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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보한집-고려 무신정권 때 펴낸 한민족 최초 본격 문학 비평서의 첫 문단은 젊은 세대의 화려한 글쓰기를 비판한다 본문

서문
"글이란 바른 도리를 밟아나가는 문(文)이므로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기운을 돋우어 말을 멋대로 함으로써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려고 때로는 엄악하고 괴이한 것도 말하게 된다. 더구나 시를 짓는 것은 비유와 흥취와 풍류에 근본함에 있어서랴? 그로므로 반드시 기괴함에 의탁한 다음에야 그 기운이 씩씩하고 그 뜻이 깊으며 그 말이 뚜렷해진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닫게 하고, 깊고 미묘한 뜻을 드러내어 마침내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또 선비는 남의 글을 훔쳐 베끼거나 지나치게 꾸미는 것을 하지 않는다. 비록 시인에게는 다듬고 연마하는 네가지 격식이 있으나, 그 중에서 취하는 것은 시구를 다듬고 뜻을 연마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요즘의 후진들은 소리고르기와 글귀만 좋아하여 글자를 다듬는데는 반드시 새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 말이 산뜻하지 못하고, 대구(對句)를 다지는 데는 반드시 비슷한 것을 가지고 맞추려 하기 때문에 그 뜻이 졸렬해져서 크게 뛰어나고 의젓한 기품이 이로 말미암아 잃게 되었다.우리나라(고려)는 글로써 가르쳐 감화하여 어질고 뛰어난 인물들이 뒤따라나와 도덕이 잘 지켜지게 했다." (고려 명현집(高麗名賢集) 영인본(조선 중기 경주부윤 엄정구-1605~1670, 목판 인쇄 '기해본-1659' 번역본), 이상보 역, 종합출판범우, 2023)

1.첫 문장에 도에 어긋나는 말은 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을 설파한다. 글쓰기의 기본을 설명하면서 글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문일치'다. 물론 젊은 세대(후학들)의 글쓰기를 비판하는 말도 잊지 않는다. 좋은 말 좋은 글귀(미사여구)만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글의 기품을 잃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경고한다. 한문을 번역한 글로, 1000년 가까이 지난 옛글이지만 지금도 새겨볼만한 명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엄악은 원문에 없는 말이다. 번역자가 험하고 까탈스럽다는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원문은 뒷말과 이어 '험괴(險怪)'로 표기했다. *.흥취(興趣)는 북돋아 오르는 기운, *. 의탁은 依託, 혹은 依托으로 의지해 맡기다는 뜻이다. *.대구(對句)는 주로 한시에서 비슷한 '말의 높낮이(어조,語調)'나 '말의 기운(어세,語勢)'을 가진 단어(語句)를 짝지어 표현 효과를 내는 것을 말한다.

2.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1254)'은 고려 문학사의 핵이자 한문학사 최초 시문론이자 비평서다. 고려시대 시문에 대해 일일히 평가해 문학평론의 새 지평을 연 작품집이다. 특히 고려 시화, 잡록집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그래서 고려 3대 시화(詩話)집이자 3대 문학비평서에 동시에 이름을 올리는 명저로 꼽힌다. 3대 시화집은 고려 중기 무신정권(1170~1270) 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이규보(李奎報, 1169~1241)의 '동국이상국집(1241)'에서 발췌해 편집한 '백운소설(白雲小說, 시화및 잡록집)', 무신정권 때 비서감 우간의대부를 역임한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1220)', 최자의 '보한집'을 말한다. 3대 비평서는 원 간섭기인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시대 명신으로 문하시중을 지낸 이제현(李齊賢, 1288~1367)의 '역옹패설(櫟翁稗說, 1342)',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1220)', 최자의 '보한집'이다.
저자가 서문을 쓴 해인 고려 고종 41년(1254)에 '속파한집(續破閑集)'이라는 이름으로 3권으로 간행했다. 조선 초 쓴 고려사에도 '속파한집'으로 나온다. 그러나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우(崔瑀, 崔怡, 1168전후~1240)가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을 읽은 뒤 보충할 것을 요청해 썼다. 이 시화집은 조선시대 제9대 국왕 성종 이혈(李娎, 재위-1469~1494)의 국정 기록인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대사헌, 전라도 진휼사, 이조판서(정2품) 등을 역임한 문신 이극돈(李克墩,1435~1503)과 사헌부 지평(정5품)을 지낸 이종준(李宗準, 1458~1499) 등이 다른 시화와 함께 간행했다고 쓰여 있다. 이 때가 1492~1493년인데, 당시 간행본 역시 전하지 않는다. 현존 최고 판본은 조선 효종 10년(1659) 경주 부윤 엄정구(嚴鼎耉,1605~1670,이조좌랑, 한성부좌윤 역임)가 간행한 각본(刻本,목판 인쇄본)이다. 활자 판본은 일제 강점기인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낸 '파한집(破閑集)'에 합해져 있다. 한편 엄정구 간행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일본 동양문고, 중국 베이징 국가도서관, 미국 캘리포니아 UCLA 버클리 캠퍼스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3.최자의 '보한집'은 원제가 '속파한집(續破閑集)'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이어 쓴 시화집이라는 뜻이다.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 성립 초 혼란을 수습하고 최씨 무인독재정권(1196~1258)을 수립한 아버지 최충헌(崔忠獻,1149~1219, 고려 제1대 교정별감)이 사망하자 실권(고려 제2대 교정별감)을 장악, 문인과 시문학을 우대했던 최우(崔瑀, ?~1249, 나중에 崔怡로 개명)가 '파한집이 너무 소략하니 보완하라'고 지시해 대폭 보강했다. 이에 나중에 '보한집(補閑集)'으로 불렀다. '파한집'을 보강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파한집'보다 양도 두배나 되고 내용도 훨씬 다채롭다.
'보한집'은 '파한집'을 넘어서 시대를 초월한 한문학 지혜의 시화집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초 화가이자 농학자, 저술가로 유명한 강희맹(姜希孟,1423~1483, 강희안의 동생)과 조선 성종 때 학자로 조선 사림파의 태두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으로 김종딕 사후 사림파를 대표한 인물 조위(曺偉,1454~1503,성균관 대사성 역임)는 "우리나라 시문학 비평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불후의 저술"이라고 칭송했다.

4.최자의 '보한집'은 상중하 3권으로 나뉜다. 상권(上卷)은 시 이론이나 비평, 유명 시인들의 시 등을 비평한다. 저자는 좋은 시는 꾸밈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권(中卷)은 당대 문인들의 행적과 일화를 다룬다. 하권(下卷)은 상권과 중권에서 다루지 못한 여러 이야기을 모은 잡록(雜錄)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943)의 문장과 역대 명신들의 언행은 물론 누정(樓亭,누각과 정자), 역원(驛院) 등을 다룬 글이 52개나 된다. 또 선배 문인들의 에피소드, 시문 평론 46개, 모범 시구 작품 21개, 승려·기생 작품 49개, 저자의 시문론도 수록돼 있다. 특히 시문론에서는 당시 고려 문단의 북송의 시인이자 학자 소식(蘇軾, 1037~1101, 호는 동파-東坡) 작풍(글의 화려함과 음률 추구) 열기에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
특히 작문론은 당대 명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와 이규보(李奎報, 1169~1241)중 이규보를 따랐다. 이인로는 '어묘(語妙,말을 솜씨 있게 다루는 것)', 성률(聲律, 한시 음률)를 중시했고, 이규보(1169~1241)는 '신의(新意,새로운 뜻)', 의경(意境,뜻의 경계)를 보다 중시했다. 한마디로 이인로(1152~1220)는 미사여구의 화려한 문장을, 이규보(1169~1241)는 참신한 실사구시 문장을 추구했다.
실제 책 속에는 '속파한집'이라는 이름과 달리 자신을 추천하고 과거 시험 때 장원으로 뽑아준 이규보(李奎報, 1169~1241)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이론을 확장시키고 있는 점이 곳곳에 눈에 띈다. 최자는 '보한집'에서 문장은 기(氣)·골(骨)·의(意)·사(辭)·체(體)를 갖춰야 훌륭한 문장이 된다고 설파하는 데 이 역시 이규보(李奎報, 1169~1241)의 주장과 가깝다.
'보한집'은 시문을 상(上)·차(次)·병(病) 3등급으로 설정, 우열을 나눴다. 상에는 신기(新奇, 새롭고 기이함)를, 차에는 사어(辭語)와 성률(聲律, 한시 음률)의 수사적 기교가 우수한 것을, 병에는 둘다 갖추지 못해 병든 것, 거친 것을 들었다. 이처럼 시문을 나누어 비평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보한집'이 처음이다.

5.최자의 '보한집'은 고려 중기를 지배했던 시문학 풍조,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열풍의 병폐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당과 송나라에서 유행한 사륙변려문은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형식의 문장이다. 작의적이고 형식적, 수식이 강한 미사여구 문장이 특징으로 변려문·변문·사륙문(四六文) 등으로도 불린다. 변려에서 '변(騈)'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 '려(儷)'는 부부,함께라는 뜻을 갖고 있다.
변려문에서 '변려'는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당나라 문신이자 사상가 유종원(柳宗元, 773~816)의 '걸교문(乞巧文,기교있는 문장을 구걸하다)' 중 '변사려륙 금심수구(騈四儷六 錦心繡口,네필의 멍에에 여섯을 함께하니, 비단같은 마음에 입을 수(繡)를 놓았네)'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당송8대가는 당나라 문신 한유(韓愈, 768~824), 유종원(773~816), 송(북송)의 명신 구양수(毆陽修, 1007~1072,중국 산문의 대가), 송(북송)의 문인 소순(蘇洵,1006~1066), 송(북송)의 문장가 증공(曾鞏, 1019~1083), 송(북송)의 정치인이자 문필가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송(북송)의 시인이자 학자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1101, 소순 아들), 송(북송)의 문인 소철(蘇轍, 1039~1112, 소순 아들)을 말한다.
고려 중기 변려문의 대가는 대사성(교육 실질 책임자, 정3품)을 역임한 이공로(李公老, ?~1224)다. 이공로는 현존 가장 오래된 경기체가인 '한림별곡(翰林別曲)'에 '공로 사륙(公老 四六-이공로의 사륙변려문)'이라고 나올 정도로 변려문를 잘 썼다. 한림별곡은 무신정권 시기 문벌 계급의 현실 도피를 별곡체의 음률에 맞춰 노래한 가사다.
'보한집'에는 저자가 고려 중기 의종 때 한림원 학사를 지낸 시인 임종비(林宗庇, '국순전'의 저자 임춘-林椿,1149~1182의 큰아버지)와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의 문신이자 시인 정지상(鄭知常, ?~1135, 묘청의 난 연루자로 몰려 김부식이 처형)의 사륙변려문(四六文)를 흠모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성장해서는 사륙변려문을 적극 비판한다. 과거시험 보기에 급급해 미사여구 등 표현 기교에 힘쓰는 후학들의 글쓰기 풍조를 못마땅해 한 것이다.

6.'보한집'에는 오수개(獒樹犬) 설화(불이 난 것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한 개 이야기), 호승설화(虎僧說話,노승과 호랑이 소년이 등장하는데 죽은 뒤 승려로 환생하는 이야기), 강감찬설화(姜邯贊說話,여우 여인과 만나서 관계해 강감찬을 낳은 이야기) 등이 등장한다.
고려 최고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姜邯瓚, 948~1031, 문하시중 역임)에 대해서는 '보한집'에 또 나온다. 거란(契丹,요나라)으로부터 고려를 구해낸(귀주대첩) 명장 강감찬(948~1031)을 칭송하는 고려 8대 국왕 현종(顯宗, 992~1031, 태조 왕건의 손자)의 시 '강군(姜君)'이 그것이다.
현종의 '강군'이라는 시에는 "강군의 책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다 좌임인(左袵人)이 되었으리"라고 썼다. 현종은 강감찬(948~1031)을 임금처럼 높여서 '군(君)'을 썼다. 한편 중국 기준 좌임인은 북방 유목지대(고구려,거란,여진,몽골) 사람를 뜻한다. 농경지대는 '우임인(右袵人)'이다. 고려는 조상이 '좌임인'이었지만 고려 중기부터 성리학 질서가 보편화 하면서 중국과 같은 '우임인'으로 자부했다.한편 오늘날 항공사 이름(캐세이퍼시픽)에 남아 있는 캐세이는 거란을 지칭하는 키타이,카타이에서 나온 말이다. 원나라 성립 이전 중세 중국 중원 이북을 지배했던 거란은 서양에서 오랫동안 키타이(Khitai)나 키탄(Khitan), 카타이(Cathai,캐세이) 등으로 불렸다. 서양에서는 캐세이가 곧 중국을 의미했다.

7.최근들어 책명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한문학자인 안대회(1961~현재)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는2022년 4월 한 미디어와 인터뷰에서 "파한집과 보한집은 후대에 붙인 이름"이라며 "원래 저술 명칭은 '파한'과 '보한'이라고 주장했다. 후대에 '집'(集)이라는 문자를 붙였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1254년 최자가 완성한 '보한집'(補閑集)도 원래 이름은 '속파한'(續破閑)이나 '보한'(補閑)이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고려 원종 9년(1268)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장용(李藏用,1201∼1272)이 쓴 보한집 초간본 발문도 적시했다. 이 발문에는 "이인로가 평소 적바림해 둔 것을 정리해 적어 대강 평론하고 '파한'이라 이름했다는 문장이 있다"고 소개했다.

#.최자(崔滋, 1188~1260)=고려시대 비평문학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당대 최고의 비평가. 수상 격인 문하시중 역임. 해주최씨(海州崔氏)로 초명은 종유(宗裕),안(安)이다. 자는 수덕(樹德). 시호는 문청(文淸), 자호(自號)는 동산수(東山叟)다. 고려 성리학의 대가로 '해동공자(海東孔子)'로까지 불린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984~1068)의 6대손이다.

1.고려시대 대표 명문가인 해주최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실무는 없이 벼슬 이름만 있던 예빈승 동정(禮賓丞 同正)과 우복야(右僕射, 정2품)를 지낸 최민(崔敏)이고, 어머니는 임씨(任氏)다. 할아버지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최윤인(崔允仁,1112~1161), 증조할아버지는 예부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를 역임한 최약(崔瀹, 생몰 미상)이다. 명유(名儒)인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崔冲,984~1068)의 6대손이다.

2.고려 22대 국왕 강종(康宗, 1152~1213, 재위 1211~1213)때인 1212년 과거 급제해 상주(尙州) 사록(司錄,수령을 보좌하고 속읍의 순찰과 감독을 맡아 하던 정7품 지방관직)에 임명됐다. 직후 개경에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 국자감(國子監) 학유(學諭, 종9품)를 10년동안 지냈다.
하지만 관운이 없어 승진을 못하다가 몽골 침략(1231년 1차 침입)으로 위기를 맞았는데 최우(崔瑀, ?~1249)정권 때인 고종 20년(1233)에 실세 문인 최린(崔璘, ?~1256, 문하시랑평장사 역임)·국왕의 근시 및 숙위를 지낸 권술(權述, 생몰 미상)과 함께 금나라(1113~1234)로 사행을 간 것이 계기가 돼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당시 고려 무인정권은 몽골 재침략 가능성에 위기 의식을 느껴 1232년 수도를 송악(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몽골 견제를 위해 금나라와 연합하려고 했다. 하지만 몽골이 금나라마저 정복(1234)하면서 고려는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최자는 금나라 사행 직후인 마흔 다섯무렵 당시 문벌 권세가인 이규보(李奎報,1168~1242)의 주목을 받았다. 이규보가 최자의 시 '우미인초(虞美人草, 초나라 항우의 애첩 우미인이 자결한 곳에서 피어난 개양귀비풀-후에 양귀비)' 등을 읽고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극찬, 출세가도에 올랐다. 이규보는 최자를 최씨 무신정권 2대 집권자 최우(崔瑀, ?~1249, 후에 최이,崔怡)에게 천거했다.

3.최자는 최우(崔瑀, ?~1249) 사망으로 1249년 최씨 무신정권 제3대 집권자가 된 최항(崔沆, ?~1257)정권 때 승승장구했다. 최우 집권 말에 문병(文柄, 문장을 평정하거나 문사를 버리거나 취하는 문단 지도자, 과거 시험관 수장)으로 발탁됐고, 최항 집권기에 거의 모든 시험을 주관했다. 과거의 경우 충헌왕(忠憲王, 고종) 임자년(1252)과 무오년(1258),두 차례에 걸쳐 주관했다.
하지만 말년에 살얼음판을 걷는 관료생활을 했다.1257년 최우(崔瑀, ?~1249)의 아들 최항(崔沆, ?~1257)이 죽자 최의(崔誼, 1233~1258, 최항의 서자)가 실권을 장악, 전횡을 일삼으면서 무신정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때 왕정복고를 꿈 꾼 문신 유경(柳璥, 1211~1289, 대사성 역임)이 무신정권 타도를 위해 삼별초를 접촉, 무신 타도 거사를 도모했다.
1년 후인 1258년 유경(柳璥, 1211~1289, 대사성 역임)은 최씨 가문 노속(奴屬)출신 무신으로 야별초 중간간부 김준(金俊, ?~1268, 제9대 무신정권 집권자)과 연합, 무신정권 실권자 최의(崔誼, 1233~1258, 최항의 서자)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1196~1258)이 막을 내렸다. 당시 거사 성공 배경에는 김준이 최의(崔誼, 1233~1258, 최항의 서자)가 아꼈던 애첩 심경(心境, 생몰 미상)과 사통하면서 최의 측 내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4.고려 무신정권의 종말이 다가왔으나 1259년 1월 몽골군이 또 침입했다. 몽골의 9차 침입(1차는 1231년)이었다. 최자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서 노구(老軀, 72세)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다가 이듬해(1260) 영면했다. 향년 73세.
저서로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10권'이 있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속파한집(續破閑集)-보한집(補閑集) 3권'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말 문인 조운흘(趙云仡,1332~1404,관찰사 역임)이 편집한 '삼한시 귀감(三韓詩龜鑑)'에 시 1편이, 조선 초 문장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1425~1488)의 '동문선(東文選)'에 부(賦) 2편, 시 10편, 기타 작품이 있다.
아들 최유후(崔有候, 생몰 미상)는 고종 때인 1254년 과거 급제해 봉익대부(奉翊大夫, 종2품 문관)에 올랐고, 둘째 아들 최유배(崔有坏)는 동경(경주)유수, 판관(留守判官,정4품~정6품 관직)을 지냈다. 셋째 아들 최유엄(崔有渰, 1239~1331)은 첨의정승(僉議政丞,정1품), 판선부사(判選府事,종1품),문하시중에 이르렀고, 대령부원군(大寧府院君)에 봉해졌다.

5.최자 영면 10년 후 고려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완전한 왕정복고(1270)가 이뤄졌다. 무신정권의 종말은 의외로 빨리 왔다.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김준(金俊, ?~1268, 제9대 무신정권 집권자,재위 1258~1268)이 측근이자 양아들이었던 임연(林衍, 1215~1270)에게 1268년 피살됐고, 2년 후 임연이 죽자 차남 임유무(林惟茂, 1248~1270)가 대를 이었다. 그런데 임유무는 그해에 무신 송송례(宋松禮, 1207~1289), 홍규(洪奎, 1242~1316, 초명은 洪文系) 등에게 피살됐다.
이같은 무신정권의 살륙전이 벌어진 배경에는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유경(柳璥, 1211~1289)이 있었다. 유경은 최우가 죽자 실권자 최항(崔沆, ?~1257, 최우의 아들 제3대 집권자)의 신임을 얻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257년 최항의 서자 최의(崔竩, 1233~1258)가 뒤를 이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민심을 잃자 삼별초의 핵심 김준(金俊, ?~1268, 제9대 무신정권 집권자)과 모의, 최의를 죽이고 1258년 최씨 무신정권 62년을 끝냈다.그로부터 12년후 100년을 이어온 고려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