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동문선-조선 최고,최대의 시문집은 사대주의 ‘문(文)’의 위대함으로 서장을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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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조선 최고,최대의 시문집은 사대주의 ‘문(文)’의 위대함으로 서장을 연다.

지성인간 2024. 3. 1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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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서(東文選序) “하늘과 땅이 처음 나뉘자 문(文)이 이에 생겼습니다. 위로는 밝은 일월(日月)과 벌여 있는 별이 하늘의 문(文)이 되었으며, 아래로는 솟아 있는 산과 흐르는 물이 땅의 문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괘(卦)를 긋고 글자를 만들매 인문(人文)이 점차 베풀어졌으니 정(精)ㆍ일(一)ㆍ중(中)ㆍ극(極)은 문(文)의 체(體)요,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은 문(文)의 용(用)입니다. 따라서 시대마다 각각 문이 있고, 문은 각각 체재가 있으니, 전(典)ㆍ모(謨)를 읽으면 당(唐)ㆍ우(虞)의 문을 알 수 있고, 훈(訓)ㆍ고(誥)ㆍ서(誓)ㆍ명(命)을 읽으면 삼대(三代)의 문을 알 수 있습니다. 진(秦)에서 한(漢)으로, 한에서 위(魏)ㆍ진(晉)으로, 위ㆍ진에서 수(隋)ㆍ당(唐)으로, 수ㆍ당에서 송(宋)ㆍ원(元)으로 내려오면서, 그 시대를 논하여 그 문을 상고하면 문선(文選)ㆍ문수(文粹)ㆍ문감(文鑑)ㆍ문류(文類) 등 여러 편찬으로써, 후세 문운(文運)의 높고 낮음을 대략 논할 수 있습니다. 근대에 문(文)을 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송(宋)의 문(文)이 당(唐)의 문이 되지 못하고, 당은 한이 되지 못하며, 한은 춘추전국(春秋戰國)이 되지 못하고, 춘추전국은 삼대 당(唐) 우(虞)가 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식견 있는 의논입니다.”(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1968)

조선 최고최대의 시문집 '동문선' 편찬 책임자 서거정 초상화. 출처=네이버 카페 사가공파 제주사람들.

1.문(文)의 생성과 문의 쓰임으로 서장(序章)을 시작하고 있다. 천지와 함께 문이 생기고, 천지 잔체가 문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첫 문단이다. 문이 중국 수와 당으로 내려오는 역사 등도 기술하면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이의 말을 인용, 각 시대 마다 변별력 있는 문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도입부에 우리 민족의 문에 대한 글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모두 중국 이야기로 사대주의  조선 유학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당(唐)과 우(虞)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를 가리킨다. 당요는 상고시대 염황(炎黃)부락 연맹의 수령이었고, 뒤를 우순이 이었다. 두 사람은 재임 중 선덕을 베풀어 후세에 제왕의 본보기가 됐다. 염황은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로 중국인이 시조로 인식하는 전설의 인물이다.

'동문선'은 조선 초 1460년 세조의 명으로 편찬작업에 착수, 성종 대에 완성했다. 후대에 나온 '동문선' 활판본 표지.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 1478)’은 한민족사 최고, 최대의 시문집이다. 고대~조선시대 통틀어 이보다 방대한 문집은 없다. 특히 우리나라 역대 인물들의 시문들과 산문들을 한데 모아 국책사업으로 편찬한 시문집이어서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460년 세조의 명으로 편찬작업에 착수, 1478년 성종 때 완성해 을해자(乙字) 활자본으로 첫 간행한 우리나라 문집의 정점을 찍은 저작물이다. 문집 이름 '동문선'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별칭 南梁, 蕭梁,502년 건국) 양무제(梁武帝,464~549) 소연(蕭衍)의 맏아들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 즉위 전 사망) 소통(蕭統)이 편찬한 ‘문선(文選, 전 30권)‘에서 따왔다.
총 133권(목록 3권 포함) 45책에 달한다. 1518년 추가로 속편 23권이 더 편찬됐다. 최종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550여 명의 작품 4300여 편이 수록됐다. 간행에는 당시 대제학(정2품)이던 서거정을 수장으로 조선 전기의 능신(能臣) 노사신(盧思愼,1427~1498, 연산군 초 영의정), 당대 으뜸 문장가 강희맹(姜希孟,1424~1483), 세조의 제갈량으로 불린 양성지(梁誠之,1415~1482, 성종 때 대사헌) 등을 포함한 찬집관(纂集官) 23인이 참여했다.
1478년 첫 간행 후 1713년까지 9차례나 인쇄, 번각(飜刻,한 번 새긴 책판을 본보기로 그 내용을 다시 새기는 것)됐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동문선' 1권 첫 사(辭). 고려 문신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저서 '파한집')의 사(辭), '화 귀거래사' 로 시작하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3.동문선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구려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쟁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6세기 중반 7세기 초)부터 신라 최치원(崔致遠,857~사망년도 미상), 고려 문신이자 권세가 김부식(金富軾,1075~1151), 정몽주(鄭夢周,1337~1392), 이색(李穡,1328~1396), 조선의 변계량(卞季良,1369~1430,세종때 대제학), 신숙주(申叔舟,1417~1475), 이방원(2367~1422,나중에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죽임을 당한 정도전(鄭道傳,1342~1398), 계유정난(癸酉靖難, 계유년인 1453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의 희생자 성삼문(成三問, 1418~1456),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글도 실렸다.
당송(唐宋) 시문만이 아닌 한민족사의 시인, 문사(文士)들의 작품도 널리 편집됐다. 또 우리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분리된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 편집했다. 여기에 도교와 불교 관련 자료 등도 포함, 주자학(朱子學) 일색의 조선 후기의 선집들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를 보여 준다. 지금은 사라진 고려 시대 문헌도 다양하게 인용, 역사 사료로서 가치도 높다.
하지만 문집 이름에서부터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묻어난다. ‘東文選’은 책의 이름부터 동쪽(조선) 문(글)을 선택 편집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동국(중국에서 조선 지칭)의 문학을 모아 편찬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1397~1450)의 훈민정음 창제(1443년, 반포는 1446년 ) 이후 나온 문집임에도 모두 한문으로 썼다. 중국(당 송 등) 찬양 글이 너무 많은 것도 독자성을 저해한다.

4.동문선의 장점은 삼국~조선 초의 ‘특정 인물(왕조에서 경원시하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관찬(官撰)이면서도 검열,배제없이 다양한 인물의 여러 가지 시와 글을 수록한 것이다.
고루한 조선 유학자의 눈으로 보면 배은망덕한 간신인 최충헌(崔忠獻, 1149~1219, 최씨 무신정권)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한 고려시대 시문, 조선 태종 이방원에 죽임당한 역적 정도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역적이 된 성삼문의 조선 태조 찬양문, 숭유억불 치하에서 신라 불승 원효(元曉, 617~686)대사의 불서, 기타 승려 29인의 작품 82편 등도 들어 있다.

서거정은 조선 초 20여년 동안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정2품)을 지냈다. 조선 순조 연간(1801-1834)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에 나오는 옥당(가운데,홍문관)모습. photo by namuwiki

5.동문선은 크게 권1∼3까지가 사(辭)와 부(賦), 권4와 5는 오언고시(五言古詩), 권6에서 8은 칠언고시(七言古詩), 권9에서 10은 오언율시(五言律詩), 권11은 오언배율(五言排律), 권12에서 17은 칠언율시(七言律詩), 권18은 칠언배율(七言排律), 권19에서 22는 오언(五言), 칠언(七言), 육언절구(六言絶句)등이다.
또 권23에서 30은 조칙(詔勅,임금이 백성에 내리는 글)과 교서(敎書,임금의 명령이 적힌 문서), 제고(制誥,임금이 관리 임명때 내리는 문서), 책문(冊文, 왕실에서 책봉, 존호·시호·휘호를 낼 때 글판에 새긴 문서),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 ), 권31에서 45는 표전(表箋, 표문과 전문)과 비답(批答), 권46에서 48은 계(啓,임금에게 올리는 글)와 장(狀,글로 적어서 남에게 개진하는 편지체 글. 札,牒), 권49에서 51은 노포(露布, 봉함하지 않은 글, 군사 용도 글), 격서(檄書,격문), 잠(箴,훈계의 글), 명(銘,금석·기물·비석 따위 쓴 글), 송(頌, 성덕 칭송 글), 찬(贊, 찬미하는 글)이다.
이후 권52에서 56은 주의(奏議,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와 차자(箚子,격식을 안갖추고 간단하게 올리는 상소문), 기타 잡문, 권57부터 63까지는 서독(書牘, 안부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 권64부터 95까지는 기(記)와 서(序), 권96에서 98까지는 설(說), 권99는 논(論), 권100과 101은 전(傳), 권102와 103은 발(跋, 책 뒤에 책의 성립•전래•간행(刊行) 경위•배포 등에 관해 짧게 쓴 글)이 실린다.
또 권104는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 글), 권105는 변(辯), 대(對), 지(志), 원(原), 권106은 첩(牒)과 의(議), 권107은 잡저, 권108은 책제(策題)와 상량문, 권109에서 113까지는 제문과 축문, 소문(疏文,죽은 이의 죄와복을 아뢰는 글), 권114는 도량문(道場文,부처 축원 글)과 재사(齋詞,도교에서 기원문), 권115는 청사(靑詞, 도가의 축원문), 권116부터 121까지는 애사(哀詞), 뇌(誄, 행적이 있는 애도문), 행장(行狀,몸가짐과 품행), 비명(碑銘), 권122에서 130까지는 묘지(墓誌)이다.

서거정이 대제학(옥당의 우두머리)을 지낸 서울 창덕궁 궐내각사 옥당(홍문관)의 최근 모습.일제 강점기 때 헐린 건물을 2000년~2004년에 복원 했다. photo by namuwiki

6.동문선은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포괄적(包括的)으로 늘어놓은 관각문학(館閣文學-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서 엮은 문학)의 산물이다. 흔히 '관각문(館閣文)', '관각문자(館閣文字)'라고 했으며, 관각 애용 문체를 '관각체(館閣體)'라 했다.
관각문학의 대표 인물은 조선 전기에는 권근(權近, 1352~1409)과 변계량(卞季良,1369~1430), 서거정이다. 이후 관각삼걸(官閣三傑)로 정사룡(鄭士龍,1491~1570,명종 때 대제학), 노수신(盧守愼, 1515~1590,선조 때 영의정), 황정욱(黃廷彧,1532~1607, 선조 때 대제학) 등이 있다.
조선 중기에는 한문 4대가(四大家)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인조때 좌의정),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 인조 때 좌의정),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 인조 때 우의정),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인조때 대사헌)이 관각 문학의 대표로 분류된다.

7.판본은 다양하다. *.을해자 본(乙亥字本)은 성종 9년 12월에 간행한 초간본이다. 권80~83에 달하는 2책 분량이다. 을해자 초간본의 번각본이 있는데 권106~108. 낙본 4책이다. 연대는 미상.
*.갑인자 본(甲寅字本)은 화산서림서목 본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 13년 2월에 남원군 양성지의 글에 등장한다. 갑인자(甲寅字)로 간행됐을 것으로 비정한다.*.훈련도감자 인본(訓鍊都監字印本)은 광해군 7년 을묘 11월에 간행한 목활자본이다. 번각본도 3책이 낙질된 채 존재한다. 번각본은 간행년도 미상이다.

조선초 간행한 '동문선'에는 조선 초 문헌 중 처음이자 유일하게 '진삼국사기표'를 실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8.동문선에는 희귀 시문이 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의 표문인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1145)’다. 오직 동문선에만 전해진다. 동문선에 ‘진삼국사기표’가 실리지 않았으면 ‘삼국사기’는 자칫 표문이 전하지 않은 책이 될 뻔했다.
하지만 1478년 책이 완성, 유포되자 ‘용재총화(慵齊叢話)’의 저자이자 문장가 성현(成俔,1439∼1504,연산군때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은 “이것은 정선(精選)한 것이 아니고, 유취(類聚, 어떤 것을 단순하게 종류별로 모은 것)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후대의 지봉유설(1614년 편찬,1634년 간행) 저자 이수광(李睟光,1563~1628,인조때 대사헌)도 “(동문선은) 채선(採選) 범위는 넓으나 주선자(主選者,서거정을 지칭)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취사선택 됐다”며 공평성 부족을 지적했다. 

조선 숙종 39년인 1713년 송상기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시문선집 동문선 펼침본. 조선 초 편찬과 구별하기 위해 '신찬 동문선', '별본 동문선'이라고도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9.동문선이라는 시문집은 두 종류가 더 있다. 조선 중종 13년(1518)에 신용개(申用漑, 1463~ 1519,중종 때 좌의정),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를 주도한 김전(金詮, 1458~1523,중종 때 영의정 ), 남곤(南袞, 1471~1527,중종 때 영의정) 등이 국책으로 편찬한 ‘속 동문선’시문집이다. 총 23권 11책이다.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또 조선 숙종 39년(1713)에 송상기(宋相琦, 1657~1723) 등이 편찬한 국가 시문집 ‘동문선’이 있다. 총 35권 15책이다.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시문집은 청나라에서 조선에 보낸 중국 시문집에 대한 답례로 편찬, 청에 보냈다.
당시 청에서 1710년(강희 49년)에 강희제가 직접 선정해 서건흥(徐建興,1631~1694) 등이 편찬한 ‘고문연감(古文淵鑑, 64권)’과 강희제 칙명으로 장옥서(張玉書) 등 76명이 편찬한 ‘패문운부(佩文韻府, 1711년 완성)’ 등 300여 권의 책을 선물로 보내자 답례로 보낸 시문집이다. 이 시문집은 청나라에서 유명했으나 국내에서는 간행 기록만 있을 정도로 높게 취급하지 않았다. 한편 동문선은 역대왕조실록(歷代王朝實錄등 국가의 귀중한 문헌들과 전국 사고(史庫)에 보관됐다.

9.현대에 들어와서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출판했다. 해방 후 1966년에는 경희출판사(慶熙出版社)에서 한문학자 이우성(李佑成, 1925~2017,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회장 역임) 가장본(家藏本)을 영인(影印), 간행했다.
1968년에는 국책사업으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정속편 합본 동문선’과 조선 고서간행회에서 인쇄한 ‘정편 동문선’을 대본(臺本)으로 삼아 국역본(國譯本) 동문선을 냈다. 단행본으로는 1995년 전영진이 ‘동문선’으로 엮어 홍신문화사에서 나왔다.

문충공 순성명량좌리공신 제3등 달성군 사가정 서거정(文忠公 純誠明亮佐理功臣 第三等 達城君 四佳亭 徐居正). 출처=바이두백과. 작성자 최하림 네이버블로그 재인용.

#.서거정(徐居正, 1420~1488)=조선 전기 최고 문장가. 권문세가의 아들로 45년간 조정에 있으며, 양관(兩館,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大提學, 정2품)을 오래 지낸 ‘관각문학(館閣文學) 권력’의 핵심. 조선 세종 시대 때 출사, 문종~단종~세조~성종 대까지 과거 시험을 23차례 주관해 ‘문병(文柄, 과거 전형 권한, 지공거, 知貢擧)’을 장악했던 학자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책의 서문을 썼다. 서거정은  문형(文衡)으로 불렀다.문형은 양관 대제학을 지냈고, 모든 문장의 균형을 맞출수 있을정도로 학문이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본관은 대구(大邱)이고, 자(字)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을 썼다. ‘거정(居正)’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 역사서 ‘춘추(春秋, 공자가 첨삭을 한 최초 편년체)’의 ‘공양전(公羊傳)’에 나오는 ‘군자대거정(君子大居正)’에서 따온 것이다.

서거정 가계도.어머니가 여말선초 권벌귀족이자 조선 첫 대제학 권근의 딸이고, 누나 남편(자형)이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최항이다.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참조.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1.할아버지는 고려시대 호조전서(戶曹典書, 정3품)를 지낸 서의(徐義), 아버지는 안주(安州, 현 평남 안주) 목사(牧使, 지방관으로 정3품 외직 문관)를 지낸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조선 초대 대제학)의 딸이다.
조선 초 권신(權臣)인 권근 가문이 외가로 권제(權踶, 1387~1445,세종 때 이조판서와 우찬성  역임)는 외삼촌, 권람(權擥,1416~1465,세조때 권신,좌의정 역임)은 외사촌이었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유학(遊學)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와도 친했고, 자형(姉兄)이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1409~1474)이다.

서거정이 말년에 거처한 집 앞의 은행나무.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수령 600년 추정. 출처=아시아투데이

2.6세부터 글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10대 시절에는 원주(原州)에 유배되어 있던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1443,조선 초 유학자)을 찾아가 수년간 그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이때 권람(1416~1465)과 한명회(韓明澮)도 함께 공부했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했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 식년은 과거를 보거나 호적을 조사하는 해를 지칭)에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고기와소금, 연료를 맡은 관청의 종7품)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젊고 유능한 문신에게 공부하라고 주는 특혜)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쳤다.
서거정의 등룡(登龍) 계기는 1452년(문종 2) 겨울, 명나라 사은사(謝恩使)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종사관(從事官)이 된 것이었다. 명나라로 가는 길에 모친상으로 되돌아왔지만 후에 세조가 되는 수양(首陽大君)의 신뢰를 확고히 얻었다.
1456년(세조 2) 문과 중시(文科重試, 10년마다 당하관 문관이 보는 시험)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 임금 특명으로 당하관 이하 문신에게 임시로 보게 한 과거)에 장원, 공조참의(工曹參議, 공조의 정3품)를 역임했다

. '천사사한진적(天使詞翰眞蹟)' 서첩에 있는  서거정의 필적.1476년(성종 7)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 그를 맞이했던 서거정의 글씨가 함께 실려있다. 보물 제1622호. 경기 용인시 기흥구 경기도박물관 소장. 출처=문화재청

3.1460년 이조참의(吏曹參議)때 사은사(謝恩使,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낸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종2품)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兩館, 예문관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정2품)에 올랐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1466년 단오에 중신과 문무 백관에게 임시로 실시한 과거)에 장원한 후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 조선시대 의정부의 종1품)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성종이 자신을 잘 보필하고 정치를 잘한 공으로 내린 칭호,1~4등급 총 75인)이 됐다.

2021년 1월 열린 사가 서거정 탄신600주년 기념 학술대회 포스터.출처=아시아투데이.

4.서거정은 권문세가 출신이다. 서거정이 1444년(세종 26) 문과에 합격했을 때 자형(姊兄, 누님 남편) 최항은 대제학을 맡고 있었다. 1467년(세조 13) 서거정이 대제학에 올랐을 때 최항은 영의정으로 있었다.
이런 권문세가를 ‘사가집(四佳集)’ 권 31, 시류(詩類) ‘증채응교수(贈蔡應教壽)’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다. “나의 외조 권근은 도덕과 문장이 백세의 모범이 될 만하여 일찍이 예문응교(藝文應敎,예문관 정4품)를 역임하고 마침내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權踶,1387~1445)는 선업(先業)을 잘 이었고, 권제는 이계전(李季甸, 1404~1459, 이조판서 역임)에게 전하였으니, 이계전은 바로 권근(權近, 1352~1409, 조선 초대 대제학)의 외손이요, 그가 다시 최항(崔恒,1409~1474, 영의정 역임)에게 전하였으니, 그는 또한 권근의 외손서(外孫壻)인 것이다. 내가 무능한 사람으로 잠시 빈자리를 채워서 영성을 이었는데, 비록 불초하지만 역시 권근의 외손이다. 한집안에서 팔십에서 구십 년 동안에 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들 그리고 외손 세 사람이 서로 이어 예문응교가 되었다가 끝내 문병(文柄)을 손에 쥐고 일품의 관직에 오른 경우는 천고에 드문 일이니, 이는 실로 우리 외조의 적선(積善)으로 인한 경복(慶福)과 시례(詩禮)를 가르치신 은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출처=인물한국사, 사학자 신병주 글)

서거정이 조선 최고의 전망이라고 격찬한 경기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의 2020년대 초 모습. 출처=한국관광공사

5.조선 최초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 각종 서책의 ‘서문(序文)’을 70편 이상 썼다. 조선 최고의 ‘서문 전문가’인 셈이다.
한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 최초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웠다.
6.서거정에게는 색다른 이야기가 있다. 성현의 용재통화에 수록한 글이다. 서거정은 젊은 시절 방탕하게 놀았는데 사헌부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당대의 절색' 홍천기(洪天起)라는 화사(畫師)가 함께 조사를 받았는데 그 미모에 넋이 빠져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서거정의 죄를 추궁하던 대사헌 남지(南智, 1392 혹은 1398~1453,문종때 좌의정 고명대신)가 한심하게 쳐다보다 방면했다. 그런데 서거정은 오히려 "공사(대사헌 남지)는 마땅히 범인의 말을 묻고 또 자술서를 받아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 뒤에 천천히 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이렇게 급한가"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서울 중랑구 사가정공원에 있는 서거정의 시비(詩碑) 시 '한중'이 쓰여 있다. 출처=한겨레

7.서거정은 말년에 중랑구 용마산 아래 거처했는데 정자 이름이 사가정(四佳亭)이었다. 1488년(성종 19) 사저에서 영면했다. 향년 69세. 시호 ‘문충(文忠)’을 받았다. 경기 광주 방이동(芳桋洞, 현 서울 강동구 방이동)에 묻혔다.
그런데 사가정 묘는 1975년 도시계획에 따라 경기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로 이장됐다. 오늘날 사가정은 곳곳에 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중랑구 면목동 495번지)으로 명명됐다. 서울 사가정길은 동대문구 답십리동 498-1번지(신답사거리)에서 장안교를 거쳐 중랑구 면목동 1083-1번지(용마산길)에 이르는 폭 20m, 길이 4,200m의 2~4차선 도로이다. 중랑구 용마산 입구에 사가정공원 등이 있다.
서거정은 1718년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됐다. 주요 저술집으로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강동구 고덕동 396번지에 있는 강동예찬시비 중 하나인 서거정 시비(詩碑). 시 '광진지촌 서만조'가 원문과 함께 번역돼 있다. 출처=한국관광공사

8.서거정은 중국에서도 문명을 떨쳤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호부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 1460년 진사, 호 巽川) 은 “명에서 태어났으면 천하를 호령랫을 텐데 작은 나라서 태어나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였다.
기순은 서거정의 ‘북정록(北征錄, 명 사행시 쓴 글 모음집)’ 서문에서 “중국에서 시가(詩歌)를 잘 한다는 사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고, 비록 고대(古代)의 문인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라고 극찬했다.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사신으로 명나라의 과거에서 장원을 했던 양곡(梁鵠)은 서거정의 문장을 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라며 탄복했다. 또 명나라 요동(遼東) 사람 구제(丘霽)는 서거정이 대충 휘어 갈긴 초고(草稿)를 보고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中原)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고며 극찬했다.

대구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에 있는 구암서원 숭현사. 서거정은 1718년(숙종 44년) 3월 배향됐다. 출처=www.buk.daegu.kr

9.문형(文衡, 대제학)으로 22년 동안 군림했지만 후진 양성은 인색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본격 대두한 사림파와도 의기투합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16세기 사림파의 득세 후 작성된 성종실록(1488년 성종 19년 12월)에는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고 씌어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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