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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두 도시 이야기-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의 첫 문단은 늘어뜨리기 문체로 혁명을 예고한다. 본문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당시의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당시의 사건들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왕좌에는 턱이 큰 왕과 못생긴 왕비가 앉아 있었고, 프랑스의 왕좌에는 턱이 큰 왕과 아름다운 왕비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나라 모두, 빵과 생선을 재어놓고 사는 귀족들에게는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이 영원할 것임이 수정을 들여다보듯 명백한 사실이었다.”(찰스 디킨스 저, 이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2)

1.책 제목을 상기 시키기라도 하듯이 두 상황을 명확하게 대비시키며 첫 문단을 시작한다. 이분법적 설명으로 독자들의 몰입감을 끌어당기는 서술방식이다. 불만과 불온의 시대를 이처럼 적확하게 묘사한 문장들도 없을 것이다. 다만 문단을 최대한 길게 하려는 ‘늘어뜨리기 문체(당시 원고료 때문?)’가 이어진다. 턱이 큰 왕과 추녀(영국), 턱이 큰 왕과 미인(프랑스), 피의 혁명 전야의 불온한 기운조차 모르는 귀족의 삶을 내세워 장엄한 서사 전개를 예고하고 있다. 눈에 쏙 들어오는 어휘들과 상징, 은유가 쉽게 간파되는 보기드문 명문(名文)의 도입부다. *.18세기 말 영국은 하노버 왕조의 조지3세(George William Frederick Hanover. 1738~1820)와 왕비 소피아 살럿(독일어 조피 샤를로테,Sophie Charlotte,1744~1818),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의 루이16세(Louis-Auguste de France,1754~1793)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1755~1793)가 권좌에 있었다.

2.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1859)’는 세계 소설문학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명작이다. 특히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몇 안되는 걸작(傑作)으로 꼽힌다.
45챕터인 이 소설은 런던에서 작가가 발행한 문학 정기 간행물 ‘All the Year Round’에 1859년 4월부터 11월까지 연재됐다.이후 1859년 말 런던 출판사 채프맨 앤 홀 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소설은 출간이후 21세기까지 2억 부 이상 판매됐다. 영국 미디어 텔레그래프(The Telegraph)와 가디언(The Guardian)은 세계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 공식 판매통계는 없지만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단행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없을 정도다. 21세기에도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많은 공공 서비스 확대와 사적인 친절을 기억한다”며 당시 휘그당과 총리 존 러셀(John Russell, 제1대 러셀백작,1792~1861) 경에게 헌정했다.
이 소설에서 ‘두 도시’는 런던과 파리이다. 소설은 작가의 연륜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무렵에 나와서 문장과 문체, 재미와 문학성을 모두 갖췄다는 평판을 얻었다.영국 방송 BBC가 2003년 조사한 The Big Read 투표에서 63위를 차지했다.

3.이 소설은 다른 학자와 작가의 수많은 선행 작업에 큰 영향을 받았다.먼저 찰스 디킨스의 지도아래 윌리엄 윌키 콜린스(William Wilkie Collins, 1824~1889)가 써서 공연한 ‘얼어붙은 심연(The Frozen Deep, 1856)’이 바탕이 됐다. 또 당시 공연 중이던 극작가 왓츠 필립스(Watts Phillips,1825~1874)의 ‘죽은 심장(The Dead Heart)’은 이 소설의 모델이 됐다. 나중에 일부 평론가들이 표절 의혹까지 제기했을 정도다.
작가의 절친인 스코틀랜드 소설가이자 철학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의 ‘역사-프랑스 혁명사(The French Revolution: A History, 1837)’의 영향도 특히 컸다.
이와함께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s of Pompeii)’을 쓴 소설가이자 학자 에드워드 불워리턴(Edward George Earle Lytton Bulwer-Lytton,1803~1873, 영국 글래스고대학 총장 역임)의 ‘자노니(Zanoni,1842,주인공 자노니가 프랑스 혁명중 단두대에서 죽음)’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밖에 매튜 조지 루이스(Matthew Gregory Lewis, 1775~1818)의 희곡 ‘캐슬 스펙터(The Castle Spectre ,1796)’, 프랑스 저술가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Louis-Sébastien Mercier,1740~1814)의 ‘파리의 테이블(Le Tableau de Paris,1781)’ 등도 참고됐다.

4.이 소설의 시대 배경인 1700년대 후반기는 빵과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이어진 시기다. 그럼에도 특히 프랑스는 귀족의 사치와 폭압 정치가 계속됐다. 서민들의 삶 곳곳에 상류사회를 향한 복수의 광기가 잉태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런던은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와 오랜 사업 관습의 도시였지만 그런대로 법과 질서가 있었다. 이른바 법치주의로 자기 통제를 하면서 노동계급이 점차 잘 살아가는 도시였다.
하지만 파리는 빵이 해결되지 않은 채 가난과 지배계급의 폭압이 이어졌다.그래서 대중 입장에서 공공의 이익이나 자유보다 빵과 주거가 먼저였다. 대중들 모두가 불만과 억압에 대한 분노를 품은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1789년 7월부터 피비린내 나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소설은 두 도시의 백성,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없는 백성들의 불만과 불운의 시대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런던보다 파리, 프랑스 혁명과 그 속에 얽힌 이들의 생생한 삶 등이 압축돼 있다.

4.등장인물은 텔슨은행 직원 제리 크런처(Jerry Cruncher)와 매니저(재산 관리인) 자비스 로리(Jarvis Lorry), 바스티유 감옥에서 풀려난 의사 알렉상드르 마네트(Doctor Alexandre Manette) 박사(구두수선공)와 그의 딸로 런던에 있는 루시 마네트 (Lucie Manette) 등이 나온다.
또 찰스 다네이(Charles Darnay,프랑스 귀족 시몽 에브레몽드), 다네이의 삼촌 생 에브레몽드 후작, 후작의 마차에 치여 죽임을 당한 아들의 아버지 가스파르, 술집 주인 마담 테레즈 드파르주(Madame Defarge)와 남편(가상인물) 무슈 드파르주(Monsieur Defarge)도 주요 인물이다.
이와함께 영국 법정 변호사 시드니 카톤(Sydney Carton), 카튼의 선임 파브너 변호사 스트라이버(Mr Stryver), 존 바르사드(John Barsad, 본명 솔로몬 프로스(Solomon Pross), 여동생이자 가정부 미스 프로스(Miss Pross), 세무공무원 테오필 가벨 (Théophile Gabelle),제리와 크런처 부인의 아들 영 제리 크런처 등도 나온다.
한편 소설에서 대속(代贖)을 한 시드니(생드니) 카톤은 프랑스 파리에서 순교(참수형)한 성인 '성 디오니시오'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어로 '생 드니(Saint Denis)'이다.

5.줄거리는 첫 문단에서 말하듯이 시대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려버린 인간 군상의 행태와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억울하게 18년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던 양심적인 귀족이자 의사인 마네트 박사는 석방되자 런던으로 건너가 서서히 안정된 삶은 찾는다.그런데 마네트 박사의 딸 루시를 사랑한 프랑스 귀족 찰스 다네이가 혁명 전 자기 집에 있던 충실한 하인을 구하려고 파리로 갔다가 신분이 탄로 나 혁명 정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오랫동안 루시를 사랑해오던 영국인 시드니 카톤은 루시가 곤경이 닥치면 도와 주겠노라던 약속대로 찰스를 구해내기위해 작전을 쓴다. 감옥을 찾아가 찰스에게 약을 먹여 기절시켜 내보내고, 자신이 사형수가 된다. 찰스를 대신한 시드니는 스물세 번째 사형수로서 단두대에 오른다.그날 밤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단두대 앞에 섰던 이들 중 가장 평화롭고 숭고해 보이는 얼굴은 시드니(생드시)였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6.소설은 희곡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대화형 문체가 많이 나온다.역동적인 묘사와 재치있는 대사 등도 돋보인다.
소설은 극적 긴장감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마지막 부분에 ‘죽음 바꿔치기’를 설정해 놓고 있다. 이른바 대속(代贖)이다. 이는 그리스도 교에서 예수의 대속(Redemption of Christ)과도 같은 개념이다.

7.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나왔다. 연극으로는 1899년 동명의 제목으로 처음 나왔다. 영화는 무성영화만 4편이나 나올 정도로 인기있는 소재였다.
영화는 영국계 미국 배우이자 감독 찰스 켄트(Charles Kent,1853~1923)와 미국 감독 윌리엄 J. 험프리(William Jonathan Humphrey, 1875~1942)가 1911년 공동 감독한 무성영화를 시작으로 십여 차례 나왔다.
1917년에도 영국태생 미국 영화감독 프랭크 로이드(Frank William George Lloyd, 1886~1960)가 감독하고 윌리엄 파넘(William Farnum, 1876~1953), 주얼 카르멘(Jewel Carmen(본명 Florence Lavina Quick,1897~1984), 찰스 클레리(Charles Clary,1873~1931)가 출연했다.

1922년에도 월터 코트니 로든(Walter Courtney Rowden, 1880~1953)이 감독하고 클라이브 브룩(Clive Brook,1887~1974), 앤 트레버(Ann Trevor,1899~1970), J. 피셔 화이트(J. Fisher White,1865~1945)가 출연한 무성영화가 나왔다.
1927년에는 허버트 윌콕스(Herbert Sydney Wilcox,1890~1977) 감독의 영국 무성 드라마 영화 ‘The Only Way’로 나왔다. 존 마틴 하비(Sir John Martin Harvey,1863~1944), 매지 스튜어트(Madge Stuart, 1865~1958), 베티 페어(Betty Faire,1897~1981)가 출연했다.

8.유성 영화도 잇달아 만들어졌다. 1935년 잭 콘웨이(Jack Conway, 1887~1952) 감독이 ‘두 도시 이야기’로 내놓았다. 로널드 콜먼(Ronald Charles Colman,1891~1958), 엘리자베스 앨런(Elizabeth Allan, 1910~1990), 레지널드 오웬((John Reginald Owen,1887~1972), 바질 래스본((Philip St. John Basil Rathbone,1892~1967), 에드나 메이 올리버(Edna May Oliver, 1883~1942)가 출연했다.
1958년에는 영국에서 랄프 토마스(Ralph Philip Thomas, 1915~2001)가 감독하고 더크 보가르드(Dirk Bogarde, 1921~1999)와 도로시 투틴(Dame Dorothy Tutin, 1930~2001)이 주연을 맡았다.
1980년에는 미국의 역사 드라마 영화로 짐 고다드 (Jim Goddard, 1936~2013)가 감독하고 크리스 서랜든(Christopher Sarandon, 1942~현재)과 남아공 출신 여배우 앨리스 모드 크리지(Alice Maud Krige,1954~현재)가 주연을 맡아 나왔다.
1989년에는 프랑스 영국 합작으로 필립 모니에(Philippe Monnier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감독 작품으로 나왔다.

9.텔레비전 드라마로는 미국 ABC가 1953년 46부작 미니 시리즈로, 영국 BBC가 1957년 를 제작, 방영했다. BBC는 1965년에 47부작, 1980년에 으로 방영했다. ITV 그라나다는 1989년 49부작으로 제작 방영했다.이 작품은 미국 PBS의 마스터피스 극장에서도 방영했다.
연극은 1899년 영국의 헨리 어빙의 라이시엄 극단이 시드니 카턴역에 존 마틴 하비 경(Sir John Martin-Harvey,1863~1944)을 내세워 공연했다.
뮤지컬은 1968년 ‘두 도시, 스펙타큘러 뉴 뮤지컬’로 나왔다. 1998년에는 빌 켄라이트(Bill Kenwright)가 공동 제작에 참여해 영국 버밍엄의 뉴 알렉산드라 극장(New Alexandra Theatre)에서 공연됐다.
세계 4대 뮤지컬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에서도 공연된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는 2008년 제작, 브로드웨이 알 히르슈펠트 극장에서 개막 공연했다. 미국 유명 여류작곡가 질 산토리엘로(Jill Santoriello,1965~현재)가 시드니 카툰 역에 제임스 바버(James Barbour,1966~현재), 마담 드파르주(Madame Defarge) 역의 나탈리 토로(Natalie Toro), 루시 마네트(Lucie Manette) 역의 브랜디 버크하르트(Brandi Burkhardt, 1979~현재)를 내세워 히트했다. 브로드웨이 이후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일본, 한국에서 공연됐다.
오페라는 아르투르 벤야민(Arthur Leslie Benjamin, 1893~1960)이 1953년 '여섯 장면의 낭만적 멜로드라마'라는 부제를 붙여 제작, BBC 라디오 무대에서 공연했다. 무대 초연은 1957년 영국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Sadler's Wells Theatre)에서 레온 로베티(Leon Lovett) 지휘로 무대 초연됐다.
10.이 소설은 21세기 들어서 다시 큰 화제가 됐다. 2012년 영국 출신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Edward Nolan, 1970~현재) 감독이 만든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에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차용(借用)하면서다.
소설에서 시드니 카툰의 마지막 독백인 "내가 지금 하려는 행위는 지금까지 해온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걸었던 어느 길보다 훨씬 평안한 길이리라"를 주인공 짐 고든(게리 올드만(Gary Leonard Oldman, 1958~현재) 분)이 마지막 대사로 한다.

11.한국에서는 1982년 금성출판사에서 세계의 명작 시리즈로 출간했다. 또 출판사 어문각 등에서도 나왔다.
21세기 들어서는 푸른숲에서 나온 청소년 판이 있다. 또 창비, 더클래식, 동서문화사 등 여러 출판사에서도 번역본이 간행됐다. 2012년에는 펭귄클래식코리아가 첫 완역을 내세워 출간했다.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영국의 대문호이자 사회 비평가. 19세기(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천재 작가. 연재물의 개척자이자 수혜자이다.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사람으로 불린다.
1.영국 햄프셔 주 포츠머스 교외(현 포츠머스 커머셜 로드 393번지)에서 해군 경리국에 근무하는 하급관리 존 디킨스 (John Dickens,1785~1851)와 엘리자베스(Elizabeth,1789~1863) 사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1824년 런던 사우스워크(Southwark)에 있는 ‘마샬시 채무자 감옥(Marshalsea Debtor's Prison)’에 수감되면서 어렵게 성장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 일을 했다. 이에 소년기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못받은 채 12살 때부터 구두약 공장에서 병 라벨 작업 등을 했다.

2.19세기는 영국의 패권시대였지만 디킨스의 삶은 곤궁했다.그는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1827년 변호사 사무소 직원, 법원 속기사, 신문 기자 등으로도 일했다.
1833년 첫 단편 ‘포플러 거리의 만찬’을 발표, 문단에 나왔다. 당시 필명으로 ‘Boz(보즈)’를 사용했다. 1836년 ‘보즈의 스케치’, 다음해 ‘픽윅 클럽 여행기’로 주목받았다.
3.디킨스가 발딱 일어선 계기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발표,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동시에받으면서다. 이 때부터 디킨스는 당대 문학 아이돌(Idol)로 떠올랐다.그의 소설은 유럽과 미국 부르주아(Bourgeois, 유산계급)들의 필수 교양품일 정도였다.
특히 디킨스는 팬덤(Fandom)까지 형성, 영국 전역은 물론 미국까지 독서강연회(요즘 말로 북 콘서트)를 다녔다. 당시 디킨스의 인기는 ‘가장 디킨스적인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다’라는 관용어가 나올 정도였다.
후대의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1935~현재)는 “지속적인 대중의 관심과 찬사의 대상이 된 최초의 작가”라고 말했다.

4.디킨스는 1829년 런던 은행가의 막내딸 마리아 비드넬(1810~1886)과 사랑에 빠졌지만 마리아 부모가 반대, 헤어졌다. 이후 1838년 음악 비평가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의 딸인 캐서린 톰슨 호가스(Catherine Thomson Hogarth,1815~1879)와 결혼했다.둘의 금슬은 좋아서 자녀를 10명이나 뒀다.
하지만 1858년 결혼생활(1838~1858) 22년 만에 이혼했다. 20년이 넘는 동안 모범 가장이었던 디킨스가 18살의 여배우 엘런 테넌(Ellen Lawless Ternan, 1839~1914)과 바람을 피웠는데, ‘불륜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이혼까지 갔다.
디킨스에게 여배우 테넌은 ‘뮤즈(Muses, 예술의 여신)’였다. 그는 테넌에 푹 빠져서 ‘나의 마법의 원(Magic circle of one)’이라고 불렀다.

디킨스는 1870년 사망 시 유언장에 테넌에게 1000파운드의 유산과 그녀가 다시는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신탁 기금도 남겼다. 하지만 테넌은 1876년 조지 와튼 로빈슨(George Wharton Robinson)과 결혼, 딸과 아들을 낳았다.나중에는 학교도 운영했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드라마 ‘디킨스(2002)’와 영국 채널4의 드라마 ‘디킨스와 비밀의 연인(2008)’등이 이를 주제로 다뤘다.
5.첫 부인 캐서린과 이혼했으나 그녀의 여동생인 조지나 호가스(Georgina Hogarth ,1827~1917)는 디킨스 자녀들을 돌보면서 1870년 디킨스가 사망할 때까지 가정부, 조언자, 친구로 함께 했다. 특히 디킨스 사망 후에도 그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캐서린 바로 아래 동생인 메리 호가스(Mary Hogarth, 1819~1837)는 1836년 디킨스 집에 들어왔으나 17세 때 극장에 다녀온 후 병에 걸렸고 디킨스의 품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디킨스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뺀 반지를 평생 착용했다.

6.디킨스의 자녀들은 다양한 삶을 살았다. 디킨스의 큰 딸 메리(마미, 1838~1896, 디킨스의 둘째 자녀)는 요절한 처제 메리 호가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메리누ㅈ결혼하지 않았고 디킨스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면서 아버지의 글을 편집하는 것을 도왔다. 나중에 아버지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둘째딸 케이트 맥레디 디킨스(1839~1929)는 디킨스의 셋째 아이로, 디킨스의 친구인 배우 윌리엄 맥레디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베드포드 대학에 다녔으며, 부모 별거 때 어머니 편에 섰다.
케이트는 디킨스의 친구 윌키 콜린스의 형제인 예술가 찰스 콜린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나중에 불행한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했다고 밝혔다.
케이트는 병약한 남편이 죽자 예술가 카를로 페루지니와 결혼했다. 나중에 글래디스 스토리(Gladys Storey)의 책 ‘디킨스와 딸(Dickens and Daughter, Schlicke, 1999)’에서 아버지와 엘렌 터넌(Ellen Ternan)의 관계를 밝히는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7.디킨스의 넷째 아이로 아들인 월터 새비지 랜더 디킨스(1841~1863)는 영국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의 이름을 땄다. 동인도 회사의 사관 후보생으로 1857년에 인도로 갔고, 인도 캘커의 반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제42 하이랜더에서 중위로 진급했다. 인도에 있는 동안 빚더미에 앉았으며, 캘커타에서 대동맥류로 사망했다.
프랜시스 제프리 (프랭크) 디킨스 (1844-1886) - 디킨스의 다섯 번째 자녀로, 디킨스의 친구이자 에딘버러 리뷰의 편집자인 프랜시스 제프리 경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제프리는 1864년 인도로 갔는데, 벵골 기마 경찰이 됐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인 187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가남긴 많은 유산을 탕진하고 나중에 캐나다로 가서 기마 경찰이 됐다. 미국 일리노이 주 몰린에서 사망했다.
8.디킨스의 여섯째인 알프레드 도르세 테니슨 디킨스(1845~1912)는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도르세 백작과 영국 시인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1865년 호주로 이주해 45년 동안 살았다.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일곱째인 시드니 스미스 핼디먼드 디킨스(1847~1872)는 해군이었으나 젊을 때 몰타에서 사망했다. 여덟째인 헨리 필딩(해리) 디킨스(1849~1933는 작가 헨리 필딩의 이름을 땄다.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왔으며, 변호사와 판사를 역임했다. 1922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열 번째 자녀인 에드워드 리톤 디킨스(Edward Bulwer Lytton(Plorn) Dickens, 1852~1902)는 소설가이자 친구인 Edward Bulwer-Lytton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6살에 호주로 갔고, 뉴 사우스 웨일즈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9.1870년 6월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터리’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집필하다가 쓰러졌다. 마지막 말은 ‘On the ground?!’(땅바닥이라니?!)였다고 한다. 향년 58세였다.
조용한 장례를 원했던 디킨스의 바람과는 달리 수많은 인파의 추모 속에 영국인 사후 최고의 영예의 전당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됐다.
찰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 소녀가 말한 “크리스마스 할아버지도 죽은 것이냐”는 말이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묘비명은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의 지지자, 우리는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를 잃었다”이다.
10.주요 작품으로는 이후 ‘니컬러스 니클비(1839)’, ‘오래된 골동품 상점(1841)’, ‘바너비 러지(1841)’ ‘크리스마스 캐럴(1843, 수전노 스크루지 영감으로 유명)’,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1)’등이 있다.
한편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찰스 디킨스의 어린이를 위한 영국사(A Child's History of England,1852~1854)’시리즈도 펴냈다.

11.디킨스에 대해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1862년, 흠모하는 작가 찰스 디킨스를 만났다.”고 썼다. 레흐 톨스토이(1828~1910)와 “19세기 최고의 문호이자 위대한 기독교 작가”라고 말했다.
미국의 20세기 최고 비평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은 “영어로 소설을 쓴 천재 작가에 대해 말하라면 그 시작도 끝도 디킨스다”라고 격찬했다.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은 “인간보다 더 강렬한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탁월했다”고 평했다.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1889~1977)은 “디킨스는 영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유머 감각을 지닌 소설가”라고 평가했다.
악평도 있다.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는 “가장 대표적인 얄팍한 소설가”라며 “디킨스를 위대한 소설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모독”이라고 폄하했다.

13.가장 최근에는 디킨스의 별명인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남자(The man who invented Christmas,2017, 감독 바랏 날루리 )'라는 영화가 북미에서 개봉됐다. 한국에서도 2018년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디킨스는 최고의 인기 작가인 만큼 세계 곳곳에서 기리고 있다. 영국 은행이 발행한 10파운드 지폐(1992~2003)의 모델이었고, 영국에서는 2012년 찰스 디킨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 작가 관련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런던 중심지인 블룸스버리 다우티 거리에 찰스 디킨스 박물관이, 영국 포츠머스의 찰스 디킨스 출생지에도 박물관이 있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는 디킨스 친구 존 포스터(Jokn Forster,1812~1876, 전기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의 수집품에서 나온 인쇄소의 교정쇄, 초판, 여러 소설 원본 등이 소장돼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 스프루스 힐 근처의 클라크 공원에는 ‘디킨스와 리틀 넬’이라는 제목의 실제 크기 청동상이 있다. 또 다른 실물 크기의 디킨스 동상은 호주 시드니의 센테니얼 파크에 있다.
이밖에 캐나다 오타와 공공도서관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셰익스피어와 알프레드 테니슨(1809 ~1892, 영국 계관시인)사이에 디킨스의 초상화가 배치돼 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