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우신(愚神)예찬-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쏜 명저의 첫 문단은 강렬한 연설문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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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愚神)예찬-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쏜 명저의 첫 문단은 강렬한 연설문이다.

지성인간 2023. 7. 1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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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은 말한다-세상 사람들은 우신인 나에 대해 온갖 말을 해댑니다. 어리석은 자들조차 우신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는 것을 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신들과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자는 나 말고는 없습니다. 내가 여기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 앞에서 연설하기 위해 연단에 오르자 마자 어떤 새롭고, 예사롭지 않은 기쁨으로 모두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지고 이마의 주름이 금세 펴지며 환한 웃음으로 내게 환영의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 그 사실을 보내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박문재 역, 현대지성, 2022)

출판사 현대지성이 낸 우신예찬(2022)표지. 독일 화가 게오르게 그로스 작품 ‘사회를 떠받치는 사람들‘을 사용했다.

1.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연설의 시작을 직접적으로 알리는 도입부다. 연설인 만큼 구어(口語, 입말)를 그대로 쓰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어 높임말을 사용했다. 모여든 군중(이 책을 읽을 독자)을 사로잡아야 하는 장면인 만큼 과장된 어휘를 사용, 집중을 유도하고 있다. 온갖, 장담, 나말고 없다, 구름처럼, 박수갈채, 강력한 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해학과 풍자, 조롱, 아이러니를 가득 담은 연설문을 쓰기 위한 어휘들이다.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글을 쓸 때 참고할 만한 첫 문단이다. 우신(愚神)은 어리석은 신이라는 뜻이다.

2.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愚神禮讚, Moriae encomium, 1511,모리아 엔코미움)’은 르네상스를 넘어 종교개혁의 시작종을 알리는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유럽 사회의 다양한 전통, 라틴(가톨릭) 교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 종교의 폐해, 지배층의 허위의식 등을 고차원 상징과 비유로 쓴 ‘소설형 에세이(장문의 연설문)’다. 또 철학적 사유가 들어가 있는 ‘현실 고발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사망 전까지 3번의 개정작업이 이뤄졌다. 1512년 ‘최초의 개정판’이 나왔고, 1522년 저자가 또 손을 본 개정판이 출판됐다. 이후 1532년 ‘저자가 다시 손을 본 최종본’이 나왔다.
라틴어로는 ‘Stultitiae Laus’로도 쓴다. 모리아 엔코미움(Moriae encomium)은 ‘어리석음을 찬양한다’는 의미이지만 ‘더 찬양한다’는 뜻도 있다. 중의적 표현인 셈이다.
라틴어로 쓴 책인 만큼 영어와 프랑스어로 수많은 판본이 나왔으며, 체코어, 독일어 등으로도 번역됐다. 영어는 ‘In Praise of More’, ‘The Praise of Folly’로 번역된다.

18세기에 새롭게 간행된 프랑스어판 우신예찬(L'loge de la Folie, 1728) 표지.photo by wikipedia

3.1509년 런던 버클러스버리(Bucklersbury)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유토피아 저자) 집에 머물면서 10여일 만에 탈고했다. 실제 출판은 3년 후인 1511년이다. 서문에 토마스 모어에게 헌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나오자 마자 종교계의 반발 속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 지인들이 ‘혹시 잡혀 갈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기성 종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서 가톨릭계의 공격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에는 의외로 교황 레오 10세(본명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1475~1521)와 추기경들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이는 상징과 은유로 표현한 에라스뮈스의 통렬한 풍자와 조롱을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에 예상보다 늦은 출판 50여년 만인 1559년 금서(禁書) 목록에 올랐다.

4.이 책은 옛 고전(고대 그리스 신화 등)을 통한 암시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은 ‘모리아(Moriae, 라티어로 바보신, 어리석음)’라는 여신이다. 행복의 섬에서 웃으며 태어난 젊음과 부의 딸이다. 모리아는 군중 앞에서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세상은 어리석음이 충만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해진다고 연설한다.
세상은 온갖 거짓과 범죄, 주책없는 행위, 비참한 삶들이 넘쳐나는데 현자(賢者)들은 모리아를 찬양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는 현자를 자처한 학자와 성직자들의 어리석음을 찬양(비웃는 것)하는 것이다.
모리아의 충실한 동반자(혹은 시중드는 이들)로는 필라우티아(Philautia, 자기애), 콜라키아(Kolakia, 아첨), 레테(Lethe, 건망증), 미소포니아(Misoponia, 게으름), 헤도네(Hedone, 쾌락), 아노이아(Anoia, 치매), 트리페(Tryphe, 방탕함), 코모스(Komos, 무절제)와 니그레토스 히프노스(Nigretos Hypnos, 무거운 수면) 등이 있다고 말한다. 모리아는 이들 없이는 삶이 지루하고 불쾌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모리아는 ‘최고의 지혜는 미친 체 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한다. 그리고 현자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이들이 진짜 우신(愚神)이라고 일갈한다. 이성의 소리는 욕설과 비난에 덮여 버린다고 강조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No Man is wise at all Times, or is without his blind Side(어떤 사람도 항상 현명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면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한마디로 어떤 사람(신, 종교)도 ‘완벽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스위스 화가 한스 홀바인(1497~1543)의 재치있는 삽화가 그려진 스위스 바젤 간행 우신 예찬(Moriae encomium)초판(1515) 펼침본. 에라스뮈스 소유 책이었다. photo by wikipedia

5.우신예찬은 저자가 40대 초반에 쓴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과 풍자, 유머, 아이러니를 자랑한다.
읽을수록 통쾌한 책이다. 경직된 중세 질서와 광기의 종교, 그 종교와 지도자들의 허위 의식, 폐해, 모순을 여지없이 비꼬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권력의 정점이었던 1500년대 초 당시 종교와 종교지도자는 ‘절대적, 무오류’로 찬양되고 있었기에 더더욱 통렬하다.
민중을 호도하는 지식층과 지배자들, 종교의 부패와 폐단 등에 대한 비판을 ‘어리석은 신에 대한 찬사’로 풍자해 종교개혁의 시작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실제 중세의 절대 종교가 빚은 악습과 폐단을 교화하기 위한 에라스뮈스의 정신은 종교개혁은 물론 17세기 계몽의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6.우신예찬 원문은 장문의 연설문 형식이다. 이에따라 ‘장’과 ‘단락’ 구분이 사실상 없다. 한국 번역본에서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장을 구분했다.
현대지성 번역본은 68장(결어 포함)으로 구성하고, 친절하게도 제목까지 달았다. 서해문집 번역본(강민정 옮김, 2008)은 아라비아 숫자로 장을 구분했다.

독일-스위스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이 그린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초상(Portrait of Erasmus of Rotterdam,1523). 런던 National Gallery 소장. photo by wikipedia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1466~1536)=르네상스 시대 위대한 인문주의자. 네덜란드 출신의 범유럽주의자(세계시민주의자). 신약성서 최초 편집자. 본명은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이다. 라틴어로는 ‘에라스무스’다.

1.신성로마제국 부르고뉴국(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인 아버지 로헤르 헤라르트 제라드(Gerard)와 의사의 딸인 어머니 마르가레타(Margaretha Rogerius) 사이의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났다.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데벤테르(Deventer)에 있는 성 레부인 성당의 부속학교에 4살에 입학, 4년간 다녔다. 9살 때부터 라틴어 학교에서 공부했다.
17살 때(1483년)에 흑사병이 덮치면서 부모를 잃고 후견인(단체)으로 지명된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헤르토헨보스(Hertogenbosch, 북 브라반트의 도시)의 문법학교에 들어갔다.

2.21살이 되던 해 사우스 홀란트 고다(로테르담과 위트레흐트 사이의 도시)에  있는 스테인 교회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입회, 가톨릭 사제(수도사)로 7년을 복무(?)했다. 이후 1493년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데 1499년 영국 캐임브리지대학교 퀸스 컬리지 등을 거쳐 이탈리아 토리노대학교에서 신학박사(1506년) 학위를 받았다.

1519년 로테르담에서 발행된 에라스무스의 초상화와 로마 신(프론티어)이 들어가 있는메달. '긴 인생의 끝을 기다려라,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photo by wikipedia

3.영국 거주 당시 토머스 모어, 학자이자 가톨릭 사제 존 콜렛((John Colet,1467~1519) 등 당시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우신예찬(1509, 출판은 2년 후인 2011년)’을 썼다.
에라스뮈스는 1515년 무렵부터 헬라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최초로 라틴어 의역에 들어갔다. 1516년에 초판을 낸데 이어 수많은 수정을 거친 ‘신약성서’ 재판본을 1519년에 발간됐다.

4.에라스뮈스는 급서(急逝)했다. 1536년 네덜란드 섭정인 헝가리 메리 여왕 초대로 브라반트(Brabant, 현재의 벨기에 브뤼셀 일대)로 가던 중에 스위스 바젤에서 이질에 걸려 선종(善終)한 것이다. 시신은 바젤성당에 안치됐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네덜란드어로 ‘신이시여(Lieve God)’였다고 한다.
사망 전 궁핍한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상속인으로 법학자이자 바젤대 총장인 보니파시우스 아메르 바흐(Bonifacius Amerbach, 1495~1592)을 지명했다.
에라스뮈스가 남긴 재산으로 만든 기금 혜택을 본 이들 중에는 개신교 인본주의자 세바스찬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1515~1563) 등이 있다. 에라스뮈스의 업적을 기려 1622년 로테르담에 동상이 세워졌다. 바젤에 있는 무덤은 1928년에 발굴, 재안장됐다.
5.당대와 다음 세기 계몽의 시대에 신앙보다 자유의 가치를 더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빛이 됐다. 저서와 성서 번역 등은 특히 서양 학문의 비약적인 발전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반 가톨릭이 아니었음에도 1550년 말 우신예찬이 금서로 지정됐다. 또 1571년에 나온 가톨릭의 ‘금서목록(index expurgatorius)’에는 에라스뮈스 저서들의 ‘삭제해야 할 구절’이 길게 나열될 정도로 종교계에서 싫어했다.
주요 저서로는 ‘격언집(格言集, Adagia, 1500’, ‘우신예찬, 1511’, ‘대화집(對話集,Colloquia, 1518) 등이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에라스뮈스 동상. 네덜란드 조각가 헨드릭 드 키저(Hendrick de Keyser, 1565~1621)의 1620년대 초 작품이다. photo by wikipedia

5.에라스뮈스는 현대 유럽에서 각광받는 위대한 인물이다. 유럽연합 국가들 사이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그의 이름을 따 ‘에라스위스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는 ‘에라스뮈스대학교’가 있고, 로테르담의 랜드마크 다리 이름도 ‘에라스뮈스 대교(Erasmusbrug)’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에라스뮈스 목상’이 있다. 16세기 일본 전란시대 최후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1543~1616)의 가신이 된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1564~1620, 일본 이름은 미우라 안진, 三浦按針)가 타고 온 선박의 배 뒷부분(선미,船尾) 에 있었던 조각품이라고 한다.
에라스무스의 명언 중에는 “돈이 조금 생기면 책을 사고, 남은 것이 있으면 음식과 옷을 산다”는 말이 유명하다.(콘덴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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