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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동명왕의 노래(東明王篇)-한민족 영웅 서사시는 뛰어난 韻律로 시작한다 본문
“오랜 어둠속에서/세상이 처음 생길 때/천황씨는 머리가 열셋이요/지황씨는 머리가 열 하나라/그들은 생김새부터/이렇게 신기하였도다/그뒤를 이어/성스러운 임금 차례로 나왔으니/모든 신비로운 사적들/옛 글에 밝혀져 있어라. 여절은 무지개처럼 흐르는 큰 별을 보고/소호씨를 낳았으며/여추가 전욱을 밸 때도/또한 밝은 빛을 보고 느꼈음이라.”(이규보 저 동명왕편 서장(序章), 김상훈·류희정 역, 보리, 2005)
1.한문으로 쓴 서사시답게 운율(韻律)이 잘 맞춰진 노래이다. 한글로 번역했어도 그 리듬이 살아 움직일 정도다. 첫 구절이어서인지 상징이나 은유보다는 세상의 탄생을 과장되게 이야기하듯이 썼다. 우리 말로 입에서 입으로 내려 오는 구전(口傳) 이야기를 새롭게 쓴 것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창의력이 뛰어난 느낌이다.
글에 나오는 천황씨(天皇氏-중국 고대 신화 최초 임금)와 지황씨(地皇氏-중국 고대신화 임금),여절(女節,중국 개국신화 여성으로 황제의 아내이자 소호씨의 어머니)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또 소호씨(少昊氏-중국 전설 속 황제), 여추(女樞,전욱의 어머니), 전욱(顓頊-황제(黃帝)의 손자)도 모두 중국 신화 인물이다.
2.이규보의 ‘동명왕의 노래(東明王篇)’은 한국의 ‘일리아스(Ilias, 고대 그리스 서사시, 호메로스 작)’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뛰어난 서사시다.
고려국(高麗國, 918~1392) 무신정권 시기에 한문으로 지어졌으며, 282구, 약 4000자에 이른다. 최씨 무신정권이 편찬을 독려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3권에 수록돼 있다. 東國李相國集은 동국(고려)의 이상국(이규보)의 문집이라는 뜻이다. 相國은 관직명으로 '승상' 격에 해당한다.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아버지 추모(鄒牟)의 탄생 이전 계보를 밝힌 서장(序章), 출생과 건국을 밝힌 본장(本章), 후계자 유리왕의 경력 등이 있는 종장(終章)으로 구성돼 있다.
東明王은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고구려 건국 인물이다. 태조 도모대왕(太祖 都慕大王), 해주몽(解朱蒙), 추모(鄒牟), 주몽(朱蒙, 중국식 표기), 중모(中牟) 등 다양하다.다만 광개토대왕릉비에는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나는 황천(皇天)의 아들,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 추모 임금.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자라를 띄워라)’로 기록됐다. 고구려에서는 추모로 불린 것이다.
3.동명왕편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특히 어떤 구전 노래보다 다채로운 내용이 펼쳐진다. 하늘과 땅, 물속을 넘나드는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이는 동명성왕 이야기가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수있다.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는 100여 인의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 왔다. 해모수는 사냥을 나갔다가 청하(靑河)에 있는 하백(河伯)의 세 딸 유화(柳花)·훤화(萱花)·위화(葦花) 중 맏딸인 유화와 혼인하도록 요청한다.
하백은 해모수의 신통력을 알아본 후 술을 권하고, 술이 취한 해모수는 유화와 함께 하늘로 보내지려 했으나 혼자만 올라간다. 유화의 도움으로 하늘로 간 해모수가 돌아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안 하백은 유화를 태백산 물 속에 버린다. 유화는 구출돼 북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 간다.이를 안 해모수는 유화와 관계하고 주몽(朱蒙)을 낳는데 처음에는 알이었다.
이에 금와왕은 알을 산속에 버리지만 짐승들이 보호하고, 주몽이 태어난다.
주몽은 자랄수록 영특해 부여를 떠나 남으로 가서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宋讓王)의 항복을 받고 고구려를의 세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관계한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유리(類利, 고구려 2대 왕)다. 유리는 동명왕을 찾아서 왕위를 계승한다.
4.동명왕편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동명왕에서 찾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자부심을 표출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문장 곳곳에서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당시 성리학자들에 스며든 중화(中華)주의 역사관을 벗어난 것은 파격적인 것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동명왕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 아무리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이라도 이 이야기만은 잘 할 줄 안다”고 했다. 이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구전됐으며, 당대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고구려 계승파가 몰살된 사건인 묘청(妙淸, ?~1135)의 난 이후 신라 정통론이 부각하면서 고구려주의는 퇴조한다. 특히 고려 최고의 권신 김부식(金富軾, 1075~1151) 주도의 묘청과 서경파 강경진압,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편찬으로 신라 정통론은 대세를 형성한다.
5. 동명왕편이 수록된 동국이상국집은 총 53권 13책이다. 무신정권의 독려로 이규보의 아들 이함(李涵)이 주도해 1241년(고려 고종 28년) 간행했다. 이규보는 생전에 편집본은 봤으나 출판본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이 1234년에 금속활자로 만들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은 고려 인종 때 학자이자 문신인 최윤의(崔允儀, 1102~1162) 등 17명이 펴낸 유교의 예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존(現存) 최고의 금속활자 기록물은 고려 청주 흥덕사(興德寺, 현재는 폐사로 터만 존재)에서 1377년 간행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약칭 직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로 고증돼 있다.
직지의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要節은 요약본이라는 뜻이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고려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 대 몽골 외교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한 인물. 시호는 문순공(文順公),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스스로 지은 호(自號)는 ‘삼혹호(三酷好)’다. 삼혹은 시(詩),거문고(琴), 술(酒)이다.
1.무신정변(1170년, 의종 24년에 정중부(鄭仲夫,1106~1179) 등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 22년)에 고려국 황려(黃驪, 현 경기 여주)현의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다만 여주에서 태어났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아버지는 호부낭중(戶部郎中,정5품)을 역임한 이윤수(李允綏), 어머니는 울진현위(蔚珍縣尉)를 지낸 김시정(金施政)의 딸 금란군군(金蘭郡君)김씨다. 원래 이름은 인저(仁氐), 조부는 검교교위(檢校校尉)를 지낸 이화(李和)이다.
2.유년기에 한문으로 시문(詩文)을 지을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14세에 당시 최고 사학이었던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성명재(誠明齋)에 입학, 2년 연속 1등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5세, 18세, 20세 때 치른 과거시험 예비고사 격인 국자감시(國子監試, 진사 시험 )에서 연이어 탈락했다. 과거 3수생으로 끝날 뻔 했으나 4번째 과거를 보기 전날 규성(奎星, 문장 관할 별)의 화신(化神)이 나타나 ‘장원급제(壯元及第, 수석 합격)’을 미리 통지했다고 한다.
이에 1등을 하자 이름을 ‘奎星에 보은(報恩)한다’는 뜻으로 ‘규보(奎報)’로 바꿨다고 한다. 국자감시만 합격해도 진사라고 하며, 군역 등이 면제됐다. 이규보는 이후 본 시험인 예부시 등에 합격한다.
3.과거에 합격했어도 출사(出仕, 벼슬에 나아감)는 늦었다. 조정을 경주파와 서경파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1192년 대부경(大府卿·종3품)을 지낸 진승(晉昇)의 딸 진(晉)씨(생몰 미상)와 결혼해 5남 3녀를 낳았다.
이런 불운한 시기(1193년 명종23년, 26세)에 이규보는 한민족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었다.
관계에는 32세 때 전주의 하급관리로 임명되면서 발을 디뎠다. 이후 ‘김사미와 효심의 난(1193~1194년 울산과 청도 지역을 본거지로 일어난 민란)’ 때 종군(從軍)문관을 자원해 관리 생활을 하다가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충헌(崔忠獻,1149~1219)에 의해 요직에 등용됐다.
4.최충헌이 사망하자 아들인 최우(崔瑀,?~1249, 강화천도(江華遷都)를 한 권력자)의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최우는 후에 이름 ‘우’를 '이'(怡)로 바꿨고, 무신 권력자 중 최장인 30년을 집권했다.
이규보는 최우 정권에서 잘 나갔다. 그래서 ‘무신정권 부역자’, ‘최씨 정권의 어용학자’라는 비판도 있다. 장기간의 여몽(麗蒙) 전쟁으로 백성의 삶은 망가지고 있는데 최씨 정권 지탱에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장 만큼은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는다. 고려 문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문장가다. 또 대 몽골 외교에서 업적도 뛰어나다. 조선 초에 편찬한 고려사(高麗史, 세종의 어명으로 시작해 문종 때 발간한 고려역사서)의 이규보 열전, 이규보 묘지명(李奎報墓誌銘), 동국이상국집 등에 그의 활약은 잘 드러나 있다.
5.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1270) 훨씬 전 강도(江都,현 강화군) 집에서 영면했다. 묘는 현재 주소로 인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이규보 사당’ 인근에 있다. 강화문학관(강화읍 관청길 40)에 이규보의 생애와 문학을 잘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패관 문학 중 하나 ‘경설(鏡說)’, 가전체로 술을 의인화해서 쓴 ‘국선생전(麴先生傳)’, ‘동명왕편’, ‘도소녀(悼小女)’ , 수필 ‘슬견설(虱犬說)’, ‘주뢰설(舟賂說))’, 한시 ‘차운공공상인 증박소년오십운(次韻空空上人 贈朴少年五十韻)’ 등이 있다.
6.한민족 문학계에서 우뚝 선 인물이다. 당대 우리나라 기록문자가 없어서 한문으로 지었지만 작품의 질과 양으로 봐서도 대문호이자 국보급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당송(唐宋) 시풍(詩風)을 따를 것이 아니라 고려에 맞는 내용과 문체를 주장했다. 당시 유행했던 송나라 시풍에 대해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