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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카네이션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참된 삶을 찾는 소설은 실수 이야기로 문을 연다 본문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 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다. 8시 십오분 전, 그는 분데스테라세에서 시내를 가로질러 김나지움과 연결되는 키르헨펠트 다리로 들어섰다. 학기 중에는, 그리고 주중에는 언제나 똑같았다. 늘 8시 십오분 전이었다. 언젠가 한번 다리가 막혀 돌아가야 했던 날, 그는 그리스어 수업 시간에 실수를 했다. 그가 실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학교 전체가 며칠 동안 그의 실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학생들이 잘못 들었을 거라는 의견이 득세했고, 나중에는 그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문두스*-그레고리우스를 모두 그렇게 불렀다-가 그리스어나 라틴어 또는 히브리어에서 실수를 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는 고개를 들어 베른시 역사박물관의 뾰족탑을 쳐다보고, 위쪽 구르텐산과 아래쪽 아레 강의 푸른 빙하수를 바라보았다.”(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 저, 전은경 역, 비채, 2022)

1.첫 문장에 3인칭 화자(話者)의 삶이 바뀌었다는 점을 독자에게 미리 주지시키고, 소설을 전개한다. 전지적인 화자가 액자(額字,액자소설)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쓸때 선택하는 작법이다.소설 속 소설이라는 것을 은연중 내보이는 것으로 ‘액자소설(이야기 속에 하나 이상의 내부 이야기가 있는 것)’이 취하는 서술 방식중 하나다. 출근길을 카메라가 쫓아가는 듯한 묘사를 통해 액자 밖 주인공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주인공은 액자 밖에 있는 3인칭 화자, 문두스다.‘8시 십오분 전’을 두 번이나 강조한 것도 문두스의 완벽함을 뒷받침한 것이다. 주인공에게 익숙한 거리 모습과 그의 에피소드를 첨가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말 없이 거리 풍경을 묘사하며 주인공을 따라가는 로드에세이 같은 도입부다.*.앞 부분에 나오는 분데스테라세는 베른(Berne)시의 거리, 김나지움(Gymnasium)은 베른에 있는 국립 중고등교육 학교(독일식 학제로 대학 진학 예비학교), 키르헨펠트(Kirchenfeld)는 베른시의 거리 명칭이다.*.문두스(Mundus)는 세계, 우주, 하늘의 뜻을 지닌 라틴어다.

2.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 2004)’는 철학 산문처럼 쓴 여행 소설의 진수(眞髓)다. 21세기 들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의 하나다.
초판은 독일 뮌헨의 칼 한서 베를라그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독일어권에서만 20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세계 40여 개 이상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이 소설은 액자 속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현실과 얽힌다. 철학과 여행 이야기도 함께 해 헝클어진 실타래 속에서 ‘삶의 버거움’이라는 실을 한가닥한가닥 풀어내는 느낌을 준다. 독일의 한 매체가 ‘100대 독일 필독서 시리즈’의 하나로 선정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번역 제목에 쓴 리스본은 영어식 발음이고,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이다. 리스본은 안전한 매혹적인 항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영미권에서는 2008년 ‘Night Train to Lisbon’으로 번역 출판됐다.

3.소설은 출발, 만남, 시도, 귀로 등 4개 부분으로 나눠 쓰여졌다. 철학과 여행이 뒤섞인 산문 소설로 두 개의 이야기가 한 권 안에 들어 있는 액자소설이다.
소설은 포르투갈의 장기 집권자 안토니오 살리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1970, 1932~1968, 총리 역임)가 죽은 후에도 이어진 독재 체제를 타도하는 ‘카네이션 혁명(Revolução dos Cravos, 1974년 4월 말 시작된 포르투갈 무혈 혁명)’에 이르는 과정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대로(?)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의 액자 속 주인공인 의사 아마데우 드 프라도(Amadeu de Prado)의 삶과 액자 밖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의 삶이 뒤엉켜 있다. 특히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의 사람과 사건의 얽힘, 필연적 관계에 우연의 겹침 등도 주제 의식을 모호하게 한다.
소설을 읽어 갈수록 뚜렷한 목적을 알 수 없는 여행을 통해 혼란한 삶에서 무엇인가를 탐구하지만 잡히지 않는다.실제 액자속 주인공 프라두는 혁명도 사랑도 잡지 못한다. 막연한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듯 하지만 표류하는 배 같은 삶의 이야기다.
이런 느낌은 철학을 전공한 작가가 의도했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리라. 실제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며 모호함을 말한다.
4.등장 인물은 액자소설 밖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고전 문학 교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액자 속 주인공으로 철학자이자 의사 아마데우 이나시우 드 알메이다 프라두, 아마데우의 레지스탕스 동지 주앙 에사, 프라두의 동지 약사 조르지 등이다.
또 아마데우와 조르지를 사랑한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스테파니아), 안경사 마리아나 에사, 비밀경찰 후이 루이스 멩지스, 멩지스의 손녀, 아마데우의 여동생 아드리아나와 멜로디, 아마데우 집의 하녀, 바르톨로메우 신부 등도 나온다.

5.줄거리는 고전 문학 교수 그레고리우스가 강물로 뛰어내리려는 낯선 여인을 구한 뒤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실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이야기다.
비 내리는 어느날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여자를 구한다. 여인은 붉은 코트만 남긴 채 가버린다. 그녀를 찾아 책방에 간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1975)’라는 포르투갈 책을 보게 된다. 책의 저자는 아마데우 프라두다.
낯선 여인과 포르투갈 책. 그레고리우스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책의 주인공 아마데우 프라두를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지난날 치열하게 살다간 한 남자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작가 아마데우는 이미 사망했고, 묘라도 보기 위해 가다가 들른 안경점에서 아마데우의 동지를 알게 되고, 그를 만나 또 다른 동지도 찾는다. 그렇게 아마데우는 액자 속에서 거대한 산처럼 다가온다.
철학자이자 작가, 의사였던 아마데우는 친구 조르지의 약국도 차려주고, (살리자르)독재정권의 끄나풀인 비밀경찰 멩데스도 시민 폭행에서 구조해 준다. 그런데 독재의 하수인을 구해줬다는 이유로 친구 조르지 등 모든 지인(知人)의 외면을 받는다.
조르지의 외면은 사연이 있었다. 조르지의 연인이 아마데우에게 애정 공세를 펼치고, 결국 둘은 사랑한다. 조르지와 연적이 된것이다. 조르지는 이런 두 사람에 실망, 두 사람과 거리를 둔다. 그런데 아마데우가 목숨을 구해 준 비밀경찰의 손녀가 그레고리우스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마리아나와 만남도 포기하고 긴 여정을 마치고 스위스로 돌아간다.

6.이 소설에 대해 평가는 엇갈렸다. 칠레 유명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 Llona, 1942~현재, 대표작 ‘영혼의 집’)는 “정신과 마을을 위한 선물, 오랜 시간 내게 최고의 책이었다”고 격찬했다.
미국 미디어 뉴스 가제트(The News-Gazette)의 앤 필립스(Anne Phillips)기자는 리스본 행 야간 열차에 대해 “수수께끼의 로맨스와 정치적 음모가 책 장을 넘기게 한다”고 썼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텔레그래프(The Telegraph)의 다니엘 존슨 기자는“작가 메르시어는 살아있는 최고의 유럽 소설가”라고 격찬했다.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오토 에이 뵈머는 “심연을 파헤치는 의식의 심리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판도 있다. 호주 멜버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헤럴드 선(The Herald Sun)의 로버트 모일 기자는 “매력적인 소설”이라면서도 “독자가 그레고리우스와 얼마나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책이 나온 직후 리뷰에서 "지적이지만 생명력이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언론인으로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 책임자 옌스 제센(Jens Jessen), 1955~현재)은 "어색한 보수성과 기념비적인 지루함이 있다"고 언급했다.

7.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 노선은 베른~제네바~파리 리용역~몽파르나스역~보르도~비아리츠~엔다예(프랑스 국경도시)~이룬 (스페인 국경도시)-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역이다.
그런데 리스본행 야간 열차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일시적으로 중단됐었다. 그런 후 프랑스와 스페인 간 철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2022년 모든 열차 연결이 중단되기도 했다.
8.영화는 스위스에서 2013년 덴마크 출신 빌레 아우구스트(Bille August, 1948~현재) 감독의 ‘리스본행 야간열차(Night Train to Lisbon)로 나왔다.
명배우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1948~현재), 프랑스 여배우 멜라니 로랑(Melanie Laurent,1983~현재), 잭 휴스턴(Jack Huston,1982~현재) 등이 출연했다.

한국에서는 책이 2007년 처음 출간됐다.그런데 당시는 책이 나온지 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책을 번역했던 전은경 씨는 2023년 4월 한겨레와 인터뷰(한겨레 4월13일자)에서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2~3년간 못 찾았다고 들었다. 읽어나 볼까 가져왔는데 너무 빠져들었다”며 “호불호가 너무 갈리겠지만 100권만 팔려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다”고 말한다.
실제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여서인지 출간 당시 신문 등에서 지면 할애가 없었다. 서평 박스 기사가 한 꼭지도 없었던 것이다. 겨우 한줄 요약 정보가 몇군데 나왔을 뿐이었다 고 한다.
그런데 2014년 7월 서울 CGV 상암, CGV 여의도 등 전국 13개의 극장에서 영화가 동시 개봉했고, 입소문을 타고 관객이 대거 들었다. 영화 개봉 직후부터 책이 잘 팔렸고, 그해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0위권을 8주 연속 유지했다. 또 그해 8월 9일 KBS1 교양 프로그램 ‘TV, 책을 보다’에서도 방영됐다.

10.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이란 작가이자 번역가 마쉬드 미르뫼에치(Mahshid Mirmoezzi, 1962~현재)가 2013년 4월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
이란은 국제 저작권 협정을 지키지 않지만 미르뫼에치는 저자 메르시어의 허가를 받아 번역, 출판했다. 미르뫼에치는 이 번역 소설로 ‘파빈 어워드(Parvin Award)’를 받았다.
파빈 상은 방글라데시 국립 다카대학교의 매스커뮤니케이션 및 저널리즘 전공 교수였지만 미국에서 2005년 교통사고로 요절한 시타라 파빈 트러스트(Sitara Parvin Trust)를 기리기 위해 2006년 제정된 상이다.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1943~2023)=스위스 작가이자 철학자. 본명은 페터 비에리(Peter Bieri)이다. 본명은 철학서를 펴낼 때 쓴다.
필명 파스칼 메르시어에서 파스칼은 프랑스 철학자로 ‘팡세(Pensées, 생각, 1670)’를 쓴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다. 메르시어는 프랑스 SF소설 작가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Louis-Sébastien Mercier, 1740~1814)’에서 따왔다.

1.1944년 스위스 베른의 전통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작곡가였다고 하는데 부모에 대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유년기에는 어두운 작은 방에서, 청소년기에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1960년대 흑백 프랑스 영화를 주로 감상하면서 성장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베른고등학교(Berne Gymnasium Kirchenfeld)를 나온 후 베른 대학교에서 고전 문헌학을 공부하다가 런던으로 이주, 철학을 공부했다.
2.영국에서 공부하다가 독일로 와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원을 다녔다. 1971년 영국 철학자 존 매가타트 엘리스 맥타가트(John McTaggart Ellis McTaggart, 1866~1925)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박사 논문은 1972년 '시간과 시간의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후 철학 교수로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빌레펠트 대학교(1981~1983), 하이델베르크 대학교(1983~1990), 헤센주의 마르부르크 필립스 대학교(1990~1993), 베를린 자유 대학교(1993~2007)에서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3.필명 파스칼 메르시어는 1995년에 출간된 첫 소설 ‘페를만의 침묵(Perlmann's Silence)’에서 사용했다. 소설을 쓸 때는 ‘파스칼 메르시어’, 철학서를 쓸 때나 논문을 발표할 때는 본명인 ‘페터 비에리’를 썼다.
교수로 재직하던 메르시어는 2004년 발표한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유명세를 탔고, 2000년대 말 교수직에서 물러나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4.화가 하이케 비에리-쿠엔틴(Heike Bieri-Quentin)과 결혼, 베를린에서 주로 살았다. 아내 하이케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전시회도 열었지만 자녀에 대한 정보는 없다.
2004년에는 철학자로는 보기드물게 11명의 주요 신경과학자들과 ‘뇌 연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2007년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외국어 소설에 주는 상인 ‘프레미오 그린차네 카보우르’ 상을 받았다. 앞서 2006년에는 독일 마리 루이제 카슈니츠 상도 받았다.

7.2023년 6월27일 독일 베를린에서 갑자기 타계했다. 향년 79세. 그 전에 별다른 병환 등이 없어 사망 원인에 대해 심장마비 등 여러 가지 설이 나왔지만 확정된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
독일 출판사 한서 베를라그의 조 렌들(출판인)은 사망 사실을 알리며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소설가를 잃었다. 페터 비에리의 소설은 인간성에 대한 위대한 질문들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고 말했다.
주요 작품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2004)’, ‘페를만의 침묵(1995)’, ‘피아노 조율사(1998)’, ‘레아(2007)’ 등이 있다. 철학 관련 저서로는 ‘삶의 격’, ‘자기 결정’, ‘자유의 기술’ 등이 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