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일리아스-올림포스 세 여신의 불화에 빗대 에게해 영유권 분쟁을 쓴 서사시의 첫 문단은 신의 우위를 노래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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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올림포스 세 여신의 불화에 빗대 에게해 영유권 분쟁을 쓴 서사시의 첫 문단은 신의 우위를 노래한다

지성인간 2023. 5. 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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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루스의 아들 아킬레우스 분노를/ 아카이오족에게 헤아릴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천병희 옮김, 숲, 2015년 개정판)
 
1.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口傳) 문체의 서사시 원형이다. 노래처럼 쉽게 입안에서 맴도는 것이 특징이다. 문맹의 독자( 청중), 듣는 이들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다만 구전답게 장황한 설명과 비유도 없진 않다. 고대 그리스어 원문은 더 심했을 것이다. 당시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만큼 듣는 이들을 위해 첫 문단에서 주제인 ‘분노’와 ‘신’, 서사시의 주인공이 누구인 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독백형 문체, 많은 청중 대상의 연설회, 강연 등에서 내레이션용으로 활용하면 좋은 구성의 문체라 할 수 있다.

2.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 BC 8세기 쯤, 1만 5693행)’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기록한 구전 노래를 문자로 옮긴 작품이다.채집한 노래에 살을 붙여 듣는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의 시초라 할수있다.
서양 문명의 근원이자 예술의 원석이다.거의 모든 서양예술이 빚지고 있는 교과서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중세는 물론 현대 서양의 최고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일리아스는 트로이(Troy)의 원래 지명 ‘일리움(Ilium,현재 튀르키예 서남부 일대)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고대 청동기 시대 트로이 전쟁(Τρωικός Πόλεμος,Trojan War, BC 1194년(?)~BC 1184) 에서 아카이아(그리스 본토)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의 이야기다. 역사 시대  구분으로는 고대 그리스 미케네 시대(BC 1600~BC1100)다. 파리스와 헬렌의 사랑에 빗대 아가멤논,핵토르, 아킬레우스,오디세우스 등 고대 영웅의 지략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노래로  부르는 고대 역사이기도 하다.

숲(출판사)의 2015년 판 '일리아스' 부분.

3.줄거리는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해 동안 아가멤논 왕과 아킬레우스 전사 사이의 싸움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싸움의 시작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스파르타 왕비 납치 사건이지만 실제는 에게해와 주변지역을 지배하기 위한 영유권 전쟁이기도 했다. 트로이는 프리아모스 왕의 장남인 명장 헥토르, 헥토르의 사촌 아이네이아스 등이 출전하고, 그리스 진영은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이 출전해 10년간 전쟁을 벌인다.
4.고대 라틴어로 필사돼 전하는 일리아스를 최초로 영역(英譯)한 이는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인 조지 채프먼(1559(?)~1634)이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는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인 튀르키예 차낙칼레 주 테브피키예 히사를리크(Hisarlik,요새)다. 독일의 부호이자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이 1870년부터 고대 트로이 유적지로 알려진 장소를 발굴했던 곳이다.

5.우리에게 잘 알려진 ‘트로이 목마’와 ‘아킬레우스의 죽음’은 일리아스(오리지날  필사본)에 나오지 않는다. 원본은 물론 이 필사본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서사시 후편(?)에 존재한다고만 알려져 왔는 데 후세인들이 창작을 거듭해 지금처럼 자리잡은(?) 것이다.

6.일리아스는 서양에서 유아기때부터 들고 자라는 텍스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오디세우스)는 서양에서 불멸의 서사시다. 시대와 장소, 장르를 불문하고 끝없이 계승, 재해석됐다.
고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중세의 단테, 17세기의 밀턴, 20세기의 제임스 조이스 등의 호메로스 영향을 받은 작품이 압권이다. 
아르헨티나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 1948~현재)의 평가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웅변한다.
‘호메로스(일리아스)가 없는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다.’
일리아스는 영화와 연극 등 문화 콘텐츠로 수백여편이 제작됐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로렌스 알마 타데마(Lawrence Alma-Tadema,1836~1912)의 1885년 작 토론하는 호메로스(오른쪽). photo by Wikipedia

#.호메로스(Homeros, Homer, BC800년 전후)=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가. 트로이 전쟁에 관한 구전을 노래한 가객(歌客), 이른바 음유시인(吟遊詩人)이다.

1.출생 사망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의 저자로 인정받는 그리스 시인이다. 가장 널리 퍼진 기록은 튀르키예의 중부 해안 아나톨리아 지역에 사는 이오니아 출신의 장님 음유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또 에피카스테(이오카스테, 네스토르의 딸)와 텔레마코스(오디세우스의 아들)가 호메로스의 부모였다는 설도 있다. 

2.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아버지인 플라톤(Plato, BC 427~347)은 저서 ‘공화국’에서 호메로스를 ‘최초의 스승’ , ‘그리스 문화의 지도자’ ,‘모든 그리스의 스승’이라고 격찬했다.

플라톤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호메로스야말로 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가장 잘 안 시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3.호메로스는 키오스 섬에서 영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오스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 증거가 없다.
후대에 세운 묘비명은 ‘여기 거룩한 호메로스의 머리를 흙이 덮고 있다. 그는 영웅들을 찬양한 사람이었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4.호메로스의 시들은 최초로 BC 6세기 후반 페이시스트라토스(BC 528년 사망)에 의해 아테네 등에서 수집됐다고 전해진다. 호메로스 시의 첫 번째 인쇄는 1488년 르네상스 시기 밀라노에서 나왔다.
일리아스를 토대로 터키 남서부의 트로이가 발굴됐다. 발굴 책임자는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이다.

5.오스만 제국이 기울어져가는 시기에  발굴된 트로이 유물은 현장에 남지 못하고  대부분 독일로 밀반출됐다. 이후  유물의 유랑도 비극(?)적이다.
1870년부터 발굴한 유물들은 1881년 독일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 공개됐다.
독일에 있던 트로이 유물은 2차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행방이 묘연했다.
전쟁 막바지에에 수많은 유물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전후 독일은 당시 베를린에 가장 먼저 입성한 소련군을 지목했지만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소련)은 시치미를 뗐다.

6. 2차 세계대전  종전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트로이 유물의 행방이 드러났다. 러시아가 전승 50주년인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 전시한  것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은 수많은 보물과 예술품을 탈취해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푸시킨 미술관)에, 도자기, 그림 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르미타쥬 박물관)로 옮겼다고 한다.실제  지금도 에르미타쥬에 가면  네딀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명작 등이 즐비하다.
 
7.일리아스의 핵심 텍스트 '트로이 전쟁'의 원인은 미인들 간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세 미인들(올림포스의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간의 미모 경쟁(아프로디테 승리)이 부른 전쟁이다.  세 미인 앞에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며 황금 사과를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어쨌든 이  ‘황금사과’는  후대에 다양한 콘텐츠로 나타났다. 
황금사과를 한 입 베어 먹은 애플 로고,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 만유인력의 뉴턴, 아들의 머리 위에 놓고 화살을 쏘았던 빌헬름 텔 등이 유명하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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