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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마농 레스코-유럽 첫 팜므파탈 소설의 첫 문단은 액자구조 전개를 예비하고 있다 본문
“내가 처음으로 슈발리에 데 그리외를 만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겠다. 그것은 내가 스페인으로 출발하기 약 6개월 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칩거하여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딸을 위해 때로는 몇 차례 짧은 여행을 해야 했고, 그럴 때면 최대한 일정을 줄이곤 했다. 외조부로부터 받아 딸에게 물려준 토지 청구 권리, 즉 토지 상속 문제 해결을 위해 노르망디 의회에 가달라고 딸이 내게 부탁해서 루앙에 다녀오던 어느 날이었다. 길을 다시 출발하여 첫날 묵었던 에브르를 지나, 다음 날 저녁을 먹기 위해 20내지 24킬로미터 쯤 떨어진 파시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나는 그곳의 모든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집에서 뛰어나와 무리를 지어 허름한 여인숙 문 앞으로 달려갔는데 여인숙 앞에는 포장이 씌어진 마차 두 대가 있었다.”(홍지화 역, 부북스(BooBooks), 2016)

1.어려운 말이 없는 소박한 문체의 첫 문단이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주인공을 첫 문단부터 내세우는 과감한 서술을 하고 있다. 3인칭의 주인공이 1인칭으로 돌아오는 전형적인 액자구조 소설 전개 방식이다. 전체적으로도 문장이 유려하다거나 상징과 은유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없다. 그래서 막장 드라마를 보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사랑과 파멸의 변주곡 이야기의 도입부치고는 편안하게 전개된다.
2.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아베 프레보)의 대표작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 1731)’는 책이 나오자 마자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은 유럽 최초의 ‘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소설이다.
소설은 당대에서 소화하기 쉽지 않은 파격 자체였다.18세기 초반 경건한 지배층과 지식인 그룹이 지탄하는 도박, 사기, 탈옥, 매춘, 살인, 패륜 등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반자전적 성장 이야기임에도 ‘부도덕’ 등을 이유로 곧바로 판금(販禁) 당했다.
이 소설은 작가가 군대에 들어갔다가 영국 등을 전전한 뒤 귀국해서 쓴 ‘어느 귀인의 회상록’ 20권 중 제7권에 해당한다. 이 7권이 작가를 세계 문학의 별로 영원히 떠 있게 한 것이다.
소설은 판금되면서 음성적 인기가 더했다. 네덜란드 등에서 들여온 해적판이 파리 시민 등 대중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독자들의 증판 요청이 빗발쳤다.
결국 수년이 지나면서 판금이 해제되고 개정판(1753)이 나왔는데 기존 7권을 별도로 떼어내 정정(訂正)과 첨필(添筆)을 거쳐 주인공들 이름을 내세운 단독 판본 ‘마농 레스코(Histoire du Chevalier des Grieux, et de Manon Lescaut)’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파리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프랑스 문학 역사상 가장 많은 판이 나온 기록을 갖고 있다. 초판 기준 1981년까지 250판이나 찍었다고 한다. 대단한 중판(重版)인 셈이다.
원제는 ‘슈발리에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L’histoire du chevalier des Grieux et de Manon Lescaut)’이다. 영어로는 ‘The Story of the Chevalier des Grieux and Manon Lescaut’로 번역됐다.

3.프랑스, 아니 유럽 문학사상 처음으로 나온 ‘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인과 파멸)의 서사 소설이다. 연애 지상주의로 인해 주인공들 스스로 삶을 망치는 자학 소설이기도 하다.
젊은 기사와 프리랜서 매춘부의 3류 로맨스에 격정의 사랑이 더해져 운명론적 사랑으로 치닫지만 결국은 불행으로 마무리된다. 소유의 욕망과 집착의 사랑의 한계가 가져온 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랑에 대한 열정 탐구라도 하듯이 이성과 명예하나 남김없이 아낌없이 태워버린다. 죽고 못사는 사랑 때문에 막장 스토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셈이다.
자연주의와 낭만주의가 교묘히 결합된 작품이어서 허구인지, 사실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자전적 느낌이 강하게 우러나 당대 독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4.마농 레스코를 읽은 프랑스 계몽주의 정치 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본명 Charles-Louis de Secondat)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주인공들의)행동이 비열하다고 해서 결코 (사랑의)고결함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몽테스키외는 최초로 삼권분립을 주장한 저서 ‘법의 정신’으로 유명하다.
당대의 셀럽으로 군인이자 작가인 사드 후작(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1740~1814)은 “이 매력적인 작품을 읽은 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는가”라고 말했다.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실연과 같은 고통을 자극하는 데는 프레보의 소설만큼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고 언급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대표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은 “어떤 여자도 마농보다 더 여자답지는 않다. 감미롭지만 성실하지 않은 여성성의 진수를 마농보다 많이 갖춘 여자는 일찍이 없었다”고 격찬했다.

5.시대와 무대 배경은 18세기 초 프랑스와 당시 프랑스 식민지인 미국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이다. 프랑스는 1718년 개척한 이곳을 ‘새로운 오를레앙(누벨 오를레앙. 영어로 New Orleans)’이라고 불렀다.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주인공으로 명문가의 젊은 청년 슈발리에 데 그리외(Chevalier Des Grieux)와 매혹의 여인 마농(Manon lescaux), 그리외의 친구 티베르주(Tiberge) 등이다.
또 마농의 오빠 레스코(lescaux), 그리외의 아버지, 세금징수인 B씨, 늙은 호색가 GM과 그의 아들, 감옥의 감화원 T씨, 총독 에티앙 페리에 등이다.
6.줄거리는 성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명문가의 수재 청년 그리외와 자유분방한 여인 마농의 파멸적인 사랑이다.
아미앵의 명문가 차남 그리외는 고교 과정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기 전날 밤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마농 레스코다. 그리외는 고향과 부모는 뒷전이고 매혹적이지만 불길한 여인 마농과 함께 파리로 달아난다.
둘은 불멸의 사랑을 하지만 마농은 사치와 허영을 더 사랑하다. 마농은 향락을 위해 그리외 몰래 부자 노인 등과 매춘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외와 마농은 이런 문제로 끊임없이 다툰다.
그러다가 둘은 헤어지고, 그리외는 친구의 권고에 따라 마농을 잊고,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매혹의 마농을 다시 만나 속세로 돌아온다.
둘은 가난하지만 정열적 사랑을 이어가지만 마농이 사치와 유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외는 마농의 오빠에게서 속임수 노름을 배워 써먹다가 사기로 감옥에 가지만 탈옥까지 한다.
그리외의 아버지는 당시 부랑배를 강제 이주시키고 있었던 미국 루이지애나로 마농을 사기, 매춘 등으로 엮어 추방되도록 한다. 그런데 그리외도 쫓아간다. 그런데 마농이 거기서 총독의 조카와 연정관계로 가자 그리외가 못참는다. 그리외는 그 조카와 결투를 해 중상을 입힌다. 둘은 사막으로 도망치지만 추위와 피곤에 못 이겨 결국 마농이 죽는다. 그리외는 목숨은 건지지만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7.마농 레스코는 파격적인 소재와 다양한 극적 요소로 인해 영화와 오페라, 연극 등의 단골 소재다.
특히 발레와 오페라로 많이 만들어져 수많은 공연을 했다. 1830년 안무가 장 루이 오메르(Jean-Louis Aumer, 1774~1833)의 발레 ‘마농 레스코’가 나왔다.
이어 1856년에는 다니엘 오베르(Daniel Auber, 1782~1871)가 동명의 오페라로 제작했다. 두 작품은 큰 성공을 못거뒀지만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Émile Frédéric Massene, 1842~1912)의 프랑스어 오페라 ‘마농(1884)’ 은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
마농 레스코는 나중에 오페라의 황제로 등극한 자코모 푸치니(1858~1924)를 세계적인 오페라 감독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탈리아어 오페라 ‘마농 레스코’는 1893년 토리노 왕립극장에서 초연이래 보기 드문 성공을 거뒀다.
영화도 많이 제작됐다. 독일 영화감독 아르투르 로비손( Arthur Robison,1883~1935)이 1926년에, 이탈리아 감독 카르미네 갈로네(Carmine Gallone,1885~1973)가 1940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또 프랑스의 앙리조르주 클루조(Henri-Georges Clouzot,1907~1977) 감독의 ‘마농(Manon, 1949)’으로도 나왔다. 소설 무대와 배경을 2차세계대전으로 옮긴 이 영화는 그해 이탈리아 ‘베네치아 영화제(1949)’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가장 최근에는 2013년 나온 이집트 출신 프랑스 영화감독 가브리엘 아지옹(Gabriel Aghion, 1955)의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다.

7.한국에서는 일제 치하인 1923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 대한매일신보 전신, 1910년8월29일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총독부 기관지로 변신)에 ‘마란희(본명을 알수없는 여성 번역가 춘계생 역)’라는 이름으로 연재됐다.
책으로는 6.25전쟁 와중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문학 평론가이자 신극운동가로 ‘개벽(1920년 창간된 천도교 월간 잡지)’ 학예부장 출신인 현철(본명 현희운,玄僖運,1891~1965) 번역으로 1952년 ‘마농(금정문화사)’으로 출판됐다. 최근에는 홍지화 옮김 ‘마농 레스코(2016)’가 부북스(Boobooks)에서 출판됐다.
한국에서 영화 개봉은 1968면 서울에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1949년 판 ‘마농’이 ‘정부(情婦) 마농’으로 개봉돼 공전의 히트를 쳤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은 2016년 8~9월 수도권 메가박스 등에서 상영됐다. 2017년 6월에는 글로리아오페라단이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다.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Antoine François Prévost, 아베 프레보, Abbé Prévost, 1697~1763)=프랑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신부, 군인으로도 활동했다.
본명은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 덱질(Antoine François Prévost d'Exiles)’이다. 필명으로 나오는 Abbé Prévost는 프랑스어로 ‘프레보 신부’, 프레보 덱질은 ‘추방된 프레보’라는 뜻이다.
1.프랑스 북부 아르투아(Artois)의 에스뎅(Hesdin)에서 변호사인 아버지 레방 프레보(Lievin Prévost)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스뎅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등 순조로운 성장을 하다가 14살 때 어머니와 여동생이 사망, 큰 충격을 받았다.
17세 전후에 파리 예수회 학교인 파리수도회의 초심자가 된 것과 함께 라 플리체(La Flèche)의 칼리지에서 동시에 공부했다. 그러나 1716년 말 세속의 쾌락을 동경해 군대에 입대했다.
2.1719년 군에서 나와 파리로 돌아와서 다시 성 마우르(St Maur)의 베네딕토회 공동체에 합류, 사제(베네딕트회 수사) 수련을 받았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1728년 사제가 됐다. 앞서 1721년 첫 작품 ‘로마 기사 폼포니우스의 모험’을 써서 172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간했다
파리의 생 제맹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수도원에서 있었으나 허가없이 일탈하자 체포영장(lettre de cachet)이 발부됐다. 이에 프레보는 1728년 말 영국으로 도피했다.

제 7권에 있는 '마농레스코'로 더 유명해진 ‘어느 귀인(貴人)의 회상록(Mémoires et aventures d'un homme de qualité qui s'est retiré du monde)’은 1728~1731년사이에 단계적으로 파리와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됐다.이후 암스테르담의 서점들에 보낸 편지에서 프레보 덱질(Prévost d'Exiles)이라는 이름을 첫 사용했다. ‘추방된 프레보’라는 뜻이다.
3.1734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저작 활동한다.잠시 런던 등억어 체류했지만 베네딕토 수도회와 화해하고 라 크로이 생 뢰프로이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지낸다. 프랑스 북부 콩티 출신의 콩티 공(prince de Conti)의 성관 주재(城館駐在) 성직자가 된다. 1740년 이후로는 비교적 편안하게 지내며, 저작활동에 몰두한다.1754년 57세때 수도원장이 된다.
4.브뤼셀과 프랑크푸르트 짧은 기간(1741~1742)외에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 북부 우아즈 주 도시 샹티이(Chantilly)에 거주했다. 샹티이는 이탈리아 중세화가 라파엘로(1483~1520)의 작품이 있는 샹티이 성(Château de Chantilly)으로 유명하다.
프레보는 1763년 겨울 어느 날 숲 속을 산책하다가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향년 66세. 나중에 ‘동맥류 파열’이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