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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유토피아-불만과 불운의 현실에 이상향을 제시한 책의 첫 문단은 담론같은 소설 전개를 예고한다. 본문
“빛나는 위업을 이루신 잉글랜드의 무적왕 헨리8세는 최근 카스티야의 왕세자 카를로스와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서 의견 차이를 보여, 이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기 위해 나를 플랑드르로 파견하셨다. 나의 동행인은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인물인 커스버트 턴스텔이었는 데, 최근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국왕에 의해 기록담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찬사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원래 친구가 하는 칭찬은 사람들이 별로 신용하지 않는 법이며 사실 그의 학식과 인품은 내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해서 칭찬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칭찬의 말을 보탠다면 속담대로 ‘태양에다가 등불을 대는 격’이 될 것이다.”(주경철 역, 을유문화사, 2021)
1.수필을 쓰듯이 편안하게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도입부와 인물 소개다. 1인칭 시점에서 동행인을 비교적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독자들이 무엇을 쓰는 지를 알 수 없게 하는 은유 장치로 보인다. 첫 문단만 보면 나의 동행인이 이 소설을 이끌고 나갈 주인공으로 보일 정도다. 뒷 부분의 ‘태양에다 등불을 대는’ 이라는 표현은 독자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메타포를 지난 담론적인 소설 전개를 암시하고 있다.
첫 문단에 나오는 헨리8세(Henry Ⅷ, 1491~1547)는 영국 국왕이다. 카를로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Karl V,1500~1558)이고, 커스버트 턴스텔(1474~1559)은 당대 영국 유명 학자이자 고위 성직자다.
2.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1516)’는 유럽 르네상스 발전과 인문주의 운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고전(古典) 중의 하나다.
라틴어로 쓴 에세이형 공상 소설로 초판은 1516년 12월 벨기에 루뱅에서 나왔다. 원고를 받은 네덜란드 출신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1466 혹은1469~1536)가 초고(初考)를 수정해 출판했다.
제목 Utopia도 당초 저자의 원고에는 라틴어 ‘아무 데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라틴어 ‘누스쿠아마(Nusquama)’였는데 에라스뮈스가 바꿨다고 한다. 제목은 책에 나오는 가상의 섬나라 이름이다.
루뱅에서 나온 초판에는 인본주의자이자 후원자(인쇄업자)인 친구 피터 길리스(피터 자일스, 페터 힐레스, Pieter Gillis, 1486~1533)에게 헌정한다고 썼다.
라틴어 원래 제목은 ‘Libellus vere aureus, nec minus salutaris quam festivus, de optimo rei 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한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대단히 훌륭한 소책자)’이다.
3.2판은 1517년 프랑스 파리에서 나왔고, 3판과 4판은 저자와 당대 인문주의자들이 참여한 수정작업을 거쳐 스위스 바젤에서 나왔다. 1519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3판을 복사한 판이 출판됐다.
영어로 번역된 유토피아가 출판된 것은 저자가 국왕 헨리8세(Henry Ⅷ, 1491~1547)의 명령에 의해 처형(참수형)당하고 16년이 지난 1551년이다.
첫 영역본은 영국 학자이자 문인인 랄프 로빈슨(Ralph Robinson,1520~1577)이 런던에서 출판됐다. 이 영역본은 라틴어, 프랑스어까지 나온 이후 독일어판까지 나온 지 27년이나 지난 후였다.
저자가 무슨 이유에서인 지 생전에 영역(英譯)을 극력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17~19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버전은 스코틀랜드 성직자(솔즈베리 주교)이자 철학자인 길버트 버넷(Gilbert Burnet,1643~1715)의 1684년 영역본이라고 한다.
4.유토피아는 귀족으로 지배계급에 있던 모어가, '이상향(유토피아)'은 실현 불가능한 허구의 세계임을 알면서 민중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대안 세계’로 제시한 곳이다.
전제 왕권 입장에서 왕권이 필요없다고 하는 유토피아라는 책은 불온서적이었던 것이다. 모어가 책의 파장을 고려, 생전 영역(英譯) 출판을 미뤘던 것으로 볼수도 있다.
실제 에라스뮈스가 수정하기 전 모어가 쓴 초고 제목에 나오는 ‘누스쿠아마(Nusquama)’는 아무데도 없는, 즉 존재하지 않은 장소를 뜻한다. 지옥같은 현실(디스토피아,dystopia)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이상 사회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문자 그대로 ‘이상향(理想鄕)’이었다. 특히 16세기 전제 군주정 시대에는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나라가 공산 체계를 지니면서 교육과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고, 하루 6시간 노동, 지방자치, 공유경제(주택 포함), 안락사, 사형제 완화, 비밀 투표, 종교의 자유, 남녀 평등교육 등은 500년 후인 21세기에도 수용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5.유토피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무역분쟁 해결을 위한 외교관으로 다른나라에 가는 ‘나’의 외교 행위와 포르투갈 선원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Raphael Hythlodaeus)를 만난 이야기다. 나는 라파엘를 만나 가상의 섬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다.
라파엘은 ‘신께서 (눈먼 이의) 병을 고치신다’, 히슬로다에우스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자’라는 뜻이다. 이같은 인물 이름은 허구를 강조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다.
2부는 유토피아의 정치, 경제, 종교, 관습, 언어 등 각 분야에 걸친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저자가 추구하는 체제의 모든 것이 2부에 들어 있는 셈이다.
6.사회주의(공산주의) 옹호와 반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품이다. 옹호론자들의 ‘이상향은 있다’, 반대론자들의 ‘이상향은 없다’를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한 책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가 유럽의 지식인층에 퍼진 16세기 후반 이후 많은 작가들이 영향을 받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철학자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의 ‘태양의 도시’, 영국 제임스1세 시대 대법관을 지낸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 본명 Francois-Marie Arouet, 1694~1773)의 '칸디에(Candide)' 등이 큰 영향을 받았다.
또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의 풍자적 유토피아 소설 '에레혼(Erewhon,1872)',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 Eric Arthur Blair,1903~1950)의 ‘1984(Nineteen Eighty-Four, 1949)’ 등도 영향을 받았다.
공상 과학소설(Science Fiction Novel)의 시초가 됐다. 영국계 아일랜드인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7~1745)의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1726)’ 등 초기의 많은 SF 소설이 영향을 받았다.
#.토머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잉글랜드 왕국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튜더왕조(The Tudor Dynasty, 1485~1603) 헨리8세 시대 수상. 1900년대 초 기독교의 성인 시성. 라틴어 이름 앞에 ‘Sanctus’, 영어로는 ‘Saint’가 붙는다.
1.영국 런던 밀크 스트리트(Milk Street)에서 법관인 존 모어(Sir John More,1451~1530)와 어머니 아그네스 그라운저(Agnes Graunger)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런던의 명문 세인트 앤소니 학교(St. Anthony 's School)에서 공부했다. 이후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모턴(John Morton,1420~1500) 경의 ‘시동(侍童, household page,1490~1492)으로 들어갔다.
존 모턴은 당시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시동(侍童, 토마스 모어)은 언젠가 위대한 인물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2.1492년 존 모턴 등의 추천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신학 등을 배웠다. 이후 라틴어를 영어 수준으로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인 네덜란드 출신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 혹은 1469~1536)와 친교를 맺었다.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당시 사제가 되기 위해 법조 경력을 포기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평신도 생활을 이어가면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1504년 하원 의원,, 1510년 런던 부시장·하원 의장, 1510년~1518년, 런던시의 주 장관 대리, 1517년 국왕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조력자인 임시 섭정이 됐다.
3.유토피아를 쓰게 된 것은 1515년 전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파견되는 외교 사절을 맡은 것이 계기였다.
모어는 1521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헨리 8세의 최측근으로 훌륭한 조언자가 됐다. 1523년에는 잉글랜드 하원 의장, 1525년 북잉글랜드 행정 사법을 감독하는 랭커스터 공령 상서(Chancellor of the Duchy of Lancaster)에 위임됐다.
1529년에는 최고 관직인 수상(Lord Chancellor)에 올랐다. 그런데 정점에서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수상 재임 기간 19명이 이단으로 판결받아 화형을 당했던 것이다.
4.모어는 1505년 27살에 에식스 출신 지주의 딸로 열 살 어린 여자인 조안나 제안 콜트(Joanna Jane Colt)와 결혼했다.
둘은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St Stephen Walbrook) 교구의 버클러스버리에 있는 올드바지(Old Barge,월브룩 강옆)에 살았다.
둘은 마거릿(Margaret), 엘리자베스(Elizabeth), 세실리(Cecily), 존(John)을 뒀다. 결혼 생활 중 고아 소녀 긱스도 입양했다. 하지만 부인 제인은 1515년 출산 중에 사망했다.
두 번째 아내는 7년째 홀로 산 직물상의 미망인 앨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 Harpur, 1474~1546 또는 1551, 나중에 Dame Alice Moore)이었다. 모어보다 4살 연상이었지만 재산도 많고 인격도 훌륭한 여인이었다.
미들턴은 모어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지만, 의붓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키웠다. 전 남편의 딸은 모어의 자녀로 입양된 마거릿 긱스(1508~1570, 나중에 마거릿 클레멘트)였다.
6.1513~18년 무렵 모어는 역사서 형식의 글 ‘리처드 3세 역사(History of King Richard Ⅲ)’을 집필했으나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그러나 이 책은 저술 방식과, 해석, 내용 등에서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연극 등으로 재해석됐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리처드 3세(Richard Ⅲ)'다.
모어는 가톨릭 적극 지지파로 종교개혁을 사실상 부정했다. 특히 교회 개혁 찬성파를 탄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가톨릭 교리를 무시하고 이혼을 반복하는 헨리 8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혼인 무효 요청 편지에 서명을 거부했으며, 1533년 잉글랜드 왕비로서 앤 볼린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34년에 의회가 만든 교황권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김 계승법도 거부했다.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에서의 왕위 지상권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전제군주정 아래에서 반역죄에 해당한다.
7.모어는 1535년7월1일 법정에서 거열형(車裂刑,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말이나 소에게 매달고 끌어서 죄인을 찢어서 죽이는 형벌)을 선도받았다.
이후 헨리8세가 거열형을 참수형(斬首刑)으로 바꿨고, 6일 런던탑 언덕에서 반역죄로 참수됐다. 모어는 참수당하기 직전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좋은 신하이기 전에 하느님의 착한 종으로서 죽는다”라고 말했다.
모어의 머리없는 시신은 무덤이라는 표시도 없는 런던탑 옆에 있는 '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Church of St Peter ad Vincula) 성당'에 묻혔다.
머리는 한 달 동안 템즈강 위의 런던다리(London Bridge,1176년에 생긴 다리) 위의 파이크에 고정됐다. 이후 템즈 강에 내던져지기 전에 가족 중 처형 장면을 유일하게 본 수양딸 마거릿 긱스가 거뒀다.
모어의 참수당한 머리는 아직도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콕 집어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수양딸 마거릿 클레멘트가 수습한 만큼 그녀의 가족묘가 있는 캔터베리의 세인트 던스탠 성당(St Dunstan's Church, Canterbury)에 안치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첼시 옛 교회(Chelsea Old Church) 안치설도 있다.
8.모어의 참수형를 들은 친구 에라스무스는 “토머스 모어는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고 애도했다. 에라스무스는 또 “모어가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고 썼다.
성공회 성직자이자 ‘걸리버 여행기’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는 “이 왕국(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미덕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길버트 케이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또는 적어도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이자 역사가 휴 트레버 로퍼(Hugh Trevor-Roper,1914~ 2003)는 모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위대한 영국인, 가장 성스러운 인본주의자, 가장 인간적인 성도”라고 언급했다.
9. 모어는 참수형을 당한 지 400년 후에 복권됐다.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PP. XI, 1857~1939)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했고,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는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명명했다.
천주교회의 성인력에 올랐고, 1980년 영국성공회의 교회력에도 올라갔다. 2002년 BBC가 영국인 10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뽑는 투표에서 37위를 기록했다.
극작가 로버트 볼트(Robert Bolt, 1924~1995)는 1960년 토마스 모어를 ‘올 시즌을 위한 남자(A Man for All Seasons)’로 극본화해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했다.
이 연극은 1966년 동명 영화로 나왔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영화감독 프레드 진네만(영어: AlFred Zinnemann, 1907~1997)이 유명 영국 배우 폴 스코필드(Paul Scofield,1922~2008, 토마스 모어 역)를 주연으로 내놓았다. 아카데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최우수감독상 등을 받았다.
1963년에는 모어와 그의 저술을 분석하는 학술지 ‘모리아나’가 창간됐다. 현대에 들어와서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과 런던 탑 옆에 기념 패와 기념비가 세워졌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