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사씨남정기-장희빈의 국정혼란을 빗댄 한글소설은 덕(德)과 간신을 대비하면서 첫 문단을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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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장희빈의 국정혼란을 빗댄 한글소설은 덕(德)과 간신을 대비하면서 첫 문단을 연다.

지성인간 2023. 11. 30.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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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숙녀는 관음찬을 짓고 매파는 좋은 인연을 이어주다. “유연수(劉延壽)는 자(字)가 산경(山卿)으로 북경 사람이다. 그는 성의백(誠意伯) 유기(劉基,1311~1375, 명나라 개국공신)의 후예로 성의백이 벼슬하여 북경에 거주한 뒤부터 그 자손들은 북경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연수의 아버지 유희(劉熙)는 세종(世宗,명나라 11대 황제)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는데, 문장과 덕망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 무렵 태학사 엄숭(嚴崇, 명나라 중엽 간신)이 정권을 농단했다. 유희는 엄숭과 뜻이 맞지 않아 병을 핑계로 간절하게 사직을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천자가 상서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고 특별히 태자소사(太子少師, 태자를 보호하고인도하는 벼슬)를 제수하여 어진 사람 공경하는 뜻을 보였다. 소사는 청현요직(淸顯要職)이 아니어서 비록 조정의 논의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사대부들은 모두 그의 덕을 숭상하여 우러러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김만중 저, 류준경 역, 문학동네, 2014)

2007년 보리에서 나온 '사씨남정기' 표지 부분.가채와 옷고름으로 본처와 첩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1.옛 소설 문체 그대로 단아한 산문을 쓰듯이 첫 문단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치만 한글에서 한문, 다시 한글로 번역한 문어체의 한문투는 못내 아쉽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길고 지루한 가문의 영광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은 고소설의 흔한  도입부다.개국공신, 문장과 덕망, 사직 상소, 청현요직 등은 앞으로 전개할 소설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첫 문단부터 이야기가 짜임새 있게 전개되면서 독자에게 앞으로 나올 이야기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소제목에 나오는 *.요조숙녀(窈窕淑女)는 품위있는 정숙한 여인, *.관음찬(觀音讚)은 찬불(讚佛)노래다. 본문의 *예부상서는 의례를 맡은 예부의 으뜸 벼슬 *.청현요직(淸顯要職)은 청환(淸宦,직급은 높지 않으나 요직)과 현직(顯職,높고 중요한 직위) 뜻으로 중요 직책을 말한다. *.유기(劉基, 1311~1371)는 원 명 교체기의 관료로 명나라 3대 개국공신 중 한명. *.엄숭(嚴嵩,1480~1567)은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1507~1567, 제11대 세종 숙황제) 때의 간신이다.

한문 필사본 사씨남정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photo by daum.net 재인용.

2.김만중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1689~1692년 추정)’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정 소설이자 통속 역사소설이다. 작자와 창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조선시대 서사문학의 본류다.
제목의 뜻은 '사씨가 남쪽으로 쫓겨나게 된 사연에 대한 기록'이다. 제목 자체가 누군가의 잘못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을 가진 '풍간(諷諫, 풍자+諫,풍자를 통해 옳은 말을 해주는) 소설'이다.그래서 단순하게 읽으면 본처와 첩(처첩,妻妾) 간의 갈등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당대 임금 숙종과 장희빈 문제를 풍자하고 있다. 숙종은 정비 인현황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일시적으로 중전에 앉혔다.
원작(原作)의 표기 문자(한글 혹은 한문)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글로 쓰였다는 게 통설이다(한글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국문과 한문, 국한문 혼용 등으로 된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 등과  분량에 따라 4책본·3책본·2책본·1책본 등이 있다. 국문본은 목판본(경판)으로 1851년 간행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활자본이 있고, 한문본은  작가의 종손자(형의 손자)이자 갑술환국( 甲戌換局, 1694년 갑술년의 국면 전환,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이 재집권한 사건)의 주인공 김춘택(金春澤,1670~1717)의 한역본이 있다. 원제는 ‘남정기(南征記)’이며, 남정기, ‘사씨전(謝氏傳)’ 등으로도 불린다. 국문 필사본 이본만 135편, 한문 필사본이 90편, 방각본(坊刻本,상인들에 의해 판각해 나온 책)을 찍은 활자본  26편 등  251편이나 된다. 이는 고소설 중 조성기(趙聖期, 숙종때의 유학자,1638~1689)의 ‘창선감의록(彰(倡)善感義錄)’ 다음으로 이본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본은 많지만  소설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조선 중후기의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던 셈이다.
20세기 들어서는 1914년 영풍서관(永豊書館)판, 1917년 박문서관(博文書館)판(활판본)이 있다.현대에 와서는 1955년 김민수(金敏洙, 전 고려대 교수)가 교주(校註,문장을 교정(校訂)해 주석(註釋)을 더하는 것)를 달아 월간지 ‘현대문학’에 소개했다.

SBS가 2013년 조선 숙종과 장희빈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장옥정,사랑에 살다' 스틸컷. 옥정은 희빈 장씨의 이름이다. 출처=SBS

3.사씨남정기의 무대는 중국이지만 조선에서 일어난 궁중 이야기가 그대로 투사된 소설이다. 액면그대로 읽으면 명나라 가정(嘉靖,제11대 황제 세종 숙황제  연호) 연간, 금릉 순천부(順天府, 현 베이징 일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중국 유학자인 유연수 집안의 본처(사정옥)와 첩(교채란)간 싸움을 권선징악으로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肅宗, 1661~1720,즉위 1674년)은 유연수, 사 씨는 인현 왕후(仁顯王后 閔氏, 1667~1701, 왕비 1681~1689,1694~1701), 교 씨는 장희빈(張禧嬪, 1659~1701, 왕비 1690~1694, 본명 장옥정)으로 대입하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숙종이 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내쫓고 희빈 장씨(禧嬪 張氏)를 왕비로 맞아들인 사건과 똑 같은 것이다.
당대 조선 궁정을 중국의 공신 집안 이야기로 빗대 축첩(畜妾) 제도의 불합리함과 사대부의 부도덕성을 비판 한 셈이다. 그런데 작가 사망 2년 후 소설이 현실화됐다. 희빈 장씨가 폐위되며 인현황후가 중전의 자리로 복위한 것이다.
이 소설은 특히 내용과 문체에서 사대부 취향의 성리학 문화와 교묘히 접합점을 찾았다. 인과응보(因果應報), 권선징악(勸善懲惡)을 그대로 드러내 소설은 허황되고 난잡하다는 유학자들의 비판도 피해갔다. 국문본으로 나왔지만 나중에 한문본도 있어 독자층을 두텁게 했다. 당시에는 소설을 한문으로는 패설(稗說,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고담(古談, 옛 이야기) 등으로 일컬었으며, 국문 소설은 언패(諺稗,한글로 쓴 민간의 잡다한 글, 언문패설)·언서고담(諺書古談, 한글로 쓴 옛 이야기책) 등으로 비하했다.

활자로 찍은 사씨남정기 한글본 첫 장.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4.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으로 무능한 양반을 대표하는 인물인 한림학사 유연수(劉延壽), 유연수의 본처(제1 부인) 사정옥(謝貞玉), 유연수의 첩(제2부인) 교채란(喬彩鸞), 교채란의 통정남(通情男)으로 악인의 전형 동청(董淸), 동청의 친구로 사씨를 곤경에 빠뜨리는 냉진(冷振) 등이 주요인물로 나온다.
유연수와 사씨의 아들 유인아, 유연수와 교씨의 아들 유장주, 유연수와 교씨의 둘째 아들 유봉추,  두 부인, 여승 묘혜의 질녀 임추영((林秋英), 주술사 십랑, 교씨와 동청의 악행을 실행으로 옮기는 행동대장 납매, 교 씨의 시녀인 납매의 동생 사매, 유씨 집안의 시녀 중 하나인 춘방 등이 나온다.

5.줄거리는 공신 집안 가문의 축첩문제와 처첩(妻妾) 갈등이 결국 천우신조(天佑神助)에 의해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문벌이지만 무능한 유연수 가문의 본처 사씨가 늦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자 교씨를 첩으로 들인다. 첩 교씨가 아들을 낳았는데 나중에 본처 사씨도 아들을 낳는다.
이에 자신과 아들의 미래에 불안을 느낀 첩 교씨는 통정남 동청과 동청의 친구 냉진 등과 짜고 사씨에게 부정(不貞)의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동청 등이 모함해 본처를 내쫓고 첩을 정실로 삼게 한다.
쫒겨난 사씨는 숱한 시련을 겪은 뒤 암자에 머물며 훗날을 도모한다. 유연수는 승상 엄숭과 갈등을 빚고, 집에 머물면서 본처의 억울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를 눈치챈 통정남 동청은 유연수를 무고(誣告)해 유배를 가게 한다.
첩 교씨는 동청을 따라 유씨 집안에서 떠나고 특사로 풀려난 유연수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본처 사씨와 다시 만난다. 조정에서는 왕이 엄숭 일파를 내치고 유연수 일파를 등용하는 한편 동청을 잡아들여 처형한다. 이에 첩 교씨는 동청의 친구 냉진을 따라간다. 유연수는 사씨를 정실로 복위시키고 교씨를 잡아 처형한다.

6.옛 소설답게 인위적 요소가 많고, 사건 전개에 천우신조(天佑神助)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주를 이룬다. 특히 소설 곳곳에서 하늘의 우연한 도움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천우신조가 많다.
유연수와 엄숭, 사씨와 교씨, 동청, 냉진 등을 통해 선을 권장하고 악을 내쫓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하고 있다.
소설은 또 교조적 성리학 도그마(절대 진리)에 매몰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가 등장한다. 시부모를 공경하는 유교, 관음보살을 찬미하는 불교, 무속 힘을 빌리는 행위 등이다. 이밖에 가부장제, 축첩 제도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사씨남정기 한글본 필사본.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7.이 소설 이후 처첩 싸움, 계모와 전처 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 잇달아 나왔다. ‘월영낭자전(月英娘子傳, 조선 중기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조생원전(趙生員傳, 작자·연대 미상) ’ 등은 물론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작자·연대 미상)’, ‘콩쥐팥쥐전(조선 후기 작가 미상)’, ‘김인향전(金仁香傳, 조선 말기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는 한글 소설)’ 등이 그것이다.

8.후대 학자들의 주목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조선 후기 실학파인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손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1788~1856, 규장각 검서관)은 1800년대 초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백과사전으로 60권 60책이나 1~4권은 낙질, 서울대 규장각 5~60권 소장)’에서 ‘사씨남정기’가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정비로 세운 숙종의 처사를 되돌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분석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포의 종손자(형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은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60년 간행한 시문집인 ‘북헌집(北軒集, 손자 김두추(金斗秋) 간행)’에서 ‘사씨남정기’를 격찬했다.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은 '유한림영사부인고사당가(劉翰林迎謝夫人告祠堂歌)'에서 '사씨남정기'의 마지막 부분 '교 씨가 창부가 되었다가 처형당하고 동청은 목이 베이는 것'을 언급하면서 "신선의 손톱이 등을 긁는 것 같도다(如仙爪爬背痒)"라고 적었다.
이양오(李養吾, 1737~1811)는 1786년에 쓴 ‘사씨남정기후서(謝氏南征記後敍)’에서 “사씨남정기는 성현의 문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감히 그 그릇된 곳을 변명하고 고치기만 한다면, 곧 그 일을 논단한 것이 세상의 권계로 삼을 수 있으니 권선징악의 도리에 있어서 또한 조그마한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한편 일제시대때는 딱지본 소설( 1910년대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소설 )로 나오기도 했다.

9.사씨남정기는 서포의 다른 저서 구운몽(九雲夢,1687)과 함께 우리나라 중,고교 시험의 단골 소재다. 수능 출제 위원들이 좋아하는(?) 고소설이다. 다수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서 고전소설 지문으로 처음 출제됐고,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역에서 시험 문제로 나왔다. 2022년 사관학교 1차 선발시험 문제로도 출제됐다.
숙종시대 장희빈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24부작)’에서는 ‘사씨남정기’가 나라 전체에 유포된 것으로 나온다.

서포 김만중 초상화. 서포의 조카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8~1716)가 그린 것이다.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김만중(金萬重,1637(인조15)∼1692(숙종 18)=조선시대 학자이자 소설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서포(西浦)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다. 한글 소설의 황금시대를 연 천재 형 인물이다. 홍문관 대제학 등 요직을 지냈지만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1.병자호란( 胡亂, 엄밀히 말하면 정축호란,丁丑胡亂,1636년12월28~1637년2월24일 벌어진 조선-청나라 전쟁)으로 피난 가던 와중에 21살의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 尹氏, 1617~1689)에게서 유복자(遺腹子, 아버지없이 배에 남겨진 아이라는 뜻)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익겸(1615~1637, 나중에 영의정 추증)은 인조 15년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했다. 당시 김익겸은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청음 김상헌( (金尙憲,1570~1952, 병자호란 척화파)의 형이자 우의정을 지낸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將, 빈궁과 원손 수행) 김상용(金尙容,1561~1637, 나중에 영의정 추증)과 화약 자폭했다.
김익겸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해동 18현의 한사람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노론 영수 송시열 스승)의 손자다. 서포의 할아버지 김반(金槃, 1580~1640)의 형이 신독재 김집(金集, 1574~ 1656)이다.
어머니도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1533~1601)의 4대 손이자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윤방(尹昉,1563~1640,윤두수 아들)의 증손녀다. 할아버지 해숭위 윤신지(尹新之,1582~1657)는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1583~1638)의 남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윤지(尹墀,1600~1644)다.

서포 김만중의 한문 글씨.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당대 최고 명문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서포였지만 유복자 (遺腹子)로 태어나 어려운 유년을 보냈다. 어머니 윤씨는 한문 실력까지 갖춘 보기 드문 재원(才媛)으로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시(唐詩)’ 등을 아비없는 두 아들(김만기, 김만중)에게 직접 가르쳤다. 형 김만기(金萬基, 1633~1687)는 나중에 숙종의 장인(인경왕후의 아버지, 광성부원군)이 된다.
어머니의 교육으로 1649년 12세에 이미 과문(科文,과거시험 문체)을 썼고, 1651년 14살 때 향시(鄕試) 합격했다. 또 1653년 열여섯에 사마시에 1등 합격(진사,進士)했다. 다만 정시 문과는 그로부터 12년 후인 1665년(현종 6년)에 장원급제했다.

3.정시 문과 장원 급제자(1665년,현종 6년)로 1671년 암행어사를 지냈다.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1680년 사간원 대사간이 됐다. 그해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됐다.
숙종 9년인 1683년 공조판서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형조 참의 조지겸(趙持謙, 1639~1685, 나중에 경상도관찰사) 등의 탄핵으로 전직됐다가 2년 후인 1685년 복직해 홍문관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1687년 무렵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할 때 면전에서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1632∼1693)을 두고 “조사석이 정승이 된 것은 희빈 장씨 때문은 아니냐"고 숙종에게 따지다가 바로 파직, 유배됐다.

4.부인은 이은상(李殷相)의 딸 연안 이씨다. 슬하에 아들 김진화(金鎭華, 1655~ ?)와 딸 김수혜(金秀惠, 1657~ ?)를 뒀다. 사위는 영의정을 지낸 전주 이씨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다.
이이명은 숙종(1661~1720)의 총애를 받아 후계 문제를 놓고 독대를 많이 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숙종 사망(1720) 후인 1722년 장희빈의 아들 경종(景宗,1688~1724) 재위(1720~1724) 시 집권한 소론의 집요한 상소에 의해 사사(賜死, 임금이 죄인에게 독약을 내려 죽게하는 것) 됐다.

경남 남해에 있는 남해유배문학관의 서포 김만중 자료실. 남해유배문학관 제공

5.서포는 당시 ‘언문(한글)’을 나라의 문자 ‘국서(國書)’라며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송강 정철(鄭澈,1536~1594, 조선 중기 정치가)의 저서로 충신연주지사(忠信戀主志事)인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 중 한글 비중이 높은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최고로 평가했다. 서포는 이들 가사를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 BC 343년 추정 ~ BC 278년 추정 )의 유명한 장편 서정시 ‘이소(離騷)’와도 견주기도 했다.
서포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까지 말할 정도였다. 오로지 성리학, 중화, 한문만을 떠받들던 양반 사대부들과 다른 인식을 하고 있었던 선각자(先覺者)였다.

6.숙종 15년인 1689년 반대파의 탄핵으로 경상도 남해(현 남해군)로 유배됐다. 이때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으나 죄인이어서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직후 1692년 유배지(현 남해군 상주면 노도길 76-16)에서 끝내 영면했다.
서포가 사망하자 형 김만기의 아들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1~1704)가 직접 행장(行狀, 죽은이가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지었고, 초상화도 그렸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서포의 앉은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그것이다.

종조부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 궁인에게 나눠 준 풍운아 김춘택 초상화.작가 미상.www.koreadaily.com

또 한글로 지어진 사씨남정기를 종손자(서포의 형이자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친손자 )인 북헌(北軒) 김춘택 (金春澤,1670~1717, 갑술환국를 설계하고 성공시킨 문신)이 한문으로 번역, 유학자 등 한문을 아는 이들에게 나눠주며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랐다. 김춘택은 당시 값비싼 책 ‘사씨남정기’를 궁녀들에게까지 공짜로 나눠주기도 했다. 그런데 서포가 죽은 2년 후인 1694년 사씨남정기의 내용이 현실에서 실현됐다. 폐서인(廢庶人, 왕비에서 서민 강등)됐던 인현왕후(仁顯王后 閔氏, 1667~1701)가 복위한 것이다.
서포는 영면한 지 6년 후인 숙종 24년(2698) 관직이 복구됐고, 1706년에는 서포의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 착한 행실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라는 왕의 표)가 내려졌다. 대표 작품으로는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선’ 등이 있다.

서포 김만중이 1689년 유배됐다가 영면한 경상남도 남해군 노도. 남해군청 홈페이지 캡처.

7.2010년 경남 남해군과 남해유배문학관이 제정한 '김만중 문학상'이 매년 열린다. 제1회 대상은 장편소설 ‘육도경’을 쓴 문호성(1958~현재)이 받았다.
서포는 방송 드라마에서 주요 인물로 많이 나왔다. 1988년 나온 MBC 드라마 ‘인현왕후’, 2002~2003년 방영된 KBS 드라마 ‘장희빈’, 2007년 KBS1에서 방영한 ‘HDTV 문학관-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에 나왔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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