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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밤의 끝으로의 여행-친나치와 반유대로 저평가된 작가가 쓴 걸작의 첫 문단은 1인칭 화자의 설명과 입말로 시작한다 본문
우리의 삶은 하나의 여로/ 한겨울 그리고 캄캄한 밤에,/ 한가닥 빛도 없는 하늘에서/ 우리의 길을 찾아 헤매노라.(스위스 민병대의 노래),1793년
"그것은 다음과 같이 발단되었다. 나는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에게 말을 시킨 사람은 아르뛰르 가나뜨(Arthur Ganate)이다. 학생이고, 역시 의과대학생이며, 동료인 아르뛰르가. 우리는 끌리쉬 광장에서 만나곤 하였다. 그날은 점심 식사 후였다. 녀석이 날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나는 묵묵히 듣는다. '밖에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녀석의 말이다. 나는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 테라스는 반숙 계란이나 먹는 곳이야! 이쪽으로 와!' 그렇게 허두를 연다. 그때, 우리는 거리에 행인이 단 하나도 없음을 깨닫는다. 더위 때문이다. 마차도, 아무것도 없다. 몹시 추울 때 역시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녀석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빠리 사람들은 항상 빠쁜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슬렁 거리고 있을 뿐이야. 그 증거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울 때, 즉 어슬렁 거리기 좋지 않을 때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사실이야---.'"(루이 페르디낭 셀린 저, 이형식 역, 최측의농간, 2020)
1.첫 문장에 1인칭 화자가 이미 결론을 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앞뒤 문장 구성도 두서가 없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첫 문단으로서 의외의 구성이다. 그래서 읽는이에게 딱딱하게 다가오는 하드보일러 문체같은 느낌이다. 평상시에 스스럼없이 쓰는 말, 입말(구어)과 속어가 구어체로 나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설적 기교나 도입부에 흔히 보이는 거대 서사나 상징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두사람의 대화가 구어체로 자리잡고, 쓸모없는 위트 아닌 위트(빠리 사람들의 산책)도 거슬린다. 무엇을 말하려는 지 종잡을 수 없는 구어체 문장도 답답하다. 그런데 앞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지,어떻게 전개될지 찜찜한 궁금증이 생긴다. 이는 기존 작법을 파괴하는 저자가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소설이다. *본문에 나오는 끌리쉬(Clichy) 광장은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인근 지명이다.
2.루이-페르디낭 셀린의 '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 1932)'은 보기드물게 출간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명작이다. 구술 언어, 속어와 비어, 저속함과 음란함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이 그대로 문장으로 구성된데다, 반국가와 반식민, 반자본, 무정부주의 소설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저자가 1929년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파리 교외 끌리쉬(Clichy) 공공 병원 의사일 때 쓰기 시작, 1931년말 완성했다. 하지만 대형출판사 갈리마르 등에서 내지 못해 1930년 설립된 신생 출판사 에디션 드노엘(Éditions Denoël)에서 1932년 10월 나왔다. 책은 우여곡절 끝에 나왔지만 평단의 논란 속에 걸작으로 평가받으면서 여러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32년 콩쿠르상(Le prix Goncourt,1903년 설립된 세계3대 문학상) 유력 후보에 올랐으나 심사위원 간의 격렬한 논란끝에 2표 차로 수상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해 프랑스 4대문학상 중 하나인 르노도상(Prix Renaudot,1925년 제정)을 받았고, 서점에서 두달동안 5만부가 팔리는 등 인기를 끌었다. 이후 지속적 인기속에 37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20세기 고전 중 한권'이 됐다.
1999년 르몽드(Le Monde)의 '세기의 책(The Hundred Books of the Century) 100권중 6위에 올랐고, 2002년 노르웨이도서협회(Norwegian Book Circle)의 '역대 최고의 책' 100권에 포함됐다. 또 2003년 영국 평론가 로버트 맥크럼(Robert McCrum,1953~현재)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100선'에서 51위를 기록했다. 영어로는 'Journey to the End of the Night'로 번역된다.
3.소설 제목은 나폴레옹 프랑스군(공식 명칭 La Grande Armée, The Great Army, 대육군)의 러시아 침공때인 1812년 11월26~29일 벌어진 베레지나강(현 벨라루스 민스크 보블라스트 브릴리 마을 주변) 전투(베레지나 전투)에 참가한 스위스 장교 토마스 레글러(Thomas Legler)가 부른 '노래', '우리의 삶은 여행입니다/ 겨울과 밤에/ 우리는 길을 찾습니다/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 하늘에서---.'를 들은 후 영감을 얻어 따왔다. 이 시는 독일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배우이자 극자가, 탐험가인 칼 루트비히 기세케(Carl Ludwig Giesecke,1761~1833)의 시 '밤의 여행(Die Nachtreise,1792)'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저자는 이 노래를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서문처럼 썼다.
참고로 베레지나 전투는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던 나폴레옹 프랑스군과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Illarionovich Golenishchev-Kutuzov-Smolensky, 1745~1813) 사령관이 이끄는 러시아군 사이의 쫓고 쫓기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베레지나 강에 다리를 건설, 겨우 후퇴했으나 큰 손실을 입으면서 나폴레옹 몰락의 직접 원인이 됐다. 다만 전술적으로 프랑스군이 몰살 위기에서 강을 건너 '후퇴는 잘 했다'는 평을 받는다.
4.소설은 자전적 느낌이 매우 강하다. 읽을 수록 1인칭 화자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증언도 없고, 더구나 다큐멘터리 형식 소설도 아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주의 , 독일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부상(浮上) 등이 자전 연대기 처럼 쓰여졌지만 자전 소설이 아니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은 당시의 주류 소설 작법인 스토리텔링과 사실주의를 거부한 혁명적 이야기 전개로 프랑스 문단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문체와 통념을 무시한 소설 기법이 당대 작가와 평론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주의 문학의 종말을 앞당긴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소설로 평가받는다.
소설을 읽는 이나 평론가들 모두 마구잡이 입말(구어), 중구난방 문장, 비속어, 음담패설 등 익숙하지 않는 이야기 전개에 당황한다. 하지만 소설 자체로는 문체나 문장, 전쟁의 광기, 인간 세상의 부조리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많은 논란에도 불구, 기교와 형식을 제대로 갖춘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다. 더구나 저자가 친나치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혀 저평가됐다는 분석도 있다.
5.등장인물은 화자인 페르디난드 바르다무(Ferdinand Bardamu, 그의 짐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 화자의 두 배에 가까운 친구 레옹 로빈슨(Léon Robinson), 아프리카에 있는 동료 앨시드(Alcide), 파리에서 만난 미국인으로 맨해튼에서도 만난 롤라, 파리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무시네(Musyne), 디트로이트 에서 만난 미국인 몰리, 파리 교외에서 만난 어린 소년 베베르, 베베르의 이모 앙루이 가족(며느리, 남편, 시어머니) 등이 나온다.
또 바이오두렛(Bioduret) 연구소(파스퇴르 연구소의 페이스트리) 연구원이자 의사이자 소녀의 연인 파라핀, 정신과 의사 바리톤, 로빈슨(때때로 바르다무)의 연인 마들론(Madelon), 슬로바키아 간호사이자 바르다무의 연인 소피, 프로티스트 신부 등도 나온다.
6.줄거리는 주인공인 바르다무의 경험을 따라가고 있다. 의대생 바르다무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군대에 자원한 뒤 독일군과 교전중 부상 당한다. 종전 후1930년대 초반 성공한 의사가 된다. 하지만 신경 발작을 일으키고, 친구 로빈슨의 주선으로 중앙 아프리카 무역소로 간다. 하지만 회사가 직원과 원주민을 속이자 회사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다.
해안에 다다른 바르다무는 해안주민들에 의해 스페인 식민지로 가는데 그 곳에서 한 사제에 의해 노예선같은 미국행 갤리선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 미국 뉴욕에서 보내다가 일자리를 찾아 디트로이트로 가서 자동차 조립라인에소 일한다. 거기서 매춘부 몰리와 사라에 빠지지만 프랑스로 돌아갈 결심으 한다. 프랑스로 돌아와 의학공부를 마친 바르다무는 파리 교외 정신병원에서 의사로 일한다.
정신병원장인 바리톤 박사는 바르다무에게 영어 레슨을 받다가 갑자기 병원을 맡기고,영국으로 떠나버린다. 병원을 맡은 바르다무는 여러가지 사건에 휘말리지만 죽음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는 찾지못한다. 고통, 노년, 죽음만이 영원한 진실이라는 인간 삶의 비참함을 깨닫는다. 삶은 가난한 이들에게 비참하고, 부자에게는 헛되며, 진보와 행복에 대한 인간의 희망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7.소설의 주제는 증오와 전쟁의 어리석음, 생존, 인간성 등이다. 여기에 전쟁의 부조리와 전쟁과 개인, 이에 대한 냉혹한 비판도 소설의 핵심 요소다. 저자는 전쟁은 '평범한 개인을 생존에만 집중하는 동물로 만드는 무자비한 힘'이라고 지적한다.
1932년 한 비평가는 파리에서 나오는 문학뉴스(Les Nouvelles littéraires,1922년 창간, 문학 및 예술잡지)에 "특별한 언어, 자연과 인공의 정점"을 칭찬했다. 하지만 르 포풀레르 파리(Le Populaire de Paris)에 글을 쓴 한 비평가는 "단순한 저속함과 음란한 소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60년 동안 사라졌던 소설 원고는 2001년 파리 서점 피에르 베레스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경매에 니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선매권을 행사,구입했다.
8. 연극은 이탈리아계 배우 파브리스 루키니(Fabrice Luchini,1951~현재)가 1986년 르노 바로 극장에서 공연했다. 또 스위스 출신 프랑스,배우 장 프랑수아 발메(Jean-François Balmer,1946~현재)가 2012~2013년 테아트르 드 루브르(The Théâtre de l'Œuvre)에서공연했다.
영화에서 활용됐다.이탈리아에서 나온 영화로 2013년 칸영화제에서 초연한 라그랑데 벨레짜,La Grande bellezza, 그레이트 뷰티, The Great Beauty)는 '밤의 끝으로로의 여행' 대사로 시작한다. "여행은 유용하다.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나머지는 모두 실망과 피로다. 우리의 여행은 전적으로 상상의 산물이다. 그것이 여행의 강점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진다."
2016년에는 프랑스에서 드라마 '루이-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97분)으로 방영됐다. 감독은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후 사회학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의 아들인 에마누엘 브루디외(Emmanuel Bourdieu,1965~현재)가 맡았다. 부르디외는 "이런 공존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불안하게 하며 문제를 일으킵니다."라고 말했다. 또 "소설을 완전히 혁신한 작가로서, 그리고 그것을 혼자서 한 단순한 의사로서 그의 독특함이 있다. 그는 자신의 것을 발명했다."고 말했다.
#.루이-페르디낭 셀린(Louis-Ferdinand Céline,1894~1961)=20세기 불문학을 한단계 끌어올린 프랑스 소설가이자 의사. 천재적인 구어체 글쓰기의 대가이지만 반유대주의와 인간 혐오로 '나치 부역자' 로 지탄받은 인물. 친 나치로 저평가된 작가이기도 하다. 본명은 루이 페르디낭 데투슈(Louis-Ferdinand Destouches)이다.
1.노르망디 출신의 페르난도 데투슈(Fernand Destouches)와 부르고뉴 출신의 마르그리트 루이 셀린 길루(Marguerite-Louise-Céline Guilloux)의 외동아들로 1894년 파리 외곽 센 주 (파리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 현 오드센 )의 쿠르브부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험 회사의 중간 관리자, 어머니는 앤틱 레이스를 판매하는 부티크를 운영했다.
유년기에 파리와 아르장퇴유 등에서 공립학교 및 튈르리 가의 생조제프 학교를 다녔다.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 독일과 영국으로 각각 1년씩 보냈다. 독일에서는 니더작센의 디에폴츠(Diepholz)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금세공인의 세일즈맨 등 18세 전후에는 여러가지 직업을 가졌다. 이 때 독학하면서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유럽에 1차 세계대전의 불온한 공기가 가득차던 1912년 무렵 18세에 프랑스군에 자원 입대했다. 이 때부터 프랑스군 제12흉갑연대에 3년간 근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1914년 10월 25일 독일군의 맹렬한 포격을 받아 교전했고, 다른 부대원에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시도하다 부상을 입었다. 이런 공로로 그해 11월 군사 훈장을 받았다. 군인 신분이던 1915년 3월 프랑스 여권 사무소 런던 출장소에 파견됐다. 그해 9월 군에서 제대했다.
2. 파리에 와서는 1916년 산가-우방기 임업 회사의 직원으로 프랑스령 카메룬에 파견됐다. 농장과 무역소 감독자였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1917년 4월 아프리카를 떠나 파리로 돌아왔다. 1918년 파리에서 결핵 예방을 위한 선전 임무를 받고, 브루타뉴 전역을 다니며 예방홯동을 벌이다가 렌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아타나스 폴레 박사를 만났다. 이때부터 공부를 시작, 학사 학위를 1919년 받았다.
1920년 4월 렌 의대에 등록했고, 1924년 의학학위를 취듣했다. 그해 6월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보건부에 들어갔다. 1927년 국제연맹에서 나와 프랑 스파리 북서쪽 교외에 있는코뮌 클리시(Clichy,끌라쉬, 로레알 화장품 본사가 있는 곳)에 정착, '루이 데투슈(Louis Destouches) 박사-일반 의학, 아동 질병' 이라는 명판을 붙이고 의료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29년 진료소를 접은 후 몽마르트으로 이사했고,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1931년 말 완성)'을 썼다.
3.셀린은 여러 여성들과 만나 교유했다.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무용수이자 바텐더로 일하는 프랑스 여성 수잔 네부트(Suzanne Nebout,1892~1922, 30살 요절)와 1915년 결혼했지만, 영사관에 혼인 등록은 못했다.혼인신고가 안된 것이다. 그들은 1년후 헤어졌다.
1919년 8월 프랑스 렌 대학교 의과대학장의 딸인 이디스 폴레(Édith Amandine Marie Follet, 1899~1990,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와 결혼했다. 둘은 1920년 딸 콜렛(Colette Destouches-Turpin,1920~2011)을 낳았다. 하지만 둘은 1926년 6월 이혼했다.
셀린은 그해 몇 달 후 미국 여인 엘리자베스 크레이그(1933년 6월 미국 영구 귀국)를 만났고, 6년동안 함께 했다. 셀린은 "그녀가 없었다만 나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도 그녀에게 헌정했다.
1932년대 중반 때 오스트리아인이자 유대인 체조 강사이자 비엔나에 살고 있던 Cillie Pam AMBO,~1939)과 바람을 피웠다. 둘은 불규칙적으로 만나다가 1939년 헤어졌다. 1936년 41세의 셀린은 스물세살의 댄서 루셋 아만조르(Lucette Almanzor,1912~2019)를 만나 1943년 결혼했다. 공식적으로 세번째 부인이었다.루셋은 2001년 셀린과 결혼 생활을 묘사한 회고록을 냈고, 2019년 10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셀린은 1929년 낭트 출신의 엘리아네 타야르(Eliane Tayar,1904-1986, 배우이자 감독)를 만났고, 1935년 4월 피아니스트 루시안 델포르지(Lucienne Delforge,1909~1987)를 만나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를 함께 여행한다. 하지만 1936년 4월 헤어진다.
또 1932년에는 독일 학생 에리카 이르강( Erika IRRGANG, 1911~?), 당시 파리 최고의 무용수 카렌 마리 젠슨(Karen Marie,1905~?), 미국에서 마가렛 산드(Margaret SANDE, 1904~?), 아이렌 맥 브리드(Irène Mac BRIDE, 1908~?) 등 최소 4명의 무용수를 만나 관계한다.
4.셀린은 1930년대 초부터 친나치 무정부주의 등의 성향을 보였다. 1935년 영국의 비평가이자 시인 윌리엄 엠슨(Empson, 1906~1984)은 "셀린은 파시즘에 적합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썼다. 예언은 적중했다. 1938년에는 반유대주의와 프랑스-독일 동맹(친 나치)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저작물 '학살해 마땅한 것들(Bagatelles pour un massacre,1937)· '시체파(L'École des cadavres,1938)· '진퇴양난(Les Beaux Draps,1941) 등이 반유대친나치를 우회적으로 지지한 자작물로 분류된다. 그래도 셀린은 나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1939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병력수송선 의사로 일했고, 1940년에는 파리 북서쪽 사르트루빌의 공공의사로 근무했다.
셀린은 1941년 2월 유대인, 프리메이슨, 가톨릭 교회, 교육 시스템, 프랑스 군대를 비난하는 책을 냈고, 이듬해 10월에는 반유대주의 책을 냈다. 셀린은 친나치 행보를 했지만 독일군의 파리 점령시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지만 영국 BBC 방송은 셀린을 나치 협력 작가로 지목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셀린은 아내 루셋,고양이와 함께 베를린으로 간 후 덴마크로 넘어갔다. 이에 종전 후 프랑스 정부가 덴마크에 셀린의 인도를 요청, 체포됐다.덴마크에 수감 중이던 1947년 6월 덴마크를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프랑스 정부는 셀린을 궐석재판에 회부했고, 1951년 2월 1년 징역형과 5만 프랑의 벌금, 재산의 절반 몰수를 선고받았다. 다만 4월 사면받았고, 7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외곽의 벨레뷔(Bellevue)에서 보냈다.
5.파리 남서쪽 뫼동에 자리잡은 셀린은 출판사 갈리마르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모든 소설을 재발행했다. 1953년에 의사로 등록, 뫼동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열었다. 아내 루셋은 건물 꼭대기 층에 댄스 학교를 열었다. 이후 침묵속에 소설을 집필했다.1950년대부터 1독일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3부작 '성에서 성으로(D'un Château l'autre,1957 ), '북쪽(Nord, 1960), 1961년 6월 완성한 '리가둔( Rigodon, 사망 후인 1969년 출판)을 썼다.
셀린은 1961년 7월 1일 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 자택인근 바스 뫼동(Bas Meudon)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 셀린 전기를 쓴(1977,1981,1985년 출판) 프랑소와 지보(Francois Gibault)는 "셀린은 어떤 관례나 규범도 일단 의심했고 한 사회 질서가 내포하는 불의와 위선에 서슴지 않고 욕설을 퍼붓던 서민출신의 귀족이었다"고 말했다.
6.전 세계 많은 작가들이 셀린의 소설을 옹호하고, 문체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소설가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와 알메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같은 부조리 작가들은 물론,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Wilhelm Grass,1927~2015,대표작 양철북), 미국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 1891~1980,대표작 북회귀선) , 미국 작가이자 시각예술가 윌리엄 S. 버로스(William Seward Burroughs II , 1914~1997), 미국 작가로 풍자,유머소설로 유명한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 1922~2007) 등도 큰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계 미국 문학 평론가이자 수필가, 철학자 조지 슈타이너(Francis George Steiner,1929~2020)는 "20세기 서사의 관용어와 감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쓴 작가는 셀린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1871~1922)"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영화 감독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1922~2008)는 "셀린은 누보로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소설가 이자 201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패트릭 모디아노(Jean Patrick Modiano,1945~현재)는 스타일리스트로서 셀린을 존경했고, 데뷔 소설 '에투알 광장(La place de l'étoile,1968)'에 셀린 글쓰기를 패러디했다.
7.세계 문학계는 셀린을 20세기의 주요 프랑스 소설가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친나치-반유대주의, 인간혐오 등으로 논란이 많은 작가다. 셀린의 사망 50주년이던 2011년 프랑스 정부가 문화와 관련된 500명의 인물과 행사에 이름을 올리자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 결국 제외했다. 2011년 영국 신문 가디언은 "셀린은 위대한 작가이자 절대적인 악한"이라고 썼다. 프랑스 출판사 갈리마르(Gallimard)가 2017년 12월 셀린 저작물 중 반유대주의 책을 새롭게 출판을 추진할 때 광범위한 논쟁을 일으키며 결국 중단됐다.
셀린의 미공개 원고 모음(1944년 파리에서 베를린 도피때 두고간 원고)은 프랑스 유명 저널리스트 장피에르 티보다(Jean-Pierre Thibaudat)가 2020년 3월 낭테르 경찰에 인계, 2021년 8월 공개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학적 발견 중 하나이자 가장 혼란스러운 발견 중 하나"라고 썼다.
영국 저널리스트 올리버 캄(Oliver Kamm,1963~현재)은 2021년 9월 유대인 주간 신문 유대인 연대기(The Jewish Chronicle, 1841년 창간)에 기고한 글에서 "셀린은 잊혀져야 할 프랑스 문학 영웅"이라고 썼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