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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설국-깔끔한 산문체 묘사가 압권인 노벨문학상의 소설 첫 문단은 눈의 나라가 영상처럼 펼쳐진다. 본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이 내려덮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의 관사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저,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02)
1.주어가 없는 짧은 첫 문장이 압권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결체로 깔끔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유명한 첫 문장(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눈의 고장, 설국이 눈앞에 영상으로 펼쳐지는 듯한 묘사로 다가오게 한다. 이는 시각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장편 소설 도입부임에도 산문시를 읽는 듯한 운율이 마음속에 울린다. 특유의 비유법도 눈길을 끈다. 입사 시험이나 논술 등에서 활용할만한 첫 문단이다.
*국경은 도쿄 북쪽의 군마(群馬)현과 니가타(新潟)현의 접경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지방 간의 경계도 관용적으로 국경이라고 한다. *터널은 군마현과 니가타현을 잇는 조에츠선(上越線)의 시미즈(淸水) 터널이다. *신호소는 현 츠치타루역(土樽駅)이다. 참고로 니가타현은 설국(雪國), 눈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2.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유키꾸니, 1935~1937)’은 일본 소설 문학의 정수(精髓)로 세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1935~1937년 분케이슌주(文藝春秋,문예춘추) 등 잡지에 연재된 단편을 모아 다듬어서 장편 소설로 발표했다.
초판본은 소겐사(創元社)에서 1937년에 나왔다. 1947년 마지막 부분이 더해져 현재의 완결판 소설로 나왔다. 마지막 부분이 1937년 판에는 없는 화재 장면과 은하수 이야기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겨울’ 하면 연상되는 첫 번째 소설이다. 영어로는 ‘Snow Country’로 1956년 번역됐다.
미국 역사가이자 일본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에드워드 세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 1921~2007)에 의해서다. 좋은 번역으로 호평을 받았고, 서구에서 인기를 끌어 노벨문학상의 발판이 됐다.
3.설국은 자연에 대한 일본 특유의 미학적인 표현, 개인의 고독과 상념, 우수(憂愁) 등이 압도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소설이다.이런 느낌을 주게 하는 것은 단편으로 쓴 연작의 특성을 살린 구조와 서정성 짙은 내레이션이다. 일본 탐미주의의 꽃을 피운 소설인 셈이다.
다만 소설은 너무 밋밋하게 흘러간다. 인과 관계가 분명치 않고 명확한 플롯, 줄거리가 없는 모호한 구조가 이어진다. 당연히 큰 서사(敍事)나 반전 등 스펙터클한 이야기 전개가 없다. 이는 단편 연작 소설을 묶은 형태로 장편화했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은 많지 않다. 주인공인 기혼의 평론가 시마무라, 옛 스승의 아들 치료비를 벌기 위해 게이샤 일을 하는 고마코(駒子), 병든 연인을 돌보는 마을 처녀 요코(葉子) 등이다.
4.줄거리는 부모 유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유부남 문인의 게이샤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다. 눈(Snow)에서 시작해 불(Fire)로 끝난다.
직접 보지도 않은(볼수 없는 유럽 무용 등) 무용을 비평하는 평론가 시마무라는 도쿄에 살면서 북쪽 지방의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 있는 온천을 향한다.
설국의 온천에서 관능의 여인 게이샤 고마코를 만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에 매료당하면서도 진도(?)를 빼지 못한다. 그러면서 고마코의 지인이자 연인을 돌보는 요코에게 빠져든다. 느슨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요코는 사랑하는 남자가 죽자 그와 지냈던 누에고치 창고같은 2층 건물에서 지낸다. 그런 어느 밤 은하수가 내리는 날 창고에 불이 나고 2층에 있던 요코도 불길을 피하지 못한다.
5.소설의 무대는 니가타현의 에치고(越後) 유자와(湯澤) 온천이다. 가와바타는 이 온천을 자주 방문했고, 그 곳의 오래된 료칸(旅館)에 머물면서 ‘설국’을 썼다.
작가가 머물렀던 다카한 료칸(高半 旅館)은 11세기인 1075년에 개업,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현재 료칸 내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및 설국 관련 자료와 실제로 묵었던 방을 재현한 세트를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첫 문장의 터널은 시미즈(淸水) 터널이다. 군마현과 니가타현을 연결해 주는 총 길이 9702미터의 터널이다. 1922년 착공, 1931년 9월에 완공했다. 건설 당시 시미즈 터널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다.
6.1957년 영화로 만들어져 히트했다. 일본 유명 감독 도요타 시로(豊田 四郎, 1906~1977)가 만들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58년 프랑스 칸영화제에 출품, 상영됐다. 그 뒤로도 다양한 예술작푸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최근에는 2022년 TV 드라마 ‘설국(SNOW COUNTRY, 와타나베 카즈타카(渡邉一孝) 연출)’ 으로 만들어져 NHK에서 방영했다.
소설 ‘신(新) 설국(雪國)’이 2000년에 나왔다. 사사쿠라 아키라(笹倉明, 1948~현재)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0년에 리메이크 판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고토 코이치(後藤幸一,1948~현재)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연출했다.
한국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1977년 나온 고영남(高榮男,1935~2003) 감독의 ‘설국(雪國) , The Land of Snow)’이다. 당대 인기 배우 박근형(1940~현재)과 김영애(1951~2017)가 주연을 맡았다.
설국은 한국에서 민음사를 비롯, 범우사 등 많은 출판사가 번역했다. 1993년 다락원에서 일한대역(日韓對譯,김채수 역) 본으로도 나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일본의 세계적인 소설가. 일본 문학의 재탄생을 알린 작가. 동양인 두 번째 노벨 문학상(1968) 수상자. 일본어로 ‘かわばたやすなり’, 영어로 ‘Kawabata Yasnari’ 다
1.세기말 오사카(大阪)에서 7개월의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났다. 의사 아버지 가와바타 에키지(川端栄吉,1869~1901)와 어머니 구로다(黒田) 겐(1864~1902)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4살 위 누나 요시코(芳子,1895~1909) 한 명이 있다.
어머니 겐은 가와바타 에키지의 이복형 가와바타 고따로(川端恒太郎,1858~1894)와 1889년 결혼했으나 5년만에 사별했다. 직후 가와바타 에키지와 부부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병인 폐병(결핵)으로 가와바타가 두 살 때인 1901년 사망했다. 아버지 병 간호를 했던 어머니마저 그해 같은 병으로 여의고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가와바타 가문은 오사카(大阪)의 귀족 집안이자 대지주였으나 할아버지 가와바타 산하치로(川端三八郎,1841~1914)가 각종 사업에 손대 가산(家産)을 탕진했다.
그런데 가와바타를 길러주던 할머니 구로다 카네(黒田 카네,1839~1906)는 일곱 살 때, 할아버지는 열다섯 살 때인 1914년에 잃었다. 다른 친척 집에 맡겨졌던 누나 요시코 역시 가와바타가 열 살 때 죽었다.
2.가와바타는 오사카 히가시무라(東村)에서 도요카와(豊川)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学校,현 이바라키 시립 도쿠카와 소학교), 1912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茨木) 중학교(현재는 고교)를 입학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오빠인 구로다(黒田) 가문의 큰 아버지 구로다 슈타로(黒田秀太郎,1862~1918)의 집으로 옮겼다. 중학 졸업 후 선생님들의 ‘불합격’ 만류에도 상경해 도쿄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学校) 문과에 들어갔다.
고교 3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으며, 학업 성적은 내내 우수했다. 이때 문학에 깊이 빠져들면서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1821~1881), 러시아 극작가이자 의사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1860~1904), 일본 탐미주의 소설의 대개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 潤一郎, 1886~1965) 등의 소설을 탐독했다.
3.1920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영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영문학 전공보다는 글쓰기와 토론 등 일본 문학 활동에 심취했다.
이때 동급생인 연출가 겸 평론가 키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1898~1960), 영문학자 혼다 아키라(本多顕彰,1898~1978), 소설가 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1898~1975), 추리소설가 이시하마 킨사쿠(石濱金作, 1899~1968) 등과 교류했다.
또 선배 문인이자 저널리스트 기꾸치 히로시(나중에 기꾸치 칸,菊池寛,1888~1948)와 교류하며 많은 도움을 받는다. 기꾸치 칸은 1923년 ‘분게이슌주(文藝春秋)’를 창간해 사업가로도 성공했으며,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 나오키(直木)상, 기꾸치 칸(菊池寛)상도 제정했다.
1921년 국문과로 전과해 1924년 졸업했다. 그해 신진 문인들과 동인지 ‘분케이 지다이(文芸時代, 금성당 발행)’를 창간, 자전적인 소설 ‘16세의 일기’를 발표했다.
이 잡지는 같은 해 6월 프롤레타리아 문학파에 의해 창간된 ‘분케이 센센(文芸戦線, 문예전선사 발행)’과 문학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그리고 2년 후 가와바타는 출세작인 단편소설 이즈의 춤군으로 번역되는 ‘이즈노 오도리꼬(伊豆の踊子, 문예시대 1926년 1월호)’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4.만주사변(滿洲事變,1931년 9월18일~1932년 2월28일, 일본이 남만주 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해 일어난 전쟁, 일본 승리)과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Pacific War,1941년 12월7~1945년 9월2일) 동안에는 허무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당시 ‘수정환상(水晶幻想)’, ‘서정가(抒情歌)’, ‘금수(禽獸)’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1947년 ‘설국’을 보완해 완결 작품을 내놓으면서 일본 전통 정서와 인간 본연의 생명력 탐구에 집중했다.
4.가와바타는 고교시절 도쿄 분쿄구(文京区) 혼고 3가 카페 ‘엘란’에서 가련한 소녀 여급 이토 하쯔요(伊藤初代(1906~1951)라는 ‘뮤즈’를 만난다.
이토 하쯔요는 일본 동북부 이와테현(岩手県) 에라시군(江刺郡) 이와타니도(岩谷堂, 현 奥州市 江刺区 岩谷堂) 출신의 13세 소녀였다. 이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후 동경제대 2학년이던 1921년 가을 가와바타는 일본 중부도시 기후(岐阜県)의 서방사(西方寺)에 있던 이토 하쯔요(당시 15세)를 찾아간다.
이후 10월에 다시 찾아가 나가라카와(長良川, 일본 3대 하천 중 하나) 호반의 숙소에서 이토 하쯔요와 결혼 약속을 하고, 다음날 기후현 이마자와(今沢) 9번지의 세코(瀬古) 사진관에서 약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후 상경해 이토 하쯔요의 아버지 다다요시(忠吉)가 소사(小使, 학교 잡무를 하는 사람)로 있는 이와테현(岩手県)의 소학교로 찾아가 약혼 기념 사진을 보여주고 승낙을 받았다.
후원자였던 기쿠치 칸은 두사람의 약혼에 대해 떨떠름 했지만 신혼집에 생활비(당시로서는 큰 돈인 매달 50엔)까지 주기로 약속한다.
5. 가와바타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1년 약혼 한달후인 11월 8일 이토 하쯔요는 "나는 당신과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만, 나에게는 어떤 비상(특별한 일)이 있습니다"라며 약혼을 파기한다. 가와바타는 몇 번을 설득했으나 실패해 그달 11월24일 이별한다.
이별 후인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関東大震災)이 발생하자 도쿄 혼고구(本郷区, 현재는 文京区) 센다기쵸(千駄木町)의 하숙집에서 관동 대지진(関東大震災)을 당한 가와바타는 ‘뮤즈’ 이토 하쯔요를 찾아 나섰으나 실패한다. 그 와중에 요사하라(吉原) 유곽 주변에서 불에 타 연못으로 뛰어든 수많은 시민과 창녀들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가와바타와 헤어진 이후 이토 하쯔요는 도쿄로 돌아와 화류계의 ‘퀸’이 된다. 카페 ‘파리’, 아사쿠사(浅草)의 카페 ‘아메리카’의 여급으로 일하면서 화류계의 명사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카페 아메리카 여급 시절 이토 하쯔요는 ‘아사쿠사 제일의 대미인’으로 인기를 끌었고, 지배인으로 13살 연상인 나카바야시 다다조(中林忠蔵)와 결혼한다.
키쿠치 칸은 가와바타의 약혼 파담(破談)를 듣고 피폐한 가와바타를 우려했으나 별일없이 견뎠다고 한다. 한편 이토 하쯔요는 1932년 유명해진 가와바타를 10년 만에 찾아와 사별한 나카바야시와 사이에 낳은 장녀 주에(珠江, 9살)를 입양을 요청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이후 1951년 2월 27일 평생의 뮤즈 이토 하쓰요가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쓰요의 여동생 마키의 차녀 노리코(紀子)가 가와바타에게 편지로 알려왔다.
6.1923년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를 문병한다. 이후 군에 입대할려고 1924년 5월 향리의 미시마 군청에서 징병검사를 받았지만 체중이 약 41kg에 불과해 불합격했다.
가와바타는 1925년 신주쿠(新宿区)에 살고 있는 ‘문예시대’ 동인 스가 다다오(菅忠雄,1899~1942,소설가이자 에디터)의 집에 갔다고 8살 연하의 마츠바햐시 히데코(松林秀子,1907~2002, 나중에 川端秀子)를 만난다.
히데코는 스가 다다오의 집에서 살림살이를 돕고 있던 처녀였다. 그리고 1년 후 스가 다다오가 천식 요양으로 가마쿠라(鎌倉)로 가면서 입주를 권하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히데코와 함께 살게 된다.
이후 둘은 실질적인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가와바타는 히데코의 조상과 조부모 섬기는 것에 반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자녀는 하늘이 점지하지 않았다. 1927년 임신한 아내 히데코가 6월 쯤 도쿄 신주쿠에 있는 게이오(慶応)병원에서 출산하지만 아이(여아)는 곧 죽었다.
또 다음해 임신 5, 6개월 상태에서 넘어져 유산했다. 둘은 1931년(쇼와 6년) 12월 2일 정식 결혼했다. 이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JR 오모리역(大森駅) 서쪽 출구에 있는 천조신사(天祖神社)의 돌담에는 남편 야스나리의 초상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단발머리의 히데코 부조가 있다.
7.1933년 2월에는 ‘이즈의 춤꾼(伊豆の踊子)’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일본 최초 유성영화를 만든 고죠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1902~1981)가 맡았다.
그해 말에는 어느 출판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여류작가 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1889~1939)의 소설 지도를 의뢰받아 꼼꼼하게 지도하고 격려한다.
1934년 6월 니가타 현의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沢)를 여행했고, 그 후 다시 방문해 ‘설국’의 모델이 되는 19세의 게이샤 마쯔에(松栄, 본명 小高キク)를 만난다. 이후 나중에 설국으로 묶여 나온 단편을 계속 집필해 투고 게재한다.
8.1941년 말에는 만주일일신문 초청으로 만주 일대를 방문하지만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로 급거 귀국한다. 진주만 기습을 전해들은 가와바타는 “군부를 억누르지 못하고 전쟁에 휘말렸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1943년 봄에는 이전부터 양녀 약속을 하고 있던 외삼촌 구로다 히데타카(黒田秀孝)의 셋째 딸 마사코(麻紗子, 호적명은 政子)를 데리러 부부는 고향에 갔다.
마사코의 어머니 곤노 토미에(権野富江)와 구로다 히데타카는 이혼한 상태였고, 마사코는 어머니와 자랐다. 5월 3일 정식으로 11세의 마사코를 양녀로 입적했다.
이후 마사코는 일본에서 유명한 러시아 문학자인 야마모토 가오리(山本 香男里, 1933~2021)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혼담이 구체화 되던 1967년 가와바타는 '딸을 가와바타 가문에서 내보낼 수는 없다'며 주장, 결국 사위가 양사위가 됐다. 이름도 가와바타 가오리(川端 香男里)가 됐다.
9.1944년(쇼와 19년) 연말에는 미군 폭격기 보잉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 되면서 지역의 방공반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패전 후인 1946년 1월 기무라 도쿠조(木村德三, 1911~2005)를 편집장으로 잡지 ‘인간’(가마쿠라 문고 발행)을 창간했다. 1월 말에는 대학생이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 유명 소설가, 나중에 할복 자살)의 방문을 받고 격려했다.
10월에 가마쿠라(鎌倉市長谷264)로 이사, 이곳에서 평생 살게 된다. 이웃집에는 소설가이자 수필가 야마구치 히토미(山口瞳, 1926~1996)가 살았다. 히토미는 양녀 마사코와 친한 사이였다.
10.일본 펜클럽을 지원하던 가와바타는 1948년 제4대 일본 펜클럽 회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도쿄에서 1957년 9월 열린 제29회 국제펜클럽 도쿄 대회(교토와 도쿄 두곳에서 열림)를 성공적으로 치른다. 이후 국제 사회에 일본 문학과 문화를 알리기 위한 사회적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1958년 2월 국제펜집행위원회의 만장일치 추천으로 국제펜클럽 부회장에 선출됐다. 이듬해에는 독일 괴테 상을 받았다.
1968년 10월 17일,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직후 19일에 알무퀴스트 스웨덴 대사로부터 수상 통지와 시상식 초대장을 전달받았다. 같은 달 29일 첫 손자·아카리(あかり)가 탄생했다
11.1970년 5월 히사마쓰 쿠이치(久松潜一)를 회장으로 하는 '가와바타 문학연구회(川端文学研究会)'가 설립됐다. 아끼던 제자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자위대 이치가야(市ヶ谷駐屯地) 주둔지에서 할복 자결, 큰 충격을 받는다
12.한국과 인연도 있다. 1934년 최승희의 일본 데뷔 무용발표회를 보고 당대의 일본 신진 여류무용가로 ‘제1인자’라고 격찬했다. 패전 후 발표한 장편 ‘무희(舞姬)’에서 최승희의 예술을 다르기도 했다.
1970년 서울(당시 일본에서는 '경성' 대회로 불렀다고 함)에서 열린 제38회 국제펜클럽대회에 게스트 오브 오너로 참석했다. 한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기도했다.
한편 유명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1935~1923)와 평론가 오다기리 히데오(小田切秀雄,1916~2000) 등의 문인들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펜클럽 세계대회 개최를 반대, 펜클럽을 탈퇴하는 소동이 있었다.
13.노벨 문학상을 받은 지 3년 6개월 만인 1972년 4월16일, 도쿄 남부 가나가와현(神奈川県,현청은 요코하마시에 있음) 즈시시(逗子市)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사인은 가스 중독(자살)이었다. 향년 73세.
가와바타는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자살 징조도 없었고, 평소 자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기 때문에 일보 열도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1일 후 일본펜클럽, 일본문예가협회, 일본근대문학관 주관으로 아오야마 장의소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가마쿠라(鎌倉)영원(霊園)에 안장됐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가와바타의 평생의 ‘뮤즈’ 이토 하쓰요의 유골이 가매장돼 있던 곳에서 가마쿠라 묘지로 옮겨진 날이었다고 한다.
14.사후인 1973년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이사장 이노우에 야스시)가 설립됐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제정, 시상되고 있다.
또 사후 10년이 지난 1983년 부인 히데코가 ‘川端康成とともに(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라는 책을 낸다. 1985년에는 고향인 이바라키에 ‘이바라키시립가와바타야스나리문학관(茨木市立川端康成文学館)'이 문을 열었다.
2012년 9월 4일 NHK는 공개 청구 자료를 통해 스웨덴 아카데미가 1961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검토됐다고 보도했다.(콘덴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