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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외로운 남자-희곡 '대머리 여가수'로 유명한 작가의 유일 소설은 35세 은퇴로 서막을 연다 본문
“나이 서른다섯이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 인생이 경주라면 말이다. 직장 일이라면 나는 신물이 났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니 이른 편도 아니었다. 예기치 못했던 유산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난 권태와 우울증으로 죽고야 말았으리라.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가끔 이런 횡재를 안겨다 주는 먼 친척이 있는 법이다. 내 경우가 마지막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찌 되었건 내 직장 동료 중에는 아무도 이런 류의 아버지나 사촌 형제 혹은 미국 아저씨를 가진 자가 없었다. 그들은 날 시기했다. 난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었으니, 상상해 보시라! 내 작별인사는 짧았다. 나는 근처 카페에서 보졸레 포도주 한 병을 돌렸는데 쥘리에트조차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부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탐닉한 후 서로를 버렸다. 사장은 애인보다 더 화를 내며 말했다.”(외젠 이오네스코 저, 이재룡 역, 문학동네, 2010)

1.갑자기 횡재(먼 친척의 유산 상속)한 남자의 독백으로 글이 시작된다.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자연스럽게 쓰면서 ‘환상적인 은퇴’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문장 곳곳에 1인칭 시점에서 개인사를 설명하는 사소설(私小說)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문장과 다음 문장과의 연결성이 좋고 단문체로 깔끔하게 읽힌다. 입사 시험의 자기소개서를 쓸 때 활용할만한 문체다.
2.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Le Solitaire, 1973)’는 현대 부조리극(不條理劇)의 거장이 쓴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출간 초기에는 문단의 호평은 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의 ‘팡세(Pensées.생각하는것)’,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26~2980)의 ‘구토(La Nausee,1938)’의 잇는 걸작으로 평가됐다.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린 소설이다. ‘난장판’이라는 희곡으로 각색, 공연되기도 했다. 대다수 사소설이 그렇듯이 우울하고 답답한 자전(自傳)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3.소설의 시대 배경은 1960년대다. 냉전이 최고조로 달한 시기에다가 프랑스에서는 학생운동 등으로 불안과 고독의 연대였다. 소설에서 서른 다섯의 나이에 은퇴하다니 말도 안되지만 평균연령이 65세 전후ㅈ시대였던만큼 2023년 기준으로 따지면 50세 전후가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하면 안된다. 문자 그대로 자전적 요소를 쓴 소설이어서 큰 서사적(敍事的) 이야기나 에피소드가 없다.
자전 요소가 강한 만큼 조국을 두고 또하나의 조국에 이식된 작가의 소통의 어려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고독과 죽음 등이 지루할 정도로 배어있는 작품이다.

4.줄거리는 홀로살기를 하면서 사회와 불화와 적응을 추구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뜻하지 않게 유산을 물려받자 퇴사를 한다.발버둥치면서 살아온 직장생활을 청산하는 것이다.
우선 누추한 호텔방에서 나와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부딪치는 문제는 인생은 무엇인가 이다. 인간의 존재와 사는 이유로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이다.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도 정답은없다.너무 형이상학적이다. 종교에 심취하지 않는 한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다. 이는 질문 속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고 여자 친구는 사귀다가 헤어지고, 철학도에게 스스로의 사색과 고민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답은 없다. 그런 속에서 시간은 흐른다.
내면에 침잠해 있을 때 바깥세상은 시끄럽다. 혁명 아닌 혁명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치고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는 일도 벌어진다. 존재의 근원보다 당장 현실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내면에서 추구하는 것과 현실의 불협화음, 진실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 이데올로기의 범람속에서 편을 가르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흐른다. 삶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는 사이 주변은 하나 둘 떠나간다. 결국은 홀로 남는다.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현대 부조리극(不條理劇, theatre of the absurd)의 선구자. 루마니아 이름은 에우젠 이오네스쿠(Eugen Ionescu)이다.
1.루마니아 서부 슬라티나(Slatina, 올트군 중심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방정교회(Orthodox Christian church) 종교를 가진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프랑스-루마니아계(혹은 유태인) 개신교 여성이었다.
1910년 전후 부모가 프랑스로 이주했으나 부모의 이혼으로 다시 1925년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유년시절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셈이다.
성 사바대학(Saint Sava National College)에서 공부한 후 부쿠레슈티 대학(1928~1933)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이때 프랑스어 교사 자격도 취득했다. 청년시대는 루마니아에서 보낸 것이다.
2.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에밀 시오란(Emil Cioran, 1911~1995, 루마니아 철학자이자 수필가)과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 종교철학자, 전 시카고 대 교수)를 만났고, 세 사람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이오네스코는 처음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루마니아어 시집 '미미한 존재들을 위한 비가'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 것이다.
3.1938년 프랑스로 가서 파리에 정주했다. 그런데 2차세계대전 발발로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다시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1942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Marseille)로 가서 비시(Vichy)정부에 대한 루마니아 외교 사절단 역할을 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4.1936년 1936년 일간지 '질서' 편집장의 딸 로디카 부리레아누(Rodica Burileanu)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딸 마리 프랑스 이오네스코(Marie-France Ionesco)가 있다. 이오네스코는 딸을 위해 틀에 얽매이지 않는 동화를 쓰기도 했다.
시집을 내고 비평 활동을 했지만 연극 작가로는 뒤늦게 데뷔했다. 사실상 40세에 가까운 1948년에 첫 희곡을 발표했다.
1948년 희곡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 La lecon, Les chaises. 영어 The Bald Soprano)’로 1950년 파리의 녹탕뷜(Noctambule) 극장에서 첫 공연됐다.
하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정한 주제나 맥락이 없는 동문서답식으로 오가다 엉뚱한 결말에 이르러 관객들이 이해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자유극장에서 1969년 공연됐다. 또 2011년 1월 14일 대학로 SM아트홀에서 막을 올렸다.

5.이오네스코는 나중에 드라마의 아이디어와 기법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지만 처음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대머리 여가수에 이어 나온 ‘의자(Les Chaises)’는 1952년 4월22일 파리 랑크리(Lancry) 극장에서 초연됐는데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첫 공연을 본 관객들이 분노해 입장료 환불을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져서 출연진이 극장 뒷문으로 도망가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한 달 뒤 러시아 출신 프랑스 극작가 아르튀르 아다모프((Arthur Adamov,1908~1970)가 호평 글을 올린 데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 196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프랑스 문인들이 ‘의자들의 옹호’라는 서명서를 내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7.1964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은 못했다. 1970년 오스트리아 유럽 문학상(Austrian State Prize for European Literature)과 1973 년 예루살렘 상(Jerusalem Prize)을 받았다.
1973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됐다. 1985년 T.S. 엘리엇상을 받았다. 1977년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한편 이오네스코는 정치적으로 이탈리아 정치가이자 언론인 마르코 판넬라(Marco Pannella,1930~2019)가 주창한 좌익 자유주의 초국가 급진당에 동조하기도 했다
8.1970년대 들어 인권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조국 루마니아의 독재정치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1994년 3월 파리 자택에서 영면했다. 향년 85세. 파리의 몽파르나스 시메티에르에 묻혔다. 루마니아 학술원은 이오네스코에 대해 사후(死後)인 2000년대 들어 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9.주요작품으로 ‘수업(1951)’, ‘의자들(1952)’, ‘의무의 희생자(1953)’, ‘이사온 하숙인(1957)’, ‘알마 즉흥극(1956)’, ‘코뿔소(1960 초연)’, ‘왕이 죽다(1962)’, ‘공중보행자(1963)’ 등 총 33편의 희곡이 있다.
평론집으로 1963년 발간한 ‘노트 반(反)노트’가 있으며, 1975년 마지막 희곡 ‘가방을 든 남자’를 발표했다. 프랑스 파리 5구 위세트 거리 23번지에 있는 위세트소극장은 1957년부터 2009년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을 공연했다.(콘텐츠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