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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수상록(Essais)-프랑스 정신의 아버지 몽테뉴가 쓴 에세이의 첫 문단은 '죽음'을 명제로 시작한다 본문

제1장 늙음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어도 겁먹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고 대부분 그 단어가 마치 악마라도 되는 듯 성호를 긋는다. 유언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언급해야 하므로 의사가 최후 선고를 해야만 유언장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얼마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지는 신만이 안다. 로마인들은 죽음이라는 말이 잔인하고 거슬린다는 이유로 이를 부드럽게 돌려 말하기 시작했다. '죽었습니다.'라는 말 대신 '삶을 마쳤습니다.' 혹은 '생을 살았으니 이제 갔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서로를 위로했다.
1533년 2월 마지막날 태어난 나는 현재 39살이 된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여전히 그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먼 죽음의 일을 생각하느라 현재를 방해받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젊은이나 늙은이 모두 같은 조건에서 삶을 마치게 되니 말이다. 그대의 삶의 시한은 누가 정하는가?타인의 이야기에 근거를 두지 말고 차라리 자기삶의 실상을 보아라"(미셸 몽테뉴 저,정영훈 편,안해린 역, 메이트북스, 2019)

1.인간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첫 문단이다.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망설임없이 책의 처음부터 명제로 채택했다.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글을 이끌어가고 있다. 오랜시간 깊은 사유없이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을 끌어내는 필력이 대단하게 다가온다. 철학 산문이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관을 비웃듯 상징이나 비유를 자제하고 아주 쉬운 수필체 문장 하나하나가 돋보인다. 그리고 독자가 옆에 있다는 듯이 만 39살의 철학자가 묻는다. 그대의 삶의 시한을 누가 정하느냐고. 본문에 나오는 *성호(聖號)는 종교에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는 십자 형식의 손짓을 말한다.
2.몽테뉴의 수상록(Essais,1580)은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명작으로 에세이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다. 근대이후 모든 이들이 평생을 베개맡에 두고 읽어야 할 걸작이라고 할 수있다.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적 사유의 철학 산문집 중 으뜸이다. 1580년 '몽테뉴의 영주 미셸 전하의 에세이(1571~1580년 사이에 쓴 글)'라는 제목으로 전 2권이 보르도에서 간행됐다. 그런데 1580~1588년 고치기와 가필(加筆)를 거듭해 1588년 3권으로 다시 발간됐다. 이후 수양딸 구르네(Mllc de Gournay)가 1588년 판의 원문 속에 새로 덧붙여진 것들을 삽입하고 정정을 해 1595년 판을 출판했다. 이 세번째 책이 오랫동안 결정판으로 인정됐으나 나중에 원문 여기저기서 수양딸 구르네의 가필(加筆) 흔적이 발견되면서 두번째 간행한 '보르도 본(보르도 시립 도서관 보존 이유)'이 정통판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상록은 당대에 수많은 모방작이 나올 정도로 인기 작품이었다.종이와 인쇄시설이 매우 귀한 시대였음에도 저자가 영면한 지 70년이 지난 1660~1670년까지도 2, 3년마다 재판을 찍었다. 원제는 Les Essais de Michel de Montaigne이다. 에세는 당시 뜻으로 시험 ·시도(試圖) ·경험 등을 의미했다.하지만 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무신론)이 곳곳에 써있다는 이유로 가톨릭 국가들의 비판을 받았고, 결국 가톨릭 금서목록에 등재됐다. 그 바람에 프랑스 등에서 수십년 동안 수상록이 출판되지 못했다.
영어로는 1603년 영국 런던에서 첫 번역판이 나왔다. 스튜어트 왕가 출신의 최초 영국 왕 제임스1세(James I, 1566~1625) 궁정의 왕실 영어교사였던 이탈리아계 존 플로리오(John Florio 혹은 Giovanni Florio,1552~1625)가 번역했다. 직후 수상록에 나오는 식인종 글을 읽고 윌리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가 '템페스트'를 썼다고 한다. 이후 영국에서 수상록 모방 작품들이 잇따랐고, 제목까지 그대로 쓴 경험철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유명한 수필집 '에세이'가 나왔다. 영어로는 Essays, 한문으로 일본 번역 때 隨想錄으로 썼고,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와 수상록으로 쓰고 있다.

3.수상록은 유럽 역사상 가장 험악한 시대인 가톨릭과 개신교(위그노,Huguenot) 사이의 종교전쟁(Wars of Religion, 1562~1598) 이라는 광기의 시대에 쓰였다. 당시는 가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신교)간에 살륙전이 벌어지면서 온갖 거짓말과 권모술수,배신이 판을 치는 시대였다. 수상록은 저자가 이때 느낀 감정과 야심, 궁정생활의 갈등, 친구 라 보에티의 죽음,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독단적인 종교적 사고에 대한 비판 등을 담아냈다.그래서 이 책의 결론으로 도출하는 명제로 '크 세 주?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 명제는 날카로운 관찰과 관용(자비)을 의미한다.
실제 저자는 수상록 서문에 독자에게 들려주는 글을 자세히 썼다. 몽테뉴는 서문에 이 책은 자못 정성을 다해 기록한 것으로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글을 세상 사람들의 호의를 사려는 의도에서 썼다면 좀 더 스스로를 장식하고 조심스럽게 검토해 책을 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특정 목적없이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이 없는 글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수상록은 고대 그리스 등 옛과 당대의 수많은 고전과 사상을 인용, 저자의 윤리적, 철학적 논지를 설파한다. 특히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 철학이 대거 나온다. 또 합리적 사고 및 근대적 자아, 비판 정신이 고스란이 녹아 있다.그래서 르네상스( Renaissance,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 이후 근대 사상의 초석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자아 인식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 수 없다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자아인식이 자신의 지혜로운 정신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교육에 대해서도 현대인보다 더 합리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은 주입식이 아닌 판단력을 키우고 도덕적으로 독립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몽테뉴의 아버지 피에르 에캠의 교육 방식이라고 한다.
5.수상록은 저자가 주요 관직에서 물러나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의 평안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쓴 글이다. 제1권은 스토아 철학적 사고속에서 지식을 총동원해 인용적 글로 채웠다. 저자의 확실한 시각이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제2권은 현실적 경험을 토대로 이론적인 지식이 인간을 구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썼다. 결론은 회의적이라는 것에 도달하는 기록이다.제3권은 여행, 외교, 보르도 시장 등 현실적 경험을 녹아냈다. 풍부한 경험 속에서 나온 근거를 바탕으로 자기 경험을 정리해 자신의 사상 체계를 주장하고 전개했다.

6.수상록은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17세기 말 종교적 신념주의자들이 종교에 회의적인 몽테뉴의 시각을 공격했다. 유명한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팡세(Pensees)'에서 "몽테뉴가 말한 '어리석은 시도'나 '죽음에 대한 신앙 없는 태도'는 혼란스럽다"고 비판했다.
다른 많은 가톨릭 신봉주의자들도 몽테뉴를 무신론자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에 수상록은 1640년 스페인에서 금서 목록에 올랐고, 이어 1676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금서 목록에 등재됐다. 이때문에 1670년대 초부터 수상록은 프랑스 등 가톨릭 국가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수상록이 프랑스에서 다시 해석된 것은 1724년 영국 출판물이 다시 파리로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특히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프랑스백과전서(1751~1780)의 편집 발행자인 철학자 데니스 디드로(Diderot, Denis , 1713~1784)는 파스칼이 비난한 몽테뉴 문장의 무질서를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며 찬양했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 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도 몽테뉴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때부터 몽테뉴는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로 '좁은 문(La Porte Étroite, 영어 Strait Is the Gate)'의 작가 앙드레 지드(André Gide,1869~1951,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 는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그가 바로 나 자신인 것 같다”고 찬양했다.
7. 수상록은 현대 프랑스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책이다. 프랑스인의 필독 도서이기도 하다.이는 지도층의 인식에서도 잘 나타난다. 프랑수아 모리스 아드리앙 마리 미테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 1916~1996) 전 프랑스 대통령(재인 1981~1995)의 공식 초상화에는 손에 수상록을 펼쳐 들고 앞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
영국에서도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영국 언론인이자 정치가 인 JM 로버트슨(John Mackinnon Robertson, 1856~1933) 은 "수상록이 셰익스피어 연극의 언어, 주제 및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수상록을 잘 설명한 책도 있다. 현대 영국의 르네상스 전문가 솔 프램튼(Saul Frampton,옥스포드대학 르네상스학 박사)이 지은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이다. 수상록의 핵심만 발췌, 설명하는 뛰어난 식견을 담은 저서다. 제목만 갖고는 수상록과 관계없는 책으로 느낄정도지만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8.한국에서 책 제목은 '수상록'으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다만 학술논문에서는 '에세'가 더 많이 쓰인다고 한다. 책 이름이 수상록이 된 것은 한국어로 첫 번역한 역자 손우성(孫宇聲, 1904~2006,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이 1965년 일본어 번역판(隨想錄)을 중역해서 한국에서 '수상록(隨想錄)'으로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프랑스 원문 한글 완전 번역본이 나온 것은 2022년 6월이다. 민음사에서 1988페이지에 달하는 원문을 번역,간행했다.두명의 번역자가 10여년동안 공들여 완역본을 냈다고 한다.

#.미셸 에캠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1533~1592)=프랑스 정신의 아버지. 날카로운 비판 정신의 모럴리스트이자 정치가. 16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가, 교육학자로 삶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철학자. 근대 개인주의 문학 형식의 창시자. 대항해 시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의 식민지화에 반대한 완벽한 근대인으로 불린다.

1.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 페리고르 지방의 보르도시 생 미셸 드 몽테뉴 마을 몽테뉴 성에서 부유한 청어 상인인 증조부 라몬 펠리페 에켐(Ramon Felipe Eyquem) 가문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남작령에 해당하는 몽테뉴 성과 영지를 사들이고, 직위를 인정받아 귀족이 됐다.
군인이었던 아버지 피에르 에캠(Pierre Eyquem, 보르도 시장 역임)은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했다.어머니는 스페인계 유대인 앙투아네트 드 루페 드 빌뇌브(Antoinette López de Villanueva)이다.몽테뉴는 8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몽테뉴는 프랑스어를 못하는 독일인 가정교사 호스타누스(Horstanus)의 조기 라틴어 교육 덕분에 6세 때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이후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2.몽테뉴는 보르도의 기옌 대학(Collège de Guyenne) 중등학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역사가이자 인본주의 학자인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Seòras Bochanan , 1506~1582)의 지도를 받았고,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21세 때 아버지가 내놓은 페리괴의 조세 재판소 판사직을 이어받았다. 이 조세재판소는 보르도 고등법원에 합병됐고, 몽테뉴는 1570년까지 일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약 15년간 법관 생활을 한 셈이다.
하지만 법관이라는 직업이 잘 맞지 않았던 몽테뉴는 법률 운용체계의 모순을 깨달았지만 개혁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때 영향을 준 인물이 문필가이자 언어학자였지만 판사로도 활동한 라 보에티(Estienne de La Boétie,1530~1563,시민 불복종 과 비폭력 저항을 첫 주장)이다. 그런데 라 보에티가 젊은 나이에 이질로 요절, 큰 상처를 받았다.
3.몽테뉴는 33세인 1565년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의 딸인 프랑수아즈 드 라 사세뉴(Françoise de la Chassaigne)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는 6명의 딸이 태어났으나 한 아이(레오노르,Léonor)를 제외하고 모두 어려서 사망했다. 몽테뉴는 이후 부인과의 애정이 사라지면서 숱한 여인들과 연애하기도 했다. 성장한 몽테뉴의 딸 레오노르는 후에 프랑수아 라투르(François de la Tour)와 결혼했고, 이혼 후 샤를 드 가매치(Charles de Gamache)와 재혼했다.

4.몽테뉴는 1568년 아버지 사망으로 작위를 물려받았고, 몽테뉴 영주가 됐다. 이듬해는 생전 아버지가 부탁했던 스페인 신학자 레몽 드 세봉의 라틴어 학술서 '자연신학'을 번역했다. 1570년 법원을 그만 둔 몽테뉴 는 영지에 틀어박혀 저술에 몰두했다. 성에는 아직도 라티어 글귀 '1571년, 38세의 나이에 오래전부터 법원과 공직의 예속 생활에 지친 미셸 드 몽테뉴가 박식한 처녀들(뮤즈)의 품 안에 쉬노라.'가 쓰여 있다고 한다.

5.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수상록(Essais)'은 몽테뉴성에서 탄생했다.짧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적인 소논문을 틈틈히 쓰고 교정하고, 가필했다가 1580년 책으로 낸 것이다. 몽테뉴는 워낙 젊은 나이에 은퇴했기 때문에 파리 궁정의 부름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문예의 아버지이자 부흥자라는 칭호를 얻은 프랑수아 1세(Francis I, 1494~1547)와 앙리2세(Henri II, 1519~ 1559),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1519년 ~ 1589)의 아들 샤를 9세(Charles IX,1550~1574), 앙리 3세(Henri III, 전 이름 Alexandre Édouard,1551~1589)의 신임이 두터웠다.
1571년 성 미셸 훈위(Order of Saint Michael)를 받았고, 1577년에는 신교도 지도자인 앙리 드 나바르(Henry of Navarre, 후일 국왕 앙리 4세,1553~1610)의 시종이 됐다. 신구파의 종교 전쟁 한가운데에 선 것이다. 앙리 드 나바르는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 프랑스 국왕 앙리4세로 취임해 낭트 칙령(Edict of Nante,1598,위그노에 종교자유 부여)을 공포했다.

5.1580년 수상록을 간행한 직후 신장결석으로 요양을 떠나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런데 여행 중 보르도 시장에 선출돼 1년 반 만에 귀국했다. 이후부터 가톨릭 동맹과 신교도 동맹 사이의 종교 내란에 휘말렸고, 창궐한 페스트 극복에 심혈을 쏟았다. 4년간의 시장 임무를 마치고 1586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년 후 다시 종교 내란으로 종교 전쟁의 중심에 휘말렸다.
몽테뉴는 양측의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하자 신교도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Henry of Navarr, 나중에 앙리4세 국왕)의 밀서를 가지고 앙리 3세를 만났다. 몽테뉴는 앙리 드 나바르가 후일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 앙리 3세와 화해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구교동맹의 지도자인 기드공작 앙리 드 기즈((Henri Ier de Guise,1550~1588)가 1588년 앙리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른바 '3앙리전쟁(War of the Three Henrys,1587~1589)'이 시작된 것이다. 앙리3세는 파리에서 쫓겨나 루앙으로 갔는데 몽테뉴는 국왕을 시종했다. 기즈 공작의 반란에 화가 난 앙리 3세는 블루아(Blois,프랑스 중부 도시)에서 삼부회의를 여는 한편 그해 말 앙리 드 기즈를 암살했다. 그런데 또한번의 변혁이 일어났다. 앙리 드 기즈의 암살에 앙심을 품은 구교동맹이 앙리 3세를 암살한 것이다. 이후 왕위계승권자인 앙리 드 나바르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몽테뉴의 예상대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몽테뉴는 충성을 맹세하고 보르도 지역일대가 국왕에 충성하도록 이끌었다.

6.몽테뉴의 말년은 행복했다. 귀족 가문(앙리 3세의 재무관) 출신의 젊은 아가씨 마리 드 구르네(Marie de Gournay,1565~1645,나중에 작가, 문학 비평에 기여한 최초의 여성)가 '수상록'를 읽고 감동, 말년의 몽테뉴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그녀를 수양딸로 삼고 그녀에게 수상록 저작권 등을 맡겼다.
몽테뉴는1592년 9월 13일 후두염을 앓다가 자택에서 영면했다. 향년 59세였다. 집 근처에 묻혔다가 나중에 유해가 보르도의 성 앙투안 교회로 옮겨졌다. 하지만 교회마저 철거됐다.그런데 프랑스 보르도 아키텐 박물관은 2019 년 11월 20일에 1년 전 박물관 지하에서 발견된 인간 유해가 몽테뉴의 것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진실은 아직 공표되지 않고 있다.

7.몽테뉴는 '수상록'으로 계몽주의의 선구자이자 철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장자크 루소(Jean-Jaques Rousseau,1712~1778)와 데니스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3)가 몽테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상록 등 저작물은 프랑스인들에게 1789년 프랑스혁명의 밑바탕을 쌓은 것으로 받들어졌다.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토대 제공자 장자크 루소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몽테뉴를 높이 평가했다.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폰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는 몽테뉴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연 회귀를 주장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비평가이자 수필가인 윌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 1778~1830)은 "인간으로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쓴 용기를 가진 최초의 인간"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는 몽테뉴의 문화상대주의와 '간결하고 발랄한 회의주의'를 찬양했다.
20세기의 프랑스의 유명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몽테뉴가 쓴 식인종에 대한 글을 언급하며 '인류학자 몽테뉴'라고 경의를 표했다. 미국의 영화감독 오슨 웰스(: Orson Welles,1915~1985)는 몽테뉴를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찬양했다. 20세기 문학평론가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1892~1957) 는 몽테뉴를 '최초의 현대인'이라고 평했다.

8.몽테뉴의 어록은 대단한 인사이트를 보여준다. 수많은 철학자의 잠언(箴言) 중에서도 폐부(肺部)를 찌르는 듯 하다. "결혼은 새장과 같다. 밖에 있는 새들은 필사적으로 들어오고 싶어하고, 안에 있는 새들은 필사적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옥좌에 오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 있을 뿐이다" .
또 "우리는 키케로가 이렇게 말했다거나, 플라톤의 '도덕론'이 어떻다거나,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라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잘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우리는 무슨 말을 하나?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말이야 앵무새라도 곧잘 할 테니 말이다"

9.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미완성 원고로 몽테뉴 전기 '위로하는 정신'을 남겼다. 몽테뉴의 삶을 유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은 몽테뉴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존중하기 어렵다"며 "운명에 의해 폭포 같은 격동의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수상록을 평가했다.
일본 유명 작가 홋타 요시에(ほった よしえ, 堀田善衛,1918~1998)의 몽테뉴 장편 전기 '몽테뉴 1~3'도 1999년에 발간됐다.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인 철학자 앙투안 콩파뇽(Antoine Compagnon, 1950~현재)의 '인생의 맛'도 있다. 몽테뉴 전문가이자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라디오방송에서 이야기했던 것으로 엮었는데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10.프랑스 파리에 몽테뉴 거리가 있다. 원래 샹젤리제 로터리 근처의 '미망인의 거리 (the allée des Veuves)'였으나 18세기 초에 미셸 드 몽테뉴를 기리기 위해 몽테뉴 거리로 바뀌었다. 현재 몽테뉴 거리에는 루이비통, 디올, 샤넬, 랄프로렌, 입생로랑, 구찌, 샤넬, 프라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베르사체, 돌체앤가바나 등의 명품 매장이 들어서 있다. 2014년 나온 루이비통 핸드백 이름인 '몽테뉴mm', '몽테뉴bb'도 이 거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보르도 대학 인문학부(Université Michel de Montaigne Bordeaux 3)는 몽테뉴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