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서양철학사-난해한 철학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책의 첫 문단은 쉬운 문장력이 돋보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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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난해한 철학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책의 첫 문단은 쉬운 문장력이 돋보인다.

지성인간 2023. 8. 8.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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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세계에 대해 주장하는 ‘철학’ 개념은 두 가지 요소에서 생겨난다. 하나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종교와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넓은 의미의 과학적 탐구다. 두 요소가 각기 다른 철학자의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큰 차이가 있으나, 철학은 두 요소를 어느 정도 포괄한다.
‘철학’은 넓든 좁든 여러 방식으로 써온 말이다. 나는 ‘철학’이라는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하자고 제안하며, 이제 그 의미를 설명하려 한다. 내가 말하려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서상복 역, 을유문화사, 2020)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1902년 작 '베토벤 프리즈-환희'. 을유문화사가 '서양철학사(2020)' 표지로 썼다.

1.도입부에 철학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해 읽는 이의 편안함을 유도한다. 더구나 어려운 낱말이나 문장도 없다.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갖는 철학에 대해 이처럼 쉽게 설명해 내는 문장력이 대단하다.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접근하기 좋은 학문이라는 느낌을 주는 저절로  느끼게 하는 첫문단이다. 저자의 독자를 위한 배려, 지적  통찰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있다.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2.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는 2500년의 서양 철학을 쉽게(?) 꿰뚫을 수 있도록 쓰여진 철학서다.  철학관련  채중에서 보기 드물게 많이 팔린 명저다.
서양 사상의 진화를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 비판적 인식과 분석으로 안내하는 세계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철학서다. 특히 복잡한 철학적 개념을 초보자(철학 입문자)도 쉽게 읽게 한 친절한 철학 설명서라고 할수 있다. 그래서 서양철학사를 다룬 책 중의 ‘정전(正典)’이라고 평가를 하는 이가 많다.
다만 2차세계대전 중에 쓴 책이어서인지 독일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햏다. 특히 독설같은 비판은 ‘옥의 티’라고나 할까. 이런 점 때문에 동시대와 후대의 많은 철학자 등 지식인들에게 비판당했다.
원래 제목은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로 '서양철학사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과 서양철학사의 연결관계'이다.

1945년 영국에서 간행된 러셀의 서양철학사 초판본. photo by wikipedia

3.러셀이 책 제목을 ‘서양 철학사’라고 붙인 것은 동양 철학에 대한 식견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당시만해도 유럽 철학자들 대부분이 서양 철학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했다.
그래서 당대 대부분의 유렵 학자들이 책을 낼 때도 서양을 붙이지 않고 ‘철학’ 혹은 ‘철학사’로 썼다. 이는 문학이나 다른 예술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러셀이 책에 굳이 ‘서양’을 쓴 것은 동양철학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분위기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1930년대 중국과 일본 등을 방문, 동양 철학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인식 전환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4.러셀의 ‘서양철학사’는 고대와 가톨릭, 근현대 철학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까지 각 시대를 대표한 철학자를 꼽아 주제별로 명료하게 설명했다.
1부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소크라테 이전은 탈레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시만데르, 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류키푸스, 데모크리토스, 프로타고라스 등이다.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고대 철학 (냉소 주의자, 회의론자, 에피쿠로스 인, 스토아 인, 플롯 티 누스 포함)을 썼다.
2부는 가톨릭 철학을 담고 있다. 교부들(유대인 철학, 이슬람 철학(모하메드라고 부르는), 세인트 암브로스, 세인트 제롬, 세인트 어거스틴, 세인트 베네딕트, 교황 그레고리 대왕), 스쿨맨(스코틀랜드의 존과 세인트 토마스 아퀴나스 포함)
3부는 현대 철학이다. 르네상스부터 흄(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모어, 베이컨, 홉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크, 버클리, 흄 포함)까지다. 그리고 루소부터 현재(1940년대)까지다.

5.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학파와 의견의 대립을 뛰어넘어 최고의 가르침을 주는 소중한 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튀르키예 최고의 소설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2006)인 오르한 파묵(Orhan Pamuk,1952~현재)은 “휴가지에 들고 갈 첫 번 책”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산문체로 썼다”며 “설명과 논증은 나무랄 데없이 명료할 뿐 더러 정직하다”고 말했다.

말년의 버트란드 러셀 모습.photo by wikipedia

#.버트란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1872~1970)=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1950). 현대의 주류 철학적 흐름인 분석철학의 창시자다.
당대 세계 최고의 지성이자 명사로 반전반핵 운동을 주도한 사회운동가이다. 유명한 제자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오스트리아-영국철학자)이 있다.

1.영국 웨일스의 남동부 몬머스셔(Monmouthshire)에 있는 트렐레치(Trellech)의 레이븐  스크로프트(Ravenscroft)에서 태어났다. 대부는 유명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83)이다
러셀 가문은 영국 최고의 명문가였다. 할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영국 총리를 2차례(1846~1852, 1865~1866) 역임한 ‘1대 러셀 백작 존 러셀(Lord John Russell, 1792~1878)’이다. 러셀의 조상은 휘그당(17세기 후반 성립된 정당)을 결성했던 가문중 하나라고 한다. 또 1536~40년의 수도원 해산, 1688~89년의 명예 혁명,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 핵심 역할을 한 가문이다.

러셀의 부모인 앰벌리 자작과 캐서린 루이사 스탠리.1867년 몬트리올의 William Notman이 제작한 앨범 발췌.McCord Museum 소장. photo by wikipedia

아버지는 앰벌리 자작(John Russell, Viscount Amberley, 1842~1876)이고, 어머니는 캐서린 루이사 스탠리(Katharine Louisa Stanley, 1842~1874)로 유명한 앨더리 가문의 에드워드 스탠리 남작의 딸이다. 형 프랭크 러셀(John Francis Stanley Russell, 1865~1931), 누나 레이첼 러셀(Rachel Russell, 1868~1874)이 있다. 이들 남매는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2.성장기에 큰 고통을 겪었다. 1874년 6월 즈음 어머니와 누나 레이첼이 디프테리아로 잇달아 사망했고, 결핵으로 고생했던 아버지도 2년 후 기관지염으로 생을 달리했다. 다섯살도 안돼 부모와 누나를 잃은 것이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자녀교육을 무신론자인 친구들에게 맡겼으나 총리를 지낸 할아버지 존 러셀은 법적 후견인으로 등록, 직접 양육에 들어갔다.
하지만 할아버지 존 러셀은 러셀의 아버지 사후 불과 2년만인 1878년 사망했다. 이에 독실한 청교도 신자이지만 자유주의자인 할머니 러셀 백작부인(Frances Anna Maria Russell, Countess Russell, 1815~1898) 손에서 자랐다.

3.러셀이 학문에 눈을 뜬 것은 7살 연상의 형 프랭크가 소개한 유클리드 관련 서적이었다. 유클리드를 통해 수학의 깊이를 알고 천착했다고 한다.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 입학했다. 이 곳에서 젊은 철학자들인 조지 에드워드무어(George Edward Moore,1873~1958)와 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 등을 알았고, 배타적 사모임인 케임브리지 사도회(Cambridge Apostles)’멤버가 됐다.
1893년 수학 졸업시험에서 7등으로 졸업한 뒤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한편 형이상학자(신 헤겔학파) 맥태거트(Mctaggart, John Ellis, 1866~1925) 교수  영향으로 관념론을 배웠다. 1년 후 윤리학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4.1894~1895년 2년동안 미국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고, 독일로 건너가 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등을 배웠다. 런던 정치경제 대학의 수석강사(1896)를 하기도 했다.
러셀은 1898년 당시의 대세 철학이었던 관념론에 반기를 들고,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됐다. 1905년에는 철학 저널 ‘Mind’에 에세이 ‘On Denoting’을 발표했다.

5.1907년 ‘자유무역, 여권 신장’ 등 진보적인 주장을 하며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투표권(여성 투표권 1928년 합법화)이 없었던 여성까지 보수파에 참여해 난동  수준의 방해를 해서 선거운동을 제대로 못해 낙선했다고 한다.
1908년에는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됐고, 1910년에는 화이트 헤드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 전3권)’의 첫 권을 출간했다. 이 책은 굴욕적인 자비(自費)출판이었다. 총 출판 비용 600파운드 중 케임브리지 출판부 300파운드, 영국왕립학회 200파운드, 러셀과 화이트 헤드 각 50파운드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앞서 출간한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s)’와 함께 러셀을 세계적 수학자로 올려놓았다. 이후 2권과 3권도 출간했는데 1권 외에는 호응을 받지 못했다.

러셀을 키운 할머니 존 러셀 백작부인이 어린 시절 러셀의 아버지와 함께한 모습. 로버트 토번의 1844년 작품이다. photo by wikipedia

6.1911년 오스트리아인 공학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청강생으로 러셀 강의를 듣는다. 이 때부터 러셀은 무명의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알고 그의 학문 발전을 격려하고, 후원한다.
러셀 자신도 제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저서 ‘철학적 탐구’와는 의견을 달리했다고 한다.
볼세비키 혁명 주역 블라디미르 레닌과도 만난다. 1920년 8월 영국 정부의 러시아 혁명 파급 효과 리서치 요원으로 가서 레닌을 만나 1시간 가량 대화했다.
이후 비판서인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을 내놓는다. 그해말 러셀은 중국 베이징을 방문, 1년간 철학을 강의한다.
러셀은 나중에 “독재국가인 소련이 핵무기를 갖게 해서는 안된다”며 “서방이 (소련이 핵을 갖기 전에) 선제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7.1931년 형 프랭크 러셀 사망으로 백작위를 물려 받았다. 러셀은 그러나 백작위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주변사람들이 ‘작위 같은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면 “작위를 내놓는 방법은 대반역죄를 짓는 것뿐”이라며 “작위를 버리는 것은 좋으나 런던 탑에서 목이 달아날 염려가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작위 반납은 영국 왕실에 대한  반역이라고 한 것이다.

7.러셀의 여성 관계는 예상외로 복잡했다. 17세 때 만난 미국 퀘이커교도 앨리스 피어솔 스미스(1867~1951)와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러셀은 할머니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1894년12월 결혼했다.
하지만 둘은 1901년 독선적인 장모와 불화 등으로 별거에 들어갔다. 이후 러셀은 귀족이자 명사였던 오톨라인 모렐(Ottoline Violet Anne Morrell, 1873~1938), 작가이자 배우 콘스탄스 맬러슨(Constance Mary Annesley,1895~1975), 비비안 하이우드(Vivienne Haigh-Wood Eliot(1888~1947, 시인 T.S 엘리엇 첫 부인) 등 많은 여인들과 관계했다.
앨리스와 별거 중이어서 법률상 불륜이었다. 오랜 별거에도 앨리스는 러셀이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1921년 공식 이혼했다. 앨리스는 끝내 홀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이혼 이유는 러셀의 연인인 작가 도라 위니프레드 블랙(Dora Winifred Black, 1894~1986)이 임신해 출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존 콘래드 러셀(John Conrad Russell, 1921~1987), 캐서린 제인 러셀(Katharine Jane Russell, 1923~2021)이 있다.

러셀이 도라 위니프레드 블랙(Dora Winifred Black, 1894~1986)와 사이에서 태어난 존 콘래드 러셀과 캐서린 제인 러셀을 돌보고 있다. 1920~1930년대 추정.photo by wikipedia

아내 도라와 공동으로 러셀은 1927년 서부 서식스(West Sussex)의 하링(Harting) 근처 거주지에 실험학교인 비콘힐 학교를 설립한다. 그러나 도라가 미국의 저널리스트 그리핀 베리(Griffin Barry)와 불륜을 이어가자 1932년 별거후 곧 이혼하면서 학교 운영에서 손을 뗐다. 도라는 1943년까지 학교를 운영했다.
러셀은 1934년 38살의 연하의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이자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패트리샤 스펜스(1910~)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는 나중에 저명한 역사가이자 자유민주당 핵심인사가 된 콘래드 서배스천 로버트 러셀 백작(1937~2004)이 태어났다.
1952년 러셀은 퍼트리샤 스펜스와 이혼했다. 이에 둘 사이의 아들 콘래드는 1968년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러셀은 이혼 후 곧바로 네 번째 아내 이디스 핀치(1900~1978)와 결혼했다. 친구의 동거인 루시 도널리의 친구였다. 이디스는 러셀이 사망할 때까지 곁에 있었다.

영국 런던 홀본에 있는 작은 광장 레드 라이언 스퀘어(Red Lion Square) 있는 러셀 동상.마르셀 퀸턴(Marcelle Quinton)의 조각 작품이다. photo by wikipedia

8.러셀은 1940년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임명돼지만 ‘성 부도덕’ 옹호 이유로 법원이 취소했다. 이후 시카고 대학, UCLA에서 강의했다. 러셀은 이후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철학사를 강연했다. 이 강연들이 ‘서양철학사’의 시발점이 됐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가 됐다. 1945년 출간한 서양철학사는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BBC 방송의 ‘브레인스 트러스트’ 등에 출연했다.
948년 10월 비행기 추락사고(승객 43명 중 19명 사망)에서 살아남았고,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 번째 강연자가 되었다. 1949년 6월 9일의 국왕 탄생 기념일에 조지 6세로부터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 받았다. 이듬해에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9.반전주의자 러셀은 1차, 2차세계대전 뿐 아니라 모든 전쟁을 비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평화 활동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켐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강사 직에서 해고당한다. 그래도 평화활동을 하자 1918년 잡혀가 6개월 금고형을 받아 브릭스턴 감옥에 수감된다.
러셀은 1950, 60년대핵 군축과 반 베트남 전쟁 운동이었다. 1955년의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은 핵 군축을 촉구하는 문서로, 저명한 핵물리학자이자 당대의 지성이었던 11명의 학자들이 서명했다.
1969년 11월 러셀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고문과 학살들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전쟁범죄위원회를 세울 것을 우 탄트UN 사무총장에게 촉구했다. 러셀은 사르트르 등과 함께 "베트남전은 미국이 저지른 대량 학살 범죄"라고 맹비난했다.
노동당이 1965년 10월 베트남 전쟁에 지원군 파병하기로 한 것에 격분, 노동당 당원증을 찢기도 했다. 1967년 인도에서 개봉된 모한 쿠마르(Mohan Kumar)의 반전 힌디어 영화 '아만(Aman)'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비틀즈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는 나중에 영국의 한 토크쇼에서 출연, “비틀즈 멤버들, 특히 존 레논의 반전주의, 평화주의 운동의 러셀의 견해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러셀이 마지막으로 거주(1955~1970)한 웨일즈 메리 오네스 셔의 펜린듀두라에스(Penrhyndeudraeth)에있는 집(Plas Penrhyn). photo by wikipedia

10.러셀은 영국 웨일스 메리오네이셔 주 웨일즈 메리 오네스 셔의 펜린듀드에스(Penrhyndeudraeth)에 있는 자택(Plas Penrhyn)에서 1970년2월2일 영면했다. 사망 원인은 독감이었다. 향년 97세.
러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어떠한 종교 의식없이 3일만에 콜윌만(Colwyn Bay, 웨일즈 북부바다)에서 화장됐고, 웨일즈의 산(Welsh mountains)에 뿌려졌다.
러셀의 딸인 캐서린 제인 테이트는 1974년 버트런드 러셀 소사이어티를 설립, 러셀의 작품을 보존하고 있다. 또 버트런드 러셀 소사이어티 어워드(Bertrand Russell Society Award)를 비롯한 장학금도 운영하고 있다.

11. 러셀은 현대 수락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수학과 논리학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져으며, ‘수학원리(전 3권)’를 통해 수학을 재건설했다. 오늘날의 집합론이나 논리기호는 러셀의 공로가 크다.
칼 포퍼는 러셀을 '칸트 이후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추켜세웠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의 가장 큰 공헌자'라고도 찬양했다. 피터 왓슨은 저서 ‘생각의 역사’ 2권에서 러셀과 화이트 헤드를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할아버지쯤 된다”고 평가했다.

1970년 러셀 사망 2년 뒤 인도에서 발행한 우표.photo by wikipedia

12. 러셀의 주요작품으로는 ‘수학의 원리(전 3권), ‘철학이란 무엇인가(The Problems of Philosophy by Bertrand Russell, 1912)’,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Why Men Fight, 1917)’, ‘상대성 이론의 참뜻(The ABC of Relativity, 1925)’,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1927)’ , ‘서양의 지혜(Wisdom of the West, 1959)’등이 있다.
또 수필집으로는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인기 없는 수필’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1935)’등이 있다.
학문적 일대기인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My Philosophical Development, 1959)’도 있다. ‘러셀 자서전(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1951~1969)’도 있다. 이밖에 자기계발서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 1930)이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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