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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오리엔탈리즘-서구의 동양 시각을 맹비판해 세계적 논란을 부른 저서는 르포르타주 같은 서설로 시작한다. 본문
서설.“1975년에서 1976년까지 격렬한 내전을 겪던 베이루트를 방문한 어느 프랑스 언론인은 파괴된 도심지를 보고 개탄하며 이렇게 썼다. ‘한때는 이곳도 샤토브라앙과 네르빌이 묘사한 동양에 속한 것처럼 보였는데....’ 특히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는 한 그 곳에 대한 그의 말은 물론 옳았다. 동양이란 사실 유럽인이 조작한 것으로 고대부터 로맨스, 색다른 존재, 잊을 수 없는 기억과 풍경, 특별한 체험담의 장소가 되어 왔다. 그러데 지금 그것이 그 언론인 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동양이란 한때 생겨났다가 이젠 그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양인 스스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점도, 샤토브리앙과 네르발의 시대에서 동양에 동양인이 살았다는 점도, 나아가 그곳에서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동양인라는 점도 서양인에게는 무관해 보였으리라. 베이루트를 방문한 유럽인 방문객의 최대 관심은 동양에 관한 유럽인의 표현과 그 현대적 운명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 언론인과 프랑스 독자들이 특권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에드워드 사이드 저, 박홍규 역, 2000, 교보문고)
1.전문 서적이 아니라 문화 비평서답게 서문에서부터 독자의 주목을 끄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저널리즘에서 르포르타주 글쓰기 양식이다. 특히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저자 자신이 아닌 제3자의 글을 내세워 책 전체 주제의 문제의식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 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서설(序說)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쓴 해설이다. 본문에 나오는 *베이루트는 레바논 공화국의 수도다.*샤토브리앙은 프랑스 정치가이자 작가 프랑수아 르네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vicomte de Chateaubriand, 1768~1848)을 말한다. *네르빌은 프랑스 시인으로 ‘동양 여행’의 저자 제라드 드 네르발(Gerard de Nerval,1808~1855)이다.
2.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은 서구의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면으로 비판한 저서 중 압권(壓卷)으로 꼽힌다. 서구의 동양(특히 이슬람)국가와 문화에 대한 조작과 유태-아랍 문제에 대한 대응을 강하게 비판한 수작(秀作)이다.
초판은 미국 크누프 더블데이 출판그룹(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계열 편집권 독립 출판사 ‘판테온 북스’에서 하드커버 및 페이퍼백으로 나왔다. 이 책은 1978년 나오자 마자 반향을 일으키면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수많은 논쟁과 토론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수없이 써왔으나 이 책이 나온 이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줬다. 참고로 오리엔트는 라틴어 ‘Oriens’가 어원이며, ‘(해가)뜨다’를 뜻한다.
책은 세계 40여개 국에서 36개 언어로 번역, 출판됐다. 출간 초 예루살렘 포스트는 “중요한 책, 사이드만큼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지속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등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미국에서 나온 원래 제목 그대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으로 출판했다.
3.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의 동양 관련 편견과 담론, 가치, 이미지 등이 총합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 지배 방식'이라고 설파한다. 서양의 지리적 확장과 식민지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서구가 동양을 비뚤어지게 본 것(위협 혹은 무시)은 뿌리가 깊다. 유명한 ‘공산당 선언’의 저자인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1883)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1851)’이라는 책에서 “그들은(오리엔트인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고 비하했다. 당대 혁명파 지식인이 오리엔트 사람들을 자신도 대변못하는 야만인 취급을 한것이다.
영국 수상을 두번(40대,42대)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4)는 정치소설 ‘탕크레드(Tancred, 1847)’에서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고 썼다.동양을 정복 대상으로 본것이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서구의 우월적 눈으로 동양 세계를 편견로 인식한 왜곡 사상 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부정확한 문화적 표현의 오리엔탈리즘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 이후 서구 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 이론가, 제국 행정가, 작가들에 왜곡돼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벨기에 출신 미국 문학평론가(전 예일대, 하버드 대 교수) 폴 드만(Paul de Man, 1919~1983)은 이 책 출판 이후 "(에드워드 사이드는) 당대의 다른 어떤 현대 학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는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고 찬사를 보냈다.
4.이 책의 내용은 ‘아랍-이슬람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미묘하고 지속적인 유럽 중심적 편견’에 대한 비판이다. 비서구 민족과 비서구 민족에 대한 서구 중심의 담론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한다.
이책은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동양학자들에 의해 개념화한 오리엔탈리즘이 결국 19~20세기에 미국 동양학자들에 의해 채택됐고, 미국과 유럽 열강의 식민지 야망과 제국주의적 노력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왔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랍인과 무슬림에 대한 현대 오리엔탈리즘의 고정관념이 형성됐으며, 지금도 무슬림과 아랍인에 대해 석유 공급업자 또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특히 오리엔탈리즘이 서구-동양 관계에서 잘못된 문화적 표상의 원천임을 비판한다. 또 이슬람 문명에 대한 서구의 많은 연구가 객관적인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유럽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확인을 위한 ‘정치적 지성주의’라고 주장했다. 책은 서설과 제1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돼 있다.
5.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인 ‘페르시아 전쟁(BC 499~449)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의 승리(살라미스 해전, BC 480)를 기념하는 아이스킬로스(Aeschylos, BC 525/524~BC 456/455)의 연극 ‘페르시아인(BC 472)’을 주목한다.
이후 서구 학자와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주관 해석으로 ‘이국적인 동양’과 ‘불가해한 동양’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는 중세에 오리엔트 공포에 시달렸다.그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극에 달했다.서구가 오리엔트 공포를 극복한 것은 18세기였다.
이후 서양 우월주의 오리엔탈리즘에 갖혀 있던 서구 세계가 놀란 것은 현대에 와서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인 ‘욤 키푸르(Yom Kipur) 전쟁(1973년 10월 6일~25일, 욤 키푸르는는 유대교의 속죄일)과 석유수출국기구(OPEC, 1960년 창설)의 석유 금수 조치(1973년 10~1974년3월)였다고 한다.
6.저자의 오리엔탈리즘 연구의 선구적 작업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태생의 평론가·정신분석학자·사회철학자 프란츠 파농(Frantz Omar Fanon, 1925~1961)의 여러 저술이다.
파농의 저서는 전 세계 문학 이론, 문화 연구, 역사, 인문 지리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탈식민주의 연구가 본격화된 계기가 됐다. 이후 프랑스 현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팔레스타인의 역사가이자 교육자 압둘 라티프 티바위(Abdul Latif Tibawi, 1910~1981), 이집트계 프랑스 정치학자 아누아르 압델 말렉(Anouar Abdel-Malek,1924~2012), 프랑스 역사가 사회학자 막심 로댕손(Maxime Rodinson,1915~2004), 영국 역사가 리처드 윌리엄 서던(Richard William Southern,1912~2001)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 역사가 갸안 프라카시(Gyan Prakash, 1950~현재)의 ‘인도 탈식민지 역사(post-colonial history)’, 미국 학자이자 버클리대학 전 총장 니콜라스 더크스(Nicholas Dirks, 1950~현재)와 남아시아 및 탈식민지 연구 학자 로널드 인덴(Ronald Inden) 등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발칸 반도와 남아시아 연구학자 밀리카 바키치-헤이든(Milica Bakić-Hayden)은 ‘오리엔탈리즘 중첩(Nesting Orientalisms, 1992)’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이탈리아 역사학자 로렌조 카멜(Lorenzo Kamel, 1980~현재)은 ‘성경적 오리엔탈리즘의 영향(The Impact of ‘Biblical Orientalism’ in Late Nineteenth-and Early Twentieth-Century Palestine, 2014)’에서 ‘성경적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7.출간이후 광범위한 영향력과 폭발적인 반응에도 불구, 당대의 중동 문제 석학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다. 저자의 문제 제기와 가정(假定) 등이 부분적으로 잘못됐다는 지적이었다.
비판가와 그들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영국사학자 앨버트 호우라니(Albert Hourani,1915~1993)의 ‘아랍인의 역사(A History of the Arab Peoples, 1991), 영국 역사가 아랍문학작가 로버트 그레이엄 어윈(Robert Graham Irwin, 1946~현재)’의 ‘앎의 욕망을 위하여-오리엔탈리스트와 그들의 적(For Lust of Knowing-The Orientaists and their Enemies, 2006)’, 미국 역사학자 니키 케디(Nikki Keddie, 1930~현재)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슬람의 대응, 1968)’, 영국 태생의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중동연구가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1916~2018)의 ‘이슬람과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질문(The Question of Orientalism", Islam and the West, 1993)’ 등이 있다.
텔아비브 대학 중동연구가 마틴 크레이머(Martin Kramer, 1954~현재)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경멸적인 표현으로 바꿨다”고 힐난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막심 로댕송(Maxime Rodinson)은 “미국에서 이 책의 인기에 놀랐고, 이 책은 ‘논쟁적’이고 ‘약간 스탈린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고전학자 브루스 손튼(Bruce Thornton)은 “모호한 포스트모던 이론, 감상적인 제3세계주의, 명백한 역사적 오류, 서구의 죄책감의 지리멸렬한 혼합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저자는 버나드 루이스 (Bernard Lewis, 1916~2018) 에 대해 "객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주제에 대한 선전에 매우 가까운 기득권 오리엔탈리스트의 완벽한 예"라고 지적했다. 또 나중에 루이스와 공개토론에서도 “아랍인들을 비하하고, 이슬람을 잘못 표현하고, 서구 제국주의를 조장하는 시온주의 변증가이자 오리엔탈리스트”라 직격했다.
8.사후 레바논에서 비판이 나왔다, 2003년 10월 레바논 신문 데일리 스타(Daily Star)는 "사이드의 작품이 서구 문명을 탈선시키기 위해 고안된 허구라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며 "미국의 중동 연구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탈식민주의 연구 패러다임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책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뒤 미국 대부분 대학의 ‘오리엔탈 스터디스(동양학과)’는 학과 명칭을 ‘동아시아학과’로 바꿨다. 2002년에는 미국에서 신호범 전 워싱턴주 상원 의원에 의해 최초로 ‘오리엔탈 용어 사용 금지 법안’이 통과됐다. 또 2016년부터는 연방 법규와 공문서에서 ‘오리엔탈’ 이라는 단어 사용보다 ‘Asian’이라는 단어로 칭하기 시작했다.
9.한국에서는 1991년 교보문고에서 처음 출판했다. 번역자는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다. 이후 교보문고에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해서 출판하고 있다.
#.에드워드 와디 사이드(Edward Wadie Said, 1935~2003)=탈식민주의 연구의 선구자.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컬럼비아 대학 문학 교수이자 피아니스트. 서구 세계가 동양을 인식하는 방법론을 비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1.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1920~1948)의 일부였던 서 예루살렘 기독교 지역 탈비예에서 사업가 와디 사이드(Wadie William Said)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혈통으로 나사렛 출신인 힐다 무사(Hilda Musa)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 가문 모두 아랍 기독교인(Arab Christians)으로 개신교(Protestantism)를 믿었다. 아버지 와디 사이드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원정군에 합류한 팔레스타인으로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부모는 1차세계대전 종전 후인 1919년부터 이집트 카이로에서 문구 사업을 벌였다.
여동생은 로즈마리 사이드 자흘란(Rosemarie Saïd Zahlan,1937~2006, 미국인 역사가이자 프리랜서), 장 사이드 막디시(Jean Said Makdisi, 1940~현재, 프리랜서 작가), 조이스, 그레이스 등 4명이다.
2.1947년에 영국식 성공회 학교인 예루살렘의 성 조지 학교(St. George's School)에 다녔지만 그해 말 전쟁으로 카이로로 이주했다. 카이로에서 빅토리아 칼리지(Victoria College)의 이집트 분교를 다녔다. 하지만 1951년 퇴학당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 마운트 헤르몬 학교( Northfield Mount Hermon School, 대학 준비학교)를 다녔다. 이후 1957년 프린스턴대에서 ‘도덕적 비전-앙드레 지드와 그레이엄 그린(The Moral Vision: André Gide and Graham Greene)’이라는 제목의 졸업 논문을 완성,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곧바로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가 영문학 석사(1960)와 철학 박사(1964) 학위를 받았다.
3.철학박사 학위 과정 중이던 1963년 콜럼비아 대학교의 영문학 및 비교문학 강사로 부임했다.1966년에는 첫 저서 ‘조셉 콘래드와 자서전의 허구(Joseph Conrad and the Fiction of Autobiography, 1966)’를 낸다.
1974년에 하버드 대 비교문학 객원교수가 됐다. 이후 1975~1976년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 과학 고등 연구 센터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1977년 컬럼비아 대학 영어 및 비교 문학 교수가 됐다. 이후 존스홉킨스 대학과 예일대학 등의 객원교수를 지냈고, 유럽과 중동 여러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92년 컬럼비아 대학 정교수가 됐고, 2003년 퇴임했다.
4.1970년 아랍 기독교인이자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교수의 딸인 마리암 코르타스(Mariam Cortas)와 결혼했다. 둘은 아들 와디 사이드(Wadie E. Said(1972~현재, 변호사)와 딸 극작가 나즐라 사이드(Najla Said,1974~현재, 배우이자 작가)를 뒀다.
사이드는 1978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책을 내면서 명망있는 교수로 떠오른다. 또 1993년에는 '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 1993)를 발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7.1977년부터 1991년까지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국가평의회(PNC)의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3년 사임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 야시르 아라파트가 ‘오슬로 협정(1993년 임시 자치정부에 관한 원칙 선언)’에 서명하자, 이에 반발 그만둔 것이다. 이후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강력 비판했다. 이는 PA의 사이드의 책 판매 금지로 이어졌고, 2000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중동 평화 정상회담을 공개 지지하자 도서 금지령이 해제됐다.
1998년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BBC 다큐멘터리 영화 ‘팔레스타인을 찾아서(1998)’를 제작에 합류했다. 아들 와디와 함께 소년 시절의 장소를 다시 방문했고, 현대 서안지구의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에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방송되지 않았다.
8.사이드는 2000년 7월3일 아들 와디와 중동을 여행하면서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돌을 던지는 사진이 찍혔다. 그런데 이 사진은 테러리즘에 대한 본질적이고 개인적인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저널리스트 Edward Alexander는 Commentary 잡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침략”이라며 사이드를 ‘테러 교수’라고 말했다. 2001년 2월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프로이트 학회 강연 초청도 취소됐다.
그래도 사이드는 미국이 제국주의적 행태를 강력 비판했다. 미국의 코소보 전쟁(1998~99) 개입을 ‘제국주의적 행동’이라고 힐난했다. 2003년 클린턴 행정부의 ‘이라크 해방법(1998)’에 대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정치적 허가증’이라고 말했다.
사이드는 “미국 대통령과 역대 정부가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한 것은 중동의 지역 정치 불안정을 영속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비판했다.이집트 알아흐람 위클리 신문(2003년 4월 2일자)에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정치적으로 잘못된 군사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10. 사이드는 2003년 하이다르 압델 샤피, 이브라힘 다카크, 무스타파 바르구티와 팔레스타인의 양당 정치의 대안이 될 제3당(개혁주의 민주주의 정당)인 무바다라( Mubadala, 팔레스타인 국가 이니셔티브,교류 교환이라는 뜻)설립을 지지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주목을 받았고, FBI의 감시를 집중 받았다.
1991년 사이드는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chronic lymphocytic leukemia )이 불치병이며, 서서히 진행되는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결국 이 병이 깊어지면서 2003년 9월 25일 뉴욕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레바논 브루마나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묘지에 묻혔다.
11.사이드가 평생 잊지 못한 것은 가족이 서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쫓겨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 독일 출신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가 들어와 살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부버는 철학서 ‘나와 너’에서 ‘나’라는 존재가 인격이 되는 것은 ‘너’라는 존재를 인격으로 받아들일 때라는 명제로 유명한 철학자다.
사이드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잡지 더 네이션(The Nation)의 음악 평론가로도 일했다. 음악에 관한 책도 4권이나 썼다. 미국의 젊은 작곡가 모하메드 페어루즈 (Mohammed Fairouz,1985~현재)가 자신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1999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1942~현재)과 스페인 세비야에 바렌보임-사이드 재단을 설립하고,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공동 창단했다.
12.학자, 비평가, 문학가로서의 직업 생활 과정에서 약 20개의 명예 대학 학위를 받았다. 미국 비교문학회 웰렉상, 스피노자 렌즈 상. 미국에서 2001년 란난 문학상(Lannan Literary Award for Lifetime Achievement), 2002년 콩코드로 아스투리아스 왕자상(다니엘 바렌보임과 공동 수상). 미국 시민 최초로 술탄 오와이스 상(Sultan Owais Prize, for Cultural & Scientific Achievements, 1996~1997)을 받았다.
일본 민주주의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郎, 1935~2023)는 사이드를 평생 사상적 동반자로 삼았다.언어학자이자 철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좋은 친구이자 동료 정치 활동가였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