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목민심서-국록을 먹는 관리의 기본을 훈계하는 조선 名著의 첫 문단은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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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국록을 먹는 관리의 기본을 훈계하는 조선 名著의 첫 문단은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성인간 2024. 11. 18.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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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목민관의 도넘는(?) 행차-조선 후기 관리 부임 행차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익명의 인물이 부친의 황해도 안릉 현감 부임(1785) 광경을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에게 부탁해 1786년 그린 그림으로 추정. 당시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화사(御眞畵師,종6품 별제)를 지낸뒤 경상도 안동 안기역 종6품 찰방(察訪,역참 관리 문관)으로 근무할때여서 조정 실세의 부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https://dh.aks.ac.kr

제1부 부임(赴任) 6조 1.임명을 받음(除拜) 다른 벼슬을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된다.
"수령의 직분은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제대로 할 수 없고, 뜻이 있더라도 밝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 없다. 제대로 할수 없는 경우에는 백성이 해독을 입어 괴로움을 당하고 길바닥에 쓰러질 것이다. 사람들이 비난하고 귀신들이 책망하여 그 재앙이 후손에들에게 미칠텐데 이럼에도 수령 자리를 생각없이 구해서야 되겠는가. 요즈음 무인(武人)들이 제발로 인사담당관을 찾아가 수령 자리를 구걸히는 것이 관례가 되고 풍속을 이뤄 이제는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수령자리를 구걸하는 자는 자신이 재주와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헤아려보지도 않고, 그것을 들어주는 자 역시 알아보거나 묻지도 않으니, 정말 잘못된 일이다. 문신으로 홍문관(弘文館)이나 승정원(承政院)에서 벼슬하는 자가 고을살이를 구하는 법이 있다. 아래에서는 부모를 공양하려는 효성에서 고을살이를 구걸하며, 위에서는 효도라 하여 허락하였는데, 이 관행이 풍속을 이루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우(優)하(夏)은(殷)주(周)의 시대에는 이런일이 결코 없었다. 집이 가난하고---." (정약용 저, 다산연구회 편, 창비, 2019)

목민심서의 산실-1953년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화백이 다산과 교류한 초의(草衣)선사(법명 의순,意恂, 1786~1866,대흥사 13대 종사 역임)의 다산초당도 원본을 모사한 그림. 의재는 종고조(從高祖)뻘 되는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1809~1892)의 뒤를 잇는 시·서·화 겸전의 남종화(南宗畵,산수화 2대 화풍 중 하나)의 대가이다. 개인소장.

1.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아치의 기본을 이야기하는 당대 상황을 불쑥 쓰고 있는 도입부다. 계몽서 답게 좋은 훈계의 글이 가득하다. 앞편에 자서(自序)가 있는 만큼 관료의 행실을 경계하는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글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고난도 한문 훈계서를 과연 조선 후기 지방 관리나 아전, 형리들이 읽고 해석할 수 있었을 까 의심이 든다. 번역문임에도 도입부 전체적으로 쉼표가 많고, 고지식한 문어체의 문장 전개가 아쉽다. 새삼 한문 번역의 어려움을 이야기해 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번역 자체를 약간의 의역이 되더라도 과감하게 읽기 쉬운 단어, 쉬운 문체로 바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제목에 나오는 *제배(除拜)는 임명을 받는 것, 본문에 나오는 *수령은 고을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홍문관은 경서(經書)·사적(史籍) 관리 및 문한(文翰) 처리와 더불어 국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업무를 맡은 예조 소속 관공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이다. 우두머리는 영사(領事, 정1품)이지만 영의정 겸직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대제학(大提學,정2품)이 수장이다, 흔히 옥당(玉堂)으로 썼다. *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관장하는 비서실. 우두머리는 비서실장 겸 정무수석 격인 도승지(都承旨,정3품)다. 도승지  포함 모든 승지는 정3품이고, 도승지는 품계는 낮지만 영의정을 능가할 정도의 실세였다. *우,하,은,주는 고대 중국 전설상의 나라 이름이다.

목민심서 판본.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2.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1818)'는 조선 관리 행정 지침서이자 행정 업무 설명서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최고의 관리 계몽서이다. 조선 22대 국왕 정조(正祖,1722~1800)가 급서한 직후 순조1년(1801) 일어난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辛酉迫害,辛酉邪獄)에 휘말린 저자가 유배형을 받아 전라도 강진(康津, 현 강진군)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썼다.제목 목민심서는 '목민(牧民,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심서(心書)'를 합친 말이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목민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다산은 심서의 뜻을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귀양살이로)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마음 글)라 했다고 자서(自序)에 쓰고 있다.
목민심서는 1817년 강진에서 마무리해 간행한 초고본(1818) 외에 이본(異本)이 있다. 1821년 경기도 마현(馬峴, 말재) 고향집에서 마무리한 수정 가필본, 즉 완성본이  그것이다. 초고본의 조명(條名)을 바꾸고 문장을 수정했다. 특히, 조선과 중국 순리(循吏,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들의 선정, 선행(善行)을 많이 넣어서 분량이 3분의 1 이상 증가했다. 목민심서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6~29에 실려 있다. 책은 서울대 장서각에 일부 소장돼 있고, 필사본 일부(49권 16책중 7~9권 1책)는 단국대 퇴계기념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현대에 들어와 1901년 광문사에서 한문 그대로 간행했고, 196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본을 내놓았다. 또 1985년 다산연구회에서 교정, 주해를 달아 출판했다.

여유당전서 한 부문(권 16~59)으로 엮어 함께 수록한 목민심서 목판본.

3. 목민심서는 부임(赴任)·율기(律己,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일반 관리제도와 규범을 모아놓은 법전)·호전(戶典,주민, 조세, 곡물 사무 규정을 담은 법전)·예전(禮典,예학, 제사, 학교 따위 사무를 모은 법전)·병전(兵典, 군사 사무를 모아놓은 법전)·형전(刑典,재판과 형벌 관련 사무를 모은 법전)·공전(工典, 산과 물 관리, 수리,소비재 등의 사무를 모아놓은 법전 )·진황(賑荒, 흉년 등 재해 대비 구호품 비축, 빈민 구제 등)·해관(解官, 관원을 면직함)의 12부로 나뉘어 있다. 각 부는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됐다.
학자들은 목민심서의 핵심으로 제6조 '호전(戶典)'로 본다. 전정(田政,토지 이용 관련)·세법(稅法)·곡부(穀簿,곡식의 출납)·호적(戶籍)·평부(平賦,공평한 부역)·권농(勸農) 등을 통해 토지제도·조세 수취·진휼(재해 구호), 농업 장려(흥산) 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6조에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의 방안이 모아져 있다.

목민심서는 고난도 한문 저서이자 관리 계몽서로 지방관리들이 해독하기 쉽지 않았다.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이 그린 '긍재풍속도첩' 중 '야장단련(冶匠鍛鍊)-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다루다'.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

4.당대와 그 이후에 목민심서는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대 식자층(한문을 제대로 배운자)이나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난도(難度)가 높은 한문 저작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지방 목민관(대다수가 무관이나 음서로 들어간 관리)들이 읽을 엄두조차 못냈다고 한다. 그래도 현대에 들어와서는 조선 후기 관료, 사회, 경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저서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한글 번역도 험난했다. 각 분야 국문학·한문학··경제학 등을 전공한 16명의 학자가 민족문화추진회에 참여해 10년에 걸려 번역했다. 한글 번역이후 영어 번역판을 준비해온  최병현 호남대교수가 10년 작업끝에 2010년 12월 영역했다. 영역본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출판했다.

관리 훈계서 목민심서에는 없는 조선 목민의 고단한 삶-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 '긍재풍속도첩' 중 '성하직구(盛夏織屨, 한 여름에 짚신을 삼다)'이다.지아비는 짚신을 삼고, 지어미는 젖먹이 아이의 울음에도 물레질하는 모습이다.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

5.목민심서가 들어있는 '여유당 전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정약용 5대손 정향진을 편저자로 비매품으로 초판(1934)이 발행됐다. 2012년 다산 탄신 250주년에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정본 여유당전서(총 37권)'를 펴냈다.앞서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으로 '여유당집'을 필사, 내각(內閣, 규장각의 별칭)에 보관하도록 했으나 유실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목민심서가 국민에게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소설과 드라마가 나왔기 때문이다. 1992년 신예 여류작가 황인경(1956~현재)이 소설 '목민심서(5권, 삼진기획)'를 냈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650만 부가량 팔렸다. 이 소설은 드라마 '목민심서(연출은 이제헌, 신재국, 이재혁, 총 82부작)'로도 만들어져 KBS 2TV에서 2000년 5월 1일~2000년 10월 12일까지 방영됐다. 한편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胡志明, Hồ Chí Minh, 1890~1969)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설은 가짜뉴스로 판명됐다.

안경 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수묵화가인 김호석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가 그린 표준 영정이다. 다산의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에 걸려 있다. 강진군 제공.

#.정약용(丁若鏞,1762~1836)=조선 최고의 문장가 중 한명이자 실학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책을 쓴 저술가.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본관은 압해(押海,신안군의 섬)이지만 압해가 나주목 관할이어서 나주 정씨로 불린다.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등이 있다.  

조선사회는 과거급제만이 신분상승의 길인 선비중심 사회여서 백성의 삶은 피폐할수밖에 없었다.궁중 화가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 그린 18세기 한국 정물화 8폭 병풍.선비의 책꽂이를 병풍에 담았다.경기도박물관 소장.

1.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말재(馬峴,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1730~1792)과 어머니 해남 윤씨 윤덕렬(尹德烈)의 딸 소온(小溫, 1728~1770,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8대 조상이 모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린 명문가였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정3품)를 역임한 문신이다. 
다산이 출생한 1762년은 격변의 시기였다. 아버지 왕(영조, 英祖,1694~1776)이 세자 아들(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1762, 나중에 장조로 추증)을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갇혀 죽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임오화변은 이후 100년 동안 조선 역사를 흔드는 사건으로 작용, 망국(亡國)의 계기가 됐다. 남편 사도세자와 사별한 정조(正祖,1752~1800) 이산(李祘)의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1735~1816)는 아들이 죽은 큰아버지 효장 세자(孝章世子,1719~1728, 나중에 진종, 眞宗으로 추증)에게 입적돼 왕실에서 아무 직책도 맡지 못했기 때문이다.아들이  왕이지만 대비가 되지 못해  아들 정조 사후 10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영조의 두 번째 부인, 1745~1805)가 친정 홍씨 집안을 도륙내는데 손하나 쓰지 못했다. 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정조 세력을 억눌렀고,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로 수많은 개혁 선비가 처형됐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 정신 쇠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경주김씨에 이어 풍양조씨, 안동김씨 득세로 이후 조선 멸망의 지름길로 작용한 세도 정치를 불렀다.

다산 정약용이 정조때 청나라서 들어온 책 기기도설을 활용해 개발한 거중기(擧重機) 그림. 도르래를 이용, 물체를 들어올리는 원리로 개발했다.

2.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두번째 부인 소생이다. 첫째 형은 아버지의 첫부인 의령남씨 남하덕(南夏德)의 딸(1729~1752)과 사이에서 낳은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이다. 둘째,셋쩨 형이 다산과 같은 어머니 해남윤씨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둘째, 신유박해때 아들과 순교한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이 세째다. 동생으로 생모 사후 들어온 계모 김씨의 아들 정약횡(丁若鐄, 1785~1829)이 있다.
아홉살때 어머니 윤씨가 사망, 큰 형수(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1754~1813) 손에 자랐다. 어린 시절(10살 이전)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를 냈지만 전하지 않는다. 삼미(三眉)는 눈섭이 세개라는 뜻으로 어린시절 천연두 흉터가 있어 동무들이 놀렸는데, 이를 호로 삼았다.

다산의 친필 간찰(편지) 중 일부. 덕양재(德養齋) 소장

2.1783년(정조 7) 세자 책봉 증광 생원시에 3등 7위로 합격했고, 이듬해인 1784년 이벽(李蘗, 1754~1785)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갖는다. 22세에는 성균관에 들어갔다. 1789년(정조 13) 27세 되던 해에 대과(식년시,式年試,3년마다 치르는 과거) 문과에 급제,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 요직을 맡는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가톨릭 교인으로 몰려 충청도 서산 해미로 유배갔다가 풀려났다. 30세가 되던 해인 1792년 아버지 정재원이 사망한다. 그해 수찬(修撰, 정7품)이 되면서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연구해 거중기와 활차녹로(滑車轆轤, 도르래)를 제작, 수원 화성 축조에 활용한다. 이는 거중기를 활용한 최초의 서양식 축성법으로 평가받는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徐龍輔, 1757~1824) 등의 비리를 고발, 파직시킨다. 이는 정약용에게 최대 악재로 작용한다. 서용보가 정조 사후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를 맏으며 부활,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오른다. 서용보는 노론 벽파의 거두에 올랐고 정약용의 해배를 반대, 전라도 강진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낸다.

정약용이 유배 당시인 1813년 갓 태어난 소실 남당네가 낳은 딸 홍임을 위해 그렸다는 매조도(梅鳥). 학계에서 진위 논란이 있는 작품이다. 개인소장.

3.다산은 천주교와 불가피하게 연결된다. 성호학파의 수장 이익의 종손이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장형 杖刑 사망),이고, 그의 여동생의 아들(외조카)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평택현감 역임,세례명 베드로)이다. 이승훈은 정재원(丁載遠)의 딸과 결혼, 정약전(丁若銓) · 약현(若鉉) · 약종(若鍾) · 약용(若鏞)과 처남매부가 됐다. 이승훈은 선교가 아닌 구도(求道)에 의해서 한국 최초로 세례 를 받은 천주교인이다. 
사돈은 이복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의 처남 이벽(李蘗, 1754~1785, 조선 후기 천주교 창설 주역), 외사촌은 윤지충(尹持忠, 1759~1791, 첫 천주교 순교자, 현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으로, 다산의 어머니 윤소온의 조카다. 한편 동생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아들인 조카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이복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1773~1848)의 남편 조카 사위 황사영(黃嗣永, 1775~1801)도 한국천주교사에서 유명인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그린 산수화. 출처=2017.3.13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합뉴스 재인용.

4.다산의 배우자는 무관 홍화보(洪和輔, 영남 우도 병마절도사 역임)의 딸 풍산 홍씨 홍혜완(洪惠婉,1761∼1838)이다. 1776년 결혼, 6남 3녀를 낳았지만 4남 2녀가 요절했다. 정성한 자녀는 아들 학연(丁學淵, 1783~1859), 아들 정학유(丁學游, 1786~1855), 딸 홍연(1793~?)이 있다. 
첩으로는 유배 생활을 함께 한 강진군 동면 석교리 출신의 과수댁 '남당네(정씨)'가 있다. 둘사이에는 홍임(紅任)이라는 딸도 있다. 남당네는 다산이 유배에서 풀리자 따라나섰지만 남양주 마현의 본처에게 내처졌다. 남당네는 강진 다산초당으로 하향, 홀로 딸을 키우며 매년 차를 만들어 마현(다산이 사는 곳)에 보냈다고 한다.

정약용이 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1813년 강진 유배지에서 부인이 보내온 붉은 비단치마 하피(霞帔)에 그린 매조도. 참새 두 마리는 딸과 사위를 상징한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5.다산의 긴 귀양살이는 1801년(순조 1) 일어난 천주교 말살 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辛酉邪獄)에서 시작된다. 신유박해는 정조 사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경주김씨 가문)와 정조 때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지낸 정조 반대파인 벽파의 영수 심환지(沈煥之, 1730~1802, 순조 초 영의정 역임) 등 '노론(老論) 벽파(僻波, 정조 정책 반대파)'가 천주교 탄압과 함께 정조의 친위세력인 시파(時派,정조의 의리탕평에 호응해 소론과 협력해 정국을 주도한 노론 협력파 )를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었다. 
이때 당대 제일의 천재 학자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장형 杖刑 사망),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권철신(權哲身, 1736~1801,암브로시오) 등이 천주교도란 이유로 죽었다. 이 때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背敎)를 택해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됐다. 유배지는 전라도 흑산도와  강진이었다.

서학(천주교)을 공부하는 사대부들. 연대 작가 불상. 출처 평화방송,평화신문

6.다산은 60주년 결혼 기념일(회혼일)이던 1836년 2월22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 다산이 영면한 2년 후 15세에 혼인의 연을 맺었던 부인 홍씨도 세상을 떠났다. 다산은 회혼을 기념하는 회혼시(回婚詩)를 남겼다. "六十風輪轉眼翩(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穠桃春色似新婚(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生離死別催人老(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戚短歡長感主恩(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此夜蘭詞聲更好(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木蘭辭는 작가 미상 중국 장편 서사시) /舊時霞帔墨猶痕(그 옛날 치마-조선시대 여인이들이 입은 붉은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剖而復合眞吾象(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留取雙瓢付子孫(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 경세유표(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가 주요 저서다. 

초의선사가 만든 백운첩(白雲帖)에 그려진 다산초당도(茶山圖).

7.다산은 1910년 8월 망국직전 대한제국에서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정3품)으로 추증(시호 문도공,文度公)됐다. 자녀들은 천주교인 집안에 대한 탄압과 다산의 18년 유배로 자녀들은 입신양명하지 못했다. 다만 손자들은 관계에 나아갔다. 진사에 합격하고 단양군수를 역임한 손자 정대림(丁大林), 참봉을 거처 삼척부사를 지낸 손자 정대무(丁大懋), 문과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원승을 지낸 증손자 정문섭(丁文燮) 등이 있다. 
한편 다산은 탄생 250주년인 2012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이 해에 프랑스 계몽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1712~1778)와 독일계 스위스인 소설가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도 함께 선정됐다. 

정약용(丁若鏞)은 백운동을 왕래하며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와 교유했다. 다산이 초의선사에게 그리를 것을 요청했다고 전하는 ‘백운동도(白雲洞圖)’.


8.다산은 실학의 대가이자 한국 철학사상사의 한 획을 그슨 인물이지만 결점이 많았다. 우선 방대한 저술을 남겼음에도 훈민정음(한글)을 쓰지 않았다. 다산보다 100년전 문장가인 '서포만필'과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많은 한글 저작물을 남겼고, 실학파의 일부 학자도 한글을 사용했다. 그런데 다산은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도 한문을 사용했다.
다산은 중국 한나라의 낙랑군 평양 설치(한사군) 등을 믿었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을 신봉했다. 조선은 신해년(1731년)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했다. 특히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한편 다산은 정조 암살설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로 심환지(沈煥之, 1730~1802,순조 초 영의정 역임)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신윤복이 그린 계변가화(溪邊街話). 빨래터를 지나는 도령과 여인 셋. 머리 따는 여인과 젊은이의 눈맞춤을 묘사했다.

9.다산이 속한 남인계열 상당수 가문은 노론벽파의 탄압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런 연유로 노론 벽파의 후손은 다산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한제국 문신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윤치호(尹致昊,1865~1945,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 세례교인) 는 노론 벽파 후손이지만 남인 정약용을 높게 평가했다. 윤치호는 일기(윤치호일기, 1935년 7월 17일)에서 "노론 벽파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도 정약용을 싫어하여 정약용의 책은 사거나 읽지도 않는다"고 썼다. 
일제 강점기 학자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선생(다산) 1인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밝고 예리한 것) 내지 전 조선 성쇠존망(盛衰存亡)에 대한 연구" 라고 평가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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