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파한집-우리나라 최초 시화집이자 문학 평론집의 첫 문단은 스토리텔링으로 서두를 연다 본문

카테고리 없음

파한집-우리나라 최초 시화집이자 문학 평론집의 첫 문단은 스토리텔링으로 서두를 연다

지성인간 2025. 2. 10. 06:18
728x90
반응형
파한집은 우리나라 첫 시화집으로 문벌귀족의 문화생활을 그대로 엿볼수 있다.고려 후기 문벌귀족의 생활을 그린 ‘아집도(雅集圖)' 대련(對聯)의 일부. 아집(雅集)은 시나 음악을 듣고 토론하는 우아한 모임, 맑고 아름다운 모임이라는 뜻이다. 작가 미상. 호암미술관 소장.

권상(卷上)-좌간의대부 비서감 보문각학사(左諫議大夫 秘書監 寶文閣學士 知制誥) 이인로(李仁老) 지음
"진양(晉陽)은 옛 제왕의 도읍지(帝都)로 산수(溪山)의 좋은 경치가 영남(嶺南)에서 제일이다. 어떤 사람이 그곳의 그림을 그려 상국(相國) 이지저(李之氐)에게 바쳤다. 이지저가 벽에 걸어두고 보았는데, 군부 참모(軍府參謀)인 영양(형양,榮陽) 사람 정여령(鄭與齡)이 와 뵈니 상국이 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그림은 그대의 고향(桑梓鄕)이네. 마땅히 한 구(句) 남기시게.' 라고 하였다. 정여령이 붓을 쥐고 일어나 다가가 적기를, ‘점점이 푸른 산이 푸른 호수에 누웠네/ 공께서 이것이 진양 그림이라 하시는데/ 물가에 초가집 얼마나 있는가/ 그 중 내 집은 그렸는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좌중의 사람들이 그 정밀하고 민첩함에 감복하였다."(파한집-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 영인본인 기해본(1659), 국사편찬위원회 강은경, 김우택, 박진훈, 현수진 역, 2017)

고려는 불교의 융성에도 유학이 발전, 국가 체제 유지는 유학을 배운 문신이 주도했다. 불경에서 부자간의 왕권 다툼을 그린 13세기 말 고려 불화인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 이 불화는 왕과 왕비, 후궁,시녀들 모습을 담았는데 왕비 등의 옷 색깔이 붉다. 북송 휘종(1082~1135)때인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 1091~1153)은 '고려도경(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왕비의 복식은 홍색이고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았다고 기록했다. 일본 츠루가시 사이후쿠지(西福寺)소장.

1.옛 책 답지 않게 전지적 시점에서 스토리텔링 형태의 수필처럼 전개된다. 시화집의 첫 문단임에도 객관성을 최대한 담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곧바로 그림을 소개하고 느닷없는(?)등장인물을 통해 읽는 이의 주목을 높인다. 
도입부가 중국 고대인지 고려 중기 상황을 설명 하는 것인 지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일부는 고려의 남쪽으로 해석하고, 일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라고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진양을 고려 남쪽으로 해석하면 제도(帝都, 제왕의 도읍지)가 아니었는데다  영남(嶺南), 상국(相國) 이지저(李之氐), 군부 참모(軍府參謀)인 영양(형양,榮陽) 사람 정여령(鄭與齡) 등에 대해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시(詩)의 내용(산 그림자가 잠길 정도의 호수 등)도, 당시 진주댐이 없었던만큼  현재의 진주(진양)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어색하다.  
본문에 앞서 나오는 이인로의 직책 중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는 중서문하성의 정4품직이다. *.비서감(秘書監)은 경적(經籍)과 축소문(祝疏文)을 관장하던 비서성의 종3품직이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는 중요 문서와 전적(典籍)을 보관하던 보문각의 종3품 대우 관직, *.지제고(知制誥)는 왕언(王言)을 대신해 짓는 임무 관직이다. 본문에 나오는 *.진양은 고려 중기로 해석하면 현재의 진주시, 춘추전국시대로 해석하면 진나라의 군사요충지 산시성 '晉陽'으로 현재 타이위안(太原)으로 부른다. *.영남(嶺南)은 고려 중기에 쓰지 않는 말이지만 현재의 기준 영남지방, 중국으로 해석하면 난링산맥의 남쪽, 링난(Lingnan)을 말한다. *.상국(相國)은 고려중기에 재상, 혹은 춘추 전국 시대의 재상을 뜻한다. *.이지저는 고려 중기로 따지면 참지정사(종2품)판서경유수사(參知政事判西京留守事)를 역임한 이지저(李之氐, 1092~1145), 중국으로 따지면 춘추전국시대 재상으로 보인다. *.정여령(鄭與齡)은 고려와 중국 모두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 桑梓鄕(상재향)은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있는 마을로 시경(詩經)에 나온다. *.영양(형양,滎陽)은 정여령의 고향이라 하지만, 진양 그림을 두고도 고향이라한다. 굳이 고려로 따지만 영양은 곧 진양이다.뭔가 맞지않는다. 중국으로 따지면 허난성 싱양(滎陽)이다.

17세기 간행 파한집-조선 효종 10년(1659) 경주 부윤(慶州 府尹-수령,종2품) 엄정구(嚴鼎耉, 1605~1670, 이조좌랑 역임)가 조속(趙涑, 1595~1668, 조선 중기 화가)의 집에 소장된 비본(秘本)을 각판해 간행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2.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1260)은 우리나라 최초 평론집(評論集)이자 시화집의 효시다. 고려 중기 이전 시문을 모은 고전시학(古典詩學) 총서의 으뜸이다. 시평·서필담(書筆談)·수필·시화(詩話) 등 총 3권 1책 83장을 수록했다. 특히 작시법(作詩法), 작품평까지 수록, 문학 평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우리나라 첫 문학 비평서인 셈이다. 
책이 목판 인쇄본으로 나온 것은 저자 사후 40년 뒤인 1260년(고려  원종 1) 3월이다. 경상도 기장현(機張縣, 부산 기장군)의 수령으로 있던 아들 이세황(李世黃)이 유고(遺稿)를 수습, 안렴사(按廉使, 안찰사,按察使-고려 지방관직) 대원 왕공(大原 王公, 임금의 근친에게 봉하는 별칭)의 후원으로 간행했다.
이세황은 합문(각문, 閣門,편전의 앞문)지후(祗候,고려 시대 조회와 의례 등 의식을 맡아보던 관직.종6~7품)를 지낸 이인로의 얼자(孽子, 천민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 통칭 서자)다.

17세기에 간행한 이인로의 '파한집' 펼침본.https://ko.wikipedia.org

학계에서는 원고 마무리(탈고)를 1210~1213년 경으로 보고 있다. 본문에  ‘금상(今上, 지금 임금)’을 희종(熙宗, 1181~1237,재위 1204~1212)으로 쓴 곳이 있어서 희종 8년(1211)으로 보는 견해다. 또 아들 이세황이 간행 시 발문에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잊지 않은 것이 50년'이라고 썼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1210년이다. 여기에 중국 국가도서관 소장 '보한집(補閑集)'에 쓴 고려 문신 이장용(李藏用,1201~1272, 원종 때  문하시중  역임,몽골 침략기 외교 달인)의 발문은 숭경(崇慶, 금나라 위소왕-衛紹王 연호) 연간으로 썼다. 이는 1212~1213년이다. 친필본은 생전에 이미 완성돼 문인들 사이에 필사본 형식으로 전해진 셈이다.  
중간본은 조선 성종 24년(1468) 경상감사(慶尙 監司, 종2품) 이극돈(李克墩, 1435∼1503, 성종 때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연산군때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지목, 나중에 삭탈관작,削奪官爵)과 도사(都事, 종5품) 이종준이 간행해 올린 것을 왕명으로 간행해 내부(內府, 재화와 세금 등을 관리하는 관청)에 간수하고 홍문관(弘文館, 문서 관리 및 왕의 자문기관)에서 주해(註解,뜻을 알기쉽게 풀이하는 것) 하도록 했다. 하지만 둘 다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 '파한집'은 조선 효종 10년(1659) 경주부윤(慶州 府尹, 지역 으뜸벼슬) 엄정구(嚴鼎耉, 1605~1670, 이조좌랑,한성부 좌윤-종2품 역임)가 조속(趙涑, 1595~1668, 조선 후기 화가)의 집에 소장된 비본(秘本)을 각판한 것이다. 한편 일제시대 서지학자로 연희대와 서울대 교수를 지낸 학산(鶴山) 이인영(李仁榮,1911~1950.6.25 납북, 사망 추정)은 자신의 장서목록 '청분실서목(靑芬室書目,1968년 영인본)'에서 현존 목판본 '파한집'은 모두 이때(효종)각판된 것이라고 고언했다. 전하는 파한집 모두 인쇄 및 제책, 보존 방식만 차이가 있을 뿐, 효종때 판본이라는 뜻이다. 

가문에 내려오는 이인로의 '파한집'을 보관해 온 조선 후기 화가 조속(趙涑, 1595~1668)의 금궤도(金櫃圖, 1656). 인조가 '삼국사기'를 보고 1636년 그림 제작을 명했는데 실제 완성은 1656년이다. 효종 때 이조판서 김익희(金益熙, 1610~1656,대제학 역임)가 쓴 어제(御製, 왕의 명을 받아 쓴 글)가 실려 있다.https://ko.wikipedia.org

3.파한집은 시화집이면서도 고려시대 생활상이 많이 담겨 있다. 지방관 재임 때 '먹'을 제조하는 임무를 받고 공암촌(孔巖村, 고려시대 김포 양천-현 강서구) 주민과 함께 한 일, 정월 대보름 밤에 어좌 앞에 붉은 비단 등롱을 장식했다는 것,  문인들이 병풍에 묵화로 대나무를 그려(묵죽, 墨竹)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고려 문종의 4남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교종 중심 천태종 개창)의 제자로 유명한 고승 혜소(惠素, 의천의 제자)가 왕이 준은 백금으로 사탕(砂糖)을 잔뜩 샀다는 이야기(설탕 수입) 등은 고려인의 사회상을 엿보는 귀중한 자료다
이에따라 고려 중기의 문신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속명 전견명 全見明,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 1181)'에 이어 가장 오래된 사료로도 볼수 있다. 한편 파한집은 고려의 왕명과 기년문자(紀年文字)도 써서 독자성도 강조했다.
제목으로 쓴 파한(破閑)’이란 글자 그대로 한가함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전원에 은둔하며 온전한 한가로움을 얻었기에 ‘파한’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파한집은 '破閑'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뛰어난 시, 명유(名儒)들의 문장, 자칫 사라질 수 있는 수많은 문인의 글이 수록돼 있다. 이에 현대 학계는 '한가함을 깨뜨리고 진정한 문학을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저서'로 규정한다.

이인로의 '파한집'이 간행되던 시기인 1200년대 고려 불화 '아미타삼존도'. 고려는 유학을 숭상했음에도 왕실과 일반 백성은 불교에 심취한 불교-유학 연립국가였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4.고려는 불교의 융성에도 유학이 발전, 국가 체제 유지는 유학을 배운 문신이 주도했다. 파한집의 내용도 유학에 연연하지 않고 삼한(고려)의 풍속, 서경(평양)과 개경의 산하(山河), 인물, 궁정, 절(寺) 등과 관련한 시화·일화·기사 등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파한집은 '詩話'를 넘어서 수필, 평론 등으로 발전한 글이 많이 수록돼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비평문학을 개척한 저서로도 꼽힌다.
또 송나라 문장가 소식(蘇軾, 1036~1101)과 문동(文同, 1018~1079) 같은 묵죽화가(墨竹畵家)도 소개돼 있다. 시문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드러난다.  시문학, 즉 문장은 빈부와 귀천으로 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문장에서 신분 차등과 구속을 배제한 것이다. 어의(語義, 말의 뜻), 어묘(語妙, 말의 빼어남), 의묘(意妙, 뜻의 심오함)도 중요하게 여겼다. 즉 문학이란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뜻이 있어야 하고, 지나치게 다듬는 것을 지양했다. 
다만 충의지절(忠義之節)의 형상화를 강조한 대목도 많아 '대의멸친', '충효'를 강조하는 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 시에 중국 고사를 많이 인용하고, 중국 문인을 모범으로 삼아 비교한 것도 고려 자주성을 저해한다. 이는 유학을 배운 문신의 지배체계를 갖춘 고려의 한계라 할 수있다. 이는 고려가 개인적 덕망이나 능력보다는 '족망(族望)'을 중시해 실력보다 명문가와 문벌이 장악한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대의, 충효, 장유(長幼)를 제1덕목으로 여긴다.한편 파한집에는 개성 송악산 자하동에 있는 사찰 안화사(安和寺) 창건(혹은 고려 제16대 예종(1079~1122) 때 중수, 1118년) 때  송(宋) 8대 황제 휘종(徽宗,1082~1135, 1125년 퇴위 )이 전액(殿額, 궁궐이나 사찰 등에 붙이는 이름울 쓴 액자)과 불상(佛像)을 설치할 전재(殿財, 돈)을 보내주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초상화 이야기도 나온다. 고려 17대 인종(仁宗, 1109~1146)의 의관(醫官)으로 예종의 태의(太醫)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1등급 차관-재상급)에 오른 최사전(崔思全, 1069~1139)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려에 유학 열풍을 몰고온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 984~1068) 초상화.고려 문종때 문하시중을 지낸 문신으로 우리나라 최초 사립학교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설립자다.출처=문헌서원(文憲書院) http://postfiles2.naver.net

5.파한집에는 작품 분석도 나온다. 고려 무신정변 때 불교에 귀의한 승려 신준(神駿, 생몰미상)과 가전체 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국순전(麴醇傳, 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소설)'의 저자 임춘(林椿,생몰 미상, 1152~1180년대 사망 추정)의 작품에 대해 '한스러움'과 '구슬픔'이 깔려 있다며 현실상황(무신정권)과 연관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인로는 당대와 고려시대 말까지 극찬받았다. 고려에서 문장은 유승단(兪升旦, 혹은 元淳, 1168~1232, 참지정사,  종2품 역임)이지만 '시는 이인로'라고 했다. 이는 고려가요 ‘한림별곡’의 첫 장에 "元淳 文(원순 문-유승단) 仁老 詩(인로 시-이인로) 公老 四六(공로 사륙-이공로의 사륙변려문) 李正言(이정언-이규보) 陳翰林(진한림-진화) 雙韻走筆(쌍운주필-운을 떼자마자 시를 빠르게 짓는 것) 冲基(충기-유충기) 對策(대책-대책문) 光鈞(광균-민광균) 經義(경의-경서풀이) 良鏡(량경-김양경) 詩賦(시부-시와 부) 위 試場(시장-과거 시험장)ㅅ 景(경) 긔 엇더니잇고"라고 나온다.
조선 세조 때 최초로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정2품)을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 종1품)까지 오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자신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 1474)'의 서문에서 이인로의 '파한집'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8~1367, 공민왕 때 문하시중 역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1342)' 같은 책이 나오면서 시학의 정수를 비로소 고찰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발림무용단이 2012년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공연한 창작무용 ‘파(破).한(閑)’.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공연했다. 출처=발림무용단, 인천일보 재인용

6.파한집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제시대인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냈고, 해방 이후에는 1964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역주본(譯註本)을 간행했다.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8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 1504)'와 합본, 역주 간행했다. 용재는 조선 연산군 때 공조(工曹)판서(정2품) 겸 대제학(정2품)을 지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부수고 시신을 참수)당한 인물이다.
1659년 목판본을 모아 간행한 책 중에서는 조종업(趙鐘業, 전 충남대교수)이 낸 '한국시화총편(韓國詩話叢編, 1989, 동서문화원, 1996, 태학사)를 목판 인쇄 상태를 재간행한 것 중 최고로 친다. 1973년에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전2권'으로 영인 간행했다. 

이인로의 조상과 후손들을 모시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원인재(源仁齋, 고려문신 이허겸,李許謙 사당). www.naver.com

#. 이인로(李仁老, 1152~1220)= 고려 19대 명종(明宗, 1131~1202) 때의 문인. 본관은 경원(慶源)으로 고려 무신란 이전 3대 가문인 경원이씨(인주 이씨, 인천 이씨, 흥양 이씨)다.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최종 관직명은 '좌간의대부 비서감 보문각학사(左諫議大夫 秘書監 寶文閣學士 知制誥)'이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4품), 비서감(秘書監, 종3품),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종3품 대우), 지제고(知制誥, 조칙을 짓는 관직).

인천 연수구 원인재에 있는 쌍명재 이인로 문학비.https://ko.wikipedia.org

1.고려 전기의 명문가 경원이씨(慶源李氏) 후손으로 아버지는 좌상시(左尙侍, 정3품)를 지낸 이백선(李伯仙)이다. 증조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를 지낸 이오(李䫨, 1042~1110), 할아버지는 1149년 공부상서 우복야(工部尙書 右僕射, 정2품)를 지낸 이언림(李彦林, 생몰 미상)이다. 이언림은 고이부곡(高伊部曲, 흥양)으로 낙향, 흥양(전남 고흥)이씨 발원시조가 됐다.
이인로는 조실부모(早失父母, 일찍 부모를 여의는 것)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였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키웠다. 큰아버지는 스님으로 교종 계통 개성 흥왕사 화엄승통(華嚴僧統, 화엄종 우두머리)인 요일(寥一, 생몰미상, 고령 반룡사 창건주)이었다. 이인로는 10대 초반까지 요일 스님 밑에서 유교 전적(典籍)과 제자백가(諸子百家書, 중국 고대 여러 학파와 그들 저서 총칭)를 두루 섭렵했고, 시문 짓기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런데 열여덟 무렵이던 고려 18대 의종(毅宗, 1127~1173,고려 태평성대를 끝낸 왕) 24년(1170)때 대 변혁, 정변(武臣政變, 무신정변-정중부의 난)이 일어났다. 무신(武臣, 당시 명칭은 호신, 虎臣)으로 근위대 견룡군(牽龍軍, 왕의 직속 친위 부대) 산원(散員, 하급 장교, 고려 정8품)이던 이고(李高, ?~1171, 명종 옹립 벽상공신), 근위대장-견룡행수(牽龍行首) 이의방(李義方, ?~1174, 최초 무신 집권자), 원로 무신들의 리더 정중부(鄭仲夫, 1106~1179, 제2대 무신 집권자) 등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인로가 살던 시대는 무신정변으로 무인 집권기였다. 무신정권은 몽골항쟁을 위해 강화로 천도해 정권 유지에 나섰다.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궁지.출처=강화군청(www.ganghwa.go.kr)

2.이인로는 무신정변으로 문신들이 수없이 참살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하지만 1년도 안돼 환속해 스물세살때인 1175년 진사시(進士試)인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했고, 태학(太學, 국립교육기관)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공부했다. 육경은 춘추전국시대 여섯 가지 경서(經書)로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기(樂記)'를 말한다. 악기 대신 '주례'를 넣기도 한다.
명종 10년(1180) 스물 아홉에 장원급제한 이후 관직에 들어간다. 이후1182년 장인인 사업(司業) 최영유(崔永濡, 생몰 미상)가 금나라 하정사(賀正使,정월 초하루에 보내는 새해 축하사신)로 갈 때 서장관(書狀官, 문서기록관)으로 수행한다.  귀국후 계양군(桂陽郡, 인천) 서기를 맡는다. 
본격 출세의 길은 중서문하성 평장사(정2품) 문극겸(文克謙, 1122~1189, 무신정권 실세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린-李隣의 장인 )의 천거가 일조했다. 한림원(임금의 명령을 글로 작성하는 관청)에 보직돼 조칙(詔勅), 사소(詞疏, 궁정의 각종 축문 등)을 맡았다. 조칙, 사소, 시사를 짓는데 막힘이 없어  ‘복고(腹藁, 마치 뱃속 원고를 꺼내듯이 막힘이 없는 글 짓기)’라는 별칭을 들었다. 이후 예부 원외랑(禮部 員外郞, 정6품)을 지냈다.

고려 문인들의 묵죽 솜씨를 알수 있는 청자에 그려진 묵죽도.이인로 파한집에 문인들이 묵죽을 많이 그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묵죽이 그려진 '청자 상감매죽학문 매병(靑磁 象嵌梅竹鶴文 梅甁, 12세기 중엽)'.매병은 아가리가 좁고 어깨가 넓으며 밑은 홀쭉하게 빠진 병을 말한다. 1986년 대한민국 보물 제903호로 지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고려 중기 제19대 왕  명종(明宗,1131~1102)때의 문인으로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의 저자로 알려진 임춘(林椿, 생몰미상, 예천 임씨 시조)· 명종 때의 학자 오세재(吳世才, 1133~1383?) 등과 금란지교(金蘭)를 맺고, 어울려 시와 술로 즐겼다. 이들은 중국 위진남북조(220~589) 시대 부패권력에 등돌리고 유유자적한 죽림칠현(竹林七賢,대나무숲에서 노닌  7명의 현자)에 빗대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 시를 흝고 묵죽을 그리며 교류했다. 이들을 강좌7현(江左七賢)이라고 한다. 오세재(吳世才, 생몰미상)·임춘(林椿)·조통(趙通, 생몰미상, 한림학사 역임)·황보항(皇甫抗, 생몰미상,중원 서기 역임)·함순(咸淳, 1155~1211, 시비곡직을 가리는 지방직인 사직,司直 역임)·이담지(李湛之,생몰 미상) 등이다. 이인로는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초서(草書)·예서(隸書)에도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또 시문 사상에도 뛰어났다. 시의 본질과 독자적 가치를 강조해 ‘어의구묘(語意俱妙: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 의묘(意妙, 뜻의 묘함), 신의(新意: 새로운 뜻)를 중시했다. 

4.이인로는 1204년 이후 비서감 우간의대부(秘書監 右諫議大夫, 정4품)에 이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오른 직후 병들어 누었다. 병든 몸으로도 시문집 '파한집'도 완성했다. 그런데 병이 깊어 미처 임금에게 올리지 못하고 개성 홍도정(紅桃井)의 집에서 영면했다. 향년 69세. 
저서로 고율시(古律詩) 1천 5백여 수를 모은 '은대집(銀臺集)', 나이가 많아 물러난 고관들의 모임인 기로회(耆老會) 모임을 하며서 지은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이 있는데 후대에는 파한집만 전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쓴 '고려사' 열전의 '이인로'편에서는 출중한 인물이나 '성질 때문에'크게 쓰이지 못한 것으로 적고 있다. “성미가 편벽하고 급해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

이인로의 아들 이세황이 '파한집'을 발간할 때는 무신정권이 종식된 직후인 1260년이었다. 조선 초에 편찬한 '고려사' 반역전에 실려 있는 무신정권 1대 집권자 이의민 열전의 일부분. https://ko.wikipedia.org

5.이인로의 아들로 '파한집'을 간행하면서 발문을 쓴 이세황은 조선 초에 쓴 '고려사'의 '이인로 전(李仁老傳)'에 나오지 않는다. 이인로 전에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와 사이에 아들로 정(程), 양(穰), 온(褞) 등 세 명만 나온다. 다만 조선 중기 세자시강원 찬선(贊善, 정3품)을 역임한 보학(譜學, 족보학)의 권위자 백농(伯農)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이 전주이씨를 비롯하여 540여 개 성관(姓貫)을 수록한 족보 '씨족원류(氏族原流)'에는 고려사의 세 아들과 얼자(孽子, 천첩소생 아들 혹은 재난을 만난 아들)로 '세황'이 나온다.
이인로는 현대에 와서 고려시대 각종 기념물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경기 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30-102에는 고려역사관과 고려통일대전에 모셔져 있다. 2001년에는 쌍명재 이인로 문학비가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인천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원인재(原仁齋) 앞에 건립됐다.

이인로는 위진낙북조시대(220~589) 시인 도잠(陶潛)을 연모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 중국 명말청초 시대 화가 진홍수(陳洪綬, 1598~1652) 작품.https://ko.wikipedia.org

6.이인로는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중국 동진~육조시대 송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 도잠, 陶潛)을 사모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몇번을 읽었다고 밝혔다. 집이름(당호)도 '와도헌(臥陶軒)'으로 지었다. 와도헌은 ‘도연명이 누워 있는 마루방’이라는 뜻이다. 이인로는 '와도헌기(臥陶軒記)'도 지었다.(콘텐츠 프로듀서)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