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스케치 북(립 밴 윙클)-단편과 에세이를 담은 작품집은 변방 미국 문학의 지평을 연 소설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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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북(립 밴 윙클)-단편과 에세이를 담은 작품집은 변방 미국 문학의 지평을 연 소설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7. 19.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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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야기는 뉴욕의 한 노신사인 고(故)디드니히 니커보커의 기록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는 이 지방의 네덜란드 역사와 이곳 초기 개척민들의 후손들의 풍습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역사 연구는 책보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책에는 애석하게도 자신이 즐겨 다루는 주제가 많이 들어 있지 않고 마을의 늙은이들과 그들의 부인들이 진실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전설을 많이 알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지가 활짝 펴진 아래 지붕이 나지막한 농가에 아득하게 살고 있는 착한 네덜란드인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는 그들을 걸쇠가 있는 블랙 활자로 된 작은 책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고 달려들어 책벌레의 열정으로 그들을 연구했다.”(박경서 옮김, 문학수첩, 2004)

워싱턴 어빙의 소설 '립 밴 윙클'은 1903년에 이어 1921년 영화로 제작됐다.우크라이나 출신 미국 감독 에드워드 루드비히가 만든 'Rip Van Winkle(1921)'포스터.photo by wikipedia

1.국내 번역 출판된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The Sketch Book,2004)’에 소개된 첫 작품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잠에서 깬 한 사내의 꿈같은 이야기’ 의 도입부다. 단편인 립 밴 윙클은 미국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Rip Van Winkle은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굳이 해석하면 ‘잠자는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두가지 뜻이 있다.
독일의 ‘피터 클라우스(Peter Klaus)’ 전설을 소재로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과 계곡 등을 대입해 판타지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1818년 4월 가족들 앞에서 초고가 발표됐다.
이 소설이 나와 호평을 받으면서 작가 워싱턴 어빙은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아버지로 떠올랐다. 립 밴 윙클 첫 문단에 나오는 디드니히 니커보커는 워싱턴 어빙의 필명 중 하나다.

2.립 밴 윙클은 전형적인 ‘꿈’ 소설이다. 소설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립 밴 윙클이 사냥을 나갔다가 노인들이 준 술을 먹고 잠을 잤다가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사라진 이야기다. 잠들어 있는 동안 2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 소설은 미국 판타지 소설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설을 대입시켜 환상소설로 풀어냈는데 재미를 더했기 때문이다. 한편 소설은 뉴욕 인근 캐츠킬 산맥과 계곡 등을 배경으로 하는데 어빙은 소설을 쓰기 전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3.립 밴 윙클은 연극과 뮤지컬, 만화, 오페라 영화로 제작됐다. 첫 오페라는 조지 프레드릭 브리스토우(George Frederick Bristow,1825~1898)가 1855년 만들었다. 첫 영화는 1903년에 ‘립 밴 윙클’로 나왔고, 1921년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 감독 에드워드 루드비히(Edward Ludwig,1899~1982)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했다.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 '스케치북(1819)'초판본 첫 페이지.photo by wikipedia

4.워싱턴 어빙의 ‘스케치 북(The Sketch Book of Geoffery Crayon, Gent, 1819~1820)’은 34편의 에세이와 단편 소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제목의 Geoffrey Crayon은 어빙이 첫 사용한 가명(필명)이다.
스케치북은 영국 등 유럽에서 처음으로 널리 읽힌 ‘미국 문학’ 작품이다. 유럽 문학시장을 개척한 프론티어라  할 수있다. 19세기 초만 해도 미국 문학은 유럽에 소개되지도 않을 정도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작품집에 다뤄지는 많은 수필은 영국인의 삶과 풍경을 어빙 특유의 시각과 유려한 문체로 묘사해 미국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스케치북은 영국판과 미국판으로 각각 출판됐다. 영국판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역사가이자 소설가, 극작가인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1831)에게 헌정했다
스케치북의 첫 번째 미국판은 23개의 단편 소설과 에세이로 구성돼 1819년에 나왔다. 이후1820년까지 책에 담긴 단편과 에세이를 첨삭하거나 다르게 배치해 12개 종으로 출판됐다. 두 권을 한 권의 양장본 버전으로 낸 것은 1824년 출판사 밴윙클(Van Winkle)이 미국에서 내놓았다.

5.스케치북은 영국에서 나오자 마자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신대륙인 미국 문학에 대해 낮은 평가를 했던 영국에서 미국인이 쓴 책이 호평을 받자, 한 영국인은 어빙에게 ‘정말로 미국인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빙의 스케치북이 영국에서 호평받은 것은 치밀한 취재력과 철저한 현지 조사 등으로 완벽한 영어 문장력과 문학적 묘사, 뛰어난 구성, 미학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5.스케치북의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오늘날 ‘크리스마스 풍경’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빙은 영국 시골 저택에서 있었던 구식의 성탄절 축하 행사를 26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묘사했다. 버밍엄 등에서 있었던 겨울철의 성탄 풍경을 따뜻하게 그린 것이 미국 가정 등에서 급속히 확산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성탄절 문화는 이런 미국  풍습이 해방이후 미군, 개신교와 함께 전래된 것이다.
스케치북 출판 20년 후에 유명한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A Christmas Carol, 1843)’을 쓴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는 “어빙의 크리스마스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뉴욕 써니사이드에서는 문인들이 수시로 모임을 가졌다. 워싱턴 어빙(의자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과 써니 사이드의 문학 친구들을 제목으로 한 그림.photo by wikipedia

6.스케치북에 대한 동료 작가와 당대 유명인의 평가는 좋았다. 작가 어빙도 영국에서 성공에 대해 미국 출판사에 보낸 글에서 “영국에서 내 글이 성공한 것에 놀랐다”며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납득 안된다”고 썼을 정도다.
실제 19세기 미국의 유명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대표작 인생찬가)는 “스케치북이 (자신의)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작품 중 하나”라고 격찬했다. 롱펠로는 자신의 첫 번째 책은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대 유명 영국 역사가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1756~1836)은 “스케치북에서는 최고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지닌 정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문학 및 정치 잡지 쿼터리 리뷰(Quarterly Review,1809년 창간)는 “스케치북은 영어를 온전히 힘과 완전함으로 리서치했다”며 “귀중한 문학 광산에서 광석을 정제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화가 존 웨슬리 라르비스(John Wesley Jarvis,1780,1781~1839)가 1809년에 그린 워싱턴 어빙 초상화. photo by wikipedia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미국 최초의 단편소설 작가. 19세기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 에스파냐(스페인) 주재 미국 대사.

1.미국 뉴욕 맨해턴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도인 아버지 윌리엄 어빙 시니어(William Irving, 1731~1807)와 성공회 신자인 잉글랜드 콘월 출신 어머니 사라 샌더스(Sarah Sanders, 1738~1817) 사이의 11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문은 맨해튼에 정착한 이민자 상인 계급이었다. 어빙의 이름은 독립전쟁 영웅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에서 따 왔다. 나중에 어빙은 실제로 조지 워싱턴을 만나게 된다.

조지 버나드 버틀러 주니어가 그린 워싱턴 어빙과 조지 워싱턴의 만남을 그린 1854년 수채화.photo by wikipedia

2.1802~03년 뉴욕에서 나오는 신문 ‘모닝 크로니클(Morning Chronicle’에 조나단 올드스타일(Jonathan Oldstyle)이라는 필명으로 풍자문(observational letters)을 쓰면서 문단에 나왔다.
1806년 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변호사보다 글쓰기를 우선해 ‘잡문(Salmagundi)’이라는 제목으로 평론 20편을 발표했다. 이후 디드리히 니커보커(Diedrich Knickerbocker)라는 필명으로 1809년에 쓴 ‘뉴욕의 역사(A History of New York)’가 인기를 끌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Diedrich Knickerbocker는 점차 맨해튼 주민들을 뜻하는 별명으로 발전했고, 1946년 창단한 ‘뉴욕 니커보커스 농구팀(New York Knickerbockers basketball team, 약칭 뉴욕 닉스,New York Knicks)’ 이름으로 사용됐다.

3.어빙은 오늘날 미국 국가로 유명한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1931년 미국 국가로 인정)’ 악보를 최초로 편집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미국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시인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1779~1843)의 시(詩) ‘포트 맥헨리의 방어(Defense of Fort McHenry)’를 편집, 인쇄해 배포했다.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814년 영국이 워싱턴 D.C.를 공격하자 입대, 뉴욕주 민병대 사령관인 다니엘 톰킨스(Daniel Tompkins,1744~1825, 미국 제6대 부통령)의 참모로 복무했다.
전쟁은 미국 상인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고,가족회사는 망할 위기에 처했다. 1815년 군에서 나온 어빙은 가족이 운영하는 무역회사를 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갔다.

워싱턴 어빙 초상을 토대로 한 1940년 미국 우표.photo by wikipedia

4.어빙의 연애는 허망했다. 26세 때 17살의 마틸다 호프만(Matilda Hoffman)을 만나 약혼했으나 그의 피앙세(fiancée)는 결혼을 하기 전에 사망했다.
어빙은 1822년 독일에 잠시 거주할때 드레스덴에 살고 있는 미국인 아멜리아 포스터(Amelia Foster)의 18세 딸 에밀리에게 끌렸고, 이듬해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어빙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5.어빙이 영미 문학계에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역사가이자 소설가, 극작가인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1831)의 지원과 격려가 크게 작용했다. 스콧은 어빙에게 ‘글을 쓰라’고 끊임없이 격려했다.
미국 작가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한 ‘스케치북’이 나온 것도 스콧의 적극적인 주선과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6.어빙은 1826년 스페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또 1829년에는 안달루시아의 고대 도시 그라나다(Granada)의 궁전인 알함브라(Alhambra, 붉은 요새라는 뜻으로 이슬람 건축의 백미)에서 잠깐이나마 거주했다. 어빙이 살았던 곳에는 현재 표석을 설치해놓았다.
어빙은 스페인 생활 중 열정적인 자료 취합을 통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의 역사( A History of the Life and Voyages of Christopher Columbus,1828)’을 썼다.
어빙이 쓴 콜럼버스 전기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소설적 요소)를 혼합한 전기서술 방식을 취해 재미있게 읽을수 있어 미국과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9세기 말까지 175판을 찍었다고 한다. 다만 이 책은 현대에 와서 ‘어빙의 상상력과 허구의 산물’로 콜럼버스를 지나치게 영웅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7.어빙은 1835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왔다. 태리타운에 있는 방치된 별장과 주변 부동산을 구입, 1841년 써니사이드(Sunnyside)로 명명했다.이해에 어빙은 국립디자인아카데미 (National Academy of Design)의 명예 학자로 선출됐다.
1842년 어빙은 미국 10대 대통령 존 태일러(John Tyler,1790~1862)에 의해 스페인 대사로 임명됐다. 임무를 마친 1846년 말에야 미국으로 돌아왔다.
어빙은 1859년 95세의 나이로 써니사이드 자택 침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구전에 따르면 마지막 말은 “글쎄, 나는 또 다른 밤을 위해 베개를 준비해야 한다. 언제 끝날까요?”였다고 한다. 뉴욕 슬리피 할로우의 ‘슬리피 할로우묘지(Sleepy Hollow Cemetery)’에 묻혔다.

미국 뉴욕 슬리피 할로우에 있는 워싱턴 어빙 묘지.photo by wikipedia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가 1876년 어빙을 위해 ‘태리타운의 교회 뜰에서(In the Churchyard at Tarrytown)’라는 헌시를 냈다. 롱펠로는 나중에 어빙에 대해 “미국 문학사에서 명예로운 이름과 지위를 얻은 최초의 사람” 이라고 평가했다.

8.주요 작품으로 ‘조나단 올드스타일의 편지(1802)’, ‘살마군디(1807~1808’, ‘뉴욕의 역사(1809)’,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의 역사(1828)’, ‘그라나다 정복 연대기(1829)’, ‘알함브라 궁전 이야기(1832)’, ‘마호메트와 그의 후계자들(1850)’, ‘조지 워싱턴의 생애(5권, 1855~1859) 등이 있다.
어빙은 뉴욕시의 별명 ‘고담(Gotham)’을 대중화 한 인물이다. 또 미국 화폐 ‘달러’에 대해 ‘전능한 달러(the almighty dollar)’ 라고 불렀는데, 아직도 널리 쓰고 있다.

뉴욕 어빙턴의 웨스트 서니사이드 레인과 노스 브로드웨이 교차로에 있는 워싱턴 어빙 기념관앞의 흉상. 미국 조각가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Daniel Chester French,1850~1931)의 작품.photo by wikipedia

9.어빙은 미국 곳곳의 도시와 마을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워싱턴 어빙 박물관(1854)이 있는 뉴욕 써니사이드 인근 디어먼 마을은 1872년 ‘어빙턴’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텍사스 주 텍사스 주 어빙시와 니커보커(Knickerbocker) 마을은 워싱턴 어빙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뉴저지 주 어빙턴, 샌프란시스코의 어빙 스트리트, 시카고의 어빙 파크(Irving Park) , 펜실베니아주 혼스데일의 어빙 클리프(Irving Cliff), 인디애나폴리스의 어빙턴(Irvington)등도 그의 이름을 기념하고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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