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마의 산-병든 유럽의 각성을 촉구하는 소설의 첫 문단은 삶의 여정을 빗대며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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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병든 유럽의 각성을 촉구하는 소설의 첫 문단은 삶의 여정을 빗대며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8. 14.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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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범한 젊은이가 한여름에 고향 도시인 함부르크를 떠나 그라우뷘덴주의 다보츠 플라츠로 여행을 떠났다. 3주 예정으로 누군가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함부르크에서 그 곳까지는 긴 여정이다. 3주라는 짧은 기간을 머물기에는 사실 먼 거리이다. 여러 나라를 지나 산을 오르내리고, 남독일 고원에서 슈바벤의 호숫가로 내려가 거기에서 배를 타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헤치며 그 옛날부터 밑바닥을 알 수 없던 심연을 건너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편안하게 일직선으로 진행되던 여행이 이제부터는 다소 복잡해진다. 멈춰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고 또 갖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생긴다.”(윤순식 역, 열린책들, 2014)

파이프에 로마숫자(12,소설을 쓴 기간12년)를 태워 독일어 'Der Zauberberg(마의 산)'가 연기로 나오는 이미지를 형상화 한 출판사 '열린책들'의 2014년 표지(전 3권중 상권).열린책들 곽고운씨 디자인이다.

1.익숙한 것(고향)을 떠나 온갖 험난한 시간을 거치며 살아가는 인생을 비유한 도입부다. 철학적 사유와 상징이 스며든 산문체의 문장이지만 읽기에 어렵지 않다. 인생이란 시간을 예정할 수도 없고, 거센 파도를 헤쳐 바닥 모를 심연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직접 표현하고 있다. 삶의 여정을 빗댄 도입부가 읽을수록 심오하다는 느낌이다. 첫문단부터 상세한 설명과 심리묘사가 나오는  사유(思惟)의 소설이다.첫 문장에 나오는 다보츠는 현재의 다보스이다.

2.토마스 만의 ‘마의 산(魔의 山, Der Zauberberg, 1924)은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이다. 소설은 1912년 쓰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 12년 후인 1924년 완성됐다.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볼세비키(레닌 중심 공산당으로1917년 권력 장악)의 등장, 파시즘(전체주의 독재)의 민주주의 위협 등 유럽의 정치 사회적 변화의 시기에 인간과 체제의 존재 이유를 묻는 소설이어서 나올때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복잡한 이야기 구조, 철학적인 사유, 풍부한 상상력, 매직 리얼리즘 요소,파시즘 비판 등으로 예술성과  현실성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유럽은 물론 세계 지식인들이 열광했고, 노벨문학상 수상의 바탕이 됐다.
일부에서는 작가를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 1919~1933, 독일국(Deutsches Reich)의 별칭)의 양심’으로 추켜 세우기도 했다.

1924년 나온 '마의 산' 초판본 표지.photo by wikipidia

제목의 ‘Zauber’는 마법, ‘Berg’는 산을 뜻한다. 영어로는 The Magic Mountain’으로 번역된다. 영역본은 1927년 미국 여성 작가이자 번역가인 헬렌 트레이시 로워 포터(Helen Tracy Lowe-Porter, 1876~1963)의 번역으로 처음 나왔다.
타임 선정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에 들어가 있고, 미국 대학위원회 추천도서(문학) 101권에도 들어가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다.

3.소설의 무대는 현대에 와서 ‘다보스 포럼(Davos forum,1971년 창설된 세계경제포럼 별칭)’으로 유명한 스위스 그라우뷘덴주 다보스의 한 요양소(결핵 요양원)다. 소설은 실제 작가가 체험한 것을 토대로 집필했다.
작가는 1912년 5~6월 즈음 배우자 카타리나(카티아) 프링스하임이 폐렴 의심 증상으로 다보스의 한 요양소에 입원하자 병문안을 가서 3주간 체류했다. 작가는 요양소서 진찰도 받았고, 입원을 권유받기까지 한다.
이 요양소가 소설에 나오는 베르크호프다. 알프스 산 고지에 자리한 국제적인 폐결핵 요양소다. 마의 산이다. 세계 각국(심지어 중국, 멕시코 등)의 환자들이 모여 있는 1인 1실 고급 시설이다. 한편 이 결핵 요양소는 호텔로 리모델링해 1953년 개관했다. 현재 이 호텔에는 토마스 만 기념관이 있다.

스위스 다보스에 있는 '마의 산' 무대 건물. 결핵요양소였으나 전면 리모델링해 1953년부터 호텔로 사용중이다. photo by wikipidia

4.마의 산은 거대한 메타포와 알레고리(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서술법)가 들어 있는 소설이다. 호화 요양소 자체가 화려한 현재는 있으나 파시즘 확산 등으로 미래가 없는 ‘병든 유럽’을 상징한다.물론 등장 인물 각자도 해당 나라를 상징하는 등 다양한 은유로 쓰였다.
요양소의 인물들은 토론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를 고찰하고, 파시즘이 가져온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을 강력 비판한다.
이 소설에는 ‘7’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온다. 소설 자체가 7개의 장으로 나눠 있으며, 책의 서문에도 ‘일주일의 7일, 7개월로 부족’, ‘설마 7년이나’ 등 7이 여러 번 나온다.
소설 속에서도 체온계를 무는 7분, 일곱 개의 식탁, 7년 체류, 주인공의 방번호 34(3+4=7), 자살 방조 7명이 함께 한다.

5.마의 산은 3주간의 작가 아내 병문안이 준 강렬한 이미지가 창작의 바탕이다. 실제와 달리 소설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Hans Castorp)는 방문객에서 장기입원환자로 바뀌어 긴 소설을 풀어나간다.
젊은(23세) 상인 카스토르프는 알프스 산 다보스의 요양소로 사촌 형제를 문병 갔다가 그곳 의사 권유(병이 있으니 치료 필요)로 7년 간 요양소에 있게 된다. 그곳에는 병 치료와 요양이 목적인 실로 다양한 환자 군상들이 있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등지에서 결핵 치료 등을 목적으로 온 이들 이지만 모두 돈많고 유복한 이들이다.
요양소의 환자들은 먹고, 대화하고, 누워 있고, 치료를 받는 일 등이다. 이들은 하루 중 다섯 번의 풍성한 식사를 한다.
청년 환자 카스토르프 주변에는 제템브리니, 나프타, 쇼샤, 페페르코른 등이 있다. 제템브리니는 합리, 진보주의자로 인문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는 카스토르프를 이성과 진보의 믿음이 존재하는 바깥(평지) 세계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쇼샤는 관능적인 외모를 소유한 여인으로 욕정과, 질병, 죽음을 상징한다. 카스토르프가 입원 7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사랑을 고백하지만 다음날 요양소를 나간다.

1982년 나온 독일 개봉 영화 '마의 산' 포스터.photo by movie.daum.net

나프타는 예수회 교도이며 반자본주의자이다. 육체를 타락과 부패의 온상으로 보면서 건강한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한다. 당연히 병과 죽음을 찬양하는 허무주의자다.
제템브리니와 충돌하고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둘을 끝내 결투를 벌이기로 하는데 결투장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페페르코른은 커피 재배업자로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상징한다. 쇼샤와 함께 요양소에 다시 온다. 그는 늘 건강과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물이다.
카스토르프 사촌 요아힘 침센은 병이 덜 나았음에도 퇴원해 군대로 돌아간다. 혼자가 된 카스토르프는 단조로운 생활과 무기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스키를 배운다.
그러다 스키를 타고 계곡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눈보라에 갇힌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비몽사몽 간에 꿈속을 헤매다 시간을 잃어버린다.
그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카스토르프는 병과 죽음이 지배하는 요양소에서 나와 전장으로 떠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묻는다. ‘죽음의 축제와 사악한 불길 속에서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독일에서 2002년 출시된 영화 마의 산의 DVD 사진.photo by movie.daum.net

6.마의 산은 철학적 사유가 담긴 개인 성장소설이지만 위기에 빠진 유럽의 ‘시대 정신’을 묻는다. 병든 유럽이 새로운 시대로 가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경고에도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되고, 1933년 히틀러 나치(실제 이름은 Deutsches Reich로 씀)라는 파시즘이 등장한다. 그리고 유럽은 불과 몇 년만에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2차 세계대전)으로 빠져든다.
1982년 오스트리아,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합작으로 ‘마의 산(The Magic Mountain, Der Zauberberg)이라는 소설 제목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인 1929년의 토마스 만 photo by wikipidia

#.토마스 만(Thomas Mann,1875~)=독일의 대표적인 소설가. 노벨문학상(1929) 수상 작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다. 본명은 파울 토마스 만(Paul Thomas Mann)이다.

1.1937년까지 자유시(自由市, 단일 도시가 독립 국가로 기능하는 도시)였던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뤼벡(Lübeck)에서 부르죠아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하인리히 만(Thomas Johann Heinrich Mann, 1839~1891)은 뤼벡의 의원까지 지낸 엄격하고 냉정한 도덕주의자였다.
아버지보다 12살 연하인 어머니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Júlia da Silva Bruhns,1851~1923) 는 독일의 포르투갈-브라질계 출신으로 낙천적이고 예술가적 기질이 강했다. 

2.뤼벡 김나지움 스쿨(Lubeck Gymnasium School) 졸업 후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실업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었다. 2년 후 가족들은 독일 남부 뮌헨으로 이주했다.
만은 뮌헨에서 약 1년 정도 보험회사(South German Fire Insurance Company)에서 다니다가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과 뮌헨 기술대학을 다녔다.
만의 형인 장남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1871~1950) 역시 당대 독일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성장했다.대표작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푸른 옷의 천사(Der blaue Engel,1928) 등이 있다.

1902년 무렵의 토마스 만(오른쪽)과 하인리히 만 형제.photo by wikipidia

3.1894년 잡지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사회)’에 처음으로 ‘타락’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1898년에는 처음으로 단편집 ‘난쟁이 프리데만 씨(Der Kleine Herr Friedemann)’을 출판했다.
1901년에는 평론가와 독자 모두 호응을 얻은 ‘부덴브로크가 사람들(Buddenbrooks)’를, 2년 뒤에는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를 출판한다. 이후 토마스 만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만은 1891~1933년까지 뮌헨에서 살았다. 이 사이에 만은 결혼도 했지만 여동생 2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 충격을 받기도 했다. 또 한 명의 여동생 모니카는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4.1905년 부유한 유대계 상인 가문의 아들로 뮌헨 대학 수학과 교수인 프링스하임(Alfred Pringsheim, 1850~1941)의 딸 카타리나(카티아, Katia Pringsheim, 1883~1980)와 결혼했다.
만은 이 결혼으로 보헤미안(Bohemian,방랑 혹은 자유분방)적 태도와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가정과 예술가적 생활의 양립을 꾀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3남 3녀가 태어났다. 자녀들은 모두 훌륭한 인재로 성장했다.
장남 클라우스 만(Klaus Heinrich Thomas Mann,1906~1949) 역시 작가가 되었다. 다만 클라우스는 1949년 자살로 생을 마쳤다.
차남 고로(Golo Mann, 본명 Angelus Gottfried Thomas Mann,1909~1994)는 역사가, 3남 미하엘(Michael Thomas Mann, 1919~1977)은 미국 버클리대 교수이자 비올리스트로 명성을 떨친다.
큰 딸 에리카(Erika Julia Hedwig Mann, 1905~1969)는 독일 배우이자 작가, 둘째딸 모니카(Monika Mann,1910~1992)도 작가로 활동했다.
막내딸 엘리자베스(Elisabeth Veronika Mann Borgese, 1918~2002)는 미국 캐나다에서 활동한 해양정책, 해양법 전문가로 ‘바다의 어머니’로 불렸다. 만은 1909년 발표한 ‘대공 전하’라는 소설에서 이런 행복한 가정을 투영하기도 했다.

'토마스 만이 빠진 가족사진'. 왼쪽부터 둘째딸 모니카(Monika), 둘째 아들 고로(Golo), 3남 미하엘(Michael), 토마스만 부인 카타리나(카티아,Katia), 장남 클라우스(Klaus), 막내딸 엘리자베스(Elisabeth), 큰 딸 에리카(Erika)이다. photo by wikipidia

하지만 토마스 만은 양성애자이기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화가 파울 에렌버그와 친구이상의 관계였으며, 1950년에는 19세의 웨이터 프란츠 웨스트메이어(Franz Westermeier)를 만나기도 했다. 많은 작품 속에서도 동성애와 이성애가 함께 드러난다.

5.1929년에 만은 리투아니아의 어촌마을 니다(Nida, 현 니다 예술가 마을)에 집필을 할 수 있는 별장을 마련했다. 이 별장은 현재 문화센터로 개관하고 있으며, 작은 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다.
니다 예술가 마을은 19세기 말 쾨니히스베르크(1773~1945년 독일 동부지방 행정중심지. 현재는 러시아령 킬리닌그라드) 예술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이 여름에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인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독일 화가 로비스 코린트(Lovis Corinth, 1858~1925), 화가 겸 시인 하인리흐 크류커(Heinrich Krüger, 1863~1901), 화가 에른스트 비쇼프쿨름(Ernst Bischoff-Culm, 1870~1917) 등이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6.1930년 대 초 미국과 유럽 등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가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자 유럽 등을 떠돌면서 파시즘을 비판했다. 나치 정권은 토마스 만에 대한 다양한 포섭 작전이 실패하자 1936년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독일 내 재산도 몰수했다.
만은 1938년 블랑쉬 크누푸(Blanche Wolf Knopf, 1894~1966, 미국 여성 출판인) 등의 도움으로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9년 9월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방송사 BBC를 통해 독일 국민 대상 반나치 연설에 적극 나섰다. 만은 나치즘에 대해 ‘악마의 허무주의’라고 맹공했다.

7.1944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 2차대전 종전 후에도 미국에 머물렀다. 그런데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 광풍이 불자 1952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했다. 매카시즘은 공화당 의원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가 주도한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이었다.
1949년 괴테문학상(Goethe Prize, 독일어 Goethe-Preis der Stadt Frankfurt am Main)을 받았다. 만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탄생 200주년을 맞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과 바이마르의 행사에는 참석했으나 독일 국적을 회복하지는 않았다.

1955년 8월16일 스위스 취리히 킬히베르크 (Kirchberg) 교회 묘지에서 치러지고 있는 토마스 만 장례식.photo by wikipidia

8.1955년8월12일 영면했다. 독일 문호 F.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사망 150주년 기념 강연을 동독과 서독 양쪽에서 하고, 고향 도시 뤼벡의 명예시민이 돼 돌아온 직후였다.
사인은 혈전증이었다. 향년 81세. 장례는 4일 후 취리히 킬히베르크(Kirchberg)에서 치러졌고, 킬히베르크 교회 묘지에 안장됐다.
주요 작품으로는 ‘난쟁이 프리데만 씨(Der kleine Herr Friedmann,1898년)’,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Buddenbrooks, 1901)’,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1903)’, ‘대공전하(Königliche Hoheit,1909)’,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1912)’, ‘마의 산(Der Zauberberg,1924)’, ‘요셉과 그의 형제들(Joseph und seine Brüder,1933~1943)’, ‘자유의 문제(Das Problem der Freiheit,1937)’, ‘바이마르의 로테(Lotte in Weimar,1939)’, ‘뒤바뀐 머리들-인도의 전설(Die vertauschten Köpfe-Eine indische Legende,1940)’,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1947)’, ‘거룩한 죄인(Der Erwählte,1951)’,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elix Krull. Der Memoiren erster Teil,1922,1954)’ 등이 있다. 이밖에 소설이 아닌 인물 평설 ‘바그너와 우리 시대(Wagner und unsere Zeit,1963)’도 있다.

스위스 취리히 킬히베르크 (Kirchberg) 교회 묘지의 토마스 만 가족묘 일부. 서있는 비석이 토마스만과 부인 비석이다. photo by wikipidia

9.만의 작품과 사상은 많은 후대 문학가와 독일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에서 대문호 괴테 다음으로 많이 연구되는 작가다.
헝가리 철학자이자 미학자로 유명한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 1885~1971)는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1904~1987)은 “토마스 만은 나에게 강한 영향을 준 스승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독일 뤼벡에는 토마스 만 기념관이 있으며, 시 차원에서 토마스 만 축제 주간을 정해 행사가 열린다. 한편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교육기관 ‘Thomas Mann Gymnasium’은 토마스 만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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