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어머니-사회주의 리얼리즘 효시 소설은 폭발 전야의 불온한 분위기로 서두를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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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사회주의 리얼리즘 효시 소설은 폭발 전야의 불온한 분위기로 서두를 연다.

지성인간 2024. 2. 14.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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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매일 노동자 마을 위로 탁하고 기름진 공기 속에 공장의 사이렌 소리가 떨면서 울려 퍼지자 그 부름에 응답하듯 조그만 회색 집들에서 아직 잠으로 근육을 풀지 못한 음울한 사람들이 겁먹은 바퀴벌레처럼 거리로 나왔다. 차가운 어스름 속에서 그들은 비포장도로를 걸어 높이 솟은 돌 감옥과 같은 공장을 향해 갔고, 공장은 수십 개의 기름 낀 네모난 눈으로 더러운 거리를 밝히며 무심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기다렸다. 진흙이 발밑에서 쩔꺽거렸다. 잠에 취한 이들이 목쉰 소리로 고함을 질렀고, 거친 욕설이 화난 듯 공기를 갈랐으나 사람들 앞에는 또 다른 소리들이 떠다녔다-시끄럽고 육중한 기계 소리, 으르렁거리는 수증기 소리, 높고 검은 굴뚝들이 마치 굵은 몽둥이처럼 마을 위로 솟아올라 음울하고도 엄하게 내려다보았다.”(막심 고리키 저, 정보라 역, 을유문화사, 2022)

막심 고리키 소설 '어머니'를 영화화 한 1955년 러시아 영화 '어머니' 포스터.photo by google

1.영상 카메라가 훑는듯한 르포르타쥬(르포)식 기사체로 도입부를 시작하고 있다. 전지전능한 작가 시점에서 신문기사를 쓰듯이 내레이션을 이어가는 구조다. 공장과 그 주변, 공장 노동자들의 움직임, 전체적인 공장 풍경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첫 문단 자체가 약간 과장된 공장지대와 노동자 묘사이긴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대로다. 금새라도 무엇인가 폭발할 것 같은 불온한 분위기를 압축하고 있다.다만 번역한 첫 문장과 두번째 문장이 너무 길다. 르포로 처음을 열고 있는 만큼 과감하게 문장을 나눴으면 좋았겠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완전본으로 출판된 '어머니' 표지. photo by wikipedia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Мать, Mat’, 1906)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효시이자 당대 여성주의 소설 중 최고 역작이다.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홉, 고골 등)를 연장하는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사회민주당(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RSDLP)의 지하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던 저자가 1906년 미국 애플턴 매가진(Appleton's Magazine, 1903년 창간~1909년 폐간)에 발표했다.직후 잡지를 발행하던 D. 애플턴 앤 컴퍼니(D. Appleton & Company)에서 출판됐다. 제정러시아에서는 검열(교정, 삭제 등)을 거쳐 이듬해 나왔고, 원작 훼손없이는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성공이후 출판됐다.
소련(蘇聯,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시절에는 국어(러시아어) 과목에 연재된 필독서였다. 다만 저자의 중요한 소설로 당대에는 호평받았지만 현대 비평가들은 스테레오 타입(의식화, 민중시위, 형식적인 재판, 감옥 탈출, 시위 가담, 장례식)의 구조로 형식과 리얼리즘에 치우쳐 ‘성공적이지 못한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영어로는 ‘The Mother’로 번역된다.

미국 출판사 D. 애플턴 컴퍼니에서 1906년 초판에 이어 1907년 양장본으로ㅈ나온 막심 고리키 소설 어머니 영역판 표지.photo by wikipedia

3.저자의 고향 니즈니 노브고로드(저지대 신도시 란는 뜻 )의 소르모보에서 1902년 일어난 ‘표트르 자로모프 모자 체포 사건’이 모티브다. 억압과 무지로 찌들린 삶을 살아온 프롤레타리아 계급 여인 ‘어머니’로 대표되는 하층민의 각성과 혁명 운동을 그렸다.
소설이 나온 지 10년 이후(1917년 볼세비키 혁명 성공이후)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불리면서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등 소비에트 권력층의 주목을 받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문학적으로 공식 선포된 것은 1934년 제1회 (소련)작가 대회(주관 막심 고리키) 때부터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 예술 기조로 선포됐다.

러시아에서 무성영화로 1926년 나온 '어머니' 포스터. photo by google

4.등장인물은 어머니 펠라게야 닐로브나 블라소바(Pelageya Nilovna), 아들인 파벨 미하일로비치 블라소프(Pavel Vlasov), 기계공인 아버지 미하일 블라소프(Mikhail Vlasov) 가 나온다. 또 파벨의 친구 안드레이 나홋카(우크라이나 사람), 파벨의 동료이자 사랑하는 사이 사셰카(본명 알렉산드라), 미하일(로) 이바노비치 르이빈, 파벨의 동료인 교사 나타샤, 도둑 니콜라이 베솝시코프의 아들 ,공장 노동자 표도르 시조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누이로 과부인 소피야 이바노브나 등도 등장한다.

중동에서 아랍어로 나온 '어머니' 표지. photo by google

5.줄거리는 공장에서 고된 육체 노동을 하고 가난과 굶주림, 남편의 폭력에도 맞서 싸우는 여성의 삶을 묘사한다. 주인공은 펠라게야 닐로브나 블라소바(Pelageya Nilovna Vlasova)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인 펠라게야는 삶의 무게에 눌려 살아간다. 술주정배이와 폭력을 쓰던 남편이 죽고 어느 날 아들 파벨의 책을 살펴본다. 파벨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금서(禁書)을 읽고 있으며, 노동 혁명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파벨이 노동절 시위로 잡혀들어가고 블라소바는 아들이 구명운동에 적극 나선다. 어머니로 대표된 억압 민중이 정치적 무지를 극복하고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1911년 영국과 미국서 나온 막심 고리키 소설 '어머니' 표지 일러스트.photo by google

6.러시아어 작가들의 평가는 엇갈렸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소련 내부 권력층과 외국에서는 높게 받았다. 반소(反蘇)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1918~2008, 1974년 소련에서 추방)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고리키의 글은 역겨운 쓰레기”라고 힐난했다.
또 반소 감정이 강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 1919년 유럽 망명, ‘롤리타’ 저자)는 “소설가로서의 역량은 훌륭하지만 기초 교양이 부족한 이유로 표현력이나 글 구성력에서 많이 제한을 받는다”고 평가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대중연설을 하고 있는 혁명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photo by google

그렇치만 소련 권력층은 최고의 소설로 치켜 세웠다.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소련 제1대공산당 서기장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624)은 “아주 필요한 책이며 시의적절한 작품이다. 혁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 유용한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격찬했다.
서방에서도 좋은 평가가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유명 전기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는 “고리키의 위대한 서사시는 헛된 설화가 아니라 반박의 여지 없는 진실이자 현실 그 자체다”고 말했다.
미국 필라델피아 스와스모어대학(Swarthmore College, 소수정예 엘리트교육으로 유명한 대학) 교수 시빌란 포레스터는 “모든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바탕이 된 작품”이라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러시아 유명 화가 일리야 레핀이 1907년 그린 1905년 10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새로운 러시아 헌법 제정을 기뻐하는 시민들. 출처=wikimedia commons

7.영화 연극 오페라 등으로도 나왔다. 소련에서 1926년 브세볼로드 푸도프킨(Vsevolod Pudovkin, 1893~1953)의 감독 아래 동명의 무성 영화로 제작됐다. 1932년에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1898~1956)가 '어머니'를 원작으로 한 희곡 '어머니(Die Mutter)'를 발표했다. 그해 베를린의 시어터 암 쉬프바우어담(Theater am Schiffbauerdamm)에서 공연됐다.
소련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발레리 빅토로비치 젤로빈스키(Valery Viktorovich Zhelobinsky, 1913~1946, 33세로 요절)가 1938년 오페라로 각색했다. 소련의 영화 감독, 각본가인 마크 돈스코이(Mark Semyonovich Donskoy, 1901~1981)가 영화로 만들어 1955년 개봉했다.
1990년에는 러시아 유명감독 글렙 아나톨리예비치 판필로프(Gleb Anatolyevich Panfilov,1933~2023)가 소비에트 드라마 영화 ‘어머니’로 내놓았다. 이밖에 인도 영화감독 수레시 크리슈나(Suresh Krishna, 1959~현재)가 2011년 고리키 소설을 원작으로 인도 타밀어 시대 액션 영화를 만들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막심 고리키는 당대 유명 작가 톨스토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0년 톨스토이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폴라냐를 방문한 막심 고리키.톨스토이는 180센티가 넘는 장신이었는데 고리키는 193센티의 거구였다.photo by google

8.한국에서는 금서(禁書) 기간이 길었다. ‘빨갱이 작가’로 낙인찍히면서 일제 강점기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금서였다. 그래서 운동권 학생들이 영어 원서를 어설프게 번역한 것이나 일본어 중역본 등을 탐독했다.
일신서적 출판사에서 1995년 반광식 역으로 나왔다. 이후 열린책들(2009, 최윤락 역), 을유문화사(2022, 정보라 역) 등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왔다. 서울대학교 권장 도서 100선, 한국 문인이 선호하는 세계 명작 소설 100선, 동아일보 선정 ‘한국 명사들의 추천 도서’에 선정됐다.

1900년 무렵의 막심 고리키. 핀란드 남부 에스포에 위치한 갈렌칼렐라 박물관(Gallen-Kallelan Museo) 소장.출처=en.wikipedia.org

#.막심 고리키(Макси́м Го́рький, 1868~1936)=제정러시아-소련의 대문호. 사회주의 미학 이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조 작가다.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20세기 소비에트문학을 잇는 가교(架橋)적인 인물.
대다수의 당대 러시아 작가들이 귀족 출신인 것 달리 하층민의 아들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러시아 중앙 문단에 데뷔했다. 그래서 학구열과 열정으로 핸디캡을 극복한 소설가로 평가받는다.
막심 고리키는 필명이다. 막심 고리키 뜻은 최대로 고통받은 자, 몹시 비참한 사람이다. 영어로는 ‘Maxim Gorky’로 쓴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다. 영어로는 Aleksey Maksimovich Peshkov)로 쓴다.

막심 고리키의 고향으로 저지대 신도시라는 뜻을 가진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2010년대 모습.photo by wikipedia

1.러시아 모스크바 동쪽 볼가강((Volga River)) 연안 북서부에 있는 저지대 신도시라는 뜻을 가진 니즈니 노브고로드(Ни́жний Но́вгород, 1932~1990년 고리키 시)에서 목수인 아버지(나중에 수송 대리인) 막심 사바치예비치 페쉬코프와 염색업자인 바실리 카시린의 딸 바르바라 바실리예브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집에서 유년을 보냈으나 어머니마저 11세에 사망했다.이후 구둣방의 심부름꾼, 증기선 주방 보조 등으로 일하느라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제정러시아-소련 화가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네스테로프(1862~1942)가 1901년 그린 막심 고리키.photo by google

2.유년기에 술 취한 외조부가 상습적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폭행했던 트라우마를 겪었고, 경제적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어서 12세에 타타르스탄 수도인 카잔(Kazan)으로 가출, 굶지 않기 위해 지하 빵집에서 일했다.
이후 5년간 러시아 전역을 떠돌이로 생활했다. 이 때 많은 견문과 습작으로 필력을 키웠다. 하지만 비참한 현실을 견디기 어려워 19살이던 1887년 12월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1889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변호사인 A.I. 라닌의 서기가 됐다. 그해 징집에 응했지만 질병 때문에 면제됐다.

3.1801년 러시아 땅이 된 티플리스(Tiflis, 현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철도역에서 일하던 1892년 ‘캅카스(Kavkaz, The Caucasus) ’신문에 첫 소설로 낭만적인 이야기를 그린 ‘마카르 추드라(Макар Чудра, 늙은 집시 이름, 필명 막심 고리키 첫 사용)’를 썼다. 이후 1895년 단편소설 ‘첼카슈(Челкаш, Chelkash)’를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고리키는 페테르부르크(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본격 접촉하고 동화됐다. 또 당대 유명 문학가인 블라디미르 코롤렌코(Vladimir Galaktionovich Korolenko, 1853~1921),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레흐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등과 친하게 교류했다. 특히 이들은 물론 평론가들로부터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배웠다.
1898년 단편을 모은 단행본(2권)를 출간, 작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특히 이 단행본에 나온 희곡 ‘밑바닥에서’ 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 희곡은 독일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극본은 1903~1904년 베를린에서 500일 동안 계속해서 공연되기도 했다.

막심 고리키(오른쪽 뒤)와 극작가 안톤 체홉(앞줄 왼쪽)이 1902년 모스크바 예술가 극장에서 배우들과 함께 하고 있다. 모스크바 예술가 박물관. 출처=게티 이미지

4.1899년 자본주의가 인간을 변모시키는 과정을 묘사한 마르크스주의 평론지 ‘삶’에 ‘포마 고르제예프’, ‘세 사람(1899~1901)’을 발표, 문학적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 1900년대 초에 두 번이나 러시아 제정 당국에 체포됐다.

1900년 러시아 남부 얄타에서 만난 유명 극작가 안톤 체홉과 막심 고리키. photo by google

잡지 삶에 다가오는 혁명의 비유를 쓴 시 ‘바다 제비의 노래’가 게재되면서 발매금지를 당한 직후인 1901년 짜르(황제) 타도를 외친 ‘지하인쇄소 사건’에 연루, 체포됐다가  곧 고향으로 추방됐다. 또 1905년에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사건’을 주도했던 '가퐁신부(Georgy Gapon, 1870~1906) 사건'에 연루,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이때 반체제 활동을 이유로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에서 영구 제명 당하자 당시 선배작가 안톤 체호프는 제명을 반대하다가 본인도 제명당했다. 서른 셋인 1902년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됐다.

막심 고리키의 첫 부인 예카테리나 페시코바의 젊은 시절 모습.www.google.com

5.고리키의 뮤즈는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인권운동가 예카테리나 페시코바(Yekaterina Pavlovna Peshkova, 1876~1965, 결혼 전 Volzhina)였다. 둘은 아들 막심 페시코프(1897~1935)와 딸 예카테리나 페시코바를 낳았지만 1903년 이혼한다.

막심 고리키와 아내 예카테리나 페시코바의 1900년 초 모습.둘은 1903년 이혼했다.www.google.com

고리키는 1900년 무렵 두 자녀의 어머니이자 배우 마리아 안드레예바(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1868~1953, 나중에 모스크바과학자협회장)와 만나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 1900년 세바스토폴에서 만나 미국 여행도 함께 했고, 이탈리아 카프리에 함께 살았다. 그후 1920~1922년 무렵 고리키의 또다른 불륜으로 헤어졌다.

러시아 유명화가 일리아 레핀(Ilya Repin,1844~1930)이 1905년 그린 막심 고리키의 연인 여배우 마리아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의 초상화.www.google.com

고리키는 또 한 명의 연인이 있었다.1921년 비서인 모우라 버드버그(Moura Budberg, 1892~1974)를 고용했는데, 정부가 되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이탈리아에 함께 살았다. 버드버그는 1971년 고리키의 소설 ‘쓸모없는 남자의 삶(Жизнь ненужного человека,1908)’을 영어로 번역했다.

막심 고리키와 정부 마리아 브드메리(1892~1974) 모습.1920년대 이탈리아 남부 거주때 찍은 것으로 추정. Getty Images. www.google.com

6.1905년 체포됐다가 풀려나자 이탈리아로 ‘자의반 타의반’ 망명했고, 혁명 운동을 지원했다. 고리키는 1906년 혁명활동 지원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이 때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금 활동을 하는 한편 그동안 집필해온 ‘어머니’를 미국 애플턴 앤 컴패니(D. Appleton & Company)에서 냈다. 1913년 로마노프(Романов) 왕조(1613~1917) 300주년 기념 사면령을 내리자 러시아로 돌아왔고, 1917년 2월(니콜라이 2세 폐위로 로마노프 왕조 종언), 10월 볼셰비키 혁명(Russian Revolution)에 적극 관여했다. 1919년에 고리키는 ‘톨스토이의 회상(Vospominaniya o Tolstom)’을 내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후 모스크바 외곽 고리키 자택에서 만난 레닌과 고리키. 제정러시아-소련 화가 바실리 예파노프(1900~1978) 작품 추정.www.google.com

7.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 소련 붉은 근대 창설자이자 초대 외무부장관) 등 볼셰비키 정권의 지도자들이 언론 탄압과 폭력성을 드러내자 염증을 느끼고, 비판했다.
고리키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권력의 더러운 독에 중독돼 혁명적 꿈을 이룰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짓밟았다”고 썼다. 특히 레닌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명예나 목숨을 아끼지 않는 냉혈한 사기꾼"이라며 “레닌은 대중을 알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살지 않았다"고 직격하기도 했다.
1921년에 독일로 갔고, 그해 절친인 시인 구밀료프가 체카가 KGB에 체포돼 반혁명죄로 처형당하자 1924년에는 다시 이탈리아 소렌토로 이사했다. 이탈리아에서 7년여의 망명 생활은 ‘궁핍의 시간’이었다.
또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정권을 잡자 타국 이주를 고민하다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이 귀국을 종용, 1931년 돌아왔다. 귀국 직후 월간 평론지 ‘연대기’를 창간했다.

소련 그래픽 아티스트 빅토르 고보로프(Viktor Govorov,1902~1959)의 1933년 작 '스탈린에게 바치는 고리키의 독서(Gorky Reading to Stalin).출처=horvath.members.1012.at

8.레닌이 죽은 이후 들어선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체제는 고리키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고향을 고리키시로 개명했고, 193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큰 소련의 8엔진 항공기 투팔레프 ANT-20에 ‘막심 고리키(Туполев АНТ-20 Максим Горький)’ 붙이기도 했다.
고리키는 스탈린에게 쓴 소리를 하고도 숙청없이 편안한 말년을 보냈으나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콜호스) 계획이 시작된 몇 년 후인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으로 대숙청이 시작됐고, 고리키도 사실상의 가택연금 상태로 갔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 에 있는 막심 고리키의 무덤.https://en.wikipedia.org/

그런데 1935년 5월 아들 막심 페쉬코프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어 1936년 고리키도 갑작스럽게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관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제1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과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Vyacheslav Mikhaylovich Molotov,1890~1980, 전 소련 총리)가 운구했다. 연인이었던 모우라 버드버그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한편 1938년 소련의 보안 및 정보 기관 내무인민위원회(NKVD, KGB) 전 부장인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야고다(Genrikh Yagoda,1891~1938, 숙청 후 총살)의 숙청 당시 죄목 중 하나가 고리키의 독살이어서 논란이 지금까지 독살설이 이어지고 있다,

2018년 러시아에서 주조한 막심 고리키 기념 주화(2루블).https://en.wikipedia.org

9.소련 붕괴 직전인 1988년 작가 출생 120 주년을 기념, 1루블 동전이 발행됐다. 2018년 작가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러시아 은행은 ‘러시아의 뛰어난 인물’ 시리즈의 한 사람으로 선정해 액면가 2루블의 기념 은화를 발행했다.
고리키는 공산권 국가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부로 추앙받는다. 그래서 곳곳에 기념비와 공원, 연구소, 거리 이름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모스크바의 고리키 공원과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센트럴 파크(구 막심 고리키 공원)이다.

러시아에서 2000년 나온 막심 고리키 기념 우표.https://en.wikipedia.org

모스크바에는 막심 고리키 문학 연구소가 있고, 투폴레프 ANT-20 항공기, 순양함 Project 26bis(또는 Kirov 급)에 Maxim Gorky가 명명됐다. 2013년 기준 러시아의 2110개의 거리, 도로 등에 ‘Gorky’가 붙어있다.
수많은 극장에도 막심 고리키가 명명됐다. 1932년 모스크바를 시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베를린, 바쿠, 아스타나, 툴라, 민스크 등에 있다. 이름을 딴 문화 궁전은 네빈노미스크 (Nevinnomyssk), 로벤 키 (Rovenky), 노보시비르스크 (Novosibirsk) 및 상트 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에 지어졌다.우랄 주립 대학, 도네츠크 국립 의과 대학, 민스크 주립 교육 연구소, 옴스크 주립 교육 대학 등에 막심 고리키 문학 연구소가 있다.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일부인 막심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와 정면에 있는 기념동상.https://en.wikipedia.org

8.주요 작품으로는 자전적(自傳的) 3부작 ‘유년시대 Detstvo(1914)’, ‘사람들 속에서(V lyudyakh(1916)’, ‘나의 대학(Moi universitety(1923)’이 있다. 또 1892년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Makar Chudra)’, ‘첼카슈(1895)’, 희곡 ‘밤 주막(Na dne,1902)’, ‘밑바닥에서’, ‘어머니 Mat’(1907)’ 등이 있다. 유고작으로 서사시 ‘클림 사므긴의 생애(Zhizn’ Klima Samgina,1936)’ 도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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