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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불온한 세월 속에서 세대 갈등을 성찰한 소설의 첫 문단은 독자의 혼란을 부른다 본문
“‘그래 뾰뜨르, 아직도 안 보이나?’ 1859년 5월20일, ***거리의 어느 여인숙 현관 앞 야트막한 계단을 내려서면서 마흔 살 가량의 지주 나리가 하인에게 물었다. 지주 나리는 먼지 묻은 소박한 외투에 줄무늬 바지 차림이었으며 모자는 쓰지 않았다. 하인은 턱에 솜털이 보송할 정도로 젊었는데 통통한 체구에 눈을 작고 생기가 없었다. 하인은 한껏 젠체하는 태도로 길을 바라본 후 ‘아직 안 보입니다. 나리’라고 대답했다. 한쪽 귀에만 건 터키옥 귀걸이와 염색해 포마드를 바른 머리카락, 고상을 떠는 행동으로 보건대 그 하인은 모든 면에서 가장 새롭고 진보적인 세대의 일원인 듯 했다. ‘아직 안 보인다고?’ 지주가 재차 물었다. ‘아직 안 보입니다.’ 하인이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지주 나리는 한숨을 쉬며 벤치에 앉았다. 그가 무릎을 꺾고 앉아 생각에 잠긴 듯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독자들에게 소개를 해두겠다. 그의 이름은 니꼴라이 뻬뜨로비치 끼르사노프이다.”(이반 투르게네프 저, 이상원 역, 열린책들, 2011)
1.첫 문장에 대화체를 쓰다가 갑자기 내레이터가 등장,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보기 드문 소설이다. 3인칭 시점에서 시제와 장소를 밝히며,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정색하고, 독자를 부르는 것이다. 어지러운 도입부는 근현대 소설로 진입하는 초기에 나타나는 서술 형식으로 보인다. 지루할 정도로 상세한 지주 나리와 하인에 대한 묘사, 하인을 진보적인 세대라고 못박고 나오는 것 등은 독자의 생각을 혼란하게 하려는 의도다. 전체적으로 구전을 옮겨쓰는 서사시구도에서 소설 장르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나온 첫 문단 구성 방식이다. 수능 논술이나 입사, 편지 등 어떤 데에 활용할만한 문체는 아니다.
2.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Отцы и дети, Otsy i deti, 1862)’은 러시아 최초의 현대적인 소설로 평가받는 수작(秀作)이다. 19세기 유럽 세계에서 주목받은 첫 러시아 소설이기도 하다.
러시아 어 원제는 ‘Отцы и дети’으로 복수형이다.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한다면 ‘아버지들과 아들들(자녀들)’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소설은 제정 러시아의 계층 갈등의 핵인 농노에 대한 해방령(1861)이 나온 직후에 출판됐다. 농노해방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Алекса́ндр II,1818~1881)가 내린 농노 해방에 관한 법령이다.
영어로는 ‘Father and Son(Children)’으로 번역된다. 영문으로 가장 먼저 번역한 인물은 영국 1세대 여성 번역가 콘스탄스 클라라(블랙) 가넷(Constance Clara (Black)Garnett, 1861~1946)이다. 1895년 번역 당시 제목은 ‘Fathers and Children’ 이었다. 한편 ‘아버지와 아들’은 2022년 미국에서 통산 17번째 영역됐다고 한다.
3.이 소설은 대 서사(敍事)나 뚜렷하게 부각되는 사건, 인물이 없다. 서사보다는 일종의 ‘세대론’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신구세대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진보적인 지식인 바자로프(친구들 포함)와 아버지 세대의 갈등을 단순한 부자 관계나 노소(老少)관계가 아니라 신구(新舊)세대 간의 불가피한 대립으로 묘사했다.
아버지 세대는 귀족이 우대받은 제정러시아에서 보수 기득권적 시각에서 사회를 본다. 귀족-농노제도를 용인하고, 외국풍도 좋아한다. 이들은 러시아의 조국 전쟁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1769~1821)의 프랑스군과의 전쟁 승리(1812)를 겪은 '체제 옹호 세대'라 할 수 있다.
반면 바자로프나 친구들은 현 체제에 순응하기보다 비판하는 세대다. 일체의 묵은 도덕, 관습, 종교를 거부할 정도다. 실질을 숭상하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사회를 본다. 크림전쟁(1854~1856) 패배를 겪은 세대로 니힐리즘 성향이 강한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세대다.
이 세대 중 잡계급(귀족 아닌 평민, 의사 등 전문직 등)이면서 지식인으로 사회 변혁에 강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 인텔리겐차로 발전하고, 나중에 러시아 혁명의 밑거름이 된다.
4.소설은 1850년대 말(1859년 봄) 제정 러시아 사회가 배경이다. 당시는 황제 니콜라이 1세(Nicholas I, 1796~1855)가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Александр II/Alexander II, 1818~1881)가 즉위했으며, 크림전쟁(CrimeanWar)에 패배한 시기다. 크림 전쟁은1853∼1856년 러시아 대 오스만 제국·영국·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러시아가 패배했다.
5.등장인물은 평민 출신 주인공인 예브게니 바자로프(V. Avdyushko)와 의사 아버지 바실리 바자로프(N. Sergeev), 어머니 아리나 블라세예브나가 나온다.
또 귀족 출신 친구인 아르까디 끼르사노프(Konsovkiy)와 그의 아버지 니꼴라이 뻬뜨로비치 끼르사노프, 큰 아버지 파벨(퇴역장교) 등이다. 이밖에 바자로프가 사랑하는 사람인 안나 세르게예브나 오딘쪼바(오딘쪼바 부인)와 동생 까쨔(나중에 아르까디와 결혼) 등이다.
6.줄거리는 신구 갈등속에서 꿈틀거리는 계급, 계층 붕괴 조짐, 러시아 사회의 근대로의 전환 등이 거대 메타포로 흐른다. 의학생 바자로프는 유물적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세대다. 그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실용적 효용을 지닌 과학뿐이다.
친구의 집에 체류 중에 친구의 백부로서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교양주의자 파벨과 격론을 벌이고, 나중에는 결투도 벌이고 만다. 그런 직후 친구 약혼자의 언니가 되는 아름다운 미망인 오딘쪼바 부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사랑을 단순히 유해한 감정이라 해서 겉으로는 배척한다.
결국 사랑하는 오딘쪼바 부인 곁을 떠나 시골에 칩거하면서 의료활동에 전념한다. 그런데 시체 해부 중에 손가락에 장티푸스 독이 들어가 급사한다. 사회변화를 바라는 관념론자의 허망한 죽음이다. 반면 관념보다 현실 삶에 타협한 아카르디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 까쨔(오딘쪼바 부인 여동생)와 결혼, 귀족적인 삶을 산다.
7.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늙은 아버지와 엄마가 아들 바자로프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무덤 위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부모는 아들을 그리워한다. 죽어서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이들은 세대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했을까?
소설이 서구에 알려져 히트하면서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등에서 ‘허무주의(nihilism)’라는 용어가 곳곳에서 쓰였다. 니히리즘과 니힐리즈이 유행한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서구에 ‘니힐리즘’을 대중화한 셈이다. 한편 볼셰비키(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주도세력) 혁명가 블라디미르 바자로프(Vladimir Alexandrovich Bazarov, 1874~1939)는 이 소설의 주안공 예브게니 바자로프의 캐릭터에서 그의 가명을 채택했다.
8.러시아에서 1959년 영화 ‘아버지와 자녀들(Ottsy i deti, 1959)로 나왔다. 러시아 출신 감독 아돌프 베르군커(Adolf Bergunker,1906~1989)가 맡았다.
캐나다의 극작가 조오지 워커(George F. Walker)의 1988년 연극 ‘신성한 것은 없다(Nothing Sacred)’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의 무대용 극작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Brian Patrick Friel[, 1929~2015)도 같은 제목으로 소설을 개작했다. 이 극본은 2015년 한국에서도 연극 무대에 올랐다.
9.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 인기 있는 작가였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소설 ‘삼대(조선일보 1931년 1월 1일~1931년 9월 17일 연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투르게네프의 시도 인기를 끌었는데 24편이나 소개됐다. 시는 일제시대 주요 잡지인 ‘태서문예신보 4호(1918년 10월26일), 5호, 7호’, ‘창조 9호(1921년 5월)’, ‘백조 1호(1922년 1월), 2호(5월)’, ‘폐허’, ‘금성 3호(1924년 1월)’ 등에 소개됐다.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빙허 현진건(1900~1943)은 조선일보 1920년 12월 신문 1면에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번역한 ‘초련’(12월2일~1월23일,총 44회), 다른 소설을 번역한 ‘부운’(1월24일~4월30일, 총 86회)을 썼다. 2000년대 들어와서 민음사에서는 ‘아버지와 자식(연진희 옮김)’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Turgenev,1818~1883)=러시아 문학 세계화의 선구자.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이다.
유럽적 시각과 정서를 가진 러시아 작가로 서유럽 리얼리즘에 가까운 작품을 많이 썼다. 러시아 전체 이름은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이다.
1.퇴역 기병 장교인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Sergei Nikolaevich Turgenev,1793~1834)와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방대한 영지를 소유한 어머니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바(Varvara Petrovna Lutovinova,1787~1850)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조국 전쟁에 참여한 귀족 장교다. 성씨 ‘Turgenev’는 튀르크계 타타르인을 조상으로 둔 것으로 추정한다.
세르게이 투르게네프는 굉장한 미남이었는데 아버지(이반 투르게네프의 할아버지) 니콜라이가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 감옥에 끌려갈 상황이 되자 미남인 아들에게 부자 여성과 결혼해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에 세르게이는 자신보다 7살 연상으로 부잣집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바와 결혼, 아들 이반(투르게네프)을 낳았다.
2.아버지 일찍 사망한 후 오욜 지방의 대지주인 어머니의 혹독한 양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가정교사를 불러와 러시아어 보다 프랑스어를 먼저 가르쳤다.
가족들은 기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반 투르게네프가 러시아어를 농노 하인에게서 배웠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이반이 4살 때 프랑스를 여행했고, 9살 때 자녀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이반 투르게프는 가정교사에게서 표준 교육(standard schooling)을 받은 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1834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진학, 1837년 졸업했다. 곧바로 독일로 유학을 가서 1838~1841년 베를린대학에서 헤겔 철학과 역사를 전공했다.
3.1841년 귀국한 투르게네프는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내무부(1843~1845)에서 관료 생활을하다가 그만뒀다. 1850년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1000명(혹은 5000명)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해방시켰다.
당시 농노 일부는 해방을 거부, 자유민 일꾼으로 투르게네프 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정부의 체제에 저항하는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투르게네프는 농노 해방 몇 년 후 ‘사냥꾼의 수기’를 발표한다. 그런데 당국은 ‘불온 서적’이라며 투르게네프를 체포, 감금한다. 이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셌는데,
특히 민중들에게 ‘무슨 책에 어떤 내용이 들었는데 체포하느냐’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초판이 순식간에 매진됐다고 한다. 이후 금서로 지정하기도 전에 책이 많이 팔리면서 농노제 폐지 여론에 큰 힘을 줬다고 한다. 결국 ‘사냥꾼의 수기’가 1861년 2월 농노 해방령의 기폭제가 된 셈이었다.
투르게네프가 나중에 쓴 한 기고문에는 농노 해방령이 선포된 1861년 농장이 있는 오욜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있는데, 두 명의 농민들이 찾아와 '러시아 모든 민중의 이름으로 감사한다'는 인사를 해 뿌듯했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4.유부녀이자 프랑스 유명가수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1821~1910)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 평생의 뮤즈였다. 이 때문에 투르게네프는 훈남에 많은 돈을 가진 귀족이었음에도 공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폴린과는 1843년 첫 서사시 ‘파라샤’가 발표됐을 무렵인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다. 공연차 러시아를 방문한 폴린의 공연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후 평생을 폴린 옆, 주변에서 산다. 폴린이 이사를 가면 따라간다. 그녀의 늙은 남편과도 친했다. 일부에서는 ‘남편이 합의한 불륜’이라는 독특한 사이라는 분석도 한다.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돈으로 폴린 소생의 자식들을 모두 가르쳤고, 자신이 하녀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1842년 출생 딸)도 폴린에게 양육을 맡긴다. 물론 말년에 폴린 집에서 보살핌을 받다 죽으면서 재산 모두 폴린에게 남긴다.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은 투르게네프와 폴린의 관계에 대해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한편 투르게네프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폴린은 의붓자식을 소중히 아꼈으며, 89세까지 살며 천수를 누렸다.
5.투르게네프는 러시아에서 ‘아버지와 아들’ 등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이 잇따라 나오자 1860년대 말 조국을 떠났다.
특히 후배이자 자신이 돌봐줬던 작가들인 레흐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182~1881)와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자 사실상 망명하다시피 러시아를 떠났다.
투르게네프가 간곳은 은퇴한 폴린 부인이 휴양 중인 독일 남부의 바덴바덴이었다. 이후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폴린 부부를 따라 런던을 거쳐 파리로 갔다. 1876년부터는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 살았다.
6.19세기 기준 서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작가였다. 특히 톨스토이 등 러시아의 많은 문인을 유럽에 소개했다. 러시아 작가들을 독일과 영국, 프랑스 출판사들과 계약하도록 주선한 것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 수많은 러시아 작가가 유럽 진출의 첨병 역할을 한 투르게네프의 도움을 받았다.
1878년 프랑스 파리 국제문인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됐고, 1879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Doctor of Civil Law)를 받았다.
7.말년에 각종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투르게네프는 프랑스 파리 서쪽 작은 마을 세네와즈 부지발에 살던 연인 폴린의 별장에서 1883년 9월3일 영면했다. 사인은 척추 농양(척수암)이었다. 향년 64세.
임종 당시 투르게네프가 한 말 중에는 톨스토이에게 전하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내 친구, 문학으로 돌아 가라!’
투르게네프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러시아로 운구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르코보 묘지(Volkovo Cemetery) 의 벨렌스키(Vissarion Grigoryevich Belinsky,1811~1848,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아버지) 묘 옆에 안장됐다.
대표작으로 사냥꾼의 수기(Zapiski okhotnika,1852), 루딘(Rudin,1856, 귀족의 보금자리 (Home of the Gentry,1859), 전야(Nakanune,1860), 아버지와 아들(Otsi i deti,1862) 등이 있다.
8.레흐 톨스토이(Leo Tolstoy)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Dostoyevsky)와의 관계는 초기에 적대적이었지만 나중에 화해했다.
톨스토이는 파리를 함께 여행하면서 일기에 ‘투르게네프는 지루하다’고 썼고, 결투도 신청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나중에 사과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투르게네프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망상을 심어주는 헛된 소설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춥고 배고플 때는 돈을 빌리러 왔다.
결국 두 사람은 죽기 전에 화해했다. 1880년 알렉산더 푸쉬킨(Alexander Pushkin,1799~1837) 기념비 제막식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투르게네프에게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가 참가해 추도사를 했다. 2년 뒤 상트페테르부크에서 열린 투르게네프 장례식에는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참석했다.
9.러시아에서 톨스토이 못지않은 대문호로 평가받고 있다. 투르게네프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곳곳에 존재한다.
소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1899~1977)의 러시아 작가 평가에서 당당히 4위를 차지했다. 1위는 톨스토이, 2위는 고골, 3위는 체호프 였더. 참고로 나보코프는 도스토옙스키를 굉장히 낮게 평가한 작가다.
프링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는 투르게네프에 대해 “당신에 대해 공부할수록 당신의 실력은 저의 입이 벌어지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안-영국 사회정치학자 이사야 베를린(Isaiah Berlin,1909~1997)은 “러시아 자유주의의 가장 좋은 측면을 대표하는 혁명에 대한 휴머니즘, 다원주의 및 점진적 개혁에 대한 투르게네프의 신념은 매우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