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성(城)-관료주의, 독단, 이웃 혐오 등 우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찾는 천재 작가의 소설은 지루한 세밀화로 서문을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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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관료주의, 독단, 이웃 혐오 등 우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찾는 천재 작가의 소설은 지루한 세밀화로 서문을 연다.

지성인간 2024. 1. 2.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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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착  "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있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에 큰 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그러다가 그는 밤을 보낼 숙소를 찾아 나섰다. 여관에는 사람들이 아직 깨어 있었다. 손님을 받을 빈방이 더는 없었지만, 여관주인은 밤늦게 찾아온 손님을 적잖이 놀라고 당황한 터라 K에게 식당에 짚을 넣은 매트리스를 놓고 재워주겠다고 했다. K는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식당에는 아직 농부 몇몇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나, K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다락방에서 매트리스를 직접 꺼내와서 난로 가까이에 깔고는 몸을 눕혔다. 식당 안은 훈훈했고, 농부들은 조용했다. 그는 지친 눈길로 그들을 잠시 살펴보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프란츠 카프카 저, 권혁준 역, 창비, 2015)

체코 프라하 쿼드리드 쇼핑센터 앞에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회전하는 머리(Franz Kafka - Rotating Head Charvtova)'. 2014년 조각가 데이비드 체르니(David Cerny)가 디자인했고, 3천만 체코 크라운을 들여 조성했다.동상 무게는 39톤. photo by wikipedia

1.편안하게 읽히는 소박하고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주인공 K의 도착(?)을 지루할 정도의 정밀하게 설명하는데 소설적 장치로서 ‘임팩트’ 없는 설명체다. 마치 일기를 쓰는 듯 간결한 문체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자세히 쓰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둠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몽환적이다. 장면 하나하나가 리얼리티로 다가오지만 ‘따로 따로 떼 놓으면’ 무척이나 이질적이다. 눈속에 잠긴 어둠의 마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 빈방이 없는 여관, 지친 눈길 등이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가 첫 문단을 끌고가는 힘이 돋보인다. 한편 주인공 알파벳 이니셜 ‘K’는 문학사에서 저자의 전매특허가 됐고, 후대 작가들의 수많은 패러디로 나왔다.

카프카의 '성(Das Schloss,1926)' 초판본 표지. 독일 표현주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출판사인 쿠르트 볼프에서 나왔다.https://de.wikipedia.org

2.카프카의 ‘성(Das Schloss,1926)’은 20세기 소설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수작(秀作)이다. 저자 말년의 미완성 작품으로 세계 문학사를 새롭게 쓰게 한 매혹의 소설이다.
초판은 1922년 무렵 쓰다가 만 유고(遺稿, 글을 쓰다가 사망해 남겨진 원고)를 저자 사후인 1926년 절친 막스 브로트(Max Brod, 1884~1968, 절친이자 문학 집행자)가 편집, 쿠르트 볼프(Kurt Wolff Verlag) 출판사에서 간행됐다.
저자는 죽기 전 막스 브로트를 문학 집행자로 지정하면서 ‘모든 원고를 불태울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절친 브로트는 이 유언을 지키지 않았고, 불길 속에 사라질 뻔한 유고는 세상에 등장했다. 그런데 브로트가 출판 전에 자의적인 편집을 한 후 원고를 넘겨 ‘유고 왜곡’의 비판에서 자류롭지 못했다. 손댄 부분은 장 이동, 독일어 변경, 구두점 정리 등이다. 출판되지 않은 독일어 원문을 변경한  셈이다.
이 소설은 저자가 구상은 1914년 6월 무렵 했으나 실제 쓰기는 최악의 건강상태에 있을 때 인 1922년 무렵이었다. 당시 저자는 글을 쓰면서 ‘지상의 마지막 경계선을 향한 돌진’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러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말은 독자들의 상상의 몫이 됐고, 뭔가 지루하고 찝찝한 느낌으로 끝난다.
한국에서는 ‘성(城)으로 번역됐고, 독일어 원어는 ‘다스 슐로스’로 발음된다. 영어로는 1930년대 초 영국 번역가이자 시인 에드윈 뮤어(Edwin Muir,1887~1959)와 윌라 뮤어(Willa Muir) 부부가 처음 번역했다. 영문은 ‘The Castle’로 번역된다.

카프카 소설 '성'에 영감을 준 프라하 성과 카를교. 2019년 모습.photo by kimgsan

3.소설 ‘성(城)’은 저자의 미완성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래서 저자의 고독과 현실 부조화가 현대인의 실존 부조리로 투영돼 있다. 그럼에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거나, 캐릭터가 뚜렷하지 않다. 또  소설적 전개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미완성이어서 당연히 결말도 없다.
그렇치만 모순적이지만 모순적이지 않고, 부조리하지만 그 속에서 부조리하게 사는 현대인의 ‘부조리 일상’이 정밀하게 그려 있다. 이는 저자 본인의 모습-체코에 사는 유대인이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태생적 한계’가 소설 속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독일 소설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1929)인 토마스 만(Thomas Mann,1875~1955, 대표작 '마의 산')이 “카프카의 ‘성’은 전적으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프랑스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성’을 실존주의의 선구자적인 작품이라면서 "카프카는 우리 자신(실존)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카프카 '성(Das Schloss)' 1926년(502 페이지) 초판의 원본 브로셔.https://de.wikipedia.org

4.등장인물은 주인공 K, 성의 주인 클람(Klamm)과 클람의 전 정부인 여관 술집의 여급 프리다( Frieda), 성 주인의 조수이자 고용인 역할을 하는 아서, 제레마이어, 바르나바 등이다.
줄거리는 성을 찾아왔는데 온갖 부조리를 겪는 며칠간의 이야기다. 존재하지만 갈 수 없는 성 아래 마을에서 애매모호한 상태로 끝난다.
주인공으로 토지 측량사인 K는 눈이 내린 늦은 밤, 어둠과 안개에 싸인 성 밑 한 마을에 도착한다. 성의 백작에게 초대 받았지만 성으로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다. 낯선 이의 입장을 선뜻 받아줄리 없는 성은 접근할수록 오히려 멀어진다.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에 진입하려 하지만 좌절된다.
성 주인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숙박할 수 없는 여관. 그곳에는 성 주인의 조수로 배당된 두 명의 사내와 마을사 람들, 여관집 주인 등이 있다. K는 이들과 불협화음이 나고, 그 와중에 만난 주점 여급 프리다와 사랑을 한다. 서로 이야기가 얽히고 설키며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지만 성에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던 중 성 주인 클람(Klamm)의 전 정부인 여급 프리다와 사랑도 어긋난다. K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알자 프리다가 떠나버리는 것이다.

카프카 소설 '성'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독일 화가 에리히 헤켈(1883 ~1970)이 그린 '카프카-성(1931)'.www.artnet.de

5.이 소설은 현대인의 소외와 삶의 부조리-특히 관료주의, 폐쇄성, 불통,독단성 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모든 것이 의문시 된다. 주인공 K도 마을사람도, 실제 성이 있는지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절망의 메아리는 없다. 막연히 안개가, 어둠이 걷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독일에서 만든 영화 포스터.

6.1997년 독일 출신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1942~현재)감독이 오스트리아에서 카프카의 원작에 충실한 영화 ‘성’을 내놨다. 이 영화는 1997년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됐고, 2013년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에 나왔다.
미국 영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 1963~현재)가 만든 영화 ‘카프카(1991)’에 이 소설 등을 반영했다. 명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카프카 역을 맡아 열연했다. 소더버그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를 연출한 감독이다. 역대 최연소인 26살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020년 초 독일 함부르크 도이치 샤우슈필하우스(Deutsches Schauspielhaus)에서 공연한 카프카의 '성(The Castle, 감독 빅토르 보도)'의 한 장면.https://www.stern.de

7.한국에는 1950년대 이래 여러 형태로 작품이 소개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솔 출판사, 열린책들, 창비 3개의 번역본이 주요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 세 출판사는 동일한 판본(1982년 피셔 출판사의 패슬리 비평본)을 번역, 출판했다.
한편 우리나라 솔 출판사는 어려운 출판 환경에도 불구, ‘카프카 전집 개정판(10권)’을 간행, 한국을 카프카 전집 보유국의 하나로 만들었다.

프란트 카프카의 30대 모습.https://kafkamuseum.cz/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883~1924)=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거장(巨匠). 세계 문학사의 흐름을 바꾼 ‘독어권의 대문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현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쓴 보헤미안 유대인 소설가. 체코 프라하에서 나고 살고 죽은 ‘프라하 토박이’ 작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중의 천재’로 불린다.

다섯 살때의 카프카=www.guernicamag.com

1.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현 체코)의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6명의 자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Hermann Kafka, 1852~1931)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다.
성으로 쓰는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많이 보이는 새 '검은 까마귀'를 뜻하는 체코어 ‘Kavka’에서 유래했다. 어머니는 부유한 양조업자이자 소매상인의 딸 줄리 로위(Julie Lowy, 1856–1934)였다

프라하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출생지를 표시하는 명판. 1966년 카렐 흘라딕(Karel Hladik)과 얀 카플리키(Jan Kaplick)가 디자인했다. 출처=앤드류 시바/위키백과

2.두 남동생은 어렸을 때 사망했지만 세 명의 여동생은 성장했다. 세 자매는 가브리엘레(Gabriele, 애칭 엘리) (1889~1941), 발레리(Valerie, 발리,1890~1942), 오틸리에(Ottilie,오틀라, 1892~1943)였다. 1913년 11월 엘리와 발리는 결혼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나치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가지 못했다. 나치의 박해 속에 수용소에 끌려가 '홀로코스트'로 희생됐다. 기록이 남아 있는 둘째 동생 발리는 1942년 나치의 폴란드 점령지 우치 게토로 이송됐다는 것이 마지막이다.

카프카의 누이동생들. 왼쪽부터 발리, 엘리, 오틀라의 어린 시절(위)과 성인 이후의 모습(아래 첫번째는 카프카). 3명 모두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홀로코스트)때 희생됐다.https://kafkamuseum.cz/

3.카프카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유대인 교육은 13세 때 바르 미츠바(Bar Mitzvah, 13세에 열리는 유대인 성인식) 축제와 아버지와 함께 일 년에 네 번 회당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1889년 아들을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 학교가 아닌 독일어 사용 학교(당시 프라하의 약 10%의 지배층의 자녀 학교)에 보냈다. 그곳이 프라하 플라이슈마르크트(Fleischmarkt, 현재 프라하 마스나 거리)에 있는 남자 초등학교 도이치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였다. 1893년 졸업했다.
1901년 8개 학년으로 구성된 고전 중심의 중등학교인 알트슈테터 스타츠 김나지움(Altstädter Staats gymnasium)를 졸업했다. 이때까지도 권위적인 아버지는 병약하고 감성적인 아들을 전혀 이해 못하고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카프카에게 아버지와 불화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카푸카의 부모.https://kafkamuseum.cz/

4.1900년대 초 프라하 도이치 칼 페르디난트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주 만에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학년 때 평생의 친구인 동료 법대생 펠릭스 벨취(Felix Weltsch, 나중에 저널리스트)와 막스 브로트(Max Brod, 작가이자 출판인)를 만난다. 1906년 6월 18일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이듬해 11월1일 카프카는 이탈리아 계 보험회사 아시쿠라치오니 제네랄리(Assicurazioni Generali)에 취직, 1년 동안 일했으나 1908년 퇴사했다. 그리고 2주일 후 근무환경이 더 나은 보헤미아 왕국 산재보험연구소(Worker's Accident's Insurance Institute for the Kingdom of Bohemia)에 취업했다.
1911년 말에는 첫째 누이동생 엘리의 남편 칼 헤르만(Karl Hermann)이 카프카에게 사업을 제안, 프라하 최초의 석면 공장(Prager Asbestwerke Hermann & Co.)의 동업자가 되기도 했다.

카프카와 여동생.https://kafkamuseum.cz/

5.카프카는 직장생활에 성실했다.  돈이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노동 조건 개선에도 힘썼다.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 회사 홍보나 기업 변호를 주로 맡았다.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오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박봉에 시달리면서 생업과 작가의 꿈을 병행한 것이다.
특히 독서를 즐기고, 창작을 하는 프란츠였지만 가족의 배려는 없었다. 그래서 가족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썼다. 프란츠의 유명한 출세작 ‘변신(變身, Die Verwandlung, 1915)’은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하룻밤 만에 탈고할 정도였다.그렇치만 전업작가는 못됐다.
그런데 병이 시작됐다. 1917년 8월 결핵 진단을 받고 몇 달 동안 보헤미안 마을인 취라우(체코어로 시르젬)로 이사했다. 그곳 여동생 농장에서 쉬면서 일을 거들었다. 1910년 전후로 단편소설을 많이 발표, 알려지면서 1915년 폰타네 상을 수상했다.

카프카의 첫 약혼자 펠리체 바우어 (Felice Bauer, 1887~1960).1914년 파혼했다가 1917년 다시 약혼한다. 하지만 그해 12월 파혼한다.출처=https://prag-to-go.com

6.카프카는 늘 주변에 여성이 있었다.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다. 공식적인 첫 여인은 1912년 8월 절친 막스 브로트의 소개로 만난 펠리체 바우어(Felice Bauer, 1887~1960)였다. 브로트의 친척으로 베를린 딕터폰(보험대리인) 대표로 있는 칼 바우어(Carl Bauer, 1850-1914)의 딸이었다. 카프카를 만났을 때는  레코드 플레이어와 받아쓰기 기계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베를린 회사의 직원이었다. 약혼은 1914년 5월31일 일요일(유대인 명절인 샤부옷,Shavuot,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이 계시된 날)에 했다. 카프카의 부모와 여동생 오틀라(Ottla)가 참석했다. 하지만 그해 7월12일 아스카네스 호프 호텔에서  만나 파혼했다. 이 때 카프카는 친구 에른스트 바이스, 펠리체 바우어는 친구 그레테 블로흐, 여동생 에르나 바우어와 함께 했는데 카프카의 잘못을 일방적으로 지적당했다. 
그런데 두사람은 1915년 1월 23일과 24일에 독일-오스트리아 국경 마을인 테첸-보덴바흐(Tetschen-Bodenbach)에서 만나 다시 사귄다. 1916년 7월 마리안스케 라즈네에서 함께 휴가를 보냈고,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12일 두 번째 약혼을 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다시 약혼을 파기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의 관계가 끝난 직후인 1919년 14세 연상의 은행원 모리츠 마라세와 결혼했다. 둘은 아들 하인즈(1920년 출생)와 딸 우르술라(1921~1966)를 뒀다. 1931년 스위스로 이주했고, 다시 193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남편이 1937년 사망하면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가 자신에게 보낸 667통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끝까지 숨기다가 말년에 생계 고통이 심해지자  미국 출판사 쇼켄에 팔았다. 이 편지는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로 출판됐다. (하지만 카프카는 자신이 받은 편지를 모두 소각했다.)페리체 바우어는 1960년 10월 15일 뉴욕 근교의 라이에서 사망했다.

카프카의 또다른 약혼자 줄리 보리즈코바( Julie Wohryzkobaal, 1891~1944,줄리 보리젝, Julie Wohryzeck).https://prag-to-go.com

7.카프카는 약혼녀 펠리체와 만나는 와중에도 ‘그레테 블로흐(Grete Bloch, 게르티 바스너)’ 등 다른 여자들과 여러 번 연애를 한다. 특히 1918년 10월 가난한 유태인으로 호텔 허드렛 일, 타이피스트 등의 했던 줄리 보리즈코바(Julie Wohryzková, 1891~1944, 줄리 보리젝, Julie Wohryzeck)을 엘베 강변의 셸레센에 있는 요양촌에서 만난다. 줄리는 하숙집에 기거했고, 카프카는 치료 중이었다. 둘은 1919년 약혼했다. 카프카로서는 세번째 약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줄리의 ‘시온주의’ 신념에 반대, 결혼은 지지부진했다. 카프카와 줄리는 아파트를 빌려 결혼 날짜까지 잡았지만, 가족의 반대 등이 겹처 끝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카프카가 또다른 여인을 만나면서 1920년 7월 헤어졌다. 카프카와 헤어진 줄리는 은행원 요제프 베르너를 만나 1921년 11월에 결혼했다. 하지만 줄리도 나치의 유태인 탄압을 피해가지 못했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1944년 8월 26일 사망했다.

카프카와 밀레나 예센스카(Milena Jesenska, 1896~1944). 밀레나는 1944년 나치 독일 게슈타포에 체포돼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1944년 47세로 사망했다.출처=www.e-cultura.pt

8.1920년 말에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유부녀인 밀레나 예센스카(Milena Jesenská, 1896~1644)와 연애했다. 밀레나의 아버지  얀은 프라하 찰스 대학의 치과 교수이자 치과 병원 소유주였지만 비유태인이었다. 아버지는 딸이 유태인 에른스트 폴락(은행원이자 외환 트레이더)과 사귀자 밀레나를 정신병원에 가뒀지만 9개월만에 나와서 1918년 3월 18일 결혼, 비엔나로 이주해 버렸다.
밀레나는 비엔나에 살면서  1919년부터 프라하 잡지 '트리부나(Tribuna)'에 글을 기고하면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 밀레나가 카프카를 만난 것은 1919년 가을 비엔나였다. 둘은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예센스카가 남편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척되지 않았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2년 5월이었다.
카프카와 헤어진 밀레나는 1924년 에른스트 폴락과 이혼, 비엔나를 떠났다. 그리고 1926년 프라하로 돌아왔고,1927년 아방가르드 건축가 야로미르 크레이카르(Jaromír Krejcar,1895-1949)를 만나 1927년  재혼했다. 하지만 둘은 1934년 이혼했다.
밀레나는 직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 활동했지만 1936년 당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제명됐다.1939년 유태인 탈출 도우미로 일하다가 그해 11월 11일 나치 게슈타포에 체포돼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이송됐다. 1944년 5월 17일 사망했다.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 도라 디아망(Dwojra Diament, 1900~1952). 출처=https://prag-to-go.com/

9.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은 1923년 발트해 도시 그라알-뮈리츠(Graal-Müritz)에서 만난 폴란드 파비아니체의 정통 유태인 가정 출신의 유치원 교사 도라 디아망((Dwojra Diament, 1900~1952, 결혼 후에 디만트 라스크로 개명)이다.
스물다섯살의 도라는 그라알-뮈리츠에 있는 베를린 유태인 가정(Berlin Jewish People's Home)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40살의 카프카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그들은 그 후 3주 동안 만나면서 베를린으로 가서 함께 살 계획을 세웠다. 이후 베를린과 비엔나 등에서 동거를 하다가 카프카가 비엔나 외곽의 요양원에서 숨질 때까지 함께 했다.
카프카 장례식후 도라 디아망은 카프카의 부모님 집에 두 달 동안 머물렀다. 그후 베를린으로 돌와왔다가 1926년 도라는 뒤셀도르프 극장의 연극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극을 공부했고, 전문 배우로 일했다. 그녀는 1928년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니콜로 왕(King Nicolo, or Such is Life)'에서 여주인공 알마 공주 역을 맡아 열연해 극찬 받았다.
1930년대 도라는 선동가로서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고, 루드비히 (루츠) 라스크와 1932년 결혼했다. 둘은 1934년 3월1일 딸을 낳았는데 그녀는 딸 이름을 프란치스카(프란츠) 마리안느 라스크로 지었다.
도라는 1936년 딸을 데리고 독일을 탈출, 소비에트 러시아에 있는 남편과 합류했다. 그러나 남편이 소련당국에 1938년 3월 체포돼 극동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자 다시 소련을 탈출했다.
도라와 딸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일주일 전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적국(독일)의 외국인’으로 취급당해 아일랜드 맨섬 포트에린 여성수용소에 억류됐다가 1941년에 석방됐다. 이후 1942년부터 런던에서 딸과 함께 어렵게 살다가 1952년 사망했다. 시베리아로 유배간 남편은 1953년까지 출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카프카의 일기장과 그가 1940년 그린 삽화. 출처=게티이미지뱅크.https://kafkamuseum.cz/

10.카프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징병 대상자로 오스트리아군에서 영장을 발부했으나 결핵 등 병과 직장인 노동보험공단에서 ‘필수 인력’으로 인정, 제외됐다.
전장에 가지 않은 대신 귀향한 전쟁 부상자들, 특히 러시아 제국령에서 들어온 아슈케나짐 유대인 난민들을 많이 상대했다. 이른바 껍데기 유대인에서 전통을 지키는 유대인을 만나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은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였다.

1924년 카프카 요절 직전에 발행된 진단서.https://kafkamuseum.cz/

11.1920년 전후에서는 카프카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20세기 독일 모더니즘 대표작가 로베르토 무질이 카프카를 만나러 프라하를 찾아오기도 했다. 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프란츠를 만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허약한 몸이었던 카프카는 신경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곤 했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던 말년에 카프카는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다.
1924년에는 '굶주린 예술가'(Ein Hungerkünstler)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결핵이 목구멍에 집중돼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체코 프라하 신 유대인 묘지(New Jewish Cemetery)에 있는 프란츠 카프카 묘와 묘비.https://www.flickr.com/

12.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니더오스트리아의 작은 시장 마을인 페르니츠의 의사에게 진찰해 보니 결해균이 후두까지 퍼진 상태였다. 이에 비엔나의 대학병원으로 옮겨 폐 질환 전문의인 하이에크 교수의 진찰을 받고, 다시 키얼링의 요양소로 돌아왔다. 직후 도라 디아망의 손을 잡고 영면했다. 사인은 폐결핵으로  향년 41세의 요절이었다. 숨을 거두기 전에 현장에 없었던 절친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유언했다.
유해는 체코 프라하로 이송돼 올산스케(Olsanske)에 있는 신 유대인 묘지(New Jewish Cemetery)에 묻혔다.묘비는 2m 높이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디자인됐다. 아버지 헤르만은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살았고, 카프카가 묻힌 곳에 함께 했다.

카프카 절친 막스 브로트. 카프카의 원고 폐기 유언에도 간직했다가 책으로 출판했다.https://kafkamuseum.cz/

13. 카프카 사후 절친 막스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모두 보존, 출판 작업에 나섰다.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던 브로트는 수정까지 했다. 브로트 사후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다.
다음 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가 영국 독문학자인 M. 패슬리의 중재 하에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기증, 보존하도록 했다. 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본이 아닌 순수한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다.
프라하 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프란츠의 작업실은 서점으로 부활해 있다. 프라하 성 앞 카를 다리 인근에는 프란츠 카프카 기념 박물관도 있다. 2001년 체코에서 프란츠 카프카 상(프란츠 카프카협회, 프라하 시)이 제정돼 매년 시상하고 있다.

체코 프라하 블타바 강 유역 올드타운 635에 있는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안뜰에는 예술가 데이비드 세르니(David Černy)의 작품 '오눔 누는 사람'이 서 있다.출처=https://praguebestplaces.com/

14.카프카가 독문학계를 넘어 세계적인 유명 작가로 올라선 것은 당대의 실존주의자들 영향이 컸다. 프랑스의 지성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와 시몬 드 보바르 등이 극찬한 것이다.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José de la Concordia García Márquez, 1927~2014,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의 저자)도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국계 미국인 시인 위스턴 휴 오든 (Wystan Hugh Auden, 1907~1973)은 카프카를 "20세기의 단테"라고 불렀다.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боков,1899~1977)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 春樹, 1949~현재)는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와서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펴냈다. 이 소설은 ‘프란츠 카프카 상’을 받았다.밀란 쿤데라(1929~2023)는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프카에게서 따온 소재를 자주 언급했다. 한편 프라하 카프카 박물관(Muzeum Franze Kafky)은 블타바 강 유역의 프라하 올드타운 지역에 있다.  말로스트란스카 환승 정류장(버스, 트램 등) 바로 인근에 있다.

프라하에 있는 야로슬라프 로나(Jaroslav Rona, 1957~현재)가 만든 프란츠 카프카 동상.로나는 체코계 유태인으로 조각가, 화가, 배우, 교육자, 작가이다.https://fr.wikipedia.org/

15.미국의 유명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세 명은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프란츠 카프카”라고 서슴없이 꼽았다.
독일 유명 소설가 토마스 만은 “카프카는 몽상가였다.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들이라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해리 슈타인하우어 문학교수는 “카프카는 20세기의 어떤 작가보다 문학계에 더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격찬했다.
루마니아 작가 미르체아 카르타레스쿠(Mircea Cărtărescu, 1956~현재)는 "카프카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며 나에게 문학의 문을 의미하는 작가, 문학의 성자"라고 말했다. 한편 카프카 작품이 영어로 번역된 첫 번째 사례는 1925년 윌리엄 A. 드레이크(William A. Drake)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The New York Herald Tribune)에 "아카데미를 위한 보고서(A Report for an Academy)"를 발표했을 때이다.

체코 프라하 카프카 박불관에서 바라본 카를교와 프라하성. 출처=kafkamuseum.cz

16.카프카는 체코 출신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체코)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독일어를 쓴 만큼 독일 문학사의 주요 인물로 거론되는 '독일어권 작가'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카프카의 혈통이 유대인이므로 이스라엘의 작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오니즘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였다. 이 때문에 카프카 절친 막스 브로트 사후 연인 에스터 호페(1906~2007)와 이스라엘 정부 측에서 브로트가 공개하지 않은 카프카의 여러 유품 및 친필 원고에 대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88년 소더비 경매에서 독일 서적상이 198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소송’ 친필 원고를 낙찰받았다. 당시 현대 원고 사상 최고가였다. 이 서적상은 "이 작품은 아마도 20세기 독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일 것"이라며 "독일은 이 작품을 가져야만 했다"고 말했다. 낙찰자가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에 기증하자 반환을 요구했으나 독일은 철저히 무시했다.
당시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도서관장 다비드 블룸버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인 카프카의 자료는 이스라엘이 소장하는 것이 옳다"는 발언을 했다가 힐난을 받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무시당했지만 2012년 10월 이스라엘 법원은 ‘카프카의 모든 유품은 이스라엘이 소유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영국 작가 윌 셀프는 데일리 미러 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스라엘이 카프카를 시오니즘의 성인으로 둔갑시키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카프카 본인이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고 이스라엘의 추태를 비판했다.
그런데 유족이나 직계 후손이 없는 상황이어서 스위스 취리히 은행에 보관 중이던 남겨진 카프카의 친필 원고는 2019년 7월 스위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8월7일 공개)으로 이송됐다.

1909년 카프카가 요양했던 체코 프라하 동부 스파로 유명한 타트란스케 마틀리아레(Tatranse Matliare)의 빌라 타트라에 2001 년 8월16일 세워진 기념표식.출처=https://www.tatry.sk

17.주요 작품으로는 유고 장편소설 ‘소송(심판, Der Prozess)’, ‘성(Das Schloss)’, ‘아메리카(Amerika)’가 있다. 주요 중, 단편소설에는 ‘변신(Die Verwandlung)’,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가 있다.
카프카 사후 작품 특성을 빗대어 ‘카프카스러운(Kafkaesque)’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케임브리지 단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말로 ‘매우 혼란스럽고, 불쾌하며, 충격적인 상황’을 뜻한다.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변신’을 모티브로 피아노곡을 썼고, ‘유형지에서’와 ‘소송’을 오페라로 작곡했다. 한국에서 카프카와 절친 브로트, 브로트의 연인 에스다 호페를 소재로 창작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 제작됐다.

아일랜드 일러스트레이터 힐러리 라울러(Hilary Lawler)가 그린 카프카 소설 '변신' 관련 다양한 표지 일러스트.출처=https://hilboillustrations.wordpress.com

18.카프카의 소설은 세계 소설사상 보기 드물게 많이 연구되는 작가다. 연구 문헌만 전 세계에서 500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1983년 1월10일 미국 천문학자 랜돌프 커크와 도널드 루디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천문대에서 발견한 소행성에는 ‘3412 카프카(Kafka)’가 명명됐다.
2011년 1월 처음 출시된 오픈 소스 스트림 처리 플랫폼인 아파치 카프카(Apache Kafka)에도 Kafka 이름이 명명됐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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