베리에 세운 몸(Maugham)도서관  옆에 있는 ‘The King 's School, Canterbury’의 묘지에 묻혔다.
이곳은 1162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있다가 1170년 성당에서 살해된 ‘토마스 뤽 베케트(Thomas à Becket, 1119~1170)의 사당이자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 1340~1400, 캔터베리 이야기 저자)의 스토리텔링 순례자들의 종착지이기도 했다.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 세와 교회의 권리와 특권을 둘러싼 갈등을 겪다가 왕의 추종자들에 의해 성당에서 살해됐다.
몸은 죽기 전인 1961년 캔터베리 킹스 스쿨(King 's School)에 소장하고 있던 책 5000권을 기증했다.

8.몸은 생전에 많은 부와 영광을 누렸다. 1954년 영국 총리 윈스터 처칠(Winston Churchill)의 추천으로 ‘명예의 동반자(Companion of Honour)’로 임명됐다. 6년 후에는 처칠과 함께 ‘문학 동반자(Companion of Literature)’가 된 최초의 다섯 명의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또 명예의 군단(Legion of Honour)의 사령관이라 불렸고, 옥스포드와 툴루즈 대학의 명예 의사였다.
몸은 80살 생일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남성 명사들의 모임체 개릭클럽(Garrick Club,1831년 설립한 문인과 귀족, 지식인, 배우 클럽) 회원이 됐다. 이 클럽은 현대에 와서 여성 배제에 대한 강한 항의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개방하지 않고 있다.

서머셋 몸이 자신의 책 표시로 쓴 고대 북아프리카 상징 표시. photo by wikipedia

9. 몸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을 많이 썼다. 몸은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가는 없다고 말했지만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영향은 인정했다.
그러나 후대 작가들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소설가로 ‘1984’를 쓴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현대 작가는 서머싯 몸”이라며 “이야기를 장식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전개하는 힘 때문에 가장 존경한다”고 강조했다.
몸은 굵직한 대작이 없었음에도 책이 많이 팔렸다. 미국 출판사들은 몸의 생전에 미국에서만 450만 권의 책이 팔렸다고 추산했다. 주요작품은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1915)’,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 ‘과자와 맥주(Cakes and Ale, 1930)’, ‘면도날(The Razor's Edge,1944)’ 등이 있다.

10.생전인 1947년 거금을 출자해 ‘서머싯 몸 상(The Somerset Maugham Awards)’을 제정했다. 젊은 문학인(만 30세 이하)들을 위한 상이다. 영국 작가협회(Society of Authors, SoA, 1884년 설립)의 주관 아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소설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이 몸의 높은 평가로 영국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라선 것은 유명한 일화다.
몸은 1954년 세계 10대 소설을 뽑아 발표했다. 영국 소설가 헨리 필딩(Henry Fielding, 1707~1754)의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프랑스 작가로 필명 스탕달(본명 Marie-Henri Beyle, 1783~1842)의 ‘적과 흑’,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1799~1850)의 ‘고리오 영감’,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의 ‘마담 보바리’,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1819~1891)의 ‘모비 딕’,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ë, 1818~1848)의 ‘폭풍의 언덕’,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1821~1881)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레프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의 ‘전쟁과 평화’ 등이 다. (콘텐츠 프로듀서)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