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연인(L'Amant)-관능의 사랑은 거울 앞에 선 듯한 늙은 여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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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L'Amant)-관능의 사랑은 거울 앞에 선 듯한 늙은 여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지성인간 2023. 7. 27.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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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중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아름답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종종 나는 나 혼자만 간직하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한 적이 없는 이런 영상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 영상은 황홀한 기운에 감싸인 채 항상 같은 침묵 속에서 펼쳐진다.”(김인환 역, 민음사, 2007)

2007년 민음사에서 낸 '연인' 표지. 1992년 개봉한 영화 '연인'의 여주인공 제인마치(영국 출신 배우)를 표지에 활용했다.

1.스스로가 회한에 젖어 상상의 나래를 펴는 형식의 도입부다. 무엇이라도 두렵지 않은 나이의 여인이 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하다. 1인칭 화자인 자신의 옛 이야기를 본격 전개하기 위해 3자 개입이라는 낯선 소설 구성 방식을 택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수많은 망설임 끝에 쓰고 있다는 것을 첫문단 뒷부분에서 암시하고 있다.

2.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戀人, L'Amant, 1984)’은 실제와 허구가 구분이 안될 정도의 자서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다. 1920년대 사이공(현 베트남 호치민)과 인근 지역에서 보낸 아련한 슬픔의  나날과 고통의 사랑을 기록했다.
작가의 청소년기 연인인 중국인 ‘레오(Léo, 소설속 주인공 이름, 실제 이름 Huỳnh Thủy Lê)’를 만난 지 55년 후인 70세에 출판했다.
뒤라스는 이외 자신의 소설 두 곳,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영어명 The Sea Wall)’, ‘북중국의 연인(L’Amant de la Chine du Nord, 영어 명 The North China Lover)’에서 레오 이야기를 쓴다. 북중국의 연인은 ‘연인’ 버전2로도 불린다.
연인은 세계 44개 언어로 번역됐다. 영어로는 1986년 ‘The Lover’로 나왔다. 중국 문화권에서는 ‘情人’으로 번역됐다.

장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연인' 스틸컷. 여주인공을 맡은 영국출신 배우 제인 마치를 근접촬영했다. photo by movie.daum.net

3.연인은 지독한 가난과 슬픔, 가족간 갈등의 나날이 이어진 청춘의 뒤안길에 살며시 비춘 철부지 사랑을 관능의 미학으로 그려냈다.
언뜻 읽으면 뒤죽박죽이다. 화자(話者)가 ‘나’와 ‘그’로도 나오고, 현재와 과거를 왔다 갔다 한다. 공간도 프랑스와 인도차이나를 넘나드는 등 얽히고 설킨다. 문장도 비정형적이고, 이렇다할 서사도 없다.
하지만 깔끔하고 수월하게 읽힌다. 뒤죽박죽을 뛰어넘는 짧고 정교한 문체 탓이리라. 작가는 20세기 문학 사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사소설 문체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특히 1970년대 말부터 간경화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린 작가가 원고를 쓰고,구술하고, 고치고를 반복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큰 오빠는 전쟁이고 식민통치 제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작은 오빠는 식민지이자 피압박주민이다. 제목 연인은 중국인 부자 아들(연인)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상징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프랑스에서 1985년 나온 소설 '연인' 표지. 작가 뒤라스 본인의 사춘기 시절 얼굴 사진을 썼다. photo by namu.wiki

4.1920년대 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가 배경이다. 줄거리는 식민지에 살고 있는 궁핍한 프랑스 가정의 사춘기 소녀와 나이는 많으나 부유한 중국계 청년의 사회 통념을 넘어선 로맨스다.
15세의 프랑스 소녀는 페리를 타고 메콩 삼각주를 건넌다. 집에서 휴가를 마치고 사이공에 있는 기숙 학교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엄마와 궁핍한 생활을 하는 소녀는 같은 배를 탄 중국계 거물 사업가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물일곱의 청년의 관심을 끈다.
청년과 소녀는 대화를 하고 그의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을 타고 간다. 마음이 허전한 사춘기 소녀는 청년에게 빠져들고, 육체적인 사랑과 현실 세계에 눈을 뜬다.
청년은 소녀를 사랑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국인 여자와 사랑을 끊을 것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소녀는 불우한 가정 환경과 자신에 대한 혐오로 더욱 청년과의 욕망에 빠져들고 격정적인 관능에 몰입한다.
그런 수개월이 지난 후 소녀는 사이공에서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오른다. 청년은 부두의 한쪽 구석에서 숨어서 지켜본다. 떠나가는 배에서 소녀는 청년이 있는 부두의 구석을 바라보면서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작가로 명성을 얻은 소녀에게 전화가 온다. 노년에 접어든 그 청년이다. 그는 말한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히 사랑한다고. 작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운명적 사랑으로 남는다.

베트남 남부 메콩 델타의 동타프(Dong Thap) 지방 사 덱(Sa dec) 타운에 있는 뒤라스의 연인 후잉 뚜이레(Huynh Thuy Le)의 옛집. 2009년 베트남 정부에 의해 국가 유물로 지정됐다. photo by saigon.for91days.com

6.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까지 나오면서 미디어에서 ‘연인’의 주인공 청년에 대한 추적이 이뤄졌다. 그리고 1992년 프랑스 주간지 ‘파리 마치(Paris Match)’에 뒤라스의 중국인 연인의 이름과 사진이 실린다.
뒤라스의 연인은 메콩 델타의 동타프(Dong Thap) 지방 사 덱 타운(Sa Dec town)에 살았다고 한다. 뒤라스가 사이공을 떠난 후 결혼, 다섯 자녀를 뒀고, 1972년 사망했다. 베트남 정부는 그가 살던 집을 2009년 국가 유물로 지정했다.

7.연인은 1992년 프랑스 유명 감독 장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1943~현재)가 프랑스와 영국 합작으로 ‘L'Amant(영어 명 The Lover, 情人)’으로 만들어 개봉했다.
영국 출신 배우 제인 마치 호우드(Jane March Horwood,1973~현재)와 량자후이(梁家輝, Tony Leung Ka Fai, 1958~현재)가 주연을 맡았는데 세계 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주연 여배우 제인 마치는 영국에서 하이틴 잡지 모델 활동을 하다가 발탁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 했다. 하지만 그후 에로틱 스릴러 ‘컬러 오브 나이트(1994년)’로 할리우드에 진출했으나 더 발전하지는 못했다.
연인은 영화가 히트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영화가 나온 이후 책이 수백만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92년 6월20일 ‘연인(戀人)’으로 개봉했다. 이후 2014년 2월20일 무삭제로, 2016년8월24일 다시 무삭제판이 재개봉됐다.

8.영국의 번역가이자 비평가 바바라 브레이(Barbara Bray, 1924~2010)의 번역본은 1986년 ‘스콧 몬크리프 상’을 받았다. 이 상은 유명 번역가 C.K.스콧 몬크리프(Scott Moncrieff)의 이름를 따서 만든 상이다. 또 같은 해에 저명한 국제번역상인 ‘펜 번역상(PEN-Book-of-the-Month Club Translation Prize)도 받았다.

작품을 쓰고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습. photo by namu.wiki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1914~1996)=프랑스의 작가, 소설가, 영화 감독, 각본가. 프랑스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콩쿠르상(1984)을 수상자. ‘누보 로망(Nouveau Roman)’ 작가로 분류된다.
뒤라스는 필명이다. 아버지의 고향인 프랑스 남서부 마르망드 구 롯엣가론(롯강과 가론강)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본명은 마르그리트 게르마네 마리 도나디외(Marguerite Germaine Marie Donnadieu)이다.

1.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코친치나 지아딘(현 베트남 호치민 근교 지아딘 성)에서 공무원이던 아버지 앙리 도나디외(Henri Donnadieu, 1872~1921)와 교사인 어머니 마리 리그랑(Marie Legrand, 1877~1956)사이에서 태어난다.
일곱 살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정 경제가 어려움에 직면했다. 어머니가 프랑스어 교사를 하면서 인도차이나 곳곳으로 이사 다니며 프랑스인 기숙학교 등에서 보낸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투자한 캄보디아 농장이 난관에 처하면서 가정 환경은 더 궁핍해진다. 17살 무렵인 1932년 프랑스로 건너와 소르본대학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2.소르본 대학을 졸업(공법 학사)한 1937년 프랑스 식민성 공무원이 된다. 하지만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면서 해고됐다.
친독 정부 비시정부(Régime de Vichy,1940~1944) 시기인 1942년 다시 복직한후 남편과 함께 레지스탕스와 공산당에서 활동한다. 당시 레지스탕스 지도자는 나중에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1916~1996)이었다.

3.뒤라스는 1940년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첫 책을 낸다. 아버지 마르그리트 도나디외의 이름으로 쓴 ‘프랑스 제국’이다.
식민지 체제를 거부하고 인종 차별과 백인우월주의를 경멸하기 까지 한 뒤라스의 소신과는 반대되는 책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뒤라스가 필명을 따온 아버지의 고향 프랑스 남서부 마르망드 롯엣가론의 뒤라스 마을 뒤라스 성. photo by wikipedia

필명인 뒤라스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42년 첫 아이를 잃고, 둘째 오빠마저 인도차이나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 쓴 자전 이야기 ‘타네랑 가족’ 때였다. 이 소설이 우여곡절 끝에 1943년 나온 ‘철면피들(Les Impudents)’이다. 이때부터 이름은 뒤라스로 굳어졌다.

4.뒤라스의 사랑은 격렬했지만 충격과 공포, 고통의 시간이 많았다. 공식적으로 3명의 남자와 결혼했다. 첫 남편은 작가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 1917~1990, 동거 기간 1939~1947)다.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하지만 앙텔므는 1944년 6월 게슈타포(Gestapo, Geheime Staats polizei, 나치(Nazi) 정권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독일 바이마르(Weimar) 부근 마을 강제 수용소 부헨발트( Buchenwald Concentration Camp)에 끌려갔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뒤라스는 남편을 찾아 나서지만 앙텔므의 행방은 알수 없었다. 그런데 1945년 4월 파리가 해방되고, 연합군이 승리를 선언한 후 앙텔므가 다하우 수용소(독일 뮌헨 북서쪽의 군수공장에 최초로 개설한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미테랑 등 동료 레지스탕스들의 도움으로 남편을 구조한다. 남편은 살아 돌아왔지만 몸무게가 39키로그램 밖에 안될 정도로 죽음 직전의 환자였다고 한다.
뒤라스는 정성껏 간호해 남편을 정상인으로 만들고 난 직후인 1947년 이혼했다. 둘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유지한다.

5.재혼 상대는 1944년 두 번째 소설을 낸 갈리마르 출판사 원고 선정인 디오니스 마르콜로(Dionys Mascolo,1916~1997, 동거기간 1947~1956)였다. 이 때 만난 마르콜로와 1947년 재혼한다.
뒤라스는 나치 고문 후유증으로 온전치 못한 남편을 돌보기 위해 이혼하지 않고 마르콜로와 ‘3자 동거(ménage à trois)’ 형태로 있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서는 이듬해 아들인 장 마르콜로가 태어났다.
마지막 연인은 1980년에 만난 35세 연하의 동성애자(homosexual) 배우 얀 앙드레아 (Yann Andera, 1952~2014)다. 당시 예순여섯의 할머니가 20대 청년과 동거해 ‘세계적 스캔들’이 됐다.

6.뒤라스는 식민지 반대와 반전주의자였다. 1950년 어머니를 모델로 쓴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영어명 The Sea Wall)’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이 책은 출판 첫 주에 5000권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의 고삐를 다시 조였다. 뒤라스 등 지식인들의 비판 속에 프랑스는 패배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다시 1954년 알제리 전쟁(Algerian War of Independence,1954~1962)을 일으킨다. 이 때 뒤라스는 정부 비판과 함께 알제리 독립군 지원에 나선다. 특히 1955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를 위한 지식인들의 모임’까지 참여하며 반전 활동을 벌인다. 결국 프랑스는 1962년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한다.
뒤라스는 1968년 봄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중심으로 시작된 권위주의체제 타도 혁명(68혁명)에 적극 참여했다.

뒤라스가 각본한 영화 '히로시마 내사랑' 프랑스판 포스터. photo by namu.wiki

7.1959년 영화계에 진출한다.프랑스 유명 영화감독 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영어명 Hiroshima, My Love)’의 각본을 쓰면서다. 첫 작품이었지만 제33회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뒤라스의 소설 중에서는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The Sea Wall, 해벽, 태평양의 제방 등으로도 번역)’가 1957년 영화 ‘성난 시대(This Angry Age)로 처음 영화화됐다.
이 영화의 감독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원제 Paris Brule-t-il?, 영어 제목 Is Paris Burning?)’로 유명한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1913~1996)이다.

2008 년 캄보디아 감독 리시 판이 영화로 만든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The Sea Wall)' 스틸 컷.photo by namu.wiki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는 2008년 캄보디아 감독 리시 판(Rithy Panh, 1964~현재)에 의해 다시 동명의 영화로 나왔다.

8.뒤라스는 1975년 대표작 중 하나인 ‘인디아 송(India Song)’, 1984년 ‘연인(L'Amant)’을 내는 등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1990년대 초부터 병이 깊어지자 뒤라스는 독자와 가족에게 작별 인사로 54 페이지 분량의 짧은 자서전을 1995년 출간했다.
‘나는 그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나는 소름끼치는 광경이 되었다. 나는 무너지고 있다. 빨리 와라. 나는 더 이상 입도, 얼굴도 없다.’
이 자서전 마지막 항목이 쓰여진 1995년 8월1일 이후 6개월이 지난 1996년 3월3일 파리6구 자택에서 영면했다. 병명은 인후암이었다. 향년 81세.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뒤라스의 묘에는 마지막 연인으로 2014년 사망한 얀 앙드레아(Yann Andera)도 나중에 묻혔다.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마지막 연인 얀 앙드레아 합장묘. photo by wikipedia

8.뒤라스를 1950년대 프랑스에서 나온 ‘누보 로망(Nouveau Roman, 혹은 앙티로망, Anti-roman)’ 작가로 한정하기에는 그녀의 문학은 위대하고, 너무 복잡하다.
누보로망은 문자 그대로 전통 소설 관념을 버린 신소설 양식이다. 전통 소설의 극적 장치 등을 무시하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아련한 기억을 새 형식과 문장 기교를 통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뒤라스의 소설이 이런 형식에 부합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테두리에 가두기에는 서사성 있는 소설과 문체적 특성이 매우 독튼하고, 다채롭다는 평가다.
아일랜드 출신 영국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1906~1986)는 뒤라스의 소설 ‘르 스퀘어(1955)’를 극화한 라디오 연극 ‘The Square’를 처음 듣는 것을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여겼다고 한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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