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삼국유사-한류 바람의 원전 첫머리는 자주적인 한민족사로 풀어나갔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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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한류 바람의 원전 첫머리는 자주적인 한민족사로 풀어나갔다

지성인간 2023. 7. 10.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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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머리()에 말한다대체로 옛 성인이 바야흐로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면서 괴이완력패란(悖亂), 귀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다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부명(符命)에 응하고 도록(圖籙)을 맏는 것이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고그런 뒤에 큰 변화를 타고 천자의 지위(다른말로 대기,大器큰 그릇)를 장악하고 (제왕의)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그러므로 황하에서 (팔괘)그림이 나오고낙수에서 글이 나오면서그렇다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김원중 역민음사, 2008)

민음사가 2008년 낸 '삼국유사' 표지 부분.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그린 벽화을 썼다.

1.중국에서 일어난 기이(奇異)한 일들을 첫머리에 나열하면서 한민족 시조(始祖)의 근원을 밝히는 토대로 활용했다. 당시 식자층(識者層, 주로 성리학 지식인층)에 만연한 중화(中華, 중국 우월주의), 화이(華夷, 중국과 오랑캐)사상에 대항하는 진취적 서술이다. 중국 옛 역사의 처음이 괴이(怪異)한 일로 가득한데 우리나라 삼국 시조의 신이(神異)함이 어찌 괴이하다고 하겠냐는 따끔한 지적이다. 한자 원문의 번역이긴 하나 이해 하기 쉬운 도입부라 하겠다.

2.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1285년 간행 추정)’는 한민족 최고의 고전이자 한국 문화 원형의 보물창고(寶庫)다. 특히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최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서다. 현대의 한류(韓流) 스토리텔링의 원천(源泉)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실증(實證), 현장 채록 정신이 살아 있는 최고의 역작으로 5권 2책 9편으로 구성돼 있다. 몽골제국(예케 몽골 울루스, 1206~1635)의 고려 침략기에 쓴 것으로 보이지만 편찬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일연의 초고(初考)나 초판 목판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1281년 무렵 일연이 운문사(현 경북 청도에  있는 절)에 머물 때 집필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삼국유사는 14세기 말(고려말 조선 초 간행 추정목판본이 국보 306호로 지정돼 있다이중 306-1호(권3~5)는 개인, 306-2호(전체)는 서울대 규장각, 306-3호(권1~2)는 연세대박물관, 306-4호(권 4~5)는 부산 범어사가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삼국 유사' 활자본. photo by www.heritage.go.kr

3.삼국유사는 조선 초기 이후 필사본(筆寫本)을 판각본(板刻本,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것)과 활자본으로 출간했다.
가장 오래된 판각본은 1512년, 중종 7년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던 이계복(李繼福,14세기말~15세기 초 문신)이 주관해서 간행한 '정덕본'(正德本)이 있다.
필사본으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 소장본도 있다. 현대 활자본은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의 ‘사지총서본(史誌叢書本, 1908, 1904년 간행 삼국유사 포함)’이 가장 오래됐다. 국내는 ‘조선사학회본(1928)’ 등이 있다.

4.삼국유사는 한민족이 하늘의 후손(天孫)이라는 건국 신화와 민중들의 이야기가 수록된 사서(史書)다. 당시 지식인층(유학자)에 만연한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 화이(華夷)사상을 뒤엎는 역작(力作)으로 고려의 자존감을 높여준 저작이다.
三國遺事의 뜻은 신라·고구려·백제의 남은 이야기다. 유학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중심의 관찬(官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빠진 것을 수록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제자 무극(無極)이 적어 끼워 넣은 부분도 2곳이나 있다.

5.이 책은 맨 앞에 고조선과 위만조선, 신라·고구려·백제·가락국 등 역대 왕들의 계보와 연대를 기록한 권1, 2인 기이(紀異) 편이 있다.
권3은 흥법(興法, 불교 수용과 부흥 과정)과 탑상(塔像, 불상과 불탑에 얽힌 이야기)으로 나뉘어 있다. 이는 현대에 와서 삼국 시대 불교 미술사 역할을 하고 있다.
권4는 의해(義解) 편으로, 원효, 의상 등 고승들의 전기다. 권5는 신주(神呪, 밀교 등), 감통(感通, 불교 신앙의 기적), 피은(避隱, 은둔자들의 이야기), 효선(孝善, 효도와 선행)을 다루고 있다.

삼국유사에 들어있는 '가락국기' 부분. 출처=영남대 소장본

6.삼국유사는 자주, 불교, 민중적 시각을 드러낸다. 단군 신화와 삼한, 낙랑, 대방, 부여의 역사는 물론 ‘가락국기’에서 멸망한 가야의 역사를 자세히 전한다.
또 불교 관련 다양한 이야기, 설화, 민담, 전설, 향가 등이 실려 있다. 황룡사 장육상(皇龍寺丈六像,신라때 조성한 금동불상), 신라 만파식적(萬波息笛,세상의 많은 어지러움을 없애는 피리) 설화, 불국사와 석불사, 동화사의 창건, 포산의 두 성인 관기와 도성, 세달사의 승려 조신의꿈(調信之夢) 이야기 등이 있다.
향찰로 된 향가 14수의 원문(原文) 등에서 민중들의 역동적인 삶을 볼수 있다. 특히 상대적 약자였던 여성, 장애인, 빈민, 서민 등 백성의 생활상도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에 채록된 이같은 향가와 한시, 설화 등은 모두 후대 소설과 각종 예술작품의 모태가 됐다. 현대 한류의 기원인 셈이다.

7.삼국유사는 출간이후부터 600여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한 책이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불교 서적, 야사로 인식해 잊혀졌다. 한민족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한 책이었는데도 조선의 유학자, 특히 실학자들이 이를 외면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20세기 들어 새롭게 받아들이면서 ‘잊힌 책’에서 ‘재발견 책’으로 조명됐다. 특히 일본은 조ㆍ일전쟁(임진,정유 왜란, 1592~1598) 때 가져온 삼국유사 필사본을 1904년 간행한 데 이어 1915년 번역본까지 냈다.
현대에 들어와 삼국유사는 1년에 20여 편의 논문이 쓰여질 정도라고 한다.(중앙승가대학 불교학연구소 집계) 1995년까지 2186편의 논문이 나왔다. 국문학계는 2023년
6월 기준으로는 논문과 책을 합해서 3000편 이상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미국, 베트남, 체코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 번역,출판됐다.

8.소설가이자 당대의 석학이지만 나중에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삼국유사에 대해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삼국유사’를 잡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조동일(1939~현재) 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삼국유사를 야사(野史)로 부르는 데 반대했다. 그는 야사가 아닌 만큼 ‘대안사서(代案史書)’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다.
실제 개인적 생각으로도 ‘야사’라는 말은 삼국유사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학자와 이에 호응한 친일학자들이 폄하(貶下)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야사’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일연 스님 표준 영정. 국립현대미술관(작가 정탁영.1984 제작) 소장. photo by samseonghyeon.gbgs.go.kr

#.일연(一然,1206~1289)=고려시대 승려. 승려 최고 직책인 국존(國尊)에 올랐다. 성은 金씨와 全씨를 두고 논란이 있다. 본래 이름은 견명(見明). 나중에 일연으로 개명했다. 시호는 보각(普覺).

1.경상도 압량군(현 경북 경산시 일대)에서 아버지 ?언필(?彦弼, 1189~1211), 어머니 경주 김씨 부인(1194~1287)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때 집을 나가 전라도 해양(海陽, 현재 특정할 수 없음, 바다 해(海)을 감안할 때 나주 일대 추정)지역에서 불법을 배웠다. 이후 14살 때 설악산 진전사(陳田寺, 가지산문 중창 사찰)에서 구족계(具足戒, 계품을 완전하게 갖추는 것, 승려 입문)를 받았다.
22살 때인 고려 고종 14년(1227), 승과에 급제해 포산(苞山, 현 대구 달성군과 청도군 등에 걸쳐있슨 비슬산,琵瑟山) 대견사 주지 등을 지내며 체류했다. 기록에 따르면 22년 간 포산의 여러 사찰에 머물며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다.

2.41세에 선사가 됐고, 44세(1249년) 때 남해 정림사(定林寺)의 핵심 승려(불법 강론 및 승려들 관할)가 된다. 이곳에서 대장경을 판각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10년 후 일연 나이 54세 때(고종 46년, 1259) 고려 불교에서 가장 높은 품계인 대선사(大禪師)에 오른다. 2년 후에는 고려 왕실 핵심 사찰인 강화 선원사 주지가 된다. 이때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법을 확실하게 계승한다.
이후 대선사로서 전국 여러 사찰에 초청돼 활동한다. 1261년에는 강화도 선월사(禪月寺)에 초청돼 강론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주로 포산에 머물며 주변의 여러 절을 중수(重修, 낡은 건물을 다시 고치는 것)했다.
국가에서 내려준 사액금(賜額金)으로 중수한 포산 인흥사(仁興社)에서는 ‘역대연표(歷代年表, 삼국유사의 뼈대 역할을 하는 각 해의 기록)’를 간행했다.

인각사에 있는 일연스님 생애관. 출처=인각사

3.충렬왕 9년(1283) 78세 때 고려 승려 최고 명예직인 국존(國尊, 고려 말 덕행이 높은 고승에게 주는 최고의 법계, 국사(國師)의 다른 명칭)에 책봉됐다. 이때 ‘원경충조(圓徑沖照)’라는 호도 함께 받았다.
국존이 된 일연은 인각사(麟角寺, 현 경북 군위군 삼국유사면)로 물러난다. 이후 가지산문(迦智山門, 설익산 일대서 중창한 선종 종파) 중심의 불교 교권 확립을 위해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 불교 통합을 위한 승려대회)를 두 번이나 열기도 했다. 1289년에는 ‘인천보감(人川寶鑑)’도 간행한다.

4.일연은 84세로 입적한다. 왕이 시호를 보각(普覺)이라 내렸고, 탑호(塔號)를 정조(靜照)라 했다. 인각사에는 부도와 인각사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가 건립됐다.
이 비문에는 당시 ‘어록(語錄)’, ‘게송잡저(偈頌雜著)’ 등 100여 권의 저술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언급은 없다. 불교 관련 저술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삼국유사는 일연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몽골 침략(1차 침략 1231년)과 원 간섭기(1259~1356)의 최대 치적이자 역작(力作)으로 꼽히고 있다.

군위군에 있는 삼국유사 테마파크 전시관. 출처=삼국유사 테마파크 홈페이지.

5.경북 군위군에는 다양한 체험과 문화, 관광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 '삼국유사 테마파크(군위군 의흥면 일연테마로)'가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삼국유사 속 콘텐츠를 시각화한 다양한 전시‧조형물이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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