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퇴폐와 탐미, 매력의 과잉이 몰고 온 파멸의 소설은 언어의 유희처럼 쓰여졌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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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퇴폐와 탐미, 매력의 과잉이 몰고 온 파멸의 소설은 언어의 유희처럼 쓰여졌다

지성인간 2023. 7. 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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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는 짙은 장미 향이 가득했고, 가벼운 여름 바람이 정원의 나무 사이를 산들산들 지나가면 라일락의 진한 향기나 섬세한 분홍색 꽃이 피는 가시나무의 더욱 섬세한 향기가 열린 문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헨리 워튼 경은 페르시아 산 안장 주머니처럼 생긴 소파 겸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언제나처럼 끝도 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꿀처럼 노란 금련화들이 꿀처럼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서민아 역, 위즈덤하우스, 2018

위즈덤하우스가 2018년 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표지그림.

1.첫 문단부터 꽃들의 정원에 들어선 듯  달콤한 향기가 난다. 탐미주의 작가의 감각적인 묘사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도입부다. 만연체의 글이지만 뛰어난 어휘와 부드러운 문장 구성으로 깔끔하게 읽힌다. 단어 하나하나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언어의 파편처럼 느껴질 정도다. 첫 문단에 넘치다 싶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은  역설적으로 ‘과잉의 파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연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편지를 쓸때 활용할만 하겠다.

2.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1891)’은 장르문학(Genre Literature,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소설 등)의 고전이다. 1890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월간 리핑컷(Lippincott's Monthly Magazine)’ 7월 호에 처음 게재됐다.
로맨스 잔혹극의 문을 연 소설이자 고딕 소설(공포와 로맨스가 곁들여진 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다. 세기말의 불안과 우울이 탐미적 쾌락주의와 비도덕으로 나타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쓴 유일한 장편 소설이지만 발표 초 평론가들의 혹평이 쏟아졌다. 진한 동성애 코드, 매력적인 살인자, 기묘하고 퇴폐적인 이야기 전개 등이 비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2번이나 고쳐 써야 했다.
수정은 했지만 와일드는 서문에 ‘세상에는 도덕적인 책도, 비도덕적인 책도 없다. 잘 쓴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이 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고 반박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첫 연재된 1890년 월간 리핑컷 (Lippincott's Monthly Magazine)7 월 호 표지.영국 런던.photo by wikipedia

3.소설이 나온 이후 ‘도리언 그레이 증후군(Dorian Gray syndrome)’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나이로 인해 늙어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정신질환의 하나를 이르는 말이다.
소설은 와일드의 쾌락, 마약, 살인 등 악의 무자비함에 대한 경고이자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나드는 이중적인 삶 등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와일드가 죽은 이후 런던에도 고향 더블린에도 묻히지 못하고 프랑스 파리에 묻힌 것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4.등장인물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Dorian Gray), 그레이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배질 홀워드(Basil Hallward), 탐미주의자 헨리 워튼(Henry Wotton,애칭 해리) 경과 부인 빅토리아 워튼(Victoria Wotton), 그레이의 첫사랑 시빌 베인(Sibyl Vane)과 남동생 제임스 베인(James Vane), 화학자 앨런 캠벨(Alan Campbell) 등이다.
또 에이드리언 싱글턴(Adrian Singleton), 도리언이 만난 시골 처녀 헤티 머튼, 글래디스 할워드, 데이빗 스톤 등이 나온다.

5. 줄거리는 쾌락과 관능의 탐욕은 결국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 파멸한다는 교훈을 준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화실에서 헨리 경은 친구인 화가 배질 홀워드가 그리는 초상화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초상화는 잘생긴 청년 도리언 그레이를 그린 것이다.
곧 도리언과 직접 만난 헨리 경은 젊음과 아름다움은 일시적인 것이니 쾌락적인 삶을 살 것을 권한다. 도리언은 공감하며, 초상화를 보고 자기 대신 늙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도리언은 극단 여배우 시빌 베인과 로맨틱한 사랑에 빠져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시빌의 남동생 제임스는 도리언이 누나를 구속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도리언은 헨리 경과 배질을 시빌이 출연하는 공연에 초대하지만 시빌의 형편없는 연기에 실망해 이별을 통보한다. 충격으로 시빌이 자살한다.
이후 도리언은 방탕한 삶에 빠지고, 평판이 나빠진 도리언을 배질 홀워드가 찾아온다. 배질은 늙어버린 초상화를 보고, 도리언과 다투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에 도리언은 해부학자 친구 앨런을 협박, 시체를 처리하는데 앨런마저 자살한다.
도리언은 아편에 빠져들고, 시빌의 동생 제임스 베인이 누나의 복수을 위해 찾아오지만 오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도리언은 살인죄를 고백하고,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자신의 추악한 초상화를 보고 칼로 찌른다. 방안에는 젊은 초상화와 늙은 남자의 시체가 남는다.

한국에서 만든 총체극'도리안 그레이의 초상(2019)'스틸 컷. 출처=PAGE1 보도자료.

6.한국에서는 1990년 번역본(창우사)이 나온 이래 20본 이상이 번역 출판됐다. 번역본이나 연극,뮤지컬에서는 ‘도리언’과 ‘도리안’이 혼용되고  있다. 고유명사인 만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2016년 창작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나왔고, 2019년9월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제작 페이지1)’이 초연됐다.

7.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최초는 1910년에 덴마크에서 무성영화(감독 악셀 스트룀)로 나왔다. 미국에서는 2년 후 감독 배우 겸 프로듀서 필립스 스몰리(Phillips Smalley, 1875~1935) 감독이 무성 영화로 내놓았다.
이어 1945년에 나온 앨버트 루인(Albert Lewin, 1894~1968)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흑백 공포 드라마)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83년에는TV용으로 제작됐다. TV영화 ‘The Sins of Dorian Gray’다. 이 영화는 1992년 3월에 KBS 명화극장으로 더빙 방영됐다.
2009년에도 영화감독 올리버 파커(Oliver Parker, 1960~현재)에 의해 ‘도리언 그레이(Dorian Gray)’라는 영화로 나왔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1982년 무렵 오스카 와일드(맨 왼쪽)와 아내 콘스탄스, 아들 시릴.photo by wikipedia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시인이자 극작가. 19세기 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셀럽. 유미(탐미)주의자의 대명사. 본명은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윌스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이다.

1.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의 웨스트랜드 로(Westland Row, 현 트리니티 칼리지의 오스카 와일드 센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과의사이자 민속학자인 윌리암 와일드 경(Sir William Robert Wills Wilde, 1815~1876), 어머니는 아일랜드 시인 제인 프란체스카 아그네스(Jane Francesca Agnes, 1821~1896, 필명 Speranza)로 아일랜드 민담 전문가였다.
1871년에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Trinity College, Dublin(TCD)에 입학해 3년을 다닌 데 이어 옥스포드의 막달렌 대학(Magdalen College, Oxford)을 졸업했다.

2.옥스포드를 졸업한 후 더블린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의 연인 플로렌스 발콤(Florence Balcomb,1858~1937)을 만났으나 그녀는 이미 브램 스토커(Bram Stoker,1847~1912, 공포 소설 '드래큘라' 저자)와 약혼(1878년 결혼)한 상태였다.
1877년 런던 프랭크 마일스의 스튜디오에서 무대배우이자 프로듀서 릴리 랭트리(Lillie Langtry, 1853~1929, 본명 Emilie Charlotte, Lady de Bathe)를 소개받는다. 하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동성애자 성향이 짙었지만 와일드는 1884년5월 런던 성공회 세인트 제임스 교회에서 결혼했다. 상대는 런던에서 여왕의 변호인 활동을 하는 호레이스 로이드(Horace Lloyd, 1828~1874)의 딸 콘스탄스 로이드(Constance Lloyd, 1858~1898)였다. 귀족의 아름다운 딸과 결혼한 와일드는 콘스탄스와 사이에 시릴(1885)과 비얀(1886)이라는 두 아들을 뒀다.

1882년 미국을 방문한 오스카 와일드를 묘사한 샌프란시스코 잡지 'The Wasp'의 조지 프레드릭 켈러(George Frederick Keller, 1846~1883)의 카툰. photo by wikipedia

3.문학에서 성공하고, 런던 사교계의 스타로 군림했던 와일드는 1882년1월 초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 전역을 거의 1년 동안 순회하면서 '문학'과 '미학' 등을 강연,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와일드의 미국 순회 강연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와일드의 동성애 성향 등이 못마땅 했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1882년1월 22일자에 오스카 와일드와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의 야생 남자를 동시에 묘사하면서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런던으로 돌아온 와일드는 1886년 옥스퍼드에서 미술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로스(Robert Ross, 1869~1918)를 만나 함께 지낸다. 1년 후에는 여성지 ‘The Lady 's World’ 편집 책임자까지 맡는다.

4. 와일드는 그동안 문학인 누구도 누려보지 못했던 스타의 삶을 이어갔다.명성과 부는 물론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글로벌 셀럽’이었다. 그러나 스타의 삶은 동성애 스캔들로 순식간에 무너졌다. 1890년 대 초 터진 이른바 '퀸즈베리 사건'이 몰락을 재촉했다. 친구이자 시인인 라이어널 존슨의 소개로 1891년 앨프리드 더글러스(Lord Alfred Bruce Douglas. 약칭 보시,Bosie), 1870~ 1945)를 만나면서 구렁텅이로 빠진 것이다.
더글러스는 '퀸즈베리 후작(Marquess of Queensberry)'  존 숄토 더글러스(John Sholto Douglas, 1844~1900)의 막내아들이었다.
퀸즈베리 후작은 와일드를 소년 성추행범,매춘,동성애  등으로 고소했고, 와일드는 명예훼손 죄로 맞고소한다. 하지만 결국 와일드는 재판에서 완패, 소송비용과  배상금 등을 전액 지불하고 파산한다.
그리고 2년동안(1895년 5월 25일~1897년 5월18일) 펜튼빌 교도소 등에서 수감 생활을 한다. 중노동형을 받은 와일드는 감옥에서 병과 영양실조로 쓰러졌고, 귀도 파열된다.
와일드의 타락으로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아내 콘스탄스는 별거를 선언하고, 아이들 성도 홀랜드(Holland)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콘스탄스는 와일드보다 2년 앞서 1898년(40세)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허망하게 사망한다.

파리에 있는 대형 묘원 페레 라차즈 (Pere Lachaise )에 있는 오스카 와일브 묘지. 조각가 제이콥 앱스타인(Jacob Epstein,1880~1959)이 1908~1912년에 제작했다. photo by wikipedia

5.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와일드는 감옥에서 나와 여전히 사치와 향락에 젖어있는 더글러스를 만난다. 그런 얼마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싸구려 호텔 생활을 한다. 파리 생제르맹 드 프레의 뤼 데 보자르 거리에 있는 알자스 호텔(Hôtel d'Alsace)이다.
감옥에서부터 몸이 안좋았던 와일드는 1900년 11월 25일 뇌수막염으로 앓아 눕는다. 그런 얼마후인  30일에 숨진다. 공식 발표는 뇌막염.
와일드는 그렇게 보고싶었던 아들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마지막  가는 길엔 오랜 친구인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레지널드 터너(Reginald Turne,1869~1938)와 와일드를 동성애로 이끈 로버트 로스 두명이 곁에 있었다. 친구들이 죽기 직전 삼페인을 권하자 와일드는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를 남겼다고 한다.
와일드는 런던도 고향인 더블린에도 묻히지 못했다. 처음에 파리 외곽의 ‘Cimetière de Bagneux’에 묻혔다. 그런데 다시 페레 라차즈(Père Lachaise, 파리에 있는 대형 묘원) 묘지로 이장했다.무덤 디자인은 미국 출신 영국 조각가 제이콥 앱스타인(Jacob Epstein,1880~1959)이 했다.
와일드 사망 117년 후인 2017년 영국에서는 매춘, 성매매, 성범죄 등의 내용에 관한 법률인 ‘치안 및 범죄법(Policing and Crime Act 2017)’이 의회를 통과했다. 와일드는 불법 동성애자에서 자동사면됐다.

6.와일드의 큰 아들 시릴 홀랜드(Cyril Holland,1885~1915)는 1차 대전에 참전하였다가 프랑스 땅에서 전사했다.
작은 아들 비비언 홀랜드(Vyvyan Holland, 1886~1967)는 제1차 세계대전(포병), 제2차 세계대전(BBC 민간 통역가)에 참가했고, 아들 하나를 남겼다. 와일드의 손자 멀린 홀랜드(Merlin Holland, 1945~현재)다. 영국에서 할아버지 오스카 와일드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런던 한 거리에 있는 오스카 와일드와 코난 도일이 디너를 함께한 곳에 붙여진 명판. photo by wikipedia

7.와일드는 1995년 2월14일 발렌타인 데이에 작가들의 영광인 웨스트민스터 (Westminster Abbey)의 시인 코너에 스테인드 글라스 창으로 기념됐다.
또 오스카 와일드 기념 조각(대니 오스본 디자인 제작)은 1997년 아일랜드 더블린 중심가 메리온 스퀘어에 설치됐다. 1998년에는 노동당 정부 주도로 런던 트라팔가 광장 부근에 벤치 모양 동상도 세워졌다.
와일드 사망이후 그에 대한 많은 책이 나왔다. 그 중 영국 문학평론가 리차드 엘만(Richard Ellmann,1918~1987)이 1987년 내놓은 전기 ‘오스카 와일드’는 저자 사후 미국에서 퓰리처 상(1989)을 받았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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