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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불온한 철학사전-계몽사상의 神, 불온한 권력과 종교에 폭탄을 던지다. 본문
“간통을 뜻하는 프랑스어 아뒬테르(adultère)는 그리스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에서 간통은 ‘모이케이아’이며, 거기서 나온 라틴어 ‘모에쿠스’역시 프랑스어와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고 고대 시리아에서 온 것도, 시리아에서 파생된 히브리어에서 온것도 아니다. 히브리어로 간통은 ‘나아프’다. 아뒬테르에 해당하는 라틴어 아둘테라티오(adultèratio)는 변조, 위조, 다른 것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문서 위조, 모조 열쇠, 위조 계약, 위조 수결(手決) 등을 뜻했다. 그리고 남의 침대에 몰래 올라가는 사람을 다른 사람의 자물쇠에 모조 열쇠를 밀어넣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둘테르(adulter)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사이에-출판기획 및 번역 네트워크. 옮김, 민음사,2015)
1.계몽서 답게 처음부터 무거운 주제를 정면에 내세웠지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제어인 ‘간통’의 어원부터 설명하고 있다. 문체적으로도 길게 늘어진다거나 산만하지 않고 깔끔하다. 직설 화법으로 간결하게 마음 가는 대로 쓴 에세이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를 설득하기보다 객관적으로 나열,읽는이가 판단하도록 하는 문장 구성이다. 철학산문이 아니라 일상의 설명문체의 도입부다.
2.볼테르의 ‘불온한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1764)’은 개념사전 형태를 띤 계몽서다.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나온 계몽서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톨레랑스(Tolerance,관용 용납 이해)
전통과 비판 정신, 권력에 저항하는 에세이의 원류이기도 하다. 100여 개에 가까운 주제어를 선정, 에세이 형식으로 쉽게 쓴 것이 특징이다. 250년이나 앞선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원제는 휴대용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이다.
3.이 책에 나오는 주제 단어는 관념적인 것부터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것들이다. 간통, 무신론, 평등, 관용, 경박함, 우정 등 흔한 주제를 도마위에 놓고 실감나게 설명한다.
또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1596~1650)와 영국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3~1727) 등 당대 앞선 사상가들도 소개하고 있다. 물론 각 주제어에 대해 설명이나 소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와 법 제도, 질서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볼테르(Voltaire.1694~1778)=프랑스 철학자이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Voltaire는 필명이다.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생전에 3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 작가로 당대 유럽의 셀럽이었다. 필명(pen names)을 178개나 사용했다.
1.명문가에서 어났다.파리에서 재무관, 공증인이었던 변호사 아버지 프랑수아 아로에(1649~1722)와 마르게리트 도마르(1660~1701)사이에서 출생했다.
파리의 루이르그랑(Collège Louis-le-Grand)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수학(1704~1711)했고, 노르망디(Normandy) 캉(Caen)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프랑스 대사 샤토뉴프(Châteauneuf) 후작의 비서를 지냈다.
2.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사위로 어린 루이15세(루이14세의 증손자)의 섭정을 맡은 오를레앙 공(애첩을 100명가량 뒀다고 함) 비방죄로 바스티유 감옥을 경험했다. 그런데 수감은 전화위복, 감옥에서 집필한 희곡이 히트해 명성을 얻는다.
볼테르는 훗날 감옥에 갔던 것에 대해 ‘엠 바스티유(em bastiller, 바스티유 감옥에 쳐넣어졌다)’ 라고 썼다.
3.볼테르는 1726년 대전환의 깨달음을 얻는다. 평민인 볼테르가 한 귀족에게 교만하게 굴다가 하인들에게 몰매를 맞은 것이다. 그래도 기세등등했던 볼테르가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하자 ‘불경죄’로 감옥에 보내졌다.
이 때 대오각성(大悟覺醒),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 극복을 위한 고난의 장정을 시작한다. 출옥 후 또다시 부조리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다른나라로 망명을 택한 것이다.
5.영국(당시 프랑스보다 선진국)으로 망명한 볼테르는 런던에서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3~1727), 소설가 조나단 스위프트(1677~1745,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 등과 교류하고 파리로 돌아와 구체제를 맹비판하는 ‘철학서간(1734)’이라는 책을 낸다. 이 책은 파리대 교수이자 평론가 구스타프 랑송(Gustave Lanson,1857~1934)의 ‘구체제(앙시앵 레짐)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이라는 평가에서 보듯이 프랑스 왕정과 귀족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부는 금서(禁書)로 지정하고 볼테르 체포에 나선다. 이에 볼테르는 다시 쫓기듯 시골에 숨어 지내는 등 은둔과 방랑생활을 한다.
볼테르는 숭어 지내면서도 프랑스 콩트의 정수로 대작(大作, magnum opus)으로 평가받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 약칭 캉디드,1759)’ 와 많은 편지, 평론, 계몽서 등을 써서 프랑스 지배체제와 제도, 기득권사상가들, 탁상공론 철학을 비판하고 힐난한다.캉디드(Candide)는 천진난만,순진,순박,어리석다는 뜻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1789) 발발 전 황제 루이 15세(1710~1774)는 볼테르를 총애,왕립 학술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도 선출한다. 이후 볼테르는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 등이 시작한‘백과전서’의 편찬에도 관여한다.
6.볼테르의 연인은 많았다. 네덜란드의 프랑스 대사 비서때 헤이그에서 캐서린 올림페 뒤노이어(Catherine Olympe Dunoyer, 프랑스 출신 개신교 난민)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파리로 돌아온다.
1722년 8월 브뤼셀을 갈 때는 미망인 마리 마르게리트 드 루펠몽드(Marie-Marguerite de Rupelmonde)와 함께 한다.
1733년에는 수학자(數學者)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인 유부녀 에밀리 드 샤틀렛(Émilie du Châtelet, 1706~1749,플로랑 클로드의 부인)과 만나 오랜 시간 함께 한다. 에밀리는 볼테르의 뮤즈이기도 하다. 볼테르는 이 여인의 시골 별장에서 10년 동안 머문다. 또다른 여인으로 조카이자 정부(情婦) 드니부인도 있고, 마리 루이즈 미뇨(Marie Louise Mignot,1744~1778)는 볼테르가 죽을 때 옆에 있는다.
7.생전에 볼테르는 국제적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이룬 작가 중 한명이다. 볼테르는 1778년5월30일 죽기 한달여 전 파리의 라 로주 드 뇌프 쇠르에 들어가 프리메이슨(Freemasonry, 석공,Mason 길드에서 시작된 세계 최대 비밀결사체)이 됐다.종교에 비판적이었던 볼테르가 가톨릭계의 반대로 종교인 묘지에 못 가자 가족들이 심장과 뇌는 방부 처리하고, 극비리에 샹파뉴의 첼리에르 수도원에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 후인 1791년7월11일 당시 집권당 국민의회는 볼테르를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forerunner of the French Revolution)’로 추앙, 파리5구 영웅들의 묘인 팡테옹(Panthéon)에 안치했다. 이장할 때는 약 100만 명의 인파가 행렬에 참석해 추모했다고 한다.이후 프랑스인들은 ’볼테르의 나라 프랑스’를 즐겨 썼다.
8.볼테르는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옹호했다. 이런 볼테르의 사상은 유럽의 많은 지식인층에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 독일에는 종교개혁,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는 말도 유행했다.
후대의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는 “볼테르는 18세기 전체를 특징짓는 인물”이라고 격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재상이자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는 “현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인, 역대 최고의 문학인”으로 평가했다.프랑스 철학자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는 “볼테르의 영향력은 먼 미래로 확장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Yekaterina II Velikaya,1729~1796)는 황후가 되기 전 16년 동안 볼테르 관련 책을 섭렵했고, 이후에도 볼테르가 죽는 1763년까지 서신 교환을 했다.러시아 문학평론가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1811~1848)는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Yanovsky,1809~1852)에게 보낸 편지에 “볼테르가 비웃음으로 유럽의 광신과 무지의 불길을 짓밟았다”고 썼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1986)는 “볼테르를 존경하지 않는 것은 많은 형태의 어리석음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는 “프랑스가 루소 대신 볼테르가 만든 길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9.비판자들도 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78)와 볼테르가 프랑스를 파괴했다”고 한탄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작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은 “볼테르는 독실한 선견자나 심지어 비평가의 눈으로 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반 가톨릭적인 시각을 통해 역사를 읽는다.”고 말했다.
10.주요저서는 ‘오이디푸스Œdipe,1718)’, ‘철학 편지(Lettres philosophiques,1733)’, ‘자디그(Zadig ou la Destinée,1747)’, ‘루이 14세 시대(Le Siècle de Louis XIV,1751)’,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1759)’,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1763)’,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1764)’, ‘루이 15세 시대(Précis du siècle de Louis XV,1768) 등이 있다.
10.일부 프랑스인들은 볼테르를 너무 좋아해 ‘France’ 대신 ‘볼테르의 나라(le pays de Voltaire)’라고 한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볼테르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헌정했다.
볼테르가 마지막에 오래 살았던 페르니 마을은 1878년 ‘페르니-볼테르(Ferney-Voltaire)’로 명명됐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도서관에는 ‘Voltaire's library’가 있다.
볼테르의 명언 하나를 싣는다.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On parle toujours mal quand on n'a rien à dire)” 영어로는 ‘One always speaks badly when one has nothing to say’이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