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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이방인-부조리한 시대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감정없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첫문단부터 부조리하다 본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에서 보낸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근조.'/ 이 내용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어제인 것 같다. 양로원은 알제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렝고에 있다. 2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오후에는 도착할 것이다. 양로원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저녁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사장에게 이틀의 휴가를 신청했다. 사유가 사유이니만큼 거절하지 못했지만 못마땅 한 듯 싶었다. ‘제 잘못은 아닙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사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어쨌든 변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사장이야말로 나한테 애도를 표해야 했다. 모레에는 상중일 테니 그때는 그리할 것이다.”(알베르 까뮈 저,구영옥 역, 올리버, 2023)
1.감정이 없는 듯한 첫 문단이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시큰둥하다니 부조리(不條理)하다.일반 독자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문장을 통해 부조리 소설임을 새삼 일깨운다. 무관심과 무감정을 내세워 독자의 몰입을 유도하는 기묘한 구성인 셈이다. 나와 어머니 사이는 제목 그대로 ‘이방인’이다. 이는 삶 자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간결하고 일상적인 어휘와 문체이지만 도입부만 보면 무엇인가 불편하다. 너무 철학적이서 일까. 소설 전체적으로는 수많은 상징 장치와 부조리에 대한 통찰 등이 숨어 있지만 첫 문단은 가벼운 상징과 은유의 1인칭 소설이다. 하지만 읽는 이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어휘들이 숨어 있다. 본문에 나오는 *알제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Algiers), *.마렝고는 알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 이름으로 보인다. 한편 이 유명한 첫 문단은 저자가 1938년 가을쯤에 문득 떠오르자 노트에 메모해 두었다가 썼다고 한다.
2.알베르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 레트랑제, 1942)’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20세기 최고의 걸작(傑作)이다. 전 세계 중고교 대학생은 물론 청년들의 필독서라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로 소설사에서 길이 빛나는 명작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 파리의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 서 1942년 5월 발매됐다. 집필은 1939년 본격 착수해 스물일곱살 때인 1940년 5월 탈고했다. 하지만 파리가 나치독일군에 점령당하면서 피난을 가는 등 우려곡절 끝에 2년 늦게 출판됐다.
그런데 전 유럽이 전쟁에 휘말려 있었음에도 나오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럽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저자는 이 소설 하나로 ‘프랑스 문단의 이방인’에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로 우뚝섰다. 전쟁 중에 태어난 최고의 출세작인 셈이다.
특히 저자는 이 소설로 30대의 나이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1957년 44살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의 영광을 안았다. 최연소 수상자는 41세(1907)에 받은 ‘정글북(The Jungle Book,1894)’의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1865~1936)이다.
유럽에서 반향이 컸던 만큼 각국에서 베스트 셀러로 등극, 판매량도 엄청났다. 현재까지 한국어를 포함한 1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고, 전 세계 판매량도 수천만 부에 달한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프랑스에서 연평균 19만 부가 팔린다고 한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Le Monde)는 ‘이방인’을 20세기의 책 100권 중 1위로 선정했다.
3.영어로는 1946년 첫 발간됐다. 영국 작가이자 유명 번역가 스튜어트 길버트(Arthur Stuart Ahluwalia Stronge Gilbert, 1883~1969)에 의해 첫 영역돼 출판됐다. 미국에서도 같은 해 뉴욕의 알프레드 A. 크노프 출판사에서 나왔다.
1982년 길버트의 번역본을 다시 출간한 영국의 출판사 해미시 해밀턴(Hamish Hamilton,1931년 창립)은 작가이자 번역가 조셉 라레도(Joseph Laredo)의 번역본을 ‘아웃사이더(The Outsider)’라는 제목으로도 출판했다. 펭귄 북스(Penguin Books)도 1983년에 이 버전을 페이퍼백 에디션(양장본이 아닌 일반 출판 책)으로 냈다.
1988년에는 미국에서 매튜 워드(Matthew Ward, 영국 버밍엄대 영문과 교수)가 번역한 ‘The Stranger로 출판됐다.이어 2012년에는 산드라 스미스의 새로운 번역본이 펭귄에서 '아웃사이더(The Outsider)'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영어로는 ‘The Stranger’, ‘The Outsider’, ‘Foreigner’로 번역된다. 일본은 ‘異邦人’, 중국은 ‘局外人’으로 쓴다.우리나라가 일본 번역 제목 그대로 쓴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남남', '문밖의 사람', '바깥사람' 등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데도 일본 번역 제목을 베껴썼기때문이다.
4.이 소설은 단순하게 보면 쉬운(?)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짧은 분량(1,2부 구성이지만 분량이 작다), 간결한 문체의 소설이어서 읽기 쉬운 만큼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부조리 소설 특유의 철학적 사유 등 어려움이 숨어 있다. 읽기는 쉬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불편한 소설인 셈이다.
1,2차 세계대전 중간이 시대 배경으로 ‘전쟁’이라는 가장 비인간적인 소재를 현실에 남겨진 인간의 실존 의식과 결부해 다루고 있다. 읽기 쉬운 느낌을 갖는 것은 문어체 지문이 아니라 직간접 대화(상대가 있건, 혼잣말이든)가 많은 구어체로 쓰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설에 나오는 마렝고 양로원은 저자가 실제로 친형 뤼시앵의 장모 사망 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녀온 곳이라고 한다. 소설 속 뫼르소의 법정 장면도 저자가 기자 시절 경험한 것들이 녹아 있다.
5.등장인물은 알제리에 살고 있는 프랑스계 정착민 아르투르 뫼르소(Meursault), 뫼르소의 어머니가 집에 있는 동안의 약혼자 토마 페레스(Thomas Pérez), 뫼르소가 자주 방문하는 카페 주인 셀레스트(Céleste), 뫼르소 직장 타이피스트 마리 카르도나(Marie Cardona) 등이다.
또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 살라마노, 아랍인 내연녀를 구타하는 뫼르소의 이웃 레이몽 셍테스(Raymond Sintès), 비치 하우스 소유자 마송(Masson), 알제의 해변에서 뫼르소에게 총 맞아 살해된 남자 아랍인도 등장한다.
6.줄거리는 자연사와 살인, 사형 등 각각 다른 형태의 삶과 죽음을 통해 부조리(不條理)한 현실을 고발하고, 허무한 삶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세가지의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에도 무감각하다. 장례일(葬禮日)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고, 희극 영화를 보고 웃으며 여자친구와 밤을 보낸다. 그리고 며칠도 되지 않아 친구인 레몽과 그의 정부(情婦) 간의 분쟁에 휩쓸려 태양 빛 아래서 살인을 저지른다.
뫼르소는 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상승 욕구나 야심이 없고 생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주변에도 ‘무관심’하다. 그런 뫼르소는 우발적 살인 이후 세상에서 ‘이방인’이 된다.
재판에 가서 범행 동기를 물을 때 ‘모두가 태양 탓’이라고 대답하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진실을 왜곡해 자신을 도우려는 변호사도, 하느님을 통해 뫼르소를 감화하려는 재판관에게도 관심이 없다. 독방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사제(司祭)의 속죄(贖罪) 기도도 거절한다. 마지막 유혹인 신앙, 구원도 거절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한 사람답게 부조리한 인생 그대로, 행복한 채 죽음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7.소설은 부조리(不條理)로 점철돼 있다. 제목부터 '이방인(異邦人), 레트랑제(L'Étranger)'이다. 이방인 자체가 이주민(외지인),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냈고, 사망 후에도 시신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 시신 앞에서 아무렇게나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잔다. 장례식 이튿날에는 해변에서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섹스를 즐긴다. 동네 건달을 친구로 사귀고 수상한 치정 사건의 증인 역할을 수락하고 얼떨결에 살인을 한다.
주인공의 이름 '뫼르소(Meursault)'는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을 조합한 것이다. 그렇치만 다중적으로 쓰였다는 분석도 있다. 뫼르소라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프랑슈콩테 레지옹의 한 마을, '벽과 같은 숲' 혹은 '쥐들의 숲'을 뜻하는 라틴어 뮈르스 살투스(muris saltus)에서 유래했다고 이들도 있다.
이방인은 읽기에 쉽지만 생각할수록 어려운 소설이다. 따라서 이해를 쉽게 하려면 저자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영문 The Myth of Sisyphus, 1942)’를 읽은 후 이방인을 읽어야 한다는 게 애서가(愛書家)들의 조언이다.
8.소설은 출간 직후부터 유럽 문단에 충격을 던진 ‘문학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저명 문인의 추천으로 출판됐고, 호평도 이어졌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소설 속 내용을 두고 인종 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1941년 처음에 원고를 본 프랑스 유명 철학자이자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1971)의 칭찬에 이어 유명 소설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프랑스 첫 문화부 장관) 등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즉시 갈리마르 출판사에 추천, 다음 해 ‘ L'Étranger’라는 제목으로 간행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제라르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1980)는 이 소설에 대해 “건전지의 발명과 맞먹는 사건”이라고 격찬했고, 문학평론가 가에탕 피콩(Gaëtan Picon, 1915~1976)은 “지극히 현대적인 감수성을 완벽에 가까운 고전적인 형식으로 끌어올렸다”고 격찬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 1905~1950)는 이방인에 대해 “뼛속까지 고전적인, 다시 말해서 의도적이고 정돈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를 지향한다”고 평가했다.
친구이지만 나중에 카뮈에게 비판적이었던 '구토( La Nausée,1938)'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도 높이 평가했다. “카뮈의 어둡고도 순수한 작품 속에서 미래의 프랑스 문학의 주된 특징들을 식별해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학은 아무런 환상도 주지 않지만 인간성의 위대함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가혹하지만 불필요한 폭력은 배제하는, 열정적이지만 절제된 문학이다.”
칼 비지아니는 1956년 “겉으로 보기에 ‘이방인’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세심하게 계획해 쓴 책”이라며 “발견되지 않은 의미와 형식적 특성으로 가득 찬 밀도 있고 풍부한 창조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의 대중 지식인이자 탈식민주의의 선구적인 학자인 에드워드 와디에 사이드(Edward Wadie Said,1935~2003, 오리엔탈리즘 저자)는 “인종 차별 소설”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Kamel Daoud, 1970~현재)는 이방인 속에서 살해당한 알제리인의 동생 시점으로 '뫼르소, 살인 사건(The Meursault Investigation,2013)'이란 소설을 냈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2014년 재출간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9.영화로도 나왔다. 이탈리아에서 루치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1906~1979) 감독이 1967년 ‘이방인(스트라니에로 ,Lo Straniero, 프랑스어 제목 The Stranger)으로 만들었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아니(Marcello Mastroianni,1924~1996)가 아르투르 뫼르소 역, 덴마크 출신 프랑스 배우 안나 카리나(Anna Karina, 1940~2019)가 마리 카르도나 역을 맡았다. 안나 카리나는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의 뮤즈이자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새로운 물결)를 대표하는 여배우다.
또 튀르키예에서 영화배우이자 프로듀서 제키 데미르쿠부즈(Zeki Demirkubuz, 1964~ 현재) 감독이 2001년 ‘운명(Yazgı, 영어 Destiny)’으로 내놓았다.
8.한국에서 21세기 들어 번역 논란이 컸던 소설이다. 1976년 한국 카뮈 연구의 권위자 김화영(1941~현재)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재임 1974~2006, 현재 명예교수)의 번역(고려대 출판부)이후 많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2013년 새움출판사 이정서(본명 이대식) 대표가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라는 도발적인 카피의 광고를 내세워 번역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다음해 5월 ‘이방인(이정서 역)’ 번역본(새움)을 냈다.
이후 불어 전공자와 전문가들이 가세해 번역 논란은 3~4년 동안 이어졌고, 새움(출판사) 측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번역 문제를 두고 시끄럽자 ‘이방인’ 번역본을 연구한 논문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대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한국어 번역본들에 대한 문체론적 고찰*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새움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에 대해 강력 비판하기도 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프랑스의 세계적인 소설가, 언론인이자 (실존주의)철학자. 피에 누아르(Pied-Noir, 프랑스 식민지배기에 알제리에 정착해 살던 유럽계 백인)의 대표작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인 것을 거부한 이성적인 인본주의자로 프랑스 좌우파 모두에게서 공격받은 인물.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의 대변인이자 다음 세대의 멘토로 불린다.
1.알제리의 작은 해안 마을로 엘 타레프 지방의 안나바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져 있는 몽도비(Mondovi, 현 드레앙)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뤼시앵 카뮈(Lucien Camus,1885~1914), 어머니는 스페인 출신의 카트린 엘렌 생테스(Catherine Hélène Sintès)이다.
태어난 지 1살도 안된 1914년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프랑스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알제리 외갓집에서 외할머니, 어머니, 형, 두 명의 외삼촌과 가난하게 살았다. 문맹이며 청각 장애자였던 어머니는 허드렛일(사실상 하녀)을 했다.
1918년 초등교육학교에 들어갔고, 1923년 중고등학교인 리세(lycee,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준비하는 교육기관)에 입학했는데 유능한 교사 루이 제르맹(Louis Germain, 1884~1966)을 만나 한단계 더 성장했다.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했다. 너무 가난해 재학 중 각종 임시직(아르바이트)을 전전했다. 대학 중퇴 후에는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 등 닥치는 대로 일할 정도였다.
2.1932년 무렵 다시 대학에 돌아가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 로마 신플라톤주의 철학 창시자)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를 땄다. 대학 시절 평생의 스승인 철학자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1971)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고, 스승의 권유로 공산당에 가입한다.
카뮈는 대학 중퇴 전후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관객(주로 노동자 계급)에게 뛰어난 연극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노동자 극장(Théâtre du Travail, 나중에 Théâtre de l'Équipe로 명명)을 위해 각본, 제작, 각색 및 연기까지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35년 카뮈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으나 '스페인 내전(1936~1939년 벌어진 대규모 내전)'에 대한 지지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교조주의(敎條主義, 무비판 독단주의)'가 싫어서 이듬해 소련으로부터 좀 더 독립적인 알제리 공산당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알제리 공산당의 교조주의적 태도 등을 비판하자 1937년 제명당했다.
3.카뮈는 대학 복학 직후 아마추어 극단을 운영하기도 했고, 1935년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도 설립, 1939년까지 운영했다
1939년에는 나치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프랑스 군 입대 지원을 했으나 폐결핵으로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저널리스트로 변신, 파리스와(Paris-Soir) 잡지에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의 ‘포니 워(Phony war, 전투가 없으나 개전한 상태)’ 시기에는 반전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1년 11월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Wehrmacht ,나치 독일 육군)이 저지른 언론인이자 공산주의 지도자 가브리에 페리(Gabriel Péri, 1902~1941) 의 처형 사건에 충격을 받고, 저항에 나섰다. 가브리엘 페리는 프랑스의 저명한 공산주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그런데 1941년 5월 18일 프랑스 경찰에 체포됐고, 그해 12월 독일군에게 처형됐다. 이 해에 첫 장편소설 ‘이방인’과 논픽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완성했고, 이듬해 출판했다.
4.첫 결혼 상대자는 1933년 스무살 때 만난 시몬 히에(Simone Hie,1918~1995)였다. 둘은 1934년 결혼했으나 서로 간의 불륜(카뮈 상대여인은 1937년 블랑쉬 발라인, Blanche Balain, 시몬 히에는 의사)과 부인의 모르핀 중독으로 1936년 이혼한다.
이후 카뮈는 1937년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만난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1914~1979, 결혼생활 1940~1960)와 1940년 12월3일 프랑스 리옹에서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1945년 카트린느(Catherine Camus)와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가 태어난다.
카뮈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다.아내 프랑신 포르는 특히 여배우 마리아 카자레스(María Victoria Casares y Pérez, 1922~1996) 와 불륜 때문에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 쇠약으로 병원에 입원, 30회 이상의 전기충격 요법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카뮈는 노벨상 받은 직후 사촌 니콜 샤프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나쁜 방식으로 사랑을 멈춘 적이 없는 프랑신의 관대함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며 “프랑신은 나를 용서했다”고 말했다.
5.카뮈는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결혼 제도 자체에 강력 반대, 다른 여인들과 혼외 관계를 수시로 갖곤 했다. 그중 스페인 출신 프랑스배우로 당시 22세인 마리아 카자레스(María Victoria Casares y Pérez, 1922~1996)와 1944~1945년 2년 동안 동거하다시피 했고, 둘의 관계는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애매한 상태로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카사레스는 카뮈 사망 14년 후인 1974년 친구인 집시 가수와 결혼한 뒤 1996년 세상을 떠났다. 카뮈 아내 프랑신 포르의 우울증과 신경쇠약증의 원인을 제공한 여인이었다. 카뮈와 프랑신 포르 사이의 딸인 카트린느 카뮈는 나중에 카사레스에 대해 "기억에 남는 여배우이자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이었다"며 "아버지 인생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프랑스 최고 배우중 한명으로 성장한 카사레스도 자서전 'Residente privileged'에서 "(카뮈는)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남자"라고 말했다.
카뮈는 미국 출신 여인 마메인 패짓( Mamaine Paget, 1916~1954, 카뮈와 블륜 1946년) 등의 여인들과도 바람을 피웠다. 마메인 패짓은 나중에 카뮈의 친구인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와 1950년 결혼, 1952년 이혼한다. 1956년에는 연극 배우 카트린느 셀러스(Catherine Sellers,1928~2014, 카뮈와 불륜1956~1960)와 연인이 되었고, 1957년에는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덴마크 화가 메테 이베르(Mette Ivers,1933~현재, 카뮈와 불륜 1957~1960)를 만나 마지막 사랑을 불태웠다.
6.카뮈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로 돌아갔다가 1946년 3월 르아브르(Le Havre, 프랑스 서북부,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에서 뉴욕시까지 승객을 실어 나르는 선박인 SS 오레곤(SS Oregon,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여객선)을 탔다. 이 당시 미국 이야기는 나중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항해 여행기(Journaux de voyage)’로 프랑스에서 나왔다. 이 여행기는 나중에 앨리스 카플란(Alice Kaplan)과 라이언 블룸(Ryan Bloom)의 번역과 주석으로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아메리카 여행-새로운 세계의 노트와 인상(Notes and Impressions of a New World)’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7.1949년 카뮈는 폐결핵 재발로 2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 1951년에는 공산주의에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 프랑스 좌익 지식인과 동료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친구인 장 폴사르트의 비판이 컸고, 그와 논쟁 끝에 사실상 절교했다.
1952년 유엔(UN)이 프랑코 총통 독재 치하의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이에 항의해 유네스코(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동독 베를린 노동자들의 파업, 1956년 폴란드 노동자의 파업, 같은 해 10월 헝가리 민중봉기 진압을 강경 진압한 소련 연방을 강력, 비난했다.
1950년대 초부터 인권운동에 뛰어들어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 1957년 44세의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8.연극과 글쓰기에 몰두하던 카뮈는 비극적 사고로 영면했다. 1960년 1월4일 프랑스 중북부 파리 남동쪽 부르고뉴 지방 욘 주에 있는 도시 상스(sens)에서 친구 미셸 갈리마르(Michel Gallimard, 1917~1960)의 차 파셀 베가(Facel Vega)에 동승했다. 파셀 베가는 1954~1959년 프랑스 업체 파셀이 생산한 자동차였다.
당시 파리 팔레 루아얄 발루와 가(Rue de Valois)의 문화부 청사에서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소설 '좁은 문' 저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말로는 카뮈에게 대형 극장 책임자로 임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비극적인 사고는 상스(Sens)와 몬테로폴트욘(Montereau-Fault-Yonne) 사이의 퐁쉬르욘(Pont-sur-Yonne)근교 국도 5호선을 달리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며 발생했다. 차는 플라타너스를 들이받았고, 카뮈는 현장에서 영면했다. 동승한 운전자 미셸 갈리마르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으나 5일 후 사망했다.
9.비극적인 최후을 맞은 카뮈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파리 행 전철 티켓이 발견됐다. 이틀 전 가족과 함께 전철로 파리에 가려다가 가족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미셸 갈리마르 주최 파티에 참석한 후 파리로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소련 체제와 알제리 독립에 반대, 암살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증거도 없었고, 소문은 금새 사라졌다.
1960년 1월6일 알베르 카뮈의 장례식에는 문학계의 친구들인 출판인 가스통 갈리마르(Gaston Gallimard, 1881~1975, 갈리마르 출판사 설립자), 장 폴 사르트르, 프랑스 문인들이 좋아하던 시인 르네 샤르(Rene Char, 1907~1988), 알제리 오랑 출신의 작가 에마뉘엘 로블레, 철학자이자 스승 장 그르니에, 가브리엘 오디시오가 루르마랭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다.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알프 코트다쥐르 보클뤼즈 주의 시골 마을인 루르마랭(Lourmarin)의 묘원에 안장됐다.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쓴 루마니아계 프랑스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Eugène Ionesco, 1909~1994)는 "우리에겐 이 의로운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라며 애석해 했다.
대표작으로 ‘이방인(L'Étranger,1942)’, ‘페스트(La Peste,1947)’, ‘전락(La Chute,1956)’이 있다. 또 단편집 ‘적지와 왕국(L'exil et le royaume,1957)’이 있다. 논픽션으로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1942)’,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1951)’가 있다.
10.카뮈의 묘는 니콜라스 사르코지(Nicolas Sarkozy, 1955~현재. ) 대통령 재임(2007~2012) 시절 정부와 문학계에서 파리 5구에 있는 팡테온(Pantheon,지하에 국가 영웅 묘역)으로 옮기자는 이야기를 했으나 자녀들이 거부해 현재 자리에 있다.
카뮈는 사후에 명성이 더 커져갔다. 1967년 몬트리올 세계 박람회에서 프랑스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집트 출신 시인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 1912~1991), 장 폴 사르트르,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 1908~2009)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로 선정됐다.
1970년 ‘행복한 죽음(La Mort heureuse, 집필 시기 1936~1938)’이 출판됐다. 두 번째 유작인 미완성 자전적 소설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도 1995년에 나왔다.
11.카뮈와 장 폴 사르트르의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우정과 적(敵)’의 대명사로 오르내리고 있다. 둘은 ‘친구이자 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들이다. 실존주의자로 매우 절친했던 둘은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공산주의 등에 대한 치열한 논쟁 끝에 결별했다.
카뮈는 마르크스주의의 과잉과 억압적인 전체주의의 무자비한 메커니즘, 혁명 왜곡을 비판했다. 특히 소비에트 체제(소련연방) 자체를 사실상 거부했다. 친구인 사르트르의 이런 시각이 담긴 문학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에 사회주의자와 급진공산주의자들, 특히 선봉에 선 사르트르 등에게서 1952년 무렵 맹공격을 받았다. 진보 진영을 자처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카뮈에 대한 공격을 지속했고, 학계에서는 이를 ‘지적 암살’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론 보수 우파에서는 카뮈에 대해 ‘애국심 결핍’이라고 비난했다. 양측의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 찍힌 것이다. 다만 1960년 카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사르트르가 추모사는 썼다. “불화, 그것은 더 볼 수 없는 것에 비하면, 함게 살아가는 방법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 추도사로 카뮈가 죽은 후에야 사르트르가 우정으로 돌아선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11.카뮈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생전에 이를 거부했다. 카뮈는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을 추구했다는 분석도 있다. 아나코-생디칼리즘은 노동자 연대와 직접 민주제, 노동자 자주경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노동자들의 경제 통제와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좌익사상이기도 하다.
미국 몬태나 대학교 철학 교수 데이비드 셔먼(David Sherman)은 카뮈를 아나코-생디칼리스트(anarcho-syndicalist)라고 말한다.
국내에서 카뮈 작품의 권위자는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다. 프랑스 카뮈 학회 창립 회원이고 2009년 카뮈 전집(전 20권)을 국내 최초로 완역, 출판했다. 김 교수는 “흔히 실존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가로 장 폴 사르트르와 카뮈가 꼽히지만, 세상의 변화를 앞질러 본 사람은 카뮈였다”며 “카뮈는 인간 이외의 세계, 즉 ‘ecology(생태계)’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